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성식(poet6) / 편집: 김대홍(bugulbugul)
▲ 천마총이 위치한 대릉원의 여름. 분홍빛 백일홍이 흐드러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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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의 전설과 신화에는 말(馬)이 자주 등장한다. 현존하며 세간을 떠도는 옛이야기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애마 부케팔로스, <삼국지>의 명장 관우를 태우고 하루에 400km를 달렸다는 적토마, '서초패왕'으로 불리던 항우와 삶은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한 오추마 등은 역사와 전설 안에 존재하는 명마(名馬)다.
고대왕국 신라의 왕과 귀족들 역시 전쟁 수행과 신속한 이동에 도움을 주는 말을 소중하게 여겼다. 경주시 황남동에 자리한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는 이를 증명한다.
▲ 금관과 천마도장니 등이 발굴된 천마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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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황금 유물들
1973년. 정부는 대릉원 인근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고분 발굴작업을 진행한다. 애초 계획은 황남대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거쳐 이를 국민들에게 공개하는 것. 하지만, 당시 한국의 유적 발굴기술로는 큰 규모의 고분을 조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155호 고분으로 불리던 천마총에 대한 발굴조사.
발굴결과는 놀라웠다. 앞서 언급한 천마도장니와 금관을 필두로 1만1천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중 말과 관련된 유물은 총 504점. 그중에서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은 것은 단연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장니(障泥)였다.
말의 배를 가려 진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장식의 용도로도 사용된 천마총 출토 장니는 신라 고대미술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누벼 만든 1600여 년 전 화폭에 뿔 달린 말이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놓은 신라 사람들.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이에 대해 "한국에서 자생하지는 않았지만, 신라의 고위층들은 말을 기르고 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의 자동차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당시의 말"이라는 설명을 들려줬다.
"비단 천마도장니만이 아닌 말의 뼈와 마갑(馬甲·말에게 입힌 갑옷), 각종 마구(馬具·말을 탈 때 사용하는 기구)가 함께 출토된 것을 볼 때 말은 신라 귀족들이 귀하게 생각했던 동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역시 박 원장의 견해.
▲ 천마도장니. 하늘을 나는 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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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장니는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207호로 지정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이 유물은 신라시대에 그려진 그림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이기도 한 까닭에 역사학계는 물론, 미술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여 왔다.
고고학자 조유전의 책 <발굴 이야기>에는 천마총 발굴에 얽힌 흥미로운 후일담이 등장한다.
'경주에 가뭄이 지속되자, 왕릉을 파헤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아 민심이 흉흉했다. 금관이 출토된 날.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조사단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졌다. 이어 천둥과 번개도 몰려왔다. 겁을 먹은 조사단이 금관을 급히 수습해 상자에 옮겨놓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밝아지고 비가 그쳤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있던 신라 왕의 넋이 노했던 것이 아닐까...'
▲ 천마총 출토 유물 중 하나인 금제 허리띠. 섬세하고 화려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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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관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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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총에서 출토된 왕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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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인의 손으로 금관을 발굴한 최초의 고분이기도 하다. 거기서 출토된 금관의 두께는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가장 두껍다. 금의 성분 또한 우수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천마총 출토 금관을 국보 188호로 지정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금은 고대에도 귀한 광물로 대접받았다. 신라의 지배층들 역시 금으로 된 장신구를 신분 과시 등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과 함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제 허리띠(국보 190호)와 순금 관모(국보 189호), 화려한 금귀고리 등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천마총 내부... 신라 고분 양식 잘 보여줘
그렇다면 천마총에는 누가 묻혀있었을까? 이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엇갈린다. 22대 지증왕의 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출토된 유물의 전체적인 성격이 국가의 비약을 드러내고 있으며, 칠기 화염문(火炎文·불꽃무늬) 등이 중국 북위의 영향을 받은 6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반면 천문학 지식을 동원해 해마다 달라지는 해돋이 방향을 근거로 "천마총은 20대 자비왕의 유택"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강석경의 책 <능으로 가는 길>에는 이와 관련된 좀 더 상세한 이야기가 나와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천마도가 그려진 장니를 얹은 말 위에 앉아 순금으로 만든 왕관이나 관모를 쓴 왕과 귀족, 커다란 금귀고리로 화려하고 예쁘게 꾸민 왕비 혹은, 후궁들이 신라의 월성을 유유자적 오가는 장면을 떠올리는 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끝 간 데 없이 자극한다.
