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황해도 강령에서 전승되던 탈놀이. 한일합병과 더불어 해주감영 소속인 교방의 가무인들이 해산되고 통인청의 탈꾼도 해산되자 일부가 강령에 모여서 놀았다고 전해진다. 해마다 5월 6~8일 사이 3일 동안 해주감영에서 각도의 탈춤패들이 모여 경연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단오가 지난 10일 후면 뒤풀이라 하여 다시 놀이를 벌였고 놀이가 끝나면 사용했던 탈을 모두 태워버렸다 한다.
놀이는 모두 7마당[科場]으로 되어 있다. 첫째마당은 '사자춤'으로 백사자 2마리가 등장하여 춤을 추면 원숭이가 등장한다. 둘째마당은 '말뚝이춤'으로 말뚝이 2명이 나타나 서로 용감함을 자랑하며 춤춘다. 셋째마당은 '먹중춤'으로 칡베 장삼을 입은 첫 먹중이 장내를 한바퀴 돌며 굿거리 타령·도들이타령으로 춤추고, 둘째 먹중은 첫 먹중을 쫓아내고 굿거리장단 춤을 춘다.
넷째마당은 '상좌춤'인데 염불장단에 맞춰 상좌가 춤춘다. 다섯째마당은 '양반'·'말뚝이춤'으로 양반 2명과 재물대감·도령 등이 등장하여 서로 잘난체하며 노는데 말뚝이가 나타나 양반을 조롱하는 재담을 펼친다. 여섯째마당은 '영감'·'할미춤'으로 할미와 영감, 삼개집 주모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데 할미가 자살하자 할미의 넋을 달래려고 진오귀굿을 한다. 일곱째마당은 '노승춤'으로 팔먹중춤·노승춤·취발이춤으로 나뉜다. 노승과 취발이가 소무(小巫)를 사이에 두고 싸우다가 소무는 취발이와 음란한 행위를 한 뒤 아들을 낳는다.
이 탈놀이는 황해탈춤형의 하나로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탈춤에 쓰이는 탈은 봉산탈춤의 귀면형(鬼面型) 목탈과는 달리 인물형(人物型)이다. 옷은 회색 칡베의 장삼에 홍태기를 달고 장삼자락이 땅에 끌리도록 긴 것도 특징이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기·예능보유자로 김실자(둘째양반·마부, 2015 해제), 김정순(상좌·용산삼개집), 송용태(취발이)가 있다.
황해도 강령탈춤을 효창공원에서 공연하는 모습
여전히 튼튼한 치아....3500년 만에 얼굴 드러낸 이집트 파라오 미라
[사이언스샷]
CT영상으로 천 속에 숨겨진 두개골과 골격 확인
이집트 파라오의 미라가 첨단 의학 기술의 도움으로 3500년 만에 처음으로 베일을 벗었다. 실물은 건드리지 않고 디지털 기술로 내부가 드러난 것이다.
이집트 카이로대의 사하르 살림 교수 연구진은 28일(현지 시각) “이집트 아멘호텝 1세 파라오의 미라가 처음으로 내부의 두개골과 골격을 드러냈다”고 국제 학술지 ‘첨단 의학(Frontiers in Medicine)’에 밝혔다.
아멘호텝 1세는 기원 전 1525~1504년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1881년 프랑스 학자가 발굴했다. 파라오의 미라는 천으로 완벽하게 감싼 상태로 얼굴 가면을 쓴 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석관도 발굴 이후 밀봉된 상태로 남았다.
카이로대 연구진은 인체를 수백 장의 고해상도 평면 X선 영상으로 분할하는 컴퓨터 단층촬영(CT) 기술로 미라를 감싼 천을 디지털로 풀고 파라오의 골격과 연조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파라오는 좁은 턱과 작은 코, 곱슬머리에 윗니가 약간 튀어나온 모습이 아버지인 아흐모세 1세를 닮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죽은 지 3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치아가 튼튼한 상태였다.
살림 교수는 “이집트 신왕국(기원전 16세기부터 기원전 11세기)의 미라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잘 보존돼 있어 일종의 타임캡슐로 간주된다”며 “고대 왕과 왕비는 어떻게 생겼는지, 건강 상태나 질병, 미라 기술과 장례 도구의 제작법 등을 알려줄 수 있다”고 밝혔다.
아멘호텝 1세의 미라는 이전에도 X선으로 조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찍은 고해상도 CT 영상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뼈 구조로 파라오의 사망 당시 나이가 35세이며 키가 169㎝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연구진은 또 파라오를 둘러싼 오랜 미스터리도 풀었다. 앞서 X선 조사에서 아멘호텝 1세는 매장되고 300년이 지나 다시 방부 처리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상형문자 기록에는 무덤이 도굴되면서 미라를 다시 손본 것으로 나타났다.
