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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다큐]125년 전 10월 8일, 일본의 자객 20명은 궁궐에 잠입, 명성황후를 칼로 찌르고 옷을 벗긴 뒤 집단 능욕

문화재방송 2020. 10. 7. 23:55

출연:'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62),

그는 장편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통해 명성황후 시해의 충격적인 실체를 폭로했다.

잊지 말자 일제의 만행 '명성황후 시해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위 사진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이 담긴 에조보고서를 작성한 본인 에조입니다. 그리고 밑에 사진은 시해사건에  함께했던 20인의 사진입니다. 에조 역시 시해사건에 참여했구요.

 

20인 모두가 일본인은 아니었습니다 친일파였던 조선인들 역시 가담했었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자 일본당국은 가담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계략을 짰던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명성황후 국장>

                                                     예조보고서

에조보고서에 대한 내용입니다.

당시 일제군이 궁궐로 침입하자, 황후는 궁녀들이 입는 옷으로 입고 궁녀처럼 분장을 합니다.

이에 일제군들은 애를 낳은 여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궁녀들의 옷을 모두 벗겨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그렇게 황후가 누군지 가려내는 일을 해냅니다.

 

그 와중에 아들 순종의 부인이었던 민씨비 역시 한 쪽 가슴이 도려지는 일이 발생하고

명성황후를 찾아내자 고종과 아들 순종 그리고 민씨비가 보는 앞에서 국모의 배와 옆구리를 세번 칼로 찌릅니다.

 

그후 국모를 조용한 뒷뜰로 끌고가, 돌아가며 일본 특유의 변태짓을 국모에게 저지릅니다.

국모의 아랫도리를 벗겨내어 국부를 확인한 뒤, 이십명이 돌아가며 강간을 합니다.

에조가 경악을 금치 못하여 차마 자신은 하지 않았을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 국모 살해에 모두가 다같이 책임을 지기 위하여

한명씩 돌아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로 난도질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이마에 칼로 십자를 그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이 모든 일을 없애기 위하여 불로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출처_ 네이트판, 위키백과, 지식인

 

명성황후 찌른 칼, 현재 일본 신사에서 보관

- 시해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로 추정

- 신사 관계자 “ 이번 공개는 극히 이례적인 일 ”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건청궁(乾淸宮)

경복궁내 건청궁 전경.

고종이 대원군의 섭정을 막기위해

궁궐안 제일 북쪽 끝에 사비를 털어 지은 건청궁!

 

 

2008년까지 건청궁의 모든문은 특별관람시간 외엔 닫혀져 있었습니다

2009년 이후 일반인에게도 개방

세계적으로 전무 후무한 일국국모시해 사건 현장을 볼수있게 된겁니다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 명성황후와 편안히 지내면서

사랑채 안채 개념으로 지붕위 용마루 없이 지은 양반사도가의 집처럼 만든 궁~!,

양반가옥 99칸의 2.5배 크기.

쇄국정책으로 국권을 쥐락펴락하던 흥선대원군과 절교 쇄국정치의 종식~!

정치적 독립의미이고 외세개방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원문보기

http://cafe.daum.net/bulelin/PkX0/499?q=%EA%B1%B4%EC%B2%AD%EA%B6%81&re=1

 

- 부제: 사바틴이 남긴 기억과 공간 / 10.19.∼11.11. 덕수궁 중명전(2층) -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올해 한러 수교 30주년 기념과 상호 문화교류 해를 맞이하여 19일부터 11월 11일까지 근대기 조선에 머무르며 근대 건축물의 설계와 공사에 관여했던 사바틴을 주제로 한 특별전「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부제: 사바틴이 남긴 공간과 기억)」을 개최한다. 전시는 19일 개막과 온라인 전시 공개를 먼저 시작하며 현장관람은 20일부터 덕수궁 중명전(2층)에서 시행한다.
* 한러 수교일: 1990. 9. 30. / * 조러수호통상조약: 1884. 7. 7.


러시아 청년 사바틴(아파나시이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1860~1921년)은 1883년 인천해관 직원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1904년 조선을 떠날 때까지 제물포항의 부두를 축조하고, 조선의 궁궐 건축물과 정동 일대 근대 건축물의 설계와 공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관파천과 관련된 러시아공사관 건축에도 참여하는 등 우리 근대 건축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번 전시는 ▲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 「조선에 온 러시아 청년 사바틴」, ▲ 「러시아공사관, 사바틴의 손길이 닿다」, ▲ 「사바틴, 제물포와 한성을 거닐다」등 총 3개 주제로 나누어 진행한다.


