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군대해산으로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일제에 빼앗겼고, 내부 통치도 일제의 통감과 고문에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야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한제국의 완전한 식민화로 이어졌다.
나라가 멸망의 길에 들어서자 대한제국 내부에서 친일파 송병준, 이완용 등은 자신들의 이권 차지를 위해 일제에 매국 흥정까지 벌이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일제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 이용구, 송병준 등에게 합병 청원서를 올리도록 부추기고, 결국 1910년 8월 22일, 군대를 진주시킨 다음 강제병합을 위한 조약을 진행하게 된다. 친일파가 장악한 대한제국 대신들은 일제의 강제병합 조약에 대부분 찬성하지만 학부대신 이용직만은 이에 반대해 끝내 쫓겨나고, 결국 나라는 식민지로 떨어졌다.
조약의 승인을 위해서는 황제의 옥새가 필요했는데, 옥새를 가진 순정효황후 윤 씨는 옥새를 치맛자락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이 이를 빼앗아 옥새를 찍으며 끝내 조약은 체결되고, 8월 29일 이 사실이 공표되면서 국권은 침탈되고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경술국치 조약문 全文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함.
-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 일본국 정부는 성의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4년 8월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 43년 8월22일 통감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나라를 넘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장관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등 8명은 친일파 대신 '경술국적'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경술국적들은 매국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호위호식하게 된다. 조약에 반대한 이용직과 소극적이었던 김윤식도 작위는 받았지만 3.1운동에 동참하면서 작위를 박탈당했다고 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 이 조약을 '한일합병조약'이라고 했지만, 여기에는 이것이 합법적이라는 의미가 있어 잘못된 것이다. 한일합병조약은 1965년 한일 수교로 양국은 무효라고 합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약자체는 합법적이었으나 이후 무효화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는 '조약 자체가 무효'라며 조약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한일합병조약을 알리는 황제의 칙유가 일본정부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순종이 이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거나 하지 않은 사실이 자료로 확인됐다"고 한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8월 29일 공포된 황제칙유에는 대한국새가 아닌 1907년 7월, 고종황제 강제 퇴위 때 일본이 빼앗아간 칙명지보(국가간의 조약에는 국새가 찍혀야 하는데, 칙명지보는 행정결제용 옥새)가 찍혀 있다는 점과 1907년 11월 이후 황체의 조칙문에 날인해온 황제의 서명'척(拓)'(순종의 이름)이 빠져 있는 점을 들었는데, 당시 순종은 일본 측의 강제병합에 직면해 전권위원위임장에는 국새를 찍고 서명할 수 밖에 없었으나 마지막 비준절차에 해당하는 칙유서명은 완강히 거부했다. 이어서 이태진 교수는 "한일강제합방조약의 법적결함은 결국 국제법상으로 보아도 조약불성립론을 입증하며 1910년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식민통치도 아니고 일본이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한 상태"라고 주장한다.
2010년 5월 10일,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한국의 대표 지식인 109명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일본 지식인 105명은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병합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한일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라며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라고 밝혔으며,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라고 지적했다.
(1910년 8월22일 조인. 8월29일 발표된 한일병합조약문 한일병합 조약시 전권위임장.
관례와는 다르게 순종의 이름(?)이 서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은 순종의 친필이 아니다.)
이처럼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도 부당함을 인정할 정도로 1910년의 식민지화는 정당한 한일합병조약이 아닌, 사리사욕에 눈이 먼 친일 매국노와 손잡고 일으킨 부탕한 국권침탈에 불과하다.
이렇게 뼈 아픈 경술국치의 경험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당시의 대한제국은 항일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고자 한 애국지사도 있었지만,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경술국적에까지 이름을 올린 이완용같은 매국도 또한 존재하였고, 이들 매국노가 권력을 잡고 일제와 협력하면서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는 외세의 침입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치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만이 역사가 아니다. 수치스러운 역사일수록 잊지않고 기억해야 역사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국치일에는 조기를 게양하자!
을사오적(乙巳五賊)
1905년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내각 대신 다섯 사람을 가리킨다.
