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잘 알고있으면서 그책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세계 중국3대기행문 중 하나라는
'표해록'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표해록'은 무었일까요?.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던 최부가 1년후 1488년
부친상을 당해 제주에서 고향 나주로 건너오다 서남해바다에서 표류하며 겪었던 이야기가 담겨진 책입니다.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했던 배는 중국 남부해안에 정박 강남과 산둥지방을 거쳐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한후
조선으로 향하게됩니다. 장장 6개월에 걸친 긴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의 현장 기록입니다.
'표해록'을 통해 통해 우린 동아시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관료앞에서도 꼳꼳했던 조선선비의
기개를 볼 수있습니다.
또한 위험한 상황속에 내몰린 모험이야기를 통해 일본과 한국 중국의 관계는 물론 당시 아시아의
경쟁구조와 당시까지만해도 베일에 가려져있던 중국 강남지역의 화려한 문명과 대운하의 쓰임새
또한 자세히 만나게 됩니다.
[민경중 칼럼] 한중관계와 '표해록' 최부의 리더십
- 민경중(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 민경중 교수가 중국 절강성 영파시 닝하이현 황금열쇠희망소학교 운동장 뒤편에 최부 후손들이 세운 ‘최부표류사적비(崔溥漂流事迹碑)’를 살펴보고 있다. ‘표해록’은 조선 지식인의 눈에 비친 15세기 중국사회(명나라)를 객관적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꼽힌다.
지금으로부터 꼭 528년 전인 1488년(성종 19년) 겨울,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태주(台州府) 임해현 한 어촌 해안가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던 배 한척이 떠밀려 왔다. 배 한쪽은 갑판이 허물어져 물이 새고 돛대는 풍랑을 이기지 못해 다 부러져 있었다. 장기간 표류에 지친 듯 남루한 차림에 허기진 43명이 배에서 내려 민가를 찾았다. 이내 돌아온 것은 포박과 매질이었다. 당시 중국 해안가에 자주 출몰했던 왜구(倭寇)로 오인 받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인임이 밝혀져 오해가 풀리고 항저우(杭州)로 이송됐다.
15세기 조선 성종 때 문신이었던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내용 일부다. 최부는 왕명을 받아 제주도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출장을 나갔다가 전남 나주 고향에 있는 부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주목사가 마련해 준 배를 타고 해남으로 향하던 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 추자도 앞바다에서 표류를 시작했다. 13일간의 표류 끝에 중국 동남쪽 지금의 영파(닝보·寧波) 해안지방에 도착, 조선으로 송환되기까지 태주~영파~소흥~항주~소주~진강~양주~회안~서주~천진~북경~산해관~북녕~요양을 거쳐 단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대오를 이끌고 한양에 무사히 도착했다. 중국에서 조선으로 돌아가기까지 148일간의 대장정이었다.
일기체로 기록한 148일의 중국 견문록...“15세기 중국사회 객관적 서술”
굳이 500여 년 전 표해록 얘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심상치 않은 한·중, 한·일 관계 등 복잡다단한 국제 관계를 보면서 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 필요한 리더의 역할과 함께 한 관찰자의 정확한 시각과 견해가 후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다.
필자는 수 년전 제주에서 근무하던 시절 최부의 드라마틱한 표해록 얘기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표해록 원문과 고려대 사학과 박원호 교수의 ‘최부 표해록 연구’를 읽으며 기회가 되면 꼭 최부 일행이 걸었던 중국 대륙의 그 길을 답사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학창시절 중국과 첫 인연을 맺은 이후 베이징 특파원, 출장, 대학 강단까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중국을 알고자 했지만 지적 허기와 목마름이
항상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초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최부가 처음 도착했던 바로 그 작은 어촌, 절강성 영파시 닝하이현(寧海縣) 황금열쇠희망소학교 운동장 뒤편에 최부 후손들이 2001년 12월 25일에 세운 ‘최부표류사적비(崔溥漂流事迹碑)’를 어렵게 찾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 한국인은 후손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최부에 관한 얘기는 알고 있었다.
