자료출처 | 월간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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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의 常勝 뒤에 숨은 절대 고독
● 국보 제76호 亂中日記(아산)
● 국보 제304호 鎭南館(여수)
● 국보 제305호 洗兵館(통영)
軍艦, 상륙정, 여객선, 시외버스, 개인택시를 번갈아 타고 亂中日記에 기록된 李舜臣의 戰勝地 남해안과 多島海 횡단 답사 7박8일. 劣勢함대로 優勢함대를 격파, 壬辰倭亂을 勝戰으로 종결시킨 李舜臣의 常勝戰略을 추적했다
글 :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韓 相 一 자유기고가
順天鄕大學 李舜臣연구소 찾은 까닭
7월22일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아침 7시20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한상일 기자와 만났다. 溫陽(온양) 가는 고속버스는 7시30분 정각에 출발했다(1인 요금 5000원). 오전 9시, 온양에 도착하여 터미널 부근에서 잠시 요기하고 택시 편(요금 1만원)으로 牙山市(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소재 順天鄕(순천향)대학교에 내려 부설 「李舜臣(이순신)연구소」로 찾아갔다.
오전 10시, 이순신연구소 소장 權淳庸(권순용) 교수와 연구위원 이건영·박현규 교수를 만났다. 필자는 이번 亂中日記(난중일기) 현장 답사기간(7월22∼29일) 가운데 처음 2박3일간을 순천향대학교에서 주최하는 「李충무공 전승지 해상·국토 순례」(7월22∼26일)를 따라가기로 했다. 순례에는 전국에서 지원한 고교생 104명 그리고 순천향大 학생 21명 등 모두 165명이 참가한다.
오후 1시, 순례단원들은 순천향대학교 강당에 집합했다. 오후 3시, 관광버스 세 대에 분승한 순례단은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사적 제155호 李忠武公 遺墟(이충무공 유허)에 도착했다.
이곳의 성역화는 1966년, 朴正熙(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주도로 이뤄졌다. 境域(경역)이 10만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고, 顯忠祠(현충사)와 유물전시관이 새로 건립되었다.
먼저 李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 현충사로 갔다. 사당 안에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장군의 영정이 중앙에 모셔져 있다.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다. 벽면에는 문학진·정창섭·장우성 화백이 합작으로 그린 「한산대첩도」 등 기록화 10폭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 현판 「현충사」는 朴正熙가 썼다. 순례단은 빗발을 피해 처마 밑에 도열하여 조별로 참배했다.
이곳에 이순신의 사당이 처음 설립된 것은 숙종 32년(1706)이었다. 이듬해 왕은 현판 「顯忠祠」를 내렸다.
亂中日記는 水軍 지휘를 위한 메모
이어 유물전시관으로 갔다. 이곳엔 국보 제76호 亂中日記를 전시하고 있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쓴 일기다. 난중일기가 시작된 날은 선조 1592년, 곧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음력 1월1일(이하 이순신 및 壬亂 관련 일자는 모두 음력)이다. 일기가 끝난 날은 왜적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17일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武官이면서도 달필이며, 文體(문체)는 간결체다. 後世(후세)의 누군가가 읽을 것을 의식하여 쓴 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일기에는 왜(why), 어떻게(how) 등을 과감하게 생략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 연구로 저명한 키타지마 만지(北島萬次) 日本公立女大 교수는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조선 水軍을 지휘하기 위한 메모』라고 평한 바 있다.
난중일기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얘기가 많다. 조선 水軍의 현황과 왜란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 특히 이순신 휘하의 목수·石工·弓匠(궁장) 등 職人(직인), 노비, 피난민, 승려, 병졸 등의 역할도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바쁜 陣中생활 틈틈이 기록한 것이지만, 문장이 유려하다. 그는 兵法書(병법서) 한 권을 손에 잡으면 하룻밤을 밝혀 독파하는 독서인이었던 만큼 그런 문장력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국보 제76호의 정식 명칭은 「李忠武公 亂中日記 附 書簡帖 壬辰狀草」(이충무공 난중일기 부 서간첩 임진장초)다. 그가 상부에 전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청한 문서인 壬辰狀草, 가족·친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書簡帖과 더불어 국보 제76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李충무공의 유물로는 장검 2점, 玉鷺(옥로: 갓 위에 다는 해오라기 모양의 玉 장신구) 1점, 腰帶(요대) 1점, 桃盃(도배) 1쌍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보물 제326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장검은 1594년 4월 閑山島(한산도) 진중에서 太貴連(태귀연), 李茂生(이무생)이 만든 것으로, 칼몸에 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친필 劒銘(검명) 16자가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牙山은 어머니의 친정 있던 곳
「李충무공 유허」에는 그가 기마술을 연마했다는 치마장, 궁술을 연마했다는 활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宗家(종가)와 旌閭(정려)가 있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로서 1597년 牙山에 침범한 왜군과 맞서 싸우다 21세의 나이로 전사한 이면의 묘도 있다.