천마총은 이러한 사람들의 상상 속 궁금증을 일부나마 해소시켜주고자 발굴된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거리도 없지 않다. 천년 이상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던 고분의 속살을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훼손의 위험성은 없을까?
기자의 이런 우려를 불식해준 사람은 박임관 원장이었다. "공개가 결정된 다음부터 훼손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고민했기에 큰 위험은 없다. 내부로 스며드는 습기를 막아야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이는 제습시설 확충 등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다만 장마나 폭우를 대비한 침수 방지책은 보다 치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천마총 내부엔 발굴 당시의 고분 속 유해가 재현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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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에는 동쪽으로 머리를 향한 채 금관을 쓰고 조용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고분 주인의 유해도 재현돼 있다.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다. 박 원장에게 물었다. "일반인들이 신라 고분의 내부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게 천마총이다. 재현과 복원이 잘 된 부분과 미흡한 부분으로 나눠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경주 고분의 고유한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바로 눈앞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과 출토 상태가 양호한 여러 가지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천마총의 매력이다." 이에 덧붙여 박 원장은 "돌무지와 돌무지를 덮은 찰흙과 봉토의 두께 등을 실제 발굴 시 확인된 정보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천마총을 찾아간 날. 대릉원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그 아래서 서너 살 꼬마들이 병아리처럼 종종거렸다. 세월이 흐른 후, 그 아이들 또한 '천마와 황금의 나라'로 천년왕국 신라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우연한 발견, 그러나 빛나는 보물 '금관총' |
1921년 일제강점기. 그해 경주에서는 한국인의 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반주택을 보수하다 우연하게 발견하게 된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을 조선총독부가 보관하려 하자, "그 방식은 옳지 않다"며 들고 일어선 경주 시민들이 돈을 모아 유물전시관을 축조했고, 그것을 국운이 기울어가던 나라에 기꺼이 기증한 것. 경주시 노서동의 금관총은 '한반도 식민지배의 정당성과 근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의 '고적 조사사업' 와중에 예기치 않게 찾게 된 고분 중 하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역사서 <일본 사기>에 기록된 "경주는 일본에게 예를 바치며 항복한 나라"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1920년대 일본이 주도한 경주 고분의 발굴역사는 '발굴'이라기보다는 '도굴'과 '유물 빼돌리기'에 가까웠다. 이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제국주의국가가 식민지에서 행한 문화적 착취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일본의 의도와 달리 금관총의 발굴 조사작업은 경주 고분에 대한 당대 시민들의 인식을 혁신적으로 바꿔놓았다. 비록 일본이 주도한 것이었지만, 발굴과정에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출토된 미려한 금관은 "한국은 한때 이처럼 빛나는 문화유산을 만들어냈던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져다줬고, 이는 무장독립운동과는 또 다른 방식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경주학연구원에 따르면 인류사를 통틀어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금관이 발굴된 것은 겨우 10여 건에 불과하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레나드 울리(Leonard Woolley)가 찾아낸 수메르 왕릉의 금관, 아프가니스탄 테베 고분의 금관을 제외하면 나머지 금관은 모두 한반도에서 발굴됐다. 현재까지 출토된 신라시대 금관은 모두 7점. 이만하면 '황금의 나라 신라'라는 별호가 어색하지 않다. 금관이 나왔다고 해서 얻게 된 이름이 금관총이지만, 이 고분에선 금관 외에도 순금귀고리, 금제 팔찌와 반지, 모양을 달리하며 빛나는 구슬, 금제 신발, 칼과 갑옷, 화살촉, 말방울, 말띠 장식, 각종 토기와 칠기 등 수만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출토된 금의 양만도 7.5kg. 예술적 가치를 차치한 금 가격만으로도 3억6천만 원에 달한다. 비록 입을 가지지 못한 무덤이지만, 금관총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는 듯하다. "수난 속에서도 지속되는 것이 역사다. 그러니, 역사의 엄정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원문보기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31621&CMPT_CD=SEARCH
가장 완벽한 흥덕왕릉...수수께기인 정혜사 13층 석탑
정혜사지 13층 석탑
▲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정혜사지 13층석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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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에서 북쪽 도덕산 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40호)이 보인다. 자옥산과 도덕산을 좌우로 끼고 동쪽의 어래산을 바라보고 있는 정혜사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절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는 13층 석탑만 남아 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게 사라지고 탑만 남을 수 있단 말인가?