전시의 서막인 ▲ 프롤로그에서는 을미사변의 목격자 ‘사바틴’의 기록을 소개한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당시 조선 주재 일본공사였던 미우라 고로를 필두로 한성 주둔 일본군 수비대와 공사 관원, 낭인 집단 등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사건 전날 경복궁에서 당직을 서기 위해 출근했던 러시아인 사바틴과 미국인 다이 장군은 당일 새벽 4시 건청궁 곤녕합에서 을미사변을 목격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명성황후 시해장소 약도와 시해에 대한 사바틴의 증언서(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건청궁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고종비, 사후 명성황후 추존)의 처소


1부 ▲「조선에 온 러시아 청년 사바틴」에서는 사바틴의 활동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된다.
조선 사람들은 한자어를 빌려 우리말로 표기하는 음차(音借) 방식으로 사바틴의 성(姓)인 세레딘-사바틴을 ‘설덕(薛德), 살파정(薩巴丁), 살파진(薩巴珍)’ 등으로 불렀다. 사바틴은 1883년 9월 조선에 와서 인천해관에서 승선세관감시원(tidewaiter)으로 일했으며, 1888년 한성으로 가서 궁궐 건축을 담당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목격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시 조선을 떠났다가 1899년 경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서 1904년 러일전쟁 후 한반도를 떠나기까지 건축과 토목사업에 참여하였다. 사바틴의 활동사항뿐 아니라,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열강들의 대립과 갈등 속에 1884년 7월 7일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과 관련된 조러수호통상조약 조선 측 비준문서(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2부 ▲「러시아 공사관, 사바틴의 손길이 닿다」에서는 러시아 공사관 건립과 관련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러시아 공사관 건립은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직을 맡았던 베베르가 주도했는데, 그는 부임 전에 공사관 건축을 위한 부지 매입, 도면과 예산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공사관의 최초 설계안은 러시아 건축가 류뱌노프가 설계하였으며, 일본인 하도급자인 치오고가 견적과 도면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예산상의 이유로 최초 설계안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사바틴이 예산과 설계를 수정하여 공사를 완료하였다. 2부에서는 러시아 공사관의 최초 설계안과 준공안의 비교, 당시 기축통화였던 멕시코 달러로 계산된 견적서, 준공이 실현되지 못한 대한제국 황제 사저, 공사관 공사 대금을 요청하는 사바틴의 청원서 등 러시아 공사관이 준공되기까지 겪었던 우여곡절과 상세한 공사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3부 ▲「사바틴, 제물포와 한성을 거닐다」에서는 제물포와 한성에 위치한 12개 건물의 모형과 사진들을 전시하며, 그중 사바틴이 관여한 것이 확실한 건물은 관문각과 러시아공사관이다. 그 외 사바틴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물포구락부, 독립문, 중명전, 정관헌, 손탁호텔 등 건물의 사진들과 모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해당 건물을 기념품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엽서를 제작하였는데, 엽서의 바코드를 전시장 기기(機器)에 넣으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사진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시의 현장 관람은 20일부터 덕수궁 중명전(2층)에서 개최하며, 자세한 관람 안내는 덕수궁관리소 누리집(
www.deoksugung.go.kr)을 참고하면 된다. 또한,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관람객 마스크 착용, 입장 전 발열 확인, 한 방향 관람과 안전거리 유지(2m) 등 안전수칙을 준수하여 운영한다.


전시장 관람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온라인 전시를 19일 개막과 함께 진행한다. 문화재청 누리집(www.cha.go.kr)과 유튜브(https://www.youtube.com/chluvu), 다음 갤러리(https://gallery.v.daum.net/p/premium/sabatin) 등에서 가상현실(VR) 영상 등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사진과 영상을 공개할 계획이다.