현충사 참배를 끝내고 순례단은 李충무공 묘소로 이동했다. 묘소는 현충사에서 9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중턱에 있다. 묘소 참배를 끝내고 순천향대학교로 되돌아왔다. 고교생·대학생들과 어울리는 일은 매우 즐겁다. 순천향대학교 기숙사에서 1박했다.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3월8일(음력·이하 동일) 서울 乾川洞(건천동: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에서 德水(덕수) 李씨 貞(정)의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 그의 생가 터에는 왕년의 名배우 신영균씨 소유의 명보극장이 들어서 있다. 소년기 이순신의 행적에 관해서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南山에 올라가 전쟁놀이를 하면서 대장 역할을 했다는 정도의 일화 이외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그는 소년기에 충남 牙山으로 이주했다. 그렇다면 이순신 집안의 형편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순신의 조부 白祿(백록)은 깨끗한 선비로서 명망이 있었는데, 中宗(중종)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白頭(백두: 평민)로 지냈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草溪(초계) 卞씨 守琳(수림)의 딸로 그녀의 친정이 아산고을 백암리(지금 현충사가 있는 뱀밭 마을)에 있었다. 서울생활이 어려워지자 李貞은 부인의 친정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순신에게는 외가인 牙山 백암리가 그의 고향처럼 되어버렸다.
牙山 이주 당시 이순신의 나이에 대해서는 8세, 13세, 16세, 18세 說(설) 등이 있는데, 필자는 열여섯 전후로 추측한다. 왜냐하면 1591년 좌의정 柳成龍(류성룡)이 『이순신과는 이웃에 살아 일찍이 그의 인물됨을 잘 안다』면서 그를 宣祖에게 임란 1년2개월 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품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천거하려면 적어도 청년기 초입까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세 살 위로서 이순신의 둘째 형 堯臣(요신)의 친구였다.
李舜臣이 걸어온 軍人의 길
牙山에서 이순신은 21세 때 寶城(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했다. 방진은 武班(무반) 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무예에 뜻을 두고 騎射(기사) 연습과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은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壬亂 직전까지 그가 걸어온 군인의 길을 간단하게 짚어 보아야 난중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나이로 훈련원 別科(별과)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여 불합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성적은 합격자 28人 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實職(실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시대가 어수선하여 武官의 수요가 늘어난 것 같다. 북쪽 변경에서는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고, 남쪽 해안 지방에서는 왜구가 준동했다. 급제 10개월 만인 그 해 12월에 그는 함경도 童仇非堡(동구비보)의 權管(권관: 종9품)이 되었다. 당시로선 어지간히 나이 먹은 초급장교였다. 그 후 그는 함경도의 변경과 훈련원의 하급직 등을 전전했다.
1580년 7월, 36세 때 전라도 鉢浦(발포: 지금의 전남 고흥군 남단)의 水軍萬戶(수군만호)로 올랐다. 萬戶라면 종4품 무관직이다. 그러나 武官 천시 풍조 때문에 종4품 만호에서 종6품인 현감으로 전보되어도 榮轉(영전)으로 치던 시대였다.
그런 발포만호 재직도 불과 1년8개월로 끝났다. 1582년 1월, 서울로부터 軍器敬差官(군기경차관)이 내려와서 軍器 관리를 잘못했다고 트집을 잡아 그를 파직시켰기 때문이다.
「원칙장교」였기 때문에 그의 하급 武官시절은 대체로 불우했다. 그는 時俗(시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먼 친척이었던 栗谷 李珥(율곡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해도 『그가 인사권을 맡아 보는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찾아뵐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발포만호 자리에서 쫓겨난 일만 해도 그의 훈련원 奉事(봉사: 종8품) 재직 시절에 그의 상관이었던 徐益(서익)이 그의 항의로 情實人事를 하지 못한 데 앙심을 품고 있다가 배후조종을 했기 때문이라는 說이 있다.
이순신은 그해 5월에 복직하여 다시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가 1583년 7월에 함경도 병사 이용 막하의 군관이 되었다. 다시 그해 10월에 함경도 乾原堡(건원보: 지금의 경원군) 權管이 되어 여진족 鬱只乃(울지내)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다. 다음달 11월에 정례승진으로 훈련원 參軍(참군: 정7품)이 되었으나 15일 아버지가 73세를 일기로 작고하여 고향 牙山으로 내려가 3년상을 치렀다.
첫 백의종군
1586년 1월, 42세 때 복직하여 함경도 造山堡(조산보) 만호로 부임했다. 다음 해 8월에는 鹿屯島(녹둔도: 지금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의 屯田官(둔전관)을 겸임했다. 그해 가을 식량약탈을 노린 여진족이 대거 남침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기습을 받은 이순신은 이들과 맞서 싸워 포로가 된 양민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함경도병사 李鎰(이일)은 이순신의 병력 증원요청을 묵살한 자신의 과실을 덮기 위해 피해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돌려 그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것을 조정에 상신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일단 그에게 책임을 물어 白衣從軍(백의종군)을 하라고 명했다.
1588년 윤 6월에 北邊(북변)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 한거하던 그는 이듬해 2월, 전라도 순찰사 李洸(이광)에게 발탁되어 군관이 되고, 11월에 선전관을 겸했다가 12월에 井邑縣監(정읍현감: 종6품)이 되니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임진왜란 1년2개월 전인 1591년 2월에 珍島郡守(진도군수)로 임명되어 부임도 하기 전에 加里浦(가리포: 지금의 완도읍) 첨사로 전직, 그것 역시 부임하기도 전에 같은 달 1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使)로 임명되어 左水營(좌수영: 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불과 13일 사이에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수군절도사로 6계단을 뛴 것이다.