영파를 시작으로 한달간 최부 일행이 거쳐 간 길을 따라 각 도시를 들러 흔적을 살펴보며 위대한 학자의 여정에서 많은 것을 사색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표해록은 표류에서부터 시작된 여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일종의 중국견문록이다. 당시 조선인이 쉽게 가 볼 수 없었던 중국 강남의 견문에 대한 기술은 양반들에게 큰 화젯거리가 됐다. 흔히 ‘친구 따라 강남 간다’ ‘강남 갔던 제비 돌아 온다’는 우리 속담은 바로 중국 장강 이남의 화려했던 ‘강남’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근대 이전에 중국을 여행한 외국인이 남긴 기행기 중에는 13세기 베니스 상인의 아들 마르코 폴로가 남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1992년 중국 베이징대학 갈진가(葛振家)는 ‘표해록-중국기행’에서 “중국 문화에 정통한 조선의 지식인 최부는 해박한 역사·지리·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머문 기간은 5개월 정도에 불과했지만, 15세기 중국 사회를 이만큼 객관적으로 바라본 책은 중국 내부에서 조차 찾기 어렵다”고 언급했다.
▲ 중국 절강성 영파시 닝하이현 황금열쇠희망소학교 운동장 뒤편에 세워진 ‘최부표류사적비(崔溥漂流事迹碑)’의 뒷모습.
조선보다 일본에서 더 인기… 중국 정보 부족한 일본인들에 ‘교과서 역할’
20세기 들어 표해록에 학문적 관심을 가진 사람은 놀랍게도 미국인 메스킬이었다. 1958년 일본 유학중 일본 승려 책언(策彦)의 ‘입명기(立明記)’를 연구하던 중 교토대학 스승으로부터 책언보다 51년이나 앞서 쓴 조선인 최부의 명나라 여행기를 접하고 연구했다. 이 논문으로 메스킬은 컬럼비아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6년 비로소 첫 한글 역본이 나오기 18년전에 미국 학자가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사실 표해록은 조선보다도 일본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항상 중국 내륙의 정보에 굶주려 있던 일본인들은 표해록을 1769년 유학자 청전군금(靑田君錦)이 비록 완역은 아니었지만 일본어로 번역하고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당토’란 당시 일본인들이 중국을 부르는 말이었다. 얼마 후 ‘통속표해록(通俗漂海錄)’으로 제목을 바꿔 일본에서 더욱 널리 읽혀졌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섬나라인 일본이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었다.
일본이 얼마나 표해록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조선시대에 나온 판본 6종 중에서 임진왜란 전에 간행된 3종 판본이 국내에는 없고 일본의 세 문고에만 각각 수장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명종 연간에 출간된 관판본(官版本) 완본은 일본 도쿄의 동양문고(東洋文庫)에 보관중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도서관 화산문고에 권1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정주본(定州本)과 남원본(南原本)도 각각 일본 출판사들이 완본을 소장하고 있다.
박원호 교수는 ‘최부 표해록 연구’에서 19세기 일본인들이 바닷길을 통해 유구(劉球)나 필리핀, 그리고 남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표류 이야기에 한층 흥미진진함을 느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 민경중 교수가 ‘최부표류사적비(崔溥漂流事迹碑)’가 세워진 중국 절강성 영파시 닝하이현 황금열쇠희망소학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중국인들도 탄복한 올곧은 선비정신… 관료의 실력·품격 보여줘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왜 우리보다 미국, 일본, 중국 학자들이 표해록에 관심을 가졌
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며 세 가지 교훈과 결론을 얻었다.
첫째는 최부의 철저한 관찰력과 기록정신이다.
남경(南京)에 수도를 두었던 명조(明朝)가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이후, 조선의 조공 사절은 요동을 거쳐 북경까지만 육로로 왕래했다. 따라서 이남 지역, 특히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장강 남쪽 지방을 견문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그런데 최부는 표류로 인해 흔히 강남으로 불리는 장강 하류 델타지역을 자세히 견문할 수 있었다. 아울러 항주~북경을 연결하는 중국 교통의 대동맥을 직접 목도했다.
최부는 대운하 연안의 시가지 모습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사회생산, 생활습속, 도시풍경 등 진귀한 내용을 세세하게 담았다. 소흥(紹興)을 지날 때 당시 중국 강남지방에서 유행한 발로 밟아 양수기 역할을 하는 수차(水車)를 보고 제작방법을 여러 차례 묻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도 논에 가뭄이 들 때 이를 배워 농민들에게 가르친다면 큰 도움이 되겠다’며 재차 물어 수차제작법을 기록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은 성리학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보게 한다. 중국 역사학자 판진민(范金民) 남경대 교수는 “대운하를 통과한 여정에 대한 15세기 기록 중에 ‘표해록’이 그 정확성과 상세함에서 단연코 제일로 꼽힌다. 명대를 통틀어도 찾을 수 없다”고 격찬했다.
