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1100년의 수도 산시성 (陝西省) 기행]진 황제의 빙마용 갱, 중국 4대 미인 양귀비를 만나다, 그러나 양귀비의 묘는 일본에도 있다.
문화재방송2022. 1. 6. 06:18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 뒤로 7층 높이의 다안타가 보인다
놀라운 중국 역사의 중심지 '산시성(陝西省)'
조선닷컴 미디어취재팀
수천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던 수천명의 병사들. 그들은 지금 누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빙마용(병마용, 兵馬俑)의 거대한 군대에서 시작한 놀라움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품은 화칭츠(화청지, 华清), 중국 5악 중 하나로 꼽히는 화산華山으로 이어진다. 중국 지도에서 한가운데 있는 산시성(섬서성, 陝西省). 빙마용만 보고 돌아오면 아쉽다. 산시성 구석구석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찾아보자.
▲사람과 비슷한 크기로 제작된 빙마용. 산시성의 대표 아이콘이다
세계 4대 역사 도시 중 하나인 시안
중국의 역사를 느끼기 위해 꼭 한 곳만 가야 한다면 시안서안, 西安으로 떠나야 한다.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은 오랫동안 중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도를 봐도 산시성은 중국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추흥팔수秋興八首'에서 '진중자고제왕주(진중은 예로부터 제왕들의 터였다네, 秦中自古帝王州')라고 읊었다. 중국 최초로 통일왕국을 이룩한 진나라뿐만이 아니다. 13개 왕조를 거치는 1,180여 년 동안 시안은 중국의 수도였다.
시안은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의 중심지였다. 중국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도 시안이고 중국 8개 불교 종파 중 6개 종파가 시작된 곳도 시안이다. 뿐만 아니라 시안은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점이기도 했다.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을 수출했고 이 길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아테네와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역사 도시로 꼽히는 시안은 한때 인구 100만명을 자랑하는 국제도시이기도 했으며 문화와 종교가 섞이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던 용광로였고 사상과 문화를 중국 곳곳으로 퍼트린 통로였다.
당나라 때 시안은 오래도록 평안하라는 뜻의 '장안長安'으로 불렸다가 수도를 비롯해 국가 경제·문화 중심이 동부 베이징으로 이동한 이후 서쪽이 편안하라는 의미에서 '시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왕조가 바뀌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방궁이나 대명궁같이 황제의 권력으로 건축이 가능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사라졌지만 친숙한 중국 여행의 상징인 빙마용(병마용, 兵馬俑)과 무용(舞俑, 무희 등을 형상화한 인형)을 만날 수 있는 유적지들이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준다.
▲시안 시내 중심에 위치한 중러우. 중러우 앞 광장은 만남의 장소이자 휴식의 장소이다
▲중국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시성 역사박물관. 이곳에서도 빙마용을 볼 수 있다
수천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 온 빙마용
시안 여행의 스타는 뭐니뭐니 해도 빙마용이다. 빙마용은 흙으로 빚어진 병사를 말하는 것으로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빙마용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수천년의 기나긴 침묵을 끝내고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 빙마용은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무려 6,000여 개가 넘는 사람과 말의 토우가 그곳에 매장되어 있었다.
빙마용은 실제 사람과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습이 없고 핏줄이나 근육 모양, 표정 등까지도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돼 있어 놀라움을 준다. 빙마용은 모두 동쪽을 향해 있는데, 궁전과 성의 문 위치도 동일하다.
시안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빙마용 갱은 3개의 전시관으로 이뤄져 있다. 1호 갱은 당시 농민이 발견한 것인데 규모가 제일 크다. 2호 갱에는 1,300개의 전사와 말이 있으며 다섯명의 병사는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빙마용들은 서 있는 자세지만 화살을 쏘는 사수도 있고 갑옷을 입은 장군도 있다. 사수는 마치 소총을 쏘듯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편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 활쏘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원래 중앙, 또는 오른쪽에 틀어 올리는 상투를 왼쪽으로 튼 것도 재미있다.