살림 교수는 당시 성직자가 방부 처리를 다시 하면서 파라오의 시신과 붕대에 함께 있던 보석을 몰래 빼돌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CT 영상은 성직자가 충성스럽게 방부 처리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아멘호텝 1세의 미라에 보석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파라오는 자신을 감싼 천에 호부(護符) 장식 30개를 갖고 있었으며 독특한 금띠도 두르고 있었다.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는 교역로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과 함께 백두대간을 넘는 4대령 중 하나인 대관령은 오늘날 영동과 영서지방을 나누며 강원도 평창과 강릉의 경계에 솟아 있다. 지금은 잘 정비된 도로와 터널이 있어 쉽게 대관령을 지날 수 있지만, 과거 대관령은 ‘아흔아홉 굽이를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으로 불릴 만큼 고개가 험했다. ‘아흔아홉 굽이’라는 명칭에도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곶감 100개를 챙겨 떠나 힘들 때마다 곶감 한 개씩을 빼먹었는데, 대관령을 넘고 보니 곶감이 딱 한 개 남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 대관령을 넘는 고갯길이 명승 대관령 옛길이다. 영동 사람들에게는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동해에서 잡힌 해산물은 대관령을 넘어 영서지방으로 퍼져 나갔고, 영서지방에서 생산된 토산품 역시 대관령을 거쳐 강릉의 구산장과 연곡장 등으로 넘어갔다.
큰 뜻을 품고 한양으로 향했던 수많은 선비와 등짐 들쳐 멘 보부상의 발자국 역시 대관령 옛길에 남았다. 백두대간의 뿌리인 태백 산맥 줄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대관령 옛길은 주변 계곡과 옛길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2010년 명승으로 지정됐다.
수묵화 같은 풍경에서 찾는 옛이야기
대관령 옛길은 고개 중간에 자리한 반정(半程)에서 내려가는 길과 대관령박물관이나 부동(釜洞, 가마골)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반정은 ‘길의 절반 되는 위치’라는 뜻으로 ‘반쟁이’라고도 불린다. 도중에는 원울이재(員泣峴, 원울현)가 있는데, 이곳은 신임 강릉 부사가 부임할 때 고갯길이 험해서 울고, 임기가 끝나서 다시 고개를 넘어갈 때는 강릉의 인정에 감복해서 울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대관령 옛길 깊은 산속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가득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고,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하는 금강소나무 숲이 빽빽하게 펼쳐 진다. 한겨울 눈이 내릴 때는 수묵화처럼 은은한 풍경이 주변을 가득 채운다. 반정에서 만나는 강릉 시내 모습과 동해의 풍경은 묵묵히 걸어온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길이 험준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대관령은 겨울이면 험난한 고개를 지나다 목숨을 잃는 여행객이 많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릉부의 향리 이병화가 반정에 주막을 설치했다. 주막에서 쉬거나 하룻밤을 묵는 여행객은 이후 그를 기리는 ‘기관 이병화 유혜불망비(記官 李秉華 遺惠不忘碑)’를 근처에 세웠다.
대관령 산신과 함께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국사서낭(성황)을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사(大關嶺 國師城隍祠)도 정상에 자리했다. 지나온 시간만큼 대관령 옛길은 발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경과 얽힌 흥미 로운 옛이야기가 가득하다. 선조들의 발자취가 간직된 대관령 옛길은 빠르게 바뀌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느림과 비움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백두대간의 뿌리인 태백산맥 줄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대관령 옛길은 주변 계곡과 옛길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2010년 명승으로 지정됐다.
정리. 편집실 사진. Shutterstock
발굴유물로 확인한 『삼국유사』 속 이야기
사지(寺址)란 법등이 끊긴 사찰의 터를 의미한다. 석탑이나 석등, 사적비나 고승비, 승탑 등 유형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지표면 아래 또는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 문화재 내부에는 사찰이 운영되던 당시 사용하던 수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미륵사는 아름다운 풍경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사진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삼국유사(三國 遺事)』 무왕조(武王條)에는 ‘왕위에 오른 무왕이 왕후(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을 친견하자, 왕후가 그곳에 큰 절 짓기를 청하였고, 이에 왕은 그곳에 전(殿)과 탑(塔)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삼원가람 배치와도 일치 하고,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를 통해 석탑 건립연대가 639년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무왕의 재위 기간인 600~641년에도 부합하는 결과 이다.
‘금제사리봉안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졌으며,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봉안기가 발견되면서 『삼국유사』를 통해 미륵사 창건설화만 알려졌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성 연대와 건립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도 금동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靑銅合) 등이 함께 출토되어 보물로 지정됐다. ‘금동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 주목받고 있다.
사지 속에 잠들어 있는 기나긴 역사
『삼국유사』에는 ‘절이 별처럼 많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라는 신라시대 경주를 그린 기록이 있다. 황룡사는 미륵사보다 70년 앞서 창건된 신라의 국가대표급 사찰이다. 진흥왕 14년(553) 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전을 짓다가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계획을 변경해 건립했다. 569년에 담장을 둘러 사역을 완성했고, 진흥왕 35년(574)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안치했으며, 10년 뒤 진평왕 5년(584)에는 금당(金堂)이 조성됐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5년 구층목탑을 세웠다.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효소왕 7년(698)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했으나, 고종 25년(1238)에 몽골군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했다.
