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작 영화 미몽 |
현존하는 한국 영화중 가장 오래된 영화는 나운규의 <아리랑>이 아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한국 영화 역사가 시작된 일제 식민지 상태에서 한국 영화의 정신적 이념, 즉 민족주의를 최초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나, 필름이 존재하지 않아, 그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간접적인 연구만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가장 오래된 우리 영화는 1936년에 양주남이 만든 <미몽(迷夢,sweet dream)>인데, 2005년 중국 전영자료관에서 처음으로 발견돼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미몽>은 그보다 1년 먼저 나온 이명우의 <춘향전>과 나운규의 <아리랑 3연작> 등에 이어 발성영화(유성영화) 기준으로는 6번째 작품이다.
'미몽'은 그 동안 문서로만 그 존재가 알려져 왔으나 이번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현존하는 한국 극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기록되게 됐다.
양주남 감독의 데뷔작인 '미몽'은 월북한 당대 최고 여배우 문예봉의 주연작.
문예봉이 영화배우로 데뷔한 다음해인 1936년 출연한 작품으로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유성영화가 도입된 뒤 6번째로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일명 '죽음의 자장가'로 불리는 '미몽'은 가정 주부의 자유 연애기다. 일제 강점기라는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영화 내용은 한마디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애순(문예봉 분)은 여염집 부인이지만 허영이 심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 예순은 남편과 싸우고 데파트(백화점)에서 옷을 사는데, 지갑을 놓고 나온다. 예순은 지갑을 찾아준 사업가와 불륜에 빠져 딸아이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호텔에서 같이 지내기도 한다.
그 내연의 남자가 사업가가 아니라 돈도 없는 궁색한 범죄자임을 알게 되자 경찰에 신고한 예순은, 어느 날 무용 공연을 보다 남자 무용수에 반해 적극적으로 애정공세를 펼친다. 그를 쫓아 서울역에서 용산역으로 택시를 타고 가던 예순.
그러나 웬 운명의 장난인가. 택시가 자신의 딸을 치고 만 것이다.
자신이 탄 택시에 딸이 치이다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예순은 딸아이가 누워있는 병실침대 옆에서 약을 먹고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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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타임 49분의 짧은 영화 <미몽>에는 ‘죽음의 자장가’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예순처럼 사는 인생은 죽음을 부른다는 경고일까?
화려한 쇼핑과 불륜, 여성 흡연, 자유연애 등 1936년이라는 제작 시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신에 욕망에 충실한, 급진적인 모습의 주인공 예순은 당시 가부장적 조선사회가 바라본 근대화와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부정적 인식이 투영된 인물이다.
실제로 <미몽>을 비롯한 <자유만세>(1946), <자유부인>(1956)등 이 시기 영화에 등장하는 신여성들은 대부분 화려한 쇼핑을 즐기고, 담배를 피우며, 불륜을 서슴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돼있다. 그리고 이들의 결말은 -당연히- 불행과 파국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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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무용의 아버지 조택원(1907~76) |
영화에 남자 무용수가 펼치는 현대무용 공연이 나온다는 점도 이채롭다.
애순은 극중 담배를 피울 만큼 개방적인 여성이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당시 여염집 여성의 흡연장면이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하다.
'미몽'은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영상자료원과 유사한 기관인 중국의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견됐다.
예순을 연기한 문예봉은 훗날 북한 최고의 인민배우가 되었으며, 예순이 극중에 반한
무용수는 최택원으로 최승희와 함께 한국 근대무용의 시조이다.
둘 다 일본 근대 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제자였으며 최승희는 “북”으로 가고, 조택원은 “남”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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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文藝峰, 일본식 이름: 林丁元(하야시 데이켄]
191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고향은 함흥이되 출생지는 경성부라는 설도 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끝에, 배우였던 아버지 문수일을 따라 유랑극단에 흘러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13세 무렵에 이미 무대에 서서 아역 배우가 되었고, 처음 어른 역할을 맡은 것은 15세 때로 남자 역할이었다. 무성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주인공 뱃사공의 딸 역을 맡아 나운규와 공연한 것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후 청초한 이미지로 '화형(花形)', '백합꽃'이라는 별명을 달고 193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서 자리잡았다.
《임자 없는 나룻배》 이후 두 번째로 출연한 영화가 조선에서 최초로 제작된 발성영화 《춘향전》이었다. 문예봉은 춘향 역으로 인기를 얻은 뒤 경성촬영소에 입사하여 경성촬영소 제작 영화에 잇달아 출연했다. 당시 인기 배우였던 김연실의 연기와 비교한 평을 보면, 김연실은 능숙한 연기인 반면 문예봉은 관습화되지 않은 신선한 연기로 표현되고 있다. 주로 맡은 배역은 아담하고 깨끗하며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농촌 여성의 이미지였다. 함경도 사투리가 배어 있는 억양과 청아하지 못한 목소리는 약점이었다.
남편인 극작가 임선규와는 1933년 결혼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임선규가 친일 활동을 하면서, 문예봉도 전쟁을 미화하거나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선동하는 어용 영화에 대거 출연함으로써 친일 예술 행위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문예봉은 친일 영화 단체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기과 사원이었고, 총 9편의 친일 영화에 출연했다.[1] 이 명단에는 남편인 임선규도 들어 있다.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가[2] 1948년 월북하여 《내 고향》(1949)을 시작으로 《빨치산 처녀》, 《성장의 길에서》, 《다시 찾은 이름》 등 극영화에 출연했고, 한국 전쟁 때는 선무 공연으로 참전했다. 1952년 북조선 최초의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 사이에는 외부에 드러난 활동이 전혀 없는데, 이 기간 동안 숙청당한 상태였다는 설이 있다. 1965년 《조선영화》 4월호에 게재한 수필에서 스승이자 동료 배우였던 나운규를 지나치게 찬양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복권되어 영화 《춘향전》(1980)에 '월매' 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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