한편, 전시와 연계된 강연회도 11월 2일 오후 2시부터 경복궁 흥복전에서 진행한다. ‘사바틴 거주 당시의 국제 정세와 한러 관계’(경상대학교 김제정 교수)라는 주제로 진행하는 이번 강연에는 사바틴이 건립했던 건청궁 내 관문각 터와 사바틴이 목격했던 을미사변 현장인 곤녕합을 답사하는 순서도 마련되어 있다.
참여 방법 안내는 10월 22일부터 문화재청 누리집(
www.cha.go.kr), 경복궁관리소 누리집(www.royalpalace.go.kr), 덕수궁관리소 누리집(www.deoksugung.go.kr)에 게시할 예정이다. 강연 역시 코로나19 안전수칙에 따라 운영한다.


문화재청은 이번 전시가 러시아 청년 사바틴이 조선에서 활동했던 모습을 살펴보며 당시 한국과 러시아의 교류를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에게 역사를 알리는 교육의 장이자 치유의 공간이 되고, 더불어 한국과 러시아가 미래 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뜻깊은 자리가 되길 바란다.

 

<안내 홍보물>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藤勝顯), 신사에 칼 기증

 

 

<사진 1> 쿠시다 신사 정문 (사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혜문스님)

 

 

 

<사진 2>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

(사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혜문스님 )

 

쿠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해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 등 일행에 대해,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 했다.

 

“ 이 칼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阿部憲之介) 궁사는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취재진에게 풀러 놓았을 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 느낌이었다.

전체 길이 120㎝. 칼날 90㎝.

칼이 뿜어 내는 살기는 방안을 서늘하게 흥분시키고 있었다.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적혀 있었다. 칼주인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궁사는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며 이 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립니다.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입니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다시 말해 사람을 베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란 분이 신사에 기증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

 

 

 

<사진 3> 칼을 빼고 있는 궁사의 모습 (사진 혜문스님 )

 

 

<사진 4> 칼집에 새겨 놓은 글씨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 ’

( 사진 혜문스님 )

 

쿠시다 신사측 <명성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고 기록

 

 

< 사진 5> 기증관련 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란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도 보인다 혜문스님 제공

그러나 기증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문서에는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었다. 토오가 이 칼을 기증할 당시 궁사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는 서류에는 “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 고 적혀 있었다. 그 대목을 우리가 소리내어 읽자 궁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 사진이 공개되면 혹시라도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 토오가 정말 명성황후를 절명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왕비의 침실에 난입한 사람중 하나란 것은 맞습니다. 사건 당시 왕비는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해한 사람이 궁녀일 수도 있고 ....”

궁사는 그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설명을 늘어 놓을 수록 난처해질 거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런 심경을 반영하듯 그의 얼굴은 대취한 술꾼 처럼 붉게 달아 올랐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긴장시켰다.

“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궁사는 말을 마치고서 이내 칼을 거두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외의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 한일관계의 많은 업보를 담고 있는 칼이군요. 잘 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재를 허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궁사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사진 6> 히젠도 : 한 눈에 명검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의 칼에 방안의 병풍이 반사되고 있다. ( 사진제공 혜문스님 )

토오가쯔아키(藤勝顯)는 누구인가?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 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조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 사진 7>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끝 . 매우 예리하게 연마 되어 있다.

(사진제공 혜문스님 )

 
 

韓시민단체, 명성황후 시해 칼 ‘히젠도’ 폐기 日외무성에 요구

입력 2015-10-09 00:44

 

을미사변 120년을 맞아 한국 시민단체가 명성황후 시해 때 쓰인 일본 낭인의 칼을 폐기하라고 일본 정부에 공식 요구했다.

혜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와 최봉태 변호사 등이 참여하는 히젠도(肥前刀) 환수위원회는 히젠도 폐기 요청서를 8일 도쿄의 일본 외무성으로 발송했다고 혜문 대표가 밝혔다.

히젠도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경복궁의 황후 침전에 난입한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도오 가쓰아키(藤勝顯)가 1908년 후쿠오카(福岡) 소재 구시다(櫛田) 신사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혜문 대표는 “구시다 신사의 히젠도 봉납기록에는 ‘조선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는 문구가 적혀있다”며 “도오 가쓰아키가 을미사변을 기념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칼집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一瞬電光刺老狐)’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밝혔다.

최 변호사는 “히젠도는 범행에 사용했던 것으로 검찰이 압수해야하는 물건이지 사사로이 민간에서 소장할 물건은 아니다”며 “근대 법치국가 성립 이후 살인에 사용된 흉기가 압수되지 않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의구 기자 egkim@kmib.co.kr

출처: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940405&code=61111111&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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