진시황 사후 3년째 되던 해, 진시황이 초나라를 짓밟았을 때 이에 대한 원한으로 항우가 빙마용 갱에 불을 질렀는데 석 달이 넘도록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고 하니 그 규모는 상상에 맡긴다. 이때 전리품으로 병마용 병사들이 갖고 있던 창과 방패를 가져가는 바람에 병마용 갱의 병사들은 모두 무장해제된 상태다.
▲양귀비의 사랑을 담은 서사시 <장한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연
▲시안의 성들은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무대, 화칭츠
빙마용 갱에서 1.5km 떨어진 곳에는 진시황릉이 있다. 진시황릉은 높이 79m, 동서 475m, 남북 384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으로 능을 만드는 데 70만명이 투입되었다고 전해진다. 막상 진시황릉 앞에 서면 무덤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산이라는 느낌이 든다. 역사서 <사기史記>를 보면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에 대해 '지상의 궁전을 본떠 만들었으며 대량의 수은을 사용해 황허(황하, 黄河)와 양쯔강(양자강, 揚子江)을 조성하고 매일 진시황의 관이 중국 전역을 주유할 수 있도록 설비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밖에서 보기에는 산이지만 무덤 안에는 하나의 세계가 들어 있던 것이다.
역대 황제들의 별장이었던 화칭츠도 시안 여행에서 결코 건너뛰면 안 된다. 화칭츠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로 유명해 역대 제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내부로 들어가면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하이탕탕(해당탕, 海棠湯)을 비롯해 롄화탕(연화탕, 蓮華湯), 타이즈탕(태자탕, 太子汤) 등 여러 유적들이 과거를 상상하게 만든다. 화칭츠 안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모이는 곳은 양귀비가 목욕을 막 끝내고 나오는 동상 앞. 비록 동상이지만 양귀비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이들로 북적인다.
저녁이 되면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다룬 바이쥐이(백거이, 白居易)의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를 현대판 무용으로 연출한 공연이 펼쳐진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애절한 음악과 함께 공연을 보다 보면 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
성벽과 종루, 다안타, 베이린박물관 등 역사의 보고
시안 시내에도 둘러볼 곳들이 많다. 시안 성벽과 다안타(대안탑, 大雁塔), 산시성박물관, 베이린(비림, 碑林)박물관 등 시안 시내를 돌아보는 데 적어도 며칠이 필요하다.
시안에서 해봐야 할 것 중 하나가 시안 성벽 위에서 자전거 타기다. 시안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시안 성벽은 14세기 명나라 초기 홍무 때 축성한 것으로, 중국 성벽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성벽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높이 12m에 두께는 12~18m, 전체 둘레 13.7km로 4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각 문마다 드나드는 이들이 달랐는데, 그중 남문은 황제만 다닐 수 있었다고.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 동문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이 들어오는 문, 서문은 실크로드를 향한 문이었다.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시안 중심에는 중러우(종루, 鐘樓)와 구러우(고루, 鼓楼)가 있다. 중러우와 구러우는 명나라 때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과거에는 시간을 알려 주는 관직에 있던 이만 오를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중러우와 구러우 사이에 있는 광장은 젊은이와 여행자들에게 만남의 광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밤에는 시안 시내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으며 근처에는 이슬람 거리가 있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험준하기로 널리 알려진 화산. 아슬아슬한 절벽이 이어져 있다
중국 5악 중 하나인 화산
시안에서 동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시엔양(함양, 咸陽)에는 진시황릉과 분위기가 다른 시엔양릉이 자리하고 있다. 시엔양은 진시황이 다스린 진나라의 황궁이 위치한 곳으로 관중평야에서도 웨이하(위하, 渭河)의 하류 지역으로 리산(여산, 驪山)을 끼고 있는 풍수지리가 좋은 땅이다.