왜 이런 파격 승진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만큼 시대의 풍운이 급박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 전국의 통일정권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중국과 인도를 아우르는 「大아시아帝國 건설」이란 허황한 꿈을 꾸면서 조선에 대해 明나라를 치러 가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도 전란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조정은 將材(장재)를 찾았다. 좌의정 류성룡이 이순신을 강력히 천거했음은 앞에서 썼다.
전략가인 동시에 유능한 행정가
7월23일 아침 5시30분에 기상하여 일조점호를 한 다음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오전 7시 관광버스에 승차, 남하하여 정오 무렵에 해군사관학교에 도착했다. 오후 2시, 예행연습을 거쳐 입교식을 마쳤다.
이어 海士 부두에 정박해 있는 實物의 2분의 1인 거북선에 올라 그 내부를 참관했다. 거북선은 왜군이 長技(장기)로 삼는 登船肉薄戰(등선육박전)을 막기 위해 당시 조선 水軍의 主力 戰船인 板屋船(판옥선)의 갑판 위에 철판을 둘러씌운 돌격선이다.
박물관도 둘러보았다. 현재 두 개 남아 있는 天字銃筒(천자총통) 중 하나도 소장하고 있다. 천자총통은 壬亂 당시 海戰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던 대형 화포다.
석식 후에는 李敏雄(이민웅) 해사 교수로부터 강연 「이순신과 리더십」을 들었다. 현역 해군소령인 李교수는 2002년 논문 「임진왜란과 海戰史(해전사) 연구」로 서울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 학자이다. 필자의 면담 요청에 그는 『마침 당직근무이니 밤 8시30분 교수연구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은 李교수와의 대담 요지이다.
―이순신은 어떤 유형의 장수라 해야 할까요.
『智將(지장)이죠』
―난중일기의 이순신과 三國志(삼국지)의 諸葛亮(제갈량)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둘 다 將帥(장수)인 동시에 뛰어난 행정가였죠. 屯田(둔전)을 만들어 군량을 자급자족하고, 兵器(병기) 개발에도 적극적이었으며, 信賞必罰(신상필벌)에 철저했어요.
『난중일기와 壬辰狀草를 읽어 보면 이순신은 대단한 지적 능력을 가진 장수인 데다가 휘하에 유능한 지휘관과 참모를 두었어요. 勇將 녹도만호 鄭運(정운), 경상도 물길에 능통한 광양현감 魚泳潭(어영담), 순천부사 權俊(권준), 방답첨사 李純信(이순신), 사도첨사 金浣(김완)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활용했거든요. 이순신의 屯田(둔전) 경영과 관련해 주목할 인물은 丁景達(정경달)입니다. 善山府使(선산부사) 재직시 능력을 발휘한 그를 이순신은 從事官(종사관)으로 스카우트하여 屯田의 경작을 맡겨 성공을 거두었어요. 이순신으로선 제일류 병참참모를 곁에 둔 겁니다』
日本 軍船을 압도한 板屋船과 銃筒
―이순신의 리더십도 탁월했지만, 화포·戰船(전선) 등 무기체계에 있어서도 이순신 함대는 일본 함대를 압도했습니다.
『이순신의 뛰어난 점은 미리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壬亂을 앞두고 거북선 제조, 화기검열, 군사조련, 군기확립 등 대비에 철저했음은 난중일기에 잘 기록되어 있잖아요. 조선 수군은 건국 이래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국왕과 조정의 주도下에, 즉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성을 갖고 발전된 것이 특징입니다. 태종과 세종代에는 화기의 개발과 군선 개량에 노력을 기울였어요. 특히 明宗 10년(1555) 乙卯倭變(을묘왜변)을 계기로 板屋船(판옥선)과 대형 총통이 개발되어, 이것이 임진왜란 해전의 핵심 무기체계가 되었습니다』
―板屋船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배의 밑면이 평탄한 平底船(평저선)이죠. 평저선은 尖底船(첨저선)에 비해 물 속에 잠기는 吃水(흘수)가 깊지 않고 선회반경이 작아 배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입니다』
―판옥선의 핵심부분인 板屋의 구조는 어떠했습니까.
『갑판 위에 上粧(상장)갑판을 설치하고 그 좌우에 女牆(여장: 성가퀴)을 설치한 겁니다. 이 구조는 戰船에 승선한 전투원과 非전투원을 구분하여 전투원은 上粧갑판 위에, 非전투원은 上·下 갑판 사이에 위치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죠』
―판옥선의 크기는 얼마쯤 되었을까요.
『壬亂 당시 사용된 戰船의 크기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일반 판옥선의 경우 底板(저판)의 길이가 15∼21m였습니다. 승선인원은 100명 안팎이었죠』
―일본의 주력 軍船(군선)인 安宅船(안택선: 아타케)이나 關船(관선: 세키부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판옥선은 일본의 아타케나 세키부네에 비해 선체가 높아 왜구 이래 일본 수군의 자랑인 登船肉薄戰術(등선육박전술)을 어렵게 한 것이죠. 또 판옥선은 일본 軍船에 비해 강한 구조를 가졌어요. 外板(외판)의 겹이음 구조와 木釘(목정; 나무못)을 이용한 결과, 강도에서 일본 軍船을 압도한 거죠』
―일본 군선은 구조물의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서로 끼우고 「ㄷ」자 형 꺾쇠로 양쪽을 이었죠. 건축가들은 그걸 우리말로 「사춤 넣기」, 영어로 Dove-tail join이라고 하더군요. 일본 함선은 우리 판옥선과 부딪치기만 하면 깨져 버렸죠.