탑에 대한 안내판을 보니 정혜사 또는 탑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은 없고 탑의 형태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무렵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신라시대 탑은 3층과 5층이 많고, 드물게 7층과 9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1층 탑신만 크고 2층 이상은 거의 지붕돌만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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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을 크게 부각시킨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특이한 양식이면서도 탑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탑의 몸돌이 거대한 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높이 131㎝, 폭 166㎝)을 세웠으며, 그 안에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처마의 층급받침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탑 주변에서 주춧돌과 기왓장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너무나 잘 정비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 1층 탑신부의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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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가 너무 도식적이다. 과연 이 탑이 신라시대 만들어졌을까? 13층이라는 층수가, 2층부터 13층까지의 지붕돌 양식이 보통의 신라 석탑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또 뭔지는 모르지만 감은사탑이나 석가탑, 그리고 창림사탑 등 전형적인 신라탑과는 그 느낌도 다르다.
정혜사(淨惠寺)라는 절 이름은 또 어떤가? 맑게 베푸는 절로 풀어볼 수 있는데, 정혜가 선정과 지혜의 준말인 정혜(定慧)는 아닐까? 그렇다면 정혜사는 선종계열의 절이 된다. 그러나 당시 선종 계열의 절은 수도인 서라벌을 떠나 지방에 만들어졌다. 도대체 풀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정혜사지 13층석탑은 경주지역에 남아 있는 최대의 미스터리 석탑이다.
신라 왕릉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흥덕왕릉
수많은 의문을 안고 우리는 안강읍을 지나 68번 지방도를 따라 신광면 방면으로 향한다. 한 5분쯤 갔을까, 왼쪽으로 흥덕왕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흥덕왕릉은 이곳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에 있다. 육통리는 형산강을 따라 발달한 안강평야의 북서쪽에 있고 마을 뒤쪽으로 소나무 숲들이 보인다. 왕릉전문가인 이광국 선생이 흥덕왕릉 방향을 정확히 짚어낸다.
▲ 흥덕왕릉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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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영역에 도착하니 주차장 옆으로 사당인 숭덕전이 있고, 소나무 숲 사이로 왕릉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숲에 들어서 보니 소나무들이 정말 잘 생겼다. 함께 간 류병륜 선생이 이곳 안강 지역의 소나무들이 특이해서 안강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을 해준다. 흥덕왕릉이 훌륭한 것은 우수한 수종의 안강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능 관리인이 가지치기 등을 통해 소나무를 잘 가꾸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완벽한 모습의 흥덕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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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왕릉 앞으로 가면서 우리는 왕릉의 배치와 규모, 석물의 조화, 그리고 조각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한다. 특히 이광국 선생이 신라왕릉 중 이렇게 완벽하고 훌륭한 모습을 간직한 경우를 찾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먼저 능역 초입에 있는 석주(촛대석)와 무인석, 문인석을 본다. 8각형의 막대형으로 기단 위에 세워진 석주 높이가 이들 문․무인석과 크기가 비슷하다.
▲ 무인석(사진 왼쪽)과 문인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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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뒤 좌우로 두기의 무인석이 서 있고 그 안으로 다시 두기의 문인석이 서 있다. 무인석은 서역인을 닮았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얼굴에 보이는 미소와 머리를 묶은 띠, 뒤쪽 머리를 묶은 다음 흘려내게 한 모양이 마치 화랑도(花郞徒)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문인석은 좀 더 인자한 모습으로 머리에 관을 썼다. 관복 안으로 두 손을 받쳐 들고 있으며, 발은 겉으로 드러냈다. 문인석의 조각은 너무나 정교하다. 꽃무늬와 선까지 보이도록 아주 섬세하게 처리했다.