둘째는 올곧은 조선의 선비정신에 중국인들도 탄복한 점이다.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한 최부는 비록 표류 당시 32살이었지만 학식과 품격에서 대단한 내공을 쌓고 있었음이 표류기에서 확인된다. 중국 곳곳을 지날 때마다 중국의 지방 관료나 학자들이 조선에서 온 선비의 학식을 시험했다. 조선의 과거제도나 유학과 불교에 대한 호기심으로 질문할 때마다 필담으로 거침이 없었다.
특히 중국 관료들이 ‘당신도 시를 지을 줄 아는가?’라고 물었을 때 ‘시는 경박한 사람이 풍월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을 배운 군자가 할짓은 아니다. 그러나 먼저 시를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라고 말하며 조선 초기의 사림파(士林派)답게 작시(作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요청을 받았을 때는 거침없이 시로 화답해주자 중국 관료들이 선물을 주는 등 특별대우를 해준 대목들에서는 비록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기울었다 하더라도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관료의 실력과 품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사람 낙오 없이 43명 전원 귀환… 위기에서 더 빛난 지도자의 모습
셋째는 최부의 위기관리 리더십이다.
43명의 최부 일행은 난파선에서 선원들의 반란 움직임과 중국 해적들을 만나 처형당할 위기, 중국 하급관료들의 ‘공적 쌓기용’ 희생양으로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맞았다. 그때마다 강력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최부에 대한 원망 때문에 내부저항으로 위계질서가 무너질 처지에 빠지자 ‘우리는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하다 하더라도 너희들이 나에게 무질서하고 위의(威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우리를 대접해주겠는가’라고 설파하여 위기를 넘긴다. 최부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빛나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끝까지 조선 관료로서의 존엄을 무너뜨리지 않고 결국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중국 고전에 이런 우화가 있다. 중국 전한 시기 이광(李廣)이라는 명장이 불과 1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기습공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곧 적군에 포위됐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장병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침착하게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적은 깜짝 놀랐다. 너무나 대담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반드시 계략이 있을 것으로 믿은 적들은 주춤했다. 이때 갑자기 이광은 10여 기병을 이끌고 적진에 들어가 한칼에 적장을 베었다. 혼비백산한 적군 병사들은 허둥지둥 달아나기에 바빴다. 결국 이광은 한 사람의 병사도 잃지 않고 돌아왔다.
사마천은 ‘사기 이장군열전(史記 李將軍列傳)’에서 “장군의 언변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그 덕과 성실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복숭아와 오얏꽃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桃李不言) 그 아름다움에 끌려 사람들이 모이므로 나무 밑에는 자연스럽게 샛길이 생긴다(下自成蹊)”라고 기록했다.
최근 사드 배치, 북한 핵문제 해결방안 등을 놓고 한·중 관계가 수교 이후 최악의 상황이라는 평가가 나오고있다. 국가 간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놓고 보면 개인도 그렇지만 최상과 최악의 상황을 반복한다. 이런 때 일수록 역사 속에서 아무리 위기에 처해도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성혜(成蹊)의 지도자가 그리워진다. 21세기 위기의 대한민국에 ‘최부’와 같은 진정한 리더는 없는 것일까?
/민경중(한국외국어대 중국언어문화학부 초빙교수)
원문보기http://www.womaneconomy.kr/news/articleView.html?idxno=40638
유허비 올라가는 길
금남 최부선생 유허비錦南 崔溥 先生 遺墟碑.
전남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산43-1
최부 선생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곳으로 추정된다
최부 선생은 조선 전기 즉1454년(단종2)부터1504년(연산군10)까지 살았던 사대부이자 관료였습니다.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고 어머니는 여양(驪陽) 진(陳)씨로 알려져 있으며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초시를 거쳐25세(1478년, 성종9) 때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습니다.
선생은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당시 대유(大儒)로 평가받는 김종직(金宗直)과 사제관계를 맺었고,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같이 공부하였습니다.
이로서 선생은 사림의 계보 즉 영남사림의 맥을 이어받은 호남사림의 선도자가 되었지요.
1487년에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종5품) 등으로 승진하였고, 9월에 제주지역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전남 나주시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의 사적비
이듬해인1488년 정월에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제주에서 귀향 중에 풍랑을 만나 남중국에 표류하였습니다.
북경을 거쳐 요동을 지나 6월4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때의 표류와 중국 견문과정을{표해록}이라는 책으로 엮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답니다.
