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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르포:호국보훈의 달 특집]호국의 현장을 찾아<3>'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현장을 가다

문화재방송 2020. 6. 16. 00:03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3·1 운동 이후 무장 독립 전쟁을 벌이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는 가운데, 만주 일대에서는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광복군 총영 등 50여 개의 크고 작은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었다.


독립군 부대들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자, 1920년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해 왔다.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등은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무찔렀다(봉오동 전투).

이에 일제는 1920년 8월 훈춘 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구실로 약 2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만주의 독립군 근거지를 공격하였다. 북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들은 이를 피해 백두산 부근으로 이동하다 추격해 온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6일 동안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청산리 대첩).

* 훈춘 사건 : 일제가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을 공격하게 한 사건이다. 일제는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다.
* 청산리 대첩 : 임시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은 전사 1,200명, 부상 2,100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독립군은 전사130여 명, 부상 22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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