봉분과 그것을 둘러싼 석물들
이제 우리는 잘 가꾸어진 잔디를 밟으며 봉분 앞으로 다가간다. 타원형의 봉분을 둘레석(호석)이 감싸고 있고, 그 바깥으로 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난간석 앞으로는 네모난 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봉분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가 좌우를 감싸고 있다. 신라 왕릉은 평지에 있는 경우가 많으며, 소나무 숲이 좌청룡 우백호 구실을 하고 있다.
봉분은 밑둘레가 65m, 지름이 22.2m, 높이가 6.4.m인 원형봉토분이다. 봉분의 둘레에는 호석을 세웠고, 사방에 12개의 지신상을 조각해 놓았다. 정면으로부터 왼쪽으로 돌아가며 새겨진 동물을 보면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순이다. 뒷면 한가운데에 쥐가 있고 이어 소, 호랑이, 토끼, 용, 뱀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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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동물조각은 방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능을 지키는 호위무사 역할도 한다. 그래서 모든 동물들이 칼과 창 도끼 등 무기를 들고 있다. 이들 조각은 아주 정교하여 천 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동물 형상이 아주 분명하다. 햇볕이 잘 드는 정면의 조각들이 훨씬 더 선명해 보인다. 특히 칼을 든 양과 도끼를 든 토끼가 인상적이다.
12지신상이 새겨진 봉분 바깥으로 난간석을 둘렀는데 석주(돌기둥)만이 있고, 걸대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돌기둥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이곳에 걸대가 꽂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능의 사방에는 네 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능을 지키고 있다. 괘릉에는 네 마리 돌사자가 능 입구를 지키고 있는 데 비해, 이곳 흥덕왕릉은 봉분을 지키고 있다. 흥덕왕릉은 성덕왕릉, 괘릉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무덤제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능이다.
▲ 왕릉 한쪽에 있는 비석없는 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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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앞 왼쪽에 비석이 세워졌었는데 현재 비석은 사라지고 아래 받침돌인 귀부만 남아 있다. 머리 부분은 마모가 심해 조금은 두리뭉실해졌지만 몸통 부분의 갑주 조각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앞발과 뒷발의 조각도 분명해서 발가락까지 표현되어 있다.
흥덕왕의 아내 사랑이 앵무새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은 본명이 김수종(경휘)으로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고, 당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그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고 내치에 힘썼으나 자식이 없어 이후 왕위 다툼이 심화되는 빌미를 만들고 말았다.
▲ 돌사자가 능을 지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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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은 대단한 애처가였던 모양이다. 즉위한 해 12월에 부인인 장화부인이 죽자 아내를 사모하는 마음에 슬퍼하면서 즐거움을 멀리했다고 한다. 신하들이 재혼을 청했으나 왕이 말하기를 “외짝새(隻鳥)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서랴. 어찌 차마 무정하게 곧 재취를 할까 보냐”하고 신하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시녀들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출처: <삼국사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흥덕대왕과 앵무새’ 이야기다. 짝 잃은 암컷을 그리다 죽은 앵무새 이야기로, 왕은 그 앵무새를 위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제42대 흥덕대왕은 보력 2년 병오(826년)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했더니 새는 그림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제 짝을 얻을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는 알 수 없다.”
▲ 애처가였던 흥덕왕은 장회왕비와 함께 이곳 경릉에 묻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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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흥덕왕은 자신을 먼저 죽은 아내인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해주기를 유언했고, 안강 북쪽 비화괴(比火壞)에 묻혔다(출처: <삼국유사>). 그리고 “흥덕릉은 안강현 북쪽에 있으며 속칭 경릉(獍陵)이라 한다”고 <경주읍지>에 적혀 있다. 1977년 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가 이곳을 발굴했을 때 흥덕(興德)이라고 새긴 비 조각이 나와 흥덕왕릉임이 확인되었다.
원문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14048&CMPT_CD=TAG_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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