그렇지만 왕명에 의하여 책을 진상하였다 고는 하나, 상중(喪中)에 한가롭게 기행문이나 쓰고 있었던 것은
명교(名敎) 에 어긋난다고 여겨져서, 최부 선생은 분상(奔喪)을 마친 후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는 문제로
논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40세(1493)에 이르러서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 정5품), 홍문관 교리(정5품)로
관직에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크게 가뭄이 들자 수차(水車)제조법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중국을 여행했을 때 수차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보고{표해록}에 기록하였는데,
아직 수차를 이용한 농업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에는 혁신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을 꾀한 것이지요.
또한 조선왕조실록 에는1497년(연산군3) 최부가 3정승과 이조·호조· 예조판서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불의를 보고 바르게 직언(直言)하는 사대부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연산군 조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로 세칭 훈구파의 세력에 밀려
사림파의 거두들과 함께 유형(流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로 단천에서 10월24일 참수되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蛇足:'무오사화'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웃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김해김씨 삼현파의 증시조라 할 수 있는 탁영 김일손(당시 사관) 은 참형되고,
김종직의 묘를 파헤쳐 시신을 가르는 이른바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수많은 유생을 죽이거나 유배 보낸 사건.
무도한 연산군의 횡포에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한 최부, 그의 최후에 대해 역사는
그냥 입을 다물지는 않았습니다.
실록 연산군 10년 10월25일의 기사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부는 공렴정직하였고 경전과 사서(經史)에 박통(博通)하고 문사(文詞)에 넉넉하였다.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고 말하고는
"죽임을 당하자 조정이나 재야의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는 말로 애통함을 기록하였다.
전남 나주시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의 금남 최부 선생과 부친의 묘소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 부친의 상을 당해 풍랑이 심한데도 배를 띄워
집으로 향하다 표류하게 됐습니다.
죽은 뒤에도 부친 옆으로 가고 싶다고 생전에 유언, 유허비는 출생지에,
사적비와 묘소는 부친의 묘소에, 그러나 두 곳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통정대부 사간원 사간이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왕명을 직접 받는 도승지였음도 알 수 있습니다.
나주시는 지난 2008년 6월 최부 선생이 표류하다 처음으로 중국땅을 밟은
절강성 린하이(臨海)시 도저(桃渚)진에 한중 민간우호를 상징하는 사적비를 건립한 바 있다.
당시 나주시는 이 사적비 제막을 계기로 양국간의 우호교류 확대와 중국에 최부 선생을 알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까지 이렇다할 활동이 없었던 것.
기념사업회는 중국에서 ‘효’의 상징으로 추대 받고 있는 최부 선생이 돌아가신 지 509년째인 올해,
기념사업회 창립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우호교류 확대는 물론
최부 선생의 업적과 표해록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표해록’ 금남 최부선생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
이날 세미나에는 강원구 최부선생기념사업회회장(한중문화교류회장), 박성수 광주전남연구원 원장, 강인규 나주시장, 김판근 나주시의회의장, 손현우 주광주 중국총영사, 최남희 탐진최씨문중 대표, 안종수 호남대학교 교수, 퐁옥충 전 요녕대학교총장을 대신해 강명추 동북아경제문화촉진회비서장, 탁인석 전 폴리텍대학학장, 최한선 전남도립대교수, 이경수 광주매일신문 상무이사, 김만호 광주전남연구원 연구위원, 이정선 전광주교육대학교총장, 마옥춘 광주전남화교협회장과 한중문화교류회원 및 나주시민 300여명이 참여했다.
[표해록 요약]
최부는1487년 11월 1일 전라도 해남을 떠나 다음날 제주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듬해1월30일 부친상(父親喪)의 소식을 전해 듣고, 윤1월3일 제주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거센 풍랑 때문에16일까지 표류하게 되었으며 결국 중국 태주부 임해현(臨海縣)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도착하였다.
이후 최부를 비롯한 총43명의 일행은 왜구(倭寇)로 오해받아 고초를 받았지만, 조선의 관리임이 확인되어 북경까지 호송되었고
다시 요동을 지나 의주를 거쳐 귀국하게 되었다.
{표해록}에는 이러한 최부일행의 표류와 여정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어서,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이 묘사되었다.