시엔양릉은 한무제의 아버지인 한경제의 무덤으로 함양국제공항과 시안 사이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발견되었다. 시엔양릉에서 출품된 도자기 형태의 인형들은 빙마용의 그것과는 다르다. 50~60cm의 자그마한 크기에 팔도 없이 앙상한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쯔진청(자금성, 紫禁城)과 경복궁을 크기만으로 비교할 수 없듯이 시엔양릉의 도용 역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시안에서 북쪽으로 120km 거리에 있는 화산을 찾아보자. 중국 오악 중 서악에 속하는 화산은 기암괴석이 많아 무척 험하다. 평지라고는 거의 없고 아슬아슬한 절벽이 이어져 있다. 화산은 중국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의 작품에 나오는 화산파의 배경지로 중국 무협지 주인공처럼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화산은 옥녀봉을 비롯해 5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 봉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travel info Shanxi
Airline 대한항공과 에어차이나 등 여러 항공사에서 인천-시안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5분.
FOOD 후이족회족, 回族 거리에 가면 두건을 두른 후이족들이 곳곳에서 특색 있는 길거리 음식과 국수를 팔고 있다. 양꼬치와 해산물 꼬치를 비롯해 다양한 먹거리를 만날 수 있다.
SPOTS 진시황릉과 시엔양릉 외에도 산시성 곳곳에는 수많은 황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는 5대 황제인 한무제의 묘 '무릉'이 있다. 한무제는 실크로드 개척자로, 무릉 근처에는 한무제 때 장수 곽거병의 묘도 있다. 또 시안에서 80km 떨어진 곳에는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건릉'도 자리하고 있어, 중국 역대 황제들의 흔적을 밟고 싶은 이라면 능을 테마로 산시성을 여행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museum 역사에 관심많은 당신에게 산시성 역사박물관은 중국의 3,000년 고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36만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통 궁전양식의 외관에 3개의 전시실이 자리했다.
옛 중국의 도서관 시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박물관 중 하나가 베이린박물관이다. 베이린박물관은 시안에서 출토된 비문을 모아 놓은 박물관으로 유명 서예가들이 새긴 수천개의 비석이 나무숲처럼 빼곡히 모여 있다. 비석은 종이가 없던 시절부터 기록하기 좋은 재료였던 것을 생각하면, 베이린박물관은 옛 중국의 도서관이나 마찬가지다. 베이린박물관 주변에는 시안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문서거리가 있다. 서책과 문방사우를 파는 시안의 명물거리다.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채지형 사진 Travie writer 채지형·트래비CB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 서울지국www.visitchina.or.kr
시안(西安)에서 두 번째 만난 인물은 중국의 4대 미인이자 최고의 요부,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일컬어지는 양귀비이다. 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한 이래 천 년쯤 지난 후 시안은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이 되었는데 6대 황제 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였던 절세미인 양옥환(楊玉環)을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후궁 귀비(貴妃)로 삼은 후 그녀를 향한 총애가 남달랐다.
▲시안 화청지(華淸池)에 세워진 양귀비 동상, 통통하다던 얘기와는 달리 칠등신 서양식 미녀를 세워 놓았다.
그동안 칭송을 받으며 잘 해오던 정치를 멀리하고 여색에 빠진 채 그녀의 혈육과 양아들 등에게 지나친 권세가 집중되니 나라는 도탄에 빠지고 서로 간의 권력다툼으로 한쪽이 군사반란을 일으키니 황제와 함께 몽진 중에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은 목을 매 죽고만 여인이다.
양옥환(楊玉環)
719년 당 현종(685~762) 집권 초기, 쓰촨 성에서 태어났으며 하급관리를 지내던 부친 슬하에 아들 없이 세 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부친은 일찍 죽어 숙부 집에서 자라면서 나름대로 교육도 잘 받았으며 특히 기생 출신 하녀에게서 가무도 배웠다고 한다. 양옥환은 친척 양신명의 집 연회에 자주 초대되었는데 그 연회에서 황실 일족들과 친하게 되었으며 그러던 중 현종의 제18황자 李瑁(이모)와 혼인하게 되어 현종의 며느리가 되었다.
당(唐) 현종(玄宗)
양옥환의 시아버지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은 원래 3남으로 적장자가 아니어서 황태자가 되거나 황제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현종의 할아버지인 3대 황제 고종과 할머니인 측천무후 이후 나약한 황제들의 즉위와 폐위, 복위와 살해가 반복되는 등 혼란한 정국을 해결한 공로로 큰 형의 양보를 받아 황태자가 되었다가 6대 황제로 즉위한 사람이다.