『난중일기에 「中船」이라고 표현된 關船은 壬亂에 참전한 일본 군선들 중에 가장 많았는데, 조선의 판옥선보다 크기와 높이가 모두 작았죠. 이 때문에 일본 수군은 판옥선에 뛰어올라 그들의 장기로 삼는 칼싸움을 벌이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높은 위치에서 날아오는 판옥선의 화살 공격에 고전했던 겁니다』
―난중일기에 「大船」이라고 표현된 安宅船은 어떠했습니까.
『크기는 대체로 조선의 판옥선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택선은 대개 大將船이거나 指揮船(지휘선)이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특히 갑판 위의 2·3층 누각은 화포 공격의 타깃이 되었어요』
火砲에서 日本水軍 압도
―판옥선과 安宅船, 어느 쪽의 속력이 빨랐다고 보십니까.
『당시 양국 軍船 간에 속도 차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선박의 속도는 櫓役(노역) 방법과 帆裝(범장)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판옥선은 돛이 두 개인데, 일본 군선은 대개 하나였어요. 또 판옥선의 경우 櫓 한 자루에 4∼5명이 배치되었는데, 일본 군선에서는 한 명이 원칙이었습니다』
―일본 수군은 해적 집단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죠. 예컨대 히데요시의 직속 水軍을 대표하는 구키(九鬼嘉隆),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와의 전투에서 사살된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 그 밖에 스가(菅達長), 호리우치(堀內氏善) 등 다수의 수군장들이 해적 출신이었거든요.
『일본의 해적 집단들은 戰國시대를 지나면서 통일정권 휘하의 직속 수군, 혹은 지방 다이묘에 속한 수군으로 재편되었죠.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는 壬亂에 참전한 수군 편성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일본 수군이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한 한계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왜군은 이미 3교대에 의한 연속사격 등의 전술에 숙달해 있었죠. 일본은 1543년 種子島(종자도)로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鳥銃(조총)을 입수한 이래 꾸준히 개량하여 實戰(실전)에 사용하면서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갔어요. 임진왜란 도발 당시 조총은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소총이었습니다. 조총을 가진 왜군은 육상전투에서 연전연승했는데, 왜 이순신 함대와의 해전에선 연전연패했을까요.
『조총의 명중률이 높다지만 물결 때문에 흔들리는 해상에선 조준사격이 어렵고, 유효사거리도 50m여서 조선의 화포에 비해 위력과 사정거리가 뒤졌거든요. 조선은 1555년 을묘왜변 이후 1563년(명종 18년)까지 화포 제조에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적어도 10만 근 이상의 銅鐵(동철)을 소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명종 12년부터는 해전에 사용할 天·地·玄·黃字 등의 대형 화포를 제작했는데, 이때 만든 총통류가 임란 해전에서 사용되었어요』
―그런데도 임란의 초전에 경상좌수사 朴泓(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 싸워보지도 않고 戰船들을 불태우고 도주했을까요.
『700여 척의 왜선이 새까맣게 몰려오니 박홍과 원균은 싸우기기도 전에 워-포비아(war-phobia: 전쟁공포증)에 걸린 것입니다』
―박홍과 원균의 함대는 기습을 받고 휘하의 僉使營(첨사영)·萬戶營(만호영)의 戰船을 한 번 집결시켜 보지도 못한 채 궤멸했어요. 만약 이순신이 임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사 혹은 경상우수사였다면 상황이 어떠했을까요.
『적어도 박홍이나 원균 같지 않았을 거예요. 이순신은 7년 전쟁기간을 통해 적 함대의 동향을 항상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名將의 조건이죠. 그리고 이순신은 신중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이길 만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싸웠어요. 특히 임란 초년도인 1592년의 전투에서 이순신의 전공은 눈부셨어요. 10전10승을 했습니다. 특히 한산해전에서는 일본의 정예함대와 싸워 완승을 거두었죠. 그 결과 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곡창 전라도 방어와 局面 전환을 달성할 수 있었어요』
7월24일 오전 7시 해군부두에 도착하여 30분 만에 「비로봉함」에 승선을 완료했다. 배수톤수로 2660t이라니까 상선이라면 5000중량톤쯤 되는 상륙함(LST)이다. LST는 자동차 전용선처럼 船首를 열고 그 통로로 사람이나 차량 등을 실어 흔히 「아가리」라고 불린다.
壬亂 최초의 승전지는 玉浦조선소 자리
오전 8시, 비로봉호가 출항했다. 진해만의 水路(수로)를 따라 바깥 바다로 나오니 동쪽으로 이순신의 전적지인 安骨浦(안골포)와 加德島(가덕도)가 보인다. 비로봉함은 경제속력인 시속 14노트로 항진했다.