이와 같은 기록된{표해록}은 몇 가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제주의 풍속과 서해바다에 대한 내용이다. 최부가 귀향하기 위해서 탄 배는 관용선박이 아니라
제주 수정사 승려의 개인 배이다. 또한 여기에 승선한 뱃사람들은 대체로 제주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이나 대화내용을 통해서 제주의 풍속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주에서는 여자의 활동이 활발하다고 알고 있다. 이 책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즉 제주에서는 여자가 태어나면 부모에게 효도할 자식이라 생각하고,
사내애가 태어나면 곧 바다에 나가 고래나 악어에게 잡아먹힐 것이라 하여,
아들보다 딸을 귀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제주사람들의 기질까지도 기록하고 있어서 민속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서해바다에서 표류 중에서 목격한 고래를 묘사하고 있다.
고래의 모습은 정약전(丁若銓)이 쓴{자산어보(玆山魚譜)}(1814)에 기록된 흑산도 앞 바다의 고래와 일치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서해에서 흔치않았다고 생각하는 고래의 존재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두 번째는 한반도의 서남단에서 남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구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사실 최부는 표류기간 내내 일기상태와 바람의 방향 그리고 바다의 빛깔을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바다의 빛깔은 중국 송나라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 (高麗 圖經)} (1123)에 나온
"백수양(白水洋)· 흑수양(黑水洋)"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그 정확성이 돋보인다.
대체로 고대 한중 간의 항로 중 황해남부사단항로는{고려도경}에 기록된 대로 중국의 명주(지금의 항주)에서
북쪽으로 갔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항진하면 흑산도에 이른다.
최부에 의하여 기록된 당시의 풍향과 일기를 분석하면,
난파된 배의 진행방향이{고려도경}의 항로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조건만으로도 한반도와 남중국간의 이동이 가능하였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는 것이며,
{표해록}은 그것을 실증하는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세 번째는 최부와 같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기본소양과 자부심을 알 수 있다.
{표해록}을 보면 최부가 조선시대의 문사(文士)임을 자부하는 대목과 사림으로서의 흐트러짐이 없는 태도가 엿보인다.
먼저 표류 중인 윤1월12일 하산(下山)이라는 섬에서 관음불을 자처하는 해적 임대(林大)를 만나게 되어 노략질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잠깐 최부가 해적을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자.
처음에 임대는 해적의 모습을 하지는 않고 최부를 도와주는 뱃사람이었다.
그러나 밤9시경에 갑작스럽게 무리를 이끌고 최부일행이 탔던 배에 쳐들어와서 금품을 요구했다.
그러나 표류당한 배인 까닭으로 약탈할 물건이 별로 없자 해적들은 최부의 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후
거꾸로 매다는 등 폭력을 행사하며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 와중에서 최부가 관리임을 증명하는 인수(印綬)와 마패(馬牌)를 빼앗기자,
거꾸로 매달린 채로"배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빼앗아 갈 수 있으나 인수와 마패는 곧 나라의 신표(信表)로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으니 돌려주시오"라고 말하며 관리의 도를 지켜내었다.
또 칼로 어깨를 내리치며 부상을 입히면서 금품을 요구하는 해적 임대에게
"몸을 저미고 뼈를 부술 수 있지만 어찌 금은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등,
바로 죽음 자초할 수 있는 말 한마디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와 같이 최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도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조선의 관리임을 내세우며
당당한 태도를 보여, 결코 비례(非禮)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도적을 만나기 전 주변으로부터 상복(喪服)을 벗고 관복(官服)을 입어
위엄을 나타내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예(禮)가 아니라며 따르지 않았다.
또한 남중국에 도착해서 왜구로 오인되어 고초를 겪을 때 그리고 중국 관리 앞에 나아가 본인이
조선의 관리임을 밝힐 때 역시 항상 상복을 입고 있어서 가례(家禮)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한 것은
그가 성리학을 깊숙이 이해하고 실천적으로 따르는 조선의 문사임을 표현한 것이다.
네 번째는 방대한 양의 중국 풍토기록을 알 수 있다.
최부가 중국에 도착하여 바로 항주로 옮겨지고 다시 운하(運河)를 따라 북경으로 가는 동안,
때로는 배와 말을 갈아타고 지나간 길의 주변정황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부가 운하를 지나가면서 재미있는 풍경이 있어 언급하고자 한다.
3월2일 신안역(新安驛)이라는 곳을 지나 여량홍(呂梁洪)이라는 호수를 지날 때였다.
운하의 물 흐름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지세와 원래 존재했던 강의 흐름에 따라 자주 변하였다.
이때 북경으로 가는 최부일행의 진로와 운하의 물흐름이 반대였다.
최부일행은 배를 타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곳을 통과할 때는 인력(人力)으로는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최부일행이 탔던 거룻배를 소10마리가 물의 흐름과 반대로 끌어 올라갔다고 한다.