즉, 현종에게는 할머니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사실은 그 이전에 증조할아버지인 2대 황제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황태자와 눈이 맞았고 그 황태자가 황제(고종)로 즉위하자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와 다른 비빈들을 모두 처치하고 황후가 된 여인이다. 즉 아버지(태종)의 후궁에서 아들(고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까지 되어 훗날 근친상간의 시비에 말려들게 된 사연이다.
이렇게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남편 고종이 병약해지자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자기 아들을 중종으로 즉위시켰다가 폐위시킨 후 다른 아들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지만 역시 폐위시킨 후 마침내는 스스로가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다가 모반을 일으킨 대신들과 장군들의 강요로 다시 중종을 복위시킨 후 물러났다가 측천무후는 사망하였지만, 이번에는 중종의 황후 위 씨가 제2의 여황제(女皇帝)를 꿈꾸면서 무능한 남편 중종(현종의 큰아버지)을 독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자 현종이 군사를 일으켜 큰어머니인 위 황후 일파와 아직도 남아서 권세를 부리던 할머니 측천무후 일파를 모두 소탕하고 물러나 있던 아버지 예종을 다시 복위시킨다. 그러자 큰형이 태자 자리를 현종에게 양보하였으며 2년 후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이 즉위하여 당나라의 6대 황제가 된 것이다.
개원의 치(開元의 治)
황제에 오른 현종은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유능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민생 위주의 정치를 베풀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이룩했던 태평성대에 버금가는 치세로 후세사람들은 당시의 연호를 따서 '개원의 치(開元의 治)'라고 불렀으니 현종은 당나라의 번영과 강성함을 이끌었으나 이후 절세미인, 천하의 요부 양귀비를 만나 몰락과 쇠퇴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양옥환(楊玉環)과의 만남
태평성대와 훌륭한 치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자 현종은 이내 거만하게 된다. 특히 유능한 관리들을 적재적소에 쓰던 그가 어느 때부터인가 아첨과 아부에 귀를 기울이고 직언을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아첨꾼 승상 이임보는 무려 19년간이나 현종을 따돌리고 정치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지만, 현종은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보고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총애하는 무혜비(사후 황후로 추존)가 사망하고 현종은 실의에 빠져 무기력하게 되자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이를 눈치채고 현종과 양옥환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는데, 양옥환 부부가 화청지 온천으로 나들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된 환관 고력사는 현종을 화청지로 보내 양옥환을 만나게 한다.
현종은 양옥환의 출중한 미모에 반하고 춤과 노래에 흠뻑 빠져 양옥환이 며느리임에도 마음에 들어 하며 이를 어쩌면 좋을지 환관 고력사에게 속을 털어놓는다. 황제의 마음을 알게 된 고력사는 다시 양옥환을 만나 넌지시 그 속을 떠보게 되는데 태자도 아닌 먼 황자의 아내보다는 황제의 애첩을 택하기로 하였는지 이날 이후 양옥환은 현종의 후궁이 된다.
도교(道敎)로의 입문
그러나 세상에는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며 민심이 살아 있는 법, 아무리 황제라 해도 며느리를 바로 후궁으로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측천무후의 경우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아들 고종의 후궁이 되어 근친상간의 시비가 붙은 것을 알지 않는가? 이럴 때는 또 영악한 간신배들이 실력을 발휘하는 법, 그들은 양옥환을 바로 황궁으로 데려오지 못하고 도교의 사원으로 출가시켜 먼저 남편과 떼어 놓은 후 궁궐에 도교 사원을 지어 양옥환을 이곳의 여관(女冠)으로 불러들이는 수순을 밟는다.
당시 도교에 입문하면 그 이전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은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데 아마도 이를 노려 며느리의 신분 탈색을 위한 과정이 아니었던가 싶다. 일설에 현종은 충(忠)과 효(孝)를 강조하면서 '나라를 위하여는 충성을 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니 좋은 것은 부모에게 바쳐야 하지 않느냐?'는 시(詩)를 지어 아들에게 좋은 것(양옥환)은 아버지 현종에게 바치라는 암시도 했다고 한다.