이완용(李完用) 이근택(李根澤) 이지용(李址鎔) 박제순(朴齊純) 권중현(權重顯)
정미칠적(丁未七賊)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 이병무(李秉武) 고영희(高永喜) 조중응(趙重應) 이재곤(李載崑) 임선준(任善準)
[
‘경술국치’ 울분 순국 위당 안숙의 선비정신
유고문집 완간, 우국충정 기려
대한제국이 멸망한 시기에 비분과 저항으로 살았던 애국지사 위당(韋當) 안숙(安潚) 선비가
기념문집을 통해 이 시대의 우국정신을 일깨워 준다. 지난 11월1일,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위당 안숙 선비 유고 완역 발간기념 행사가 열렸다.
경술국치 분노한 저항 선비
위당 유고집은 1910년 8월29일의 ‘경술국치’ 100주년을 계기로 고인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당의 손자인 언론인 안병찬 박사에 의해 출간됐다.
이날 기념식에는 경술국치로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해 고향 괴산의 오랑강에 투신,
순국한 애국선비를 추모하기 위해 언론계를 비롯하여 학계, 정계인사 등이 다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번역을 맡은 이충구 박사(한문학) 가 선비 안숙 일지에 나타난 삶과 저항의
정신을 설명하고 원로 언론인 남재희씨, 전 국무총리 이수성씨, 안중근의사 승모회 안응모 이사장,
괴산출신 정범구(민)의원 등이 고인을 추앙하는 인사말을 했다.
위당 선비의 시문낭독과 안병찬 박사의 안숙선생의 좌표에 관한 의견을 발표가 있었다.
안박사는 그의 할아버지 위당 선생이 충절의 유학자로서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깊이 생각하고
전통학문과 신학문을 주장하며 부국강병론으로 실학파의 주체사상과 개화정신으로 짧은
일생을 살았다고 말했다.
충정공 자결 소식 듣고 절명시
안숙선비는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보임된
실학파 문인으로 강고한 민족 주체사상과 애국사상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시문을
많이 남겼다.
위당은 충정공 민영환이 경술국치에 분노하여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명시를 남기고
48세의 젊은 나이에 투신 순국했다
이보다 앞서 위당은 명성황후가 일제에 시해에 당한 소식을 듣고 “슬픔이 나의 가슴을 관통하여”
견딜수 없는 통분으로 미친 사내(狂夫) 가 되어 글을 쓴다고 절규했다.
광복 후 정부는 위당 선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했다.
또한 괴산군수 임각수씨는 이번 문집 발간비를 지원하고 고인이 투신한 오랑강변에 충혼비를 세워
애국선비 정신을 널리 계승하겠다고 약속했다.
100년을 기다린 책
위당 문집에는 나라를 생각하는 충절의 정론(正論) 으로 경세론, 책론, 정기론, 병제론, 상무론,
도덕론 등으로 엮여있다.
모두가 우국충정에다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한 강골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글이다.
묘비에 새겨진 절명시가 위당 선비의 저항정선을 잘 말해준다.
“사람이 태어나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진실로 죽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도리어 사는것 보다 현명한 것이니...”
이 문집 발간사를 통해 손자 안병찬은 “위당 유고집이 100년을 기다린 책” 이라고 말하고
사는 이들이 100년의 역사로 읽고 의미를 되새기는 춘추서가 될 것을 바란다는 깊은 소회를 밝혔다.
출처:경제풍월
http://www.econotalking.kr/news/articleView.html?idxno=28978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 4편을 남긴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현 선비
전남 광양시 석사리의 매천이 태어난 집. <사진작가 | 황헌만>
매천은 세종 조 명승 황희의 후손이지만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장수 황진의 10대 후손이다.
진주성 싸움에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 장수의 혼이
매천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국의 소식을 듣자 비탄에 빠진 선비 매천은
참다운 선비가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선비정심의 본질을 보여 준 것이 매천의 자결이었다.
매천의 절명시 4수(친필). <사진작가 | 황헌만> 유서(遺書)는 떨리는 손으로 쓰여졌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라는 유서는 비장하기보다 오히려 담담한 선비의 일상적인 담론으로 느끼게 한다
이렇게 읊어서 죽는 이유를 또 설명했다. 나라에 벼슬하여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고 녹을 받아 생활한 적도 없으니 나라에 충성하려는 생각보다는 인간된 도리, 선비된 도리를 다 하려 할 뿐이다. 다만 북송 때의 진동처럼 간신들을 처단하자는 독한 상소를 올려 죽음당한 일을 못하고, 겨우 남송 때의 윤곡처럼 나라의 망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나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의 의기는 더욱 굳세게 보인다. 1 매천집. 1911년 상해에서 발간됐다. 친구 김택영이 상해로 망명해 출판사에서 일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문집이다. 2 황현 묘.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퇴락한 무덤이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듯하다.
|
치마를 두른 독립운동가들, 여성의 이름으로 조국을 찾겠노라!
