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바위에 함축된 부처의 세계 ~ 바위 사방에는 불상을 비롯한 탑과 비천상(飛天像), 승려 등 34점의 조각이 빼곡히 새겨져 가히 장관을 이루는데, 놓은 우리 나라에서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남면과 동면, 서면의 삼면(三面)을 이루고 있으며, 북면은 언덕의 정상이다. 군데군데 기생하여 바위를 위협한다. 게다가 오랜 풍상으로 마멸이 심해지고 바위에 금이 가는 등 적절한 설법(說法)을 하는 영산정토(靈山淨土)를 표현하고 있다.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塔谷 磨崖彫像群) - 보물 201호
▲ 부처바위의 남쪽 면
불무사 뒤쪽에는 높이 9m, 둘레 30m 정도의 범상치 않은 큼직한 바위가 있다.
그 연유로 부처바위란 좋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것들이 바로 탑곡마애조상군이다.
신라 사람들이 그렇게나 열망하던 부처의 세계를 하나의 바위에 압축해
바위가 그늘진 곳에 자리해 있어 한여름에는 시원하나 이끼 등이
보존대책이 요구된다.
바위의 남면은 부처바위의 중심으로 부처가 보살과 나한(羅漢)에게
그럼 남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선 바위 가운데로 마애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흐드러지게 핀 연꽃을 대좌(臺座)로 삼아 앉아있는데,머리 뒤로 연꽃으로 된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신비롭게 꾸민다. 천녀(天女) 2명이 묘사되어 부처의 세상을 칭송한다. 모양새를 보니 석탑보다는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임을 짐작케 해주는데, 떠오르는 것은,
황룡사 목탑은 진흥왕(眞興王)부터선덕여왕 시절까지 무려 93년(553~646년)동안
부처의 힘으로 누르고 싶었던 약소국 신라의 의지와 그들의 천하관(天下觀)이 고스란히 담긴 이 탑은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터만 쓸쓸히 전한다.
비록 800년 전에 한 줌의 재로 사라졌지만 부처바위 한 쪽에 그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구상중인 황룡사 목탑 단서를 제공한다.
소중한 열쇠이기도 하다.
추녀 부분에는 울려퍼질 것만 같다. 모양은 우측 9층탑의 축소판 마냥 비슷하며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얹힌 형태이다. 사자<혹은 용마(龍馬)> 2마리가 새겨져 있다. 암사자로 하고 머리 부분이 대관령 양떼목장의 양처럼 털이 복스러워 숫사자로 여겨진다. | |
나무라고 함) 밑에서 | |
삼존불과
승려상, 비천상 6구 등이 바위면을 가득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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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면 가운데에 자리잡은 2개의 불상(왼쪽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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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불좌상(三尊佛坐像)
과 얇은 감실(龕室)에 자리한 여래상, 얼굴이 파열된 여래입상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돈을 넣는 복전함과 기도처가 있다. 임하는 것 같아 무척 단란해 보인다.
그들 모두 두광을 갖추고 있는데 마치 두꺼운 겨울잠바에 딸린 모자를 뒤집어 쓴 듯 하다.
연꽃대좌에 앉아 합장인을 선보이며 가운데 불상을 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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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존불과 별도로 우측에 서 있는 2.2m의 여래입상(왼쪽 사진)은 얼굴이 절반 가까이
파열되었으나풍성하고 둥근 인상을 느낄 수 있다.
배꼽에 대고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려뜨려 여원인(與願印)의 일종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와있다. 3층석탑(오른쪽 사진)이 있다. 이 탑은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얹힌 신라 후기 탑으로 옥개석(屋蓋石) 받침이
것으로 여겨지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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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불무사를 겯드린 탑곡마애조상군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부처바위는 그 모습이 준수(俊秀)하여 부처의 세계로 둔갑되기 전에는 치성을 드리는 민간신앙의 신앙심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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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백사골 선비의 여행.역사.자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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