양옥환, 귀비(貴妃)가 되다
이렇게 양옥환과 현종이 만났을 때가 각각 22세, 57세였다. 이후 현종은 양귀비의 품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양옥환의 자매들도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고 사촌오빠 양소에게는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그는 간신 이임보나 환관 고력지와 결탁하여 숱한 관직을 독점하고 세도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게 한구석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는 61세의 현종은 27세의 양옥환을 귀비에 봉하게 되는데 이때 황후가 공석이었으므로 양귀비는 사실상 황후의 자리에 앉은 기쁨을 누리게 되며 어느새 그의 사촌오빠 양국충은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라 양귀비 세력이 대당(大唐)제국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양귀비를 내친 현종, 다시 화해하다
양귀비에게는 세 언니가 있었는데 모두 국부인이라는 높은 지위를 하사받았다. 그런데 그중 셋째 언니 괵국부인 양옥쟁의 미모 또한 뛰어나서 현종이 입궁시키라고 하자 양귀비는 질투심으로 이를 거절하고 언니의 입궁을 방해하다가 결국 내침을 당하게 된다. 궁에서 내쳐진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에 머물었으며, 사촌오빠 양국충과 환관 고력사가 머리를 맞대고 양귀비의 환궁을 모의하여 현종과 양귀비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화청지에서 다시 만나게 하니 두 사람은 함께 목욕하면서 결국 화해하여 환궁하였다고 한다.
▲온천인 화청지(華淸池)에 남아있는 귀비지(貴妃池), 현종이 하사한 양귀비 목욕탕이다.
▲황제 목욕탕인 연화 탕(蓮華湯), 황제와 妃는 따로 목욕하는 것이 원칙인 듯하다.
▲씻기를 마친 양귀비가 올라 현종을 기다리며 지긋이 내려다보던 누각이라고 한다.
ㅇ안록산(安祿山), 안사(安史)의 난(亂)
이렇게 현종은 양귀비의 치마폭에 싸여 정사를 멀리하고 조정은 양귀비와 양국충 일가의 전횡이 극에 달하였으며 환관 고력사와 함께 환관 정치, 외척정치로 나라를 좌지우지할 때, 변방의 절도사로 당시 군사의 1/3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안녹산이 황궁에 들어와 현종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 이 자리에서 안녹산을 처음 본 양귀비는 당당한 그에게 호감을 느껴 자주 불렀고 친해지면서 마침내 안녹산을 양아들로 삼게 되니 십 년 이상 나이 먹은 건장한 무장(武將)이 아들이라며 귀비의 처소를 수시로 들락거리게 되었다.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은 당시 조정 권력을 모두 손에 쥐고 있었으나 변방의 절도사로 군사력을 가진 안녹산이 나타나 양귀비와 친밀해지자 그를 잘라내려고 수차례 모함하고 고변하였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막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권력은 양국충에게서 요지부동으로 떠나지 않자 안녹산은 부하 사사명과 함께 '간신 양국충을 토벌하자'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하니 바로 안사의 난(安史之亂)이다.
이후 안녹산은 그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안경서는 사사명이 죽인다. 그러나 사사명도 아들 사사의에게 살해당한 후 사사의 마저 자결함으로써 9년간 끌어왔던 안사의 난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과장에서 당나라는 급격히 쇠약해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장안(長安)을 버린 몽진 길에서 양귀비(楊貴妃) 자결하다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의 군대가 수도 장안으로 다가오자 양국충이 현종에게 몽진(피난)을 건의하여 쓰촨 성으로 떠나게 되는데 일설에는 백성들 몰래 도망가듯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를 호위하고 피난을 떠나던 군사들 간에 이 모든 환난은 양국충과 양귀비가 원흉이라며 이 둘을 처치하고 나서야 가겠다는 모반이 일어나고 환관 고력지와 대신들도 이에 동조하니 현종도 어쩔 수 없이 양국충은 끌어내려져 죽임을 당하였으며 군사들은 양귀비도 내어놓으라고 하지만 현종은 몇 번이나 이를 변명하며 살리려고 하였다.