바로 눈앞으로 거제도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거제도라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거제도 북단의 永登浦(영등포)·장문포(長木面)가 시야에 들어오더니 곧 세계 제1의 경쟁력을 지닌 玉浦(옥포) 대우조선소의 모습이 활짝 펼쳐진다. 최신예 초대형 클레인 「골리앗」의 모습이 참으로 장쾌하다. 옥포조선소 자리가 바로 이순신 함대가 첫 승전을 기록한 玉浦해전의 현장이다.
전라좌도 水軍, 즉 이순신 함대는 1592년 5월4일 새벽 2시경에 여수의 左水營(좌수영)을 출발,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했다. 함대의 세력은 板屋船 24척, 狹船(협선) 15척, 鮑作船(포작선) 46척으로 모두 85척이었다. 협선은 승선인원이 5명 정도의 소형 부속선이고, 포작선은 글자 그대로 어선에 불과했다.
이순신 함대는 5월6일 唐浦(당포)에서 경상우수사 元均 휘하의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과 합류했다. 이로써 전라좌도-경상우도 연합함대의 세력은 판옥선 28척, 협선 17척으로 증강되었다.
5월7일 정오,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右척후장 金浣(김완)이 神機箭(신기전)을 쏘아 일본 軍船의 발견을 보고했다. 이로써 전라좌수영을 떠난 지 4일 만에 첫번째 해전이 시작되었다.
이순신 함대에 맞선 일본 함대는 30여척으로 옥포만 일대에 상륙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중이었다. 왜군은 옥포만으로 돌입하는 이순신 함대를 발견하고 급히 승선하여 선봉 6척이 먼저 응전했다. 조선 수군은 이들을 포위하면서 銃筒(총통)과 화살을 쏘았고, 일본 수군은 鳥銃(조총) 등을 발사했다.
이순신 함대는 옥포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모두 26척을 격침시켰는데, 특히 조선수군의 撞破(당파)전술이 위력을 발휘했다.
옥포해전은 임란 발발 이후 조선군이 기록한 최초의 승전이었다. 옥포전투에 이은 合浦(합포: 진해시 院浦洞)·赤珍浦(적진포: 고성군 거류면 堂洞里) 전투에서도 이순신 함대는 완승했다. 이순신 함대는 제1차 출전의 세 차례 전투에서 일본의 대선 26척, 중선 9척, 소선 2척, 기타 선박 7척 등 모두 44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히데요시의 特命
이순신 함대의 피해는 全無했다. 일본 水軍이 막강한 줄 알았는데 싸워 보니 별 거 아니더라는 자신감―이것이 1차출전(1592년 5월4∼9일)에서 거둔 가장 큰 소득이었다.
우리 순례단을 태운 비로봉함은 거제도 동쪽 해안을 우회하는 항로를 항해했다. 제1차 출전시 이순신 함대가 취한 항로를 거슬러 내려가는 코스다. 이순신연구소의 교수들이 순례단원들을 갑판에 집결시켜 이순신의 전승지 개황 등을 브리핑했다. 출항한 지 두 시간 반 만에 비로봉함은 거제도의 남단 거제 해금강과 매물도 사이의 해역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북상했다.
비진도, 용초도가 차례로 나타나고, 그 너머로 거제도의 서남단 가배량이 보인다. 가배량은 임란 발발 당시 元均의 경상우수영이 소재했던 곳이다. 용초도에는 6·25 동란 때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용초도의 바로 윗섬이 閑山島(한산도)다. 한산도 앞바다가 세계 해전사에서 빛나는 한산대첩의 현장이다.
開戰(개전) 이후 유독 海戰에서만 연패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긴급대책으로 陸戰에 참가 중이던 水軍將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오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즉각 남하하여 이순신 함대와 결전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그때 일본 수군 장수 셋은 조선 水軍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육군을 따라 북진하고 있었다. 특히 와키사카는 경기도 龍仁에서 불과 1500명의 병력으로 전라·충청·경상 3도 연합군 5만 명을 기습공격 한번으로 붕괴시켜 기고만장하고 있었다.
이때 먼저 전투태세를 갖춘 와키사카는 7월6일 구키와 요시아키가 군선 정비 등을 하는 동안 단독으로 김해를 떠나 출전을 감행했다. 와키사카가 거느린 함대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73척으로 지금까지 해전에 나선 일본 함대 중 가장 큰 세력이었다.
한편 이순신 함대는 제2차 출전(1592년 5월29일∼6월10일)을 마치고 본영으로 귀환한 이래 軍船을 정비하면서 일본 수군의 동태를 탐문했다. 그 결과 가덕도·거제도 해역에서 일본 군선 수십 척이 출몰하고 있다는 첩보를 얻었다.