또 이튿날에는 서주(徐州)를 지나면서 인부100명이 운하의 양쪽에서 최부가 탔던 배를 끌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기록되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표해록}에서 여러 차례 목격된다.
이 책은15세기 당시 중국 운하주변의 풍경 뿐 아니라 운하를 운행하는 방법까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한편 최부는 운하를 만들면서 쌓은 제방을 당(塘)·제(堤)·언(堰)·패(壩) 등으로 구분하였고,
제방의 수문 즉 갑(閘)에 대해서도 서술함으로써 중국 제방의 제도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운하를 가로지르는 홍교(虹橋, 무지개 다리), 석교(石橋), 목교(木橋), 지붕이 있는 다리 등
각종 다리 또한 그 형상을 실감나게 전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시스템인 포(鋪)·참(站)·역(驛) 등에 대해서도 창고의 존재여부까지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회의 거리를 묘사한 것이나,
당시의 시장인 집(集)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세밀히 전하고 있다.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일반 백성의 신앙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각종 사찰이나 사묘(祀廟) 혹은 당시 중국 민간에서 널리 신봉되었던 관우묘(關羽廟)도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군사시스템인 위소(衛所)에 대해서도 그 명칭을 일일이 적시하고 있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호송 도중에 수차(水車)의 제도를 보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적은 것으로 말미암아 훗날 조선의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표해록}은 최부의 사람됨과 성리학자로서의 소양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인 셈이다.
게다가 한중간의 항로를 추적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으며, 나아가15세기 명나라의 지방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의 사신이 중국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소위{연행록(燕行錄)}은 다수가 존재한다.
이 기록들은 대체로 의주에서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에 다녀온 기록일 뿐이다.
그렇지만 최부의{표해록}은 연행록에 나오는 북경에서 의주에 이르는 중국을 동북지역을 기록한 것을 포함하여,
북경의 남쪽에서 항주에 이르는 남중국의 풍광을 정확하고 생동감있게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조선의 관리를 제외하더라도 전근대시대에 중국을 여행한 외국인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며,
그 여행을 밑천으로 작성한 기행문도 적지 않다. 그런데 중국 여행기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로 마르코 폴로에 의해 발간된{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1299)과,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9세기)를 손에 꼽을 것이다.
{동방견문록}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마르코 폴로가1275년부터1295년까지 중국을 여행하고 귀국하여 작성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을 문맹(文盲)이었을지도 모르는 마르코 폴로가 직접 서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다분히 서양인의 입장에서 동양에 대한 과장이 섞여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엔닌이 저술한{입당구법순례행기}는9세기 당(唐)나라 때 지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얻을 수 있는 자료이다.
엔닌은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에 살았던 승려이다.
그는 당나라의 밀교를 받아드린 구법승(求法僧)으로838년 양주(揚州)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순례하고 답사한 후
846년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을 책으로 저술하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엔닌의 이러한 구법행위와 수도였던 장안(長安)에 머물렀던 내용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 서해를 둘러싼 중국과 한반도에서 활발하게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던 신라인들 특히 장보고(張保皐)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을 소개하는 2개의 명저는9세기와13세기의 중국의 실정을 풍부한 내용으로 자세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최부가 작성한{표해록}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마르코 폴로의 저작처럼 과장되지 않았고,
15세기 중국 명(明)나라의 실정을 아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최부는, 회창폐불 당시 엔닌이 자신이 승려였음을 속이려고 한 것처럼 비굴하지 않고,
조선의 문사(文士)의 기개를 드러내며 결코 중국인들에게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두 여행기의 업적을 뛰어넘을 수 있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표해록}을 3대 중국 견문록의 반열에 올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를 인정이라도 하듯 최부의{표해록}은 출간이래,
18세기 일본의 주자학자 청전군금(淸田君錦)에 의해{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기도 하였고,
19세기에는 지암(止菴) 박씨부인(朴氏夫人)에 의해 한글 언해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미국학자Meskill(1953), 일본학자 목전체양(牧田諦亮)(1986),
중국학자 갈진가(葛振家)(1992) 등 외국학자에 의해서도 꾸준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국내외에서 공히 그 가치를 인정받은{표해록}은 최부가 지닌 사대부로서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15세기 남중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마르코 폴로라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표류와 중국을 여행하면서 보여주었던 조선 사대부의 기개와 자부심은
현재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되짚어야할 우리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
<이상 '표해록'요약은 주성지(동국대 사학과 강사)님의 조선의 마르코폴로'최부(崔溥)'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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