그래도 군인들은 수용하지 않고 소요는 진정되지 않았으며 환관 고력지도 역부족이라고 진언하자 마침내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하여 근처 나무에 목을 매 죽으니 마침내 천하의 요부 양귀비가 죽었다고 병사들은 만세를 부르며 그제야 몽진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반란을 맞아 수도 장안을 버리고 몽진을 떠난 현종은 피난길에 양국충과 양귀비를 버려 죽게 하였으며, 마침내는 대신들의 재촉으로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다가 장안으로 돌아와서도 쓸쓸한 나날은 보내다가 78세에 승하하였다.
양귀비와 당 현종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
당 현종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 그들의 사랑을 주제로 장편 서사시를 지었으니 바로 장한가(長恨歌)이다. 둘이 만나 사랑하고 귀비가 되어 총애를 받고 지내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과정과 그 후 황제 현종의 쓸쓸한 나날들을 그리고 있으며 현종이 사후에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는 이야기를 120구 840자의 서사시로 지은 것이다.
둘의 사랑 이야기를 애절하게 그렸는데 특히 마지막 구절을 보면 [上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라고 하면서 사랑을 잘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화청지의 장생전(長生殿).
물론 이때 백거이는 35세로 시안지방에 내려온 관리였으며 불과 얼마 전 황제를 거론할 수 없으니 한 무제의 고사를 바탕으로 서사시를 썼으나 이는 누가 보아도 현종과 양귀비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예모 감독이 이를 현대화하고 재해석하여 공연물로 만든 작품이 지금 시안 화청지에서는 연중 공연되고 있다. 다만 야외공연이므로 겨울철에는 공연하지 않는다.
양귀비를 만나고 나서
140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한 양귀비. 꽃다운 22세에 시아버지 현종을 만나 남편을 버리고(?) 그의 후궁이 된 후 27세에는 귀비가 되어 황후 못지않은 권세를 부리다가 38세의 나이에 피난길에서 나라를 망친 원흉으로 지목되어 목을 매 자결해야 했던 양귀비. 훗날 사람들은 그녀를 일컬어 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해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무엇을 손에 쥐고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
중국의 3대 미녀, 4대 미녀를 논할 때 대부분이 하늘거리는 몸매로 묘사하지만, 양귀비만큼은 살이 통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쳇말로 쭉쭉은 아니고 살집이 적당히 오른 빵빵 스타일이 아니었나 싶다. 심지어 키 155cm에 몸무게 65kg의 건강한 체형이었다고 근거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튼 자타가 공인하는 건강미녀 양귀비는 화려하게 불타올라 일국의 황제와 사랑을 나누고는 그의 눈물 속에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의 대표적 사례인가.
▲당나라 시대의 여인상, 시안박물관에 전시된 인형을 보더라도 대부분 통통한 몸집임을 알 수 있다.
시아버지의 유혹을 뿌리치고, 또 스스로 황제의 여자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고 황자(皇子)의 아내로 아들 낳고 딸 낳고 오순도순 살았다면 비록 황후에 준하는 자리에 올라가지는 못했겠지만, 한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권세는 없었겠지만 아마도 행복하게 잘 지내지 않았을까? 심지어 전남편 18황자(十八皇子) 수왕(壽王) 이모(李瑁)와의 사이에 아이도 하나 낳았다고 하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그 아이 친할 부인이 되다니? 참으로 권세 앞에는 천륜도 의미가 없는가보다. 그런 자리 옮김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건 또 무언가.
진실한 삶에 대한 자세와 진심 어린 사랑에 대한 무한한 의심과 이해 못 할 스토리에 아무리 애를 써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종과 양귀비가 이렇게 된 것은 사실은 자기 친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를 황태자에 올리려고 현종 앞에 자주 보여주게 한 그의 생모 무혜비 탓이라고 하니 결국 그 아들 이모(李瑁)는 황태자에 오르지도 못하고 부인만 빼앗기고만 기구한 운명이 된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전남편은 멀리 전쟁터로 내보내거나 역모에 걸어서 죽게 하는 등 비참해진다는데 그 뒷이야기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일약 황후에 버금가는 신분상승에 성공한 듯 보이던 양귀비도 결국은 십 년 남짓한 세월 만에 피난길에 자살해서 죽어야 하는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의 교훈을 남겨주었으니 후세인들은 이를 눈여겨볼 일이다.