광복 74년이 되도록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한 분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시기별로, 분야별로 수많은 여성 항일투사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으나 매국노, 하면 을사오적만 떠오르듯이,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게 평생을 바쳐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조선의 딸, 총을 들다』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대열에서도 푸대접을 받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24인의 삶과 행적을 복원한 책이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도운 백범 김구의 비서 이화림으로 기억되지만, 그들은 어머니나 아내이기 이전에 오로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조국을 찾겠노라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였다. 이제 그들의 아름답고 용감한 삶, 용감해서 더욱 아름다운 삶을 만나보자.
북소믈리에 한마디!
구한말의 양반가 며느리들은 ‘충효사상’에 입각하여, 근대의 엘리트 신여성들은 ‘인간해방’을 꿈꾸며 그렇게 ‘인간의 길’을 달려 나갔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가슴 벅찬 광복의 역사를 갖게 되었으나, 아직 이름조차 밝혀내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부디 이 책이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 운동가들의 공적을 기리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본다.
1. 고문으로 두 눈 먼 ‘대갓집 안주인’ - 한국 독립운동 명가의 잊혀진 주역 김락
2. ‘이봉창 · 윤봉길 의거’의 은밀한 조력자 - 백범의 비서로,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약한 이화림
3. ‘여자 안중근’, 일제를 저격하다 - 독립 호소 위해 무명지 자르고 조선 총독 암살에 가담한 남자현
4. 여섯 번의 국경의 밤 - 자금 조달에서 살림까지, 임정의 전천후 안주인 정정화
5. 17살 순국소녀, ‘북한의 유관순’ - 함경북도 명천에서 만세 시위하다 옥에서 순국한 동풍신
6. 나는 대한 독립과 결혼했소 - 엘리트 ‘신여성’ 출신 항일투사 김마리아
7. 투사로, 투사의 아내로, 두 번 살다 - 간호사 출신 항일투사이자 신채호의 아내였던 박자혜
8. 총 들고 일본군과 싸운 ‘부산의 딸’ -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약한 박차정
9.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10. 33살 임산부, 일제의 품에 폭탄을 안기다 -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 던진 안경신
11. “비행기를 몰고 가서 일본 왕궁을 폭격하리라”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12. 우뭇가사리 부정 판매, 해녀들 빗창 들다 - 일제의 수탈에 맞서 일경 파출소 습격한 제주 해녀 부춘화
13. 말하는 꽃, 독립 만세를 외치다 - 수원 3·1혁명 주도한 기생 김향화
14. 을밀대에 우뚝 선 한국의 여성 노동운동가 1호 - 사상 첫 ‘고공농성’을 벌인 강주룡
15. “남정네만 의병 하면 무슨 수로 하오리까” -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16. ‘청포도’ 시인의 유골함을 품에 안고 -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신을 인수한 항일투사 이병희
17. 가슴에 육혈포 품고 다닌 ‘신여성’ - 호랑이굴에 본부 차린 대한독립청년단 총참모 조신성
18. 아무르 강가의 붉은 외침 - ‘자유’를 위해 싸우다 일제에 총살당한 김알렉산드라
19. 중국 대륙 누빈 ‘여성 광복군의 맏언니’ - 한국 여군의 효시가 된 항일무장투쟁가 오광심
20. 여장군, 또는 혁명의 화신 -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운 투사 김명시
21.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상기생’ 정칠성
22. 대한의 여성이여, 모두 일어나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최후의 여성의원 방순희
23. 92년 만에 돌아온 하와이의 애국부인 - 광복을 위해 이역만리에서 분투한 ‘하와이 이민 1세’ 이희경
24. ‘눈물 젖은 두만강’의 주인공이 된 ‘막스걸’ - 풍운아 박헌영의 아내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던 주세죽
◀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