이에 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전라우수영의 李億祺(이억기) 함대와 좌수영에서 7월4일 합류했다. 연합함대는 7월6일 역사적인 제3차 출동에 나섰다. 연합함대는 남해의 露梁(노량)에 이르러 元均의 戰船 7척이 합류했다. 결전을 앞둔 조선의 연합함대와 일본 함대 간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판옥선 56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는 출항 이틀째인 7월7일 저녁 무렵에 미륵도의 唐浦(당포: 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머물렀다. 바로 이날 밤 이순신은 이 섬의 목동 金千孫(김천손)으로부터 중대 첩보를 얻었다. 『일본 군선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거제도 북단) 앞바다를 지나 見乃梁(견내량: 고성반도와 거제도 간의 협수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閑山대첩의 현장
첩보에 따라 연합함대는 7월8일 아침 일찍 일본 함대가 집결한 견내량을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견내량에는 첩보 내용대로 일본 수군의 함선 73척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이순신은 와키사카의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먼저 戰船 5~6척을 투입하여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를 벌이다 짐짓 약세를 보이며 퇴각하자, 일본 함대는 돛을 펴고 추격에 나섰다. 그들이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 이르자, 이순신 함대는 일시에 大선회하여 鶴翼陣(학익진)을 펴면서 돌격을 감행했다. 학익진은 함대의 공격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橫列陣(횡렬진)의 한 형태다. 모든 전선이 地字(지자)·玄字(현자)·勝字(승자) 총통을 발사하여 먼저 일본 군선 2~3척을 격파하자 일본군의 사기가 꺾여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견내량은 좁았다. 연합함대가 포위 공격을 가하자, 일본 함대는 퇴로가 막혀 참패했다.
한산대첩의 결과를 종합하면 연합함대는 일본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을 격침시켰다. 일본 함대를 지휘한 와키사카는 대선 1척과 중선 7척 등 14척을 수습해 金海 방면으로 탈출했다. 와다나베(渡邊七右衛門) 등 와키사카의 副將 둘이 전사하고, 선장 중 하나는 한산도에 상륙했다가 할복자살했다. 일본 수군의 전사자는 최소한 2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산대첩을 거둔 날 연합함대는 견내량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7월9일, 安骨浦(안골포: 지금의 진해시 안골동)에 왜선 40여 척이 머물고 있다는 探望船(탐망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7월10일 새벽에 출항하여 안골포에 도착하니 선창에 일본 함대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42척이 정박 중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임란 당시에도 안골포는 포구의 진입로가 병 주둥이처럼 좁고 수심이 얕아서 판옥선 규모의 戰船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이에 이순신은 밀물 때를 이용하여 전선을 교대로 포구에 투입하여 각종 총통과 불화살 등으로 일본 함대에 집중공격을 가했다. 일본 군선은 불타고, 잔존병력은 육지로 도주했다.
고뇌하는 인간의 悲歌
연합함대는 한산-안골포 해전, 즉 제3차 출동에서 적선 101척을 격파했다. 이순신의 壬辰狀草(임진장초)에 따르면 조선 수군 측 피해는 전사 19명, 부상자 116명이었으며, 軍船의 피해는 없었다.
비로봉함은 덩치가 커서 수심이 얕은 한산도의 포구에는 접안할 수 없다. 거북선 모습의 등대 남방에서 정박하고 있는 비로봉함 곁으로 「물개」라고 불리는 ○○상륙정이 물살을 헤치고 다가와 도킹했다. 순례단 일행 165명은 상륙정에 승선했다.
한산도는 이순신이 한산대첩 다음해인 1593년 7월 制勝堂(제승당)을 짓고 3道 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물개(상륙정)가 豆乙浦(두을포: 지금의 한산면 頭億里 포구)에 접안하여 순례단 일동이 상륙했다.
포구에는 한산면장, 통영시 공무원, 문화재 해설사 등이 나와 우리 순례단을 환영했다. 순례단은 閑山門을 지나 大捷門(대첩문)에 이르는 높은 돌계단을 올라 制勝堂 앞에 섰다.
제승당은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였던 원균이 漆川梁(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1597년 7월 초토화했다. 이로써 폐진되었던 제승당은 142년 후인 英祖 15년(1739) 통제사 趙儆(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운 이래 1959년 정부가 사적 113호 「한산도 李충무공 유적지」로 지정했다. 1975∼1976년, 정부는 境域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성역화했다. 제승당 내부에는 이순신의 전적을 그린 다섯 폭의 벽화가 있다.
순례단은 제승당에 이어 李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忠武祠(충무사)를 참배했다. 필자는 다시 제승당 쪽으로 되돌아 나와 그 서편의 戍樓(수루)에 올랐다. 바로 이 수루에서 이순신은 그 유명한 閑山島歌(한산도가)를 읊었다.
이순신은 武人이면서도 깊은 문학적 소양을 지닌 인물임을 閑山島歌 하나만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悲歌(비가)는 문학적 재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절대고독 속에서 잠 못 이루며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이런 詩作은 불가능하다. 그 무렵, 그에겐 최악의 시기가 도래했다.
임란 발발 2년째인 1593년부터는 식량 부족과 전염병 창궐로 참전 3개국 모두가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아에 시달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明·日 양국은 조선 국왕 宣祖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교섭을 진행했다.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도 전염병 만연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한때 1만8500명에 이르던 병력이 500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소모된 병력은 대부분 항해와 전투에 숙달된 土兵이나 잠수질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보자기 출신이었다. 도망병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계사년(1593) 봄에 시작하여 을미년(1595)까지 계속되었다. 거듭된 출전에 따른 피로와 식량 부족, 더욱이 좁은 공간에서 집단 근무해야 하는 水軍의 특성에 의한 희생이었다.