지난달 일본 오모떼센케 신년다회에 참석하고 교토의 유명사찰들을 참배하였다. 마지막으로 교토 국립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교토 국립박물관에서는 교토 용천사에 전승되는 유물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일본의 대본산들은 일반인들이 참배할수 있는 곳은 몇 군데 되지 않고 대부분 통제구역이다. 소중한 문화재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찰에 전승되는 문화재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임제종 묘심사는 12000점의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으며 대부분 사찰들이 수천점의 문화재를 소장한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교토 용천사는 경내에 16분의 천황릉이 있는 황실전용 사찰이다.
용천사 유물만을 가지고. 열리는 교토박물관 특별전을 찬찬히 보다가 사진액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유물은 소중해서 경내밖으로 반출이 안되어 사진으로만 전시하고 있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양귀비관음이다.용천사에서는 어떻게 양귀비관음을 모시게 되었을까?
역사의 미스테리가 시작된다.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이다.서시.왕소군.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사대미인으로 꼽힌다.사천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집에서 자란다.이후 양귀비는 미모를 인정받아 당현종의 아들 수왕의 비로 궁에 들어간다.
수왕의 아내가 된지 6년이 지나 22세가 되던 어느날 현종이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다.현종은 환관 고력사를 시켜 아들에게는 위씨성을 가진 미인과 재혼하도록 하고 양옥환을 귀비로 책봉하여 궁으로 들어오게 한다.그때 현종의 나이는 56세였다.
양귀비는 가무에 능하고 애교가 있고 아첨에 능하였다.현종이 쓴 예상우의곡을 받은 양귀비가 한번 보고 통달했을뿐 아니라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듯 하였다.현종은 보물을 얻은듯 기뻐하였다.
당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채 지냈기 때문에 양귀비는 황후와 같은 권력을 누렸다.양귀비의 가족들에게도 벼슬이 내려졌다.오빠 양쇠는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우승상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였다.당현종이 주색에 빠지고 정치는 부패해지고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졌다.마침내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
당현종은 촉으로 피난을 가던중 마외역에 이르러 군사들이 정변을 일으켜 양국충을 죽이고 나라를 파국으로 이끈 양귀비에게 죽음을 내리도록 하였다.현종은 고력사를 시켜 양귀비에게 자결 하도록 하였다.
양귀비는 역관 불당앞의 배나무에서 비단으로 목메어 죽었다.여기까지가 역사의 기록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현종의 명을 받은 고력사는 현종의 마음을. 헤아렸을때 양귀비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하였다.그래서 양귀비 비슷한 궁녀를 대신 죽이고 양귀비는 변복을 하고 상해를 거쳐 무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 간다.그때 양국충의 아들 며느리와 손자 양환도 양귀비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한다.
1963년 일본에서는 한 여자가 집안의 족보를 들고나와 자기는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일본의 유명배우 야마구찌 모모에도 자신이 양귀비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당현종은 안.사의 난을 평정한후 방사를 파견하여 양귀비를 찾도록 하였다.일본 츠마에서 양귀비를 찾은 방사는 현종의 서찰과 불상 두점을 주고 돌아 가기를 청하였다.양귀비는 옥비녀를 뽑아 건네주고 자기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양귀비는 일본에 와서 30년을 더살고 68세에 죽었다.일본에는 양귀비의 유물과 사당 무덤등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양귀비의 모습을 본따서 관세음보살을 만들고 양귀비 관음으로 부르게 되었다.양귀비관음을 참배하면 예쁘고 귀여운 아기를 낳을수 있고 미인이 된다는 소문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교토 천용사에는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를 장시로 읊은 백락천의 장한가가 화첩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