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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세계문화유산 기행]'코로나 팬데믹'에서도 여행하기 좋은 관광지 1위로 CNN이 추천한 '요르단 페트라'

문화재방송 2020. 12. 1. 00:01

지난 11월 19일(현지시간) CNN은 여행 잡지사 '론리 플래닛'이 새로 출판한 "최상의 여행지 리스트(Ultimate Travel List)"를 통해 코로나19로 여행계획이 취소된 사람들이 놓쳐서는 안 될 여행지를 소개했다.이 책이 꼽은 최상의 여행지 1위는 1000년 동안 '잃어버린 도시'로 방치돼 있던 요르단 유적지 '페트라'다. '페트라'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3'에서 성배가 숨겨진 장소로 등장하기도 했다. 론리 플래닛은 남들과 다른 곳을 가고 싶어하는 모험가들에게 이 도시를 추천했다.페트라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페트라는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 나오는 헬레니즘 양식의 웅대한 건물이다. 건물 정면은 암벽을 파서 만들었고, 암벽을 파서 방도 만들었다. 페트라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현대 도시 못지않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3부 '최후의 성전' 촬영지>

1938년. 헨리 존스 박사(숀 코너리)와 헨리 존스 주니어, 그러니까 우리에겐 인디아나 존스(헤리슨 포드)로

알려진 존스 박사와 그의 아들은 하타이 공화국 알렉산드레타(지금의 터키 남부)의 초승달 계곡으로 모험을 떠난다.

황금빛 위용을 뽐내는 신전 건축물 알 카즈네에서 성배를 손에 넣으려는 고고학자 부자(父子)와 나치 일당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3부 ‘최후의 성전(1989년작)’이다.

영화의 배경이었던 요르단 페트라(Petra)는 이후 세계적 관광 명소가 됐다

 

페트라 유적지 입구

진 블록(Djinn blocks)이라 불리는 이곳은 무덤길이자 페트라 유적지의 입구이다.

처음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로 알려졌다가 후에 무덤으로 밝혀졌다.

왼쪽에는 둥글둥글한 모양이, 오른쪽에는 직각 모양의 형태가 있다.

고대 동방의 전통과 헬레니즘 건축 양식이 혼합된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이다.

나바테아 인이 건설한 이 사막의 대상(隊商) 도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홍해와 흑해 사이에 있다.

이곳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이의 중요한 교차로였다.

고대 동방의 전통과 헬레니즘 건축 양식이 혼합된 페트라사라진 문명을 훌륭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트라는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Amman)의 남쪽, 산이 많은 와디 아라바(Wadi Araba) 사막의 가장자리에 있다.

이 도시를 둘러싼 우뚝 솟은 사암 언덕들은 침입자들을 막아주는 천연 보호막 구실을 했다.

이곳은 수세기 동안 지중해와 근동, 아프리카, 인도를 오가며 향신료를 수송하는 낙타 상단이 이용했던 교역로들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페트라는 나바테아 인들이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건설했고, 셈 족이 시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상업 제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서기 106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는 나바테아 왕국을 아라비아의 일부로 합병했다.

지진이 여러 차례 페트라를 강타하여 도시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대주교의 관할구로 지정되었다.

636년에는 아랍인이 도시를 정복했다. 그러나 메카로 향하는 순례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12세기에 십자군이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여 페트라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그 뒤 그들은 곧 철수했고, 페트라는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 1784~1817)가 이곳을 탐사했던 19세기까지 지역 주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알카즈네 신전의 북쪽에 제벨 쿱타(Jebel Khubtha)라는 단층 지괴가 있다.

이것은 ‘왕의 벽’이라 알려진 바위의 정면에 조각이 되어 있는 세 개의 거대한 구조물[왕의 무덤들]이다.

첫 번째는 우른 무덤으로, 정면에 2열의 둥근 천장이 있는 노천 테라스가 잘 보존된 기념물이다.

열주가 있는 회랑은 테라스의 북쪽으로 뻗어 있고, 공들인 파사드는꾸미지 않은 하나의 간소한 방을 향해 있다.

또 벽들은 매끄럽고 내부의 모서리는 빈틈이 없다.

현재 확인되는 유일한 장식은 벽과 천장, 방바닥에 있는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사암 소용돌이 문양이다.

알카즈네 신전의 축소판인 코린트식 무덤은 궁전 무덤[비단 무덤]의 옆에 있으며,바위의 독특한 색채 효과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왕의 무덤에서 약간 떨어진 북쪽에 130년에 건설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의 로마 총독 섹스티우스 플로렌티누스(Sextius Florentinus)의 무덤이 있다.

‘파라오의 보고(寶庫)’라는 뜻을 가진 카즈네 엘 파룬(Khazneh el Faroun)은대략 40m 높이의 인상적인 파사드가 데 산허리의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낮은 층에는 6개의 기둥이 떠받친 현관 지붕이 있다.

그 기둥들은 꽃무늬 기둥머리를 얹고 박공을 떠받치고 있다.

3층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가운데는 원뿔 모양의 지붕이 있는 둥근 천장식 분묘이다.

이곳에 유골 단지가 놓여 있다. 나머지 양쪽에는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반(半) 박공이 있다.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건축, 조각 장식들이 건물의 각 요소들과 정면을 꾸미고 있다

알카즈네 신전은 페트라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유일한 건물로 어떠한 나바테아적 요소도 없으며알렉산드로스의 세계와 헬레니즘 예술 전통 간의 배타적 유대를 보여준다

인상적인 정면 뒤에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를 깎아 만든 넓은 직사각형 방이 드러난다.

이것은 전형적인 페트라의 무덤이다. 외부만큼이나 평평한 내부는 복잡하

시크는 급류에 의해 만들어진 협곡으로 나바테아 인은 그곳을 막아댐이나 수로를 만들어 도시에 식수를 공급했다.

시크의 돌 벽을 따라서 일련의 비문과 벽감, 소원을 비는 작은 제단뿐만 아니교역에 나선 인간과 낙타를 묘사한 돋을새김과 조각들이 있다.

시크의 폭은 5m가 안 되지만 반면에 양쪽 벽면은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른다.

원래 포장되었던 바닥은 현재 부드러운 모래로 덮여 있다.

그렇지만 나바테아 건축양식은 여전히 몇몇 장소에서 볼 수 있다.

시크의 끝에 있는 폐허는 열주로 된 길로 연결된다. 알 데이르(al-Dayr)는 페트라 계곡을 굽어보는 서쪽 벼랑에 서 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신성한 돌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알 데이르의 간소함과 단순함에서 헬레니즘의 전통적 요소들이 초기에 이 지역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에는 장례 시설이 전혀 없다.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 되었다가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이며 젊은 여행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 1784~1817)

여행 중에 발견하였다.

<이하 사진 출처:cafe.daum.net/s21c/iAwA/49?q=%EC%9A%94%EB%A5%B4%EB%8B%cafe.daum.net/s21c/iAwA/49?q=%EC%9A%94%EB%A5%B4%EB%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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