이순신은 휘하의 수군과 함대는 국가적 지원이 全無한 가운데 증강시켜야만 했다. 그의 한산도 진중생활은 참으로 다망했다. 난관 극복을 위해 그는 군량 확보, 병력 충원, 戰船 건조, 무기 제작, 진법훈련 등 전력 증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특히 군량 확보를 위해 屯田을 경영하고, 魚鹽(어염)을 생산했다.
신경성 위장질환 앓은 名將
이순신은 强骨(강골)의 건강체질은 아닌 듯하다. 한산도로 진을 옮겨 설치한 1593년 7월14일과 15일, 그리고 18일의 亂中日記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4일 丙寅, 맑더니 늦게 조금 비가 왔다.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겼다. 몸이 몹시 불편해서 종일 신음했다>
<15일 丁卯, 홀로 배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은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닭이 울었다>
<18일 庚午, 맑음.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질병을 앓았던 날이 무려 120일에 달한다. 무과 급제 직후(32세)만 해도 쓰러진 돌장승을 혼자의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는 이순신이지만, 40대 말에는 벌써 백발이 성성했고 토사곽란 등으로 자주 신음했다. 내과 전문의들은 『이순신은 걱정을 앞질러 하는 성격으로 신경성 위장염을 앓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휘하 장병들과의 술자리를 자주 가졌던 장수였다.
그러나 女色은 멀리한 듯하다. 南海 현감 奇孝謹(기효근)의 好色함을 안 그는 기효근과 경상우수사 원균과 싸잡아 이렇게 비난한다. 『예쁜 색시를 배에 태우고 놀아나다니… 그 대장인 元均부터가 그러니 어쩌랴』
이순신은 부인 方씨와의 사이에 3남1녀, 소실과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그런데도 수도사처럼 陣中 생활을 했다.
英雄好色(영웅호색)이라는 俗說(속설)도 있지만, 이순신은 어떻든 담백했다. 그의 陣中(진중)생활은 시종 나라 일을 걱정하며 준비 또 준비하는 나날을 보내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이순신은 문필가들에 의해 완전무결한 인격체로만 묘사되어 왔다. 물론 그가 「救國(구국)의 英雄」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너무 미화되어 보통사람들에겐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聖人(성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순례단의 고교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 한산도와 이순신을 주제로 하는 글짓기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 필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한산 앞바다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問語浦(문어포) 산정에는 거북선을 臺座(대좌)로 한 높이 20m의 한산대첩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이 기념비는 1979년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국비 1억5000여만원을 들여 건립된 것인데, 그해의 10·26 사태로 그는 준공을 보지 못하고 별세했다.
국보 제305호 洗兵館
이제 필자에게 순례단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수택고등학교의 盧炳檜(노병회) 교장선생이 필자에게 석별의 맥주 한 잔씩을 나누자며 끌었다. 盧교장은 순례단원의 유니폼 차림으로 순례단원들과 행동을 함께 한 분이다. 盧교장과 선창가 목로에 마주앉았다. 그는 『오늘날 세태를 보고 걱정했는데, 이번 이순신 장군 전승지 순례를 통해 그것이 杞憂(기우)임을 느끼고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날 필자는 통영시내를 돌아다녔다. 향토역사관 길 바로 건너편에 국보 제305호 洗兵館이 있다. 먼저 金一龍 관장을 만나 자료를 얻었다.
金관장이 필자 일행을 세병관으로 안내했다. 세병관은 제6대 통제사 李慶濬(이경준)이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이곳 頭龍浦(두룡포)로 옮겨 온 1604년에 지은 客舍(객사)로서 이후 統制營(통제영)의 으뜸 건물이 되었다.
客舍는 왕권을 상징하는 闕牌(궐패: 「闕」 자를 새긴 나무 패)를 봉안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望闕禮(망궐례)를 올리던 곳이다.
세병관에 들어가려면 止戈門(지과문)을 통과해야 한다. 「止戈」라면 「싸움을 멈춘다」는 뜻이 아닌 것인가? 그러나 金관장은 또 다른 숨은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즉, 止戈는 武의 破字(파자)로서 止戈門=武門이라는 것이다. 武가 바로 평화를 담보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아닌가.
세병관은 長臺石 기단 위에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목조건물 가운데 경복궁 慶會樓(국보 제224호),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에 이어 세 번째로 규모가 큰 목조건물이다.
唐浦해전의 현장
이제, 唐浦해전의 현장 답사를 서둘러야 했다. 세병관을 나서니 곧 명정동에 있는 사적 제236호 統營忠烈祠(통영충렬사)가 보인다. 선조 39년(1606) 제7대 통제사 李雲龍(이운룡)이 왕명을 받들어 李충무공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통영충렬사 안에는 明나라 神宗이 李충무공의 위업을 기려 보내 준 八賜品(8사품: 보물 제440호)이 보존되어 있다. 팔사품은 都督印(도독인)·令牌(영패)·斬刀·督戰旗(독전기) 등 모두 8종, 15점이다.
승용차는 통영시가지와 미륵도를 연결하는 통영대교를 지나 山陽관광도로로 진입했다. 통영대교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가 당포해전의 현장이다. 지금의 삼덕포구는 욕지도로 운항하는 선박의 뱃머리로 이용되고 있다. 포구에서 차도 건너 동남방 언덕 위로 石城의 모서리가 드러나 있다. 唐浦城(당포성)은 임란 발발 직후 왜군에게 점령당했으나 제2차 출동 때 이순신이 탈환했다.