1964년 목탑의 가운데 기둥을 받치던 심초석 상부의 사리공 안에 있던 사리함이 도굴되었다가 1966년 수습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었다. 사리내함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의 건립부터 중수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금동찰주본기(金銅刹柱本記)」가 적혀 있었다.
이는 고대 탑지(塔誌)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기록문화유산인데 처음에는 녹이 두껍게 덮여 몇 글자만 확인할 수 있었 으나, 1972년 복원작업을 통해 명문을 거의 판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편의 황룡사구층목탑 이야기와도 거의 유사해서 이 찰주본기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1978년 7월 28일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心礎石, 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 에서 사리기(舍利器)로 추정되는 중국제 백자호(白磁壺· 달 모양의 백색 항아리)와 청동거울, 금동 귀고리, 유리구슬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이들 유물은 신라인이 실생활에서 직접 사용하던 것이어서 신라문화사 연구의 중요한 1차 자료가 되었다.
현재 사지는 신라왕경복원정비사업 내 8개 단위사업 중 ‘황룡사 복원사업’의 대상으로 선정되어 복원과 정비를 위한 심화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016년 사지 서편에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건립되어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전시, 황룡사 3D 입체 영상 및 신라 역사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황룡사지 발굴조사와 정비공사 당시 출토된 유물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으며 건축 유구와 관련된 석조물은 현장에 일괄 전시되어 있다.
잊고 지냈던 절터의 가치
사지 조사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481년에 편찬돼 1530년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76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불우(佛宇)’와 ‘사찰(寺刹)’ 항목을 두어 각 지방에서 운영되고 있던 사찰과 사찰의 터를 기록했다. 18세기 후반에는 『범우고(梵宇攷)』, 『가람고(伽藍考)』와 같이 불교사원을 중점적으로 다룬 문헌도 편찬되었다. 이들 고문헌은 이 땅에서 존폐를 거듭했던 수많은 사찰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0세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고적 조사가 행해졌는데 옛 문헌에 기록된 사찰 중 많은 수가 폐사돼 그 터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지만을 대상으로 한 전국 단위의 문화재 조사는 대한불교조계종단의 노력과 관심 아래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1997~1998년에 발간된 『불교사원지(佛敎寺院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조계종단의 사지 보존·관리에 대한 관심과 요구로 2009년 문화재보호기금법이 신설되었다.
이 법을 근거로 대한불교 조계종단과 문화재청이 힘을 모아 전국 사지의 전수조사를 계획했으며, 2010년부터 문화재보호기금법 최초 사업으로 사지조사사업이 시작되었다. 사지 현황 파악은 2021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북한 지역을 제외하고도 5,700여 곳의 사지가 알려지게 되었다.
매년 사지 현황조사를 통해 자료를 구축하고, 정리할수록 대다수의 사지는 이제 ‘터’조차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2000년대 이래 중장비를 사용하여 대지 정비를 하는 것이 보편화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럼 우리가 잊고 지낸 그 많은 절터는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지금부터라도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채 방치된 절터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합리적 처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두가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 사지 안에는 우리 민족의 현재를 만든 역사와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 임석규(불교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한국계 미국인 사상 최초로 '미스 아메리카' 우승
이동원 기자 입력 2021. 12. 19. 08:06 수정 2021. 12. 19. 08:10(서울=뉴스1) 이동원 기자 = 한국계 미국 여성이 사상 최초로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됐다.
화제의 주인공은 에마 브로일스(19). 그는 16일(현지시간) 코네티컷주 언캐스빌의 모히건 선 아레나에서 열린 미스 아메리카 선발 대회에서 우승했다.
외신들은 브로일스가 미스 아메리카 대회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전했다. 최초의 '미스 알래스카' 출신 우승자이기도 하다. 그는 애리조나주립대 바렛 아너스 칼리지에서 생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다.
브로일스는 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대회가 최근 들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내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우승했다는 사실이 이 조직이 보여준 변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일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회기간 인터뷰에서 “나는 결점이 있다. 나는 ADHD(주의력 결핍)와 강박증의 일종인 피부병을 앓고 있다. 그러나 이와 씨름했고, 이로 인해 더 강하고 나은 사람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기간 기숙사에서 격리되었을 때 ADHD와 피부병 진단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유력 언론인 워싱턴포스트(WP)는 그가 ADHD와 피부병을 용기 있게 고백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그는 100회를 기념해 특별 제작한 왕관과 10만 달러(약 1억186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100회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에마 브로일스가 우승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박형기 기자 100회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에마 브로일스가 우승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이동원 기자 100회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에마 브로일스가 우승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이동원 기자 100회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에마 브로일스가 우승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이동원 기자newskij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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