1592년 6월2일, 아침 8시경 이순신 함대는 『왜선들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오전 10시쯤 그곳으로 진출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는 왜선 21척을 불태웠다. 이것이 제2차 출동의 두 번째 싸움인 당포해전이다.
당포해전에 이어 연합함대는 적을 추격하여 당항포(고성군 동해면) 해전에서 적선 26척, 이어 거제도의 율포해전에서 적선 7척을 격침시켰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水軍將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는 자신의 함대가 전멸하자 할복 자결했다(실제론 해전 중 사살된 것으로 추정됨).
연합함대는 제2차 출동의 11일 동안 네 차례의 해전에서 일본 군선 72척을 격파하고 수급 수백을 벤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당포는 해전 전후 이순신 함대의 중요 기항지가 되었다.
산양관광도로 21km를 일주하고 충무교를 건너 통영시가지로 다시 진입했다. 충무교 아래로는 미륵도와 통영시가지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이 있다. 호수와 같은 바닷물 위로는 배들이 다니고, 그 바다 밑으로 뚫린 해저터널엔 사람이 걸어다니며, 바다 위로 놓인 공중다리(충무교)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통영운하」는 하늘과 바다와 바다 속 통로가 어우러진 우리나라 유일의 3중 교통로다.
順天의 왜성을 향해
한상일 기자는 『거제도의 직장에서 일하는 옛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면서 승용차에서 먼저 내렸다. 그가 택시로 거제도에 가려면 거제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그 대교 아래가 바로 한산해전 때 일본 함대의 진입로이자 퇴각로인 견내량이다.
7월25일 아침 7시30분경 노크 소리에 잠을 깼다. 객실 문을 따 주니 한상일 기자가 들어왔다. 그는 새벽 2시30분경에 모텔에 도착, 옆방에서 잤다고 했다. 둘은 선창가 수정식당에서 복국(6000원)으로 해장을 했다. 손가락 크기의 생복으로 끓인 것이라 개운했다.
통영시외버스터미널로 나가 오전 10시 發 晉州行 버스를 탔다(1인당 요금 5100원).
낮 12시가 조금 못 되어 버스는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당도했다. 때마침 폭우가 쏟아졌다. 그동안 수집한 자료 등으로 여행가방은 두 손으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개인택시 경남 14바 2301호에 올랐다. 운전기사에게 진주-순천-남해-진주 일주 코스의 요금을 물었다. 그는 정차시간은 무료, 미터기에 나오는 주행요금만 받겠다고 했다.
순천의 曳橋(예교)는 필자가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예교 해안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농성했던 倭城이 있다. 1598년 9∼11월 예교성은 육지 쪽으론 明나라의 西路軍에게 포위당하고, 바다 쪽으로는 朝·明 연합함대에 의해 봉쇄당해 고립되었다.
서로군과 조·명 연합함대의 예교성 공격은 9월20∼22일 전개되었으나 서로군의 최고지휘관 劉綎(유정)은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협상에 능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서로군의 예교성 공격은 다시 10월1일부터 4일까지 나흘간 계속되었다. 이때 이순신 함대와 陳璘(진린)이 지휘한 明의 水路軍은 합동으로 해상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벌여 한때 고니시 軍을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육전을 맡은 유정이 후퇴, 일본군의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朝·明 수륙 양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의 전투상황은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0월2일, 맑음. 오전 6시경 진군하였는데, 우리 水軍이 먼저 나가 오정까지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첨사 黃世得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李淸一도 죽었다. 제포만호 朱義壽, 사량만호 金聲玉, 해남현감 柳珩(유형), 강진현감 宋尙甫는 적탄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이어 10월3일에도 연합함대가 출동하여 해상에서 공격했는데, 潮水(조수)가 물러가는 시간을 놓친 진린 휘하의 戰船 40여 척이 뻘 위에 갇혔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소실되고 수백 명이 전사했다.
朝·明 연합함대는 10월4일 또다시 예교성을 공격했으나 육상의 西路軍이 호응하지 않아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격분한 진린은 직접 유정을 찾아가 항의, 두 지휘관의 관계가 전보다 더 험악해졌다.
1598년 10월18일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었다. 히데요시의 遺訓(유훈)을 받은 「五大老」는 조선에서의 철군을 결정하고, 조선에 출병 중인 여러 장수에게 「和議」를 성립시키고 11월 중순까지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침략의 선봉장 고니시를 사로잡기로 결심했다. 이후에 전개되는 「노량 해전」은 뒤에서 다룰 것이다.
개인택시는 진주IC를 통해 남해안고속도로에 진입, 순천1C로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탔다. 순천시내에 들어 점심을 먹은 뒤 남하하니 순천시 海龍面(해룡면)의 월전삼거리가 나온다. 순천시농산물공판장에서 좌회전하여 新城(신성)마을 삼거리에서 남쪽 길로 잡으면 바다 쪽으로 돌출한 구릉 위로 예교성이 보인다. 순천시농산물공판장에서 10리 남짓한 거리다.
예교성은 정유재란(1597) 때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축조하고, 고니시가 수비한 성이다. 축조한 지 4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폐허화했지만, 성벽과 將臺(장대)의 石築(석축)은 아직도 완연하여 그 웅대한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자료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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