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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 세계무형문화유산 판소리 들으며 판소리 유적 기행<2>

문화재방송 2014. 7. 10. 00:02

- 남원 아영면 성리 흥보마을
흥부는 어떻게 복을 쌓았을까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 하나 가득허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돈과 쌀이 도로 가뜩”.
판소리 <흥보가> 중 ‘쌀과 돈이 많이 나온다’ 대목.
“이 대목을 헐 때는 팔을 딱 걷어올리고 들어 부어내는디, 영락없이 궤 속에서 돈과 쌀을 되아내는 형용이여. 그런디 한 20분을 되아내. 자식은 많고 형님에게 쫓겨나서 그렇게 굶주렸던 흥보내외가 돈과 쌀을 만났으니 참, 팔이 부러질 정도로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도까지는 되아낸다는 그런 느낌이제. ”(윤석달, <명창들의 시대>중)
소리판에 둘러앉은 가난한 청중들의 속내를 짚어내고, 꿈속에서라도 어디 한번 후북한 쌀과 돈을 되아내 보는 것이 소원인 이들의 웃음을 위해, 기진맥진 주저앉을 때까지 돈과 쌀을 되아내던 소리꾼의 마음자리가 되새겨지는 곳.

 

 

남원시 아영면 성리에는 ‘흥보마을’이 있다. 배고픈 흥부 주린 배 움켜쥐고 넘어가다가 쓰러졌더라는 ‘허기재’라는 고개가 있고, 허기재 아래엔 ‘흰죽배미’가 있다. 가난한 객지 사람한테 흰죽을 쒀 먹인 다순 마음 전하는 논이다.
또한 화초장을 지고 놀부가 건넜다는 개울인 ‘노디막 거리’와 ‘화초장 바위’, 흥부 생가터인 ‘발복터’, 흥부의 묘에 해당되는 ‘박춘보 묘’, 흥부가 부자가 되어 선덕을 베푼 진천인 ‘흥부 참샘’ 등이 남아 있다.
뉘 집이라도 대문 열려 있는 흥보마을에서 만난 오중근 할아버지의 말씀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복이라 하는 것은 임자가 따로 없는 것이니, 똑똑헌 것은 좀 덜고 착한 것은 더하면 흥부같이 복을 쌓게 되겄지요.”


 

- 운봉 회수리 비전마을
당대의 ‘문화중심도시’

 

가왕(歌王) 송흥록(1801~1863)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송흥록의 손자이며 서편제 창시자인 송만갑(1865∼1939)에게서 소리를 받아 박초월(1913~1983)은 명창이 되었다. 남원시 운봉면 회수리 비전마을은 판소리의 본향이다.
운봉이 어떤 고을이던가. 호사가들에게 전하는 얘기가 있다. 이를테면 최고의 부자를 가리는 게임이었던 게다. 추수기도 아닌데 곡식 만석을 내일까지 어디어디로 대령하라는 기막힌 주문이 떨어졌다. 운봉 만석꾼이 즉시 답했다. “참깨로 갖다드릴까요, 들깨로 갖다드릴까요.”
쌀 만석이야 너무 쉬워서 게임이 안된다는 운봉 만석꾼의 자신감은 운봉고원의 생산성에 뿌리를 둔 것이었으니, 일교차가 심한 지형적 조건으로 운봉은 곡식 생산량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았던 것. 갑부가 즐비한 운봉의 만석꾼 집안은 ‘수많은 예술가를 부르는 장치’였다.
당시 대부호의 사랑채는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장이기도 했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는 과객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통로인 데다 부잣집이 많은 운봉엔 그래서 오래 유숙하는 선비들이 많았고 그것이 문화적 토양을 살찌웠다. 박희옥이라는 만석꾼은 소리꾼을 후원한 대표적인 인물. 오늘날의‘메세나(기업의 문화예술후원운동)처럼 그가 가진 부를 아낌없이 예술의 토양으로 전환시킨 인물이었다.
만석꾼들이 거느린 소작농들을 위로하기 위한 놀이문화가 발달했던 것도 동편제의 탯자리를 고르는 데 일조했다. 매달 전국에 유랑하는 광대를 때맞춰 부르기가 쉽지 않다 보니 자연 상주시킬 필요를 느끼게 됐던 것. 남원 40리길 함양 60리길 길목의 주막거리였던 운봉 비전마을, 광대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이곳에 동편제 시조 송흥록의 생가가 조성돼 있다.

 


-비전마을 송흥록 생가
동편제 시조의 탯자리

 

<흥보가>와 <변강쇠가>의 무대로 연재(여원치)가 등장하는 것은 판소리 창작자가 자기가 사는 산천경개 좋은 고장을 소재로 썼기 때문이다. 판소리 창작자들의 운봉에 대한 편애는 <춘향가>에서도 드러난다.
변사또의 생일잔치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기억하는가, 현감 수령들이 좌르르르 모인 잔치 자리에 거지 복장을 하고 들어온 이도령을 보고 <의복은 남루하나 행색이 다른지라. 여봐라 그양반 이리 모셔라> 하고 맞아들인 가장 눈치 밝은 이가 바로 ‘운봉 영장’이었다.
이도령이 저 유명한 시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을 지어 <여보 운봉, 과객의 글이 오죽하리요마는 잘못된 곳이 있으면 보시고 고치시요>하고 내미는 장면에서 클로즈업 되는 이가 하필 운봉 영장인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운봉이 이렇듯 음악적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송흥록은 가장 느린 가락인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하는 등 다양한 음악 기교를 사용하여 극적이고도 예술적인 판소리를 완성시켰다.
구룡폭포에서 득음한 것으로 전해지는 송흥록은 <적벽가>와 <춘향가>의 귀곡성(鬼哭聲)으로 유명하다. 더불어 <귀곡성을 얻으려 가랑비 내리는 음침한 날 밤이면 아장터(공동묘지)를 찾아가 밤새우기를 삼년, 결국 접신이 되어 귀신의 소리를 뛰어나게 할 수 있었다>는 얘기도 널리 전한다. 실상사 철불과 귀신까지 혼절시켰다는 송흥록의 동편제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씩씩하고 호방하여 장수가 호령하는 듯, 끝마침이 쇠망치로 끊듯이 명확하고 상쾌하여 막힌 가슴이 뚫리는 듯, 묵직하고 장엄하여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그 소리에 운봉고원의 바람소리며 운봉계곡의 폭포소리가 다 들어 있다.
“콩 서 말이라야 득음”한다는 말이 있다. 소리꾼들이 소리 공부하면서 6시간짜리 한바탕을 다부르고 나서야 콩 한 알씩을 폭포에 넣는데 그렇게 넣은 콩 서 말이 폭포에 쌓여야 소리가 되는거라 했다. ‘콩 서 말’의 노력이라면 무엇엔들 이르지 못하랴.

 

 

 

 

 

영화 <춘향뎐>에 ‘쑥대머리’ 대목이 없는 이유

 

“아이고 어쩔거나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고!”
오리정에 이르러 두 다리를 쭉 뻗치고 정강이를 문지르며 체면불구 우는 춘향이에게 이도령 하는 말이 이렇다.
“아이고 춘향아! 네가 천연히 집에 앉어 잘가라고 말허여도 나의 간장이 녹을 턴디 삼도 네거리에 떡 벌어진 데서 네가 이 울음이 웬일이냐!”
허나 춘향의 울음은 오리정 앞에 ‘눈물방죽’이 생기도록 그치지 않았으니.
“아이고 여보 도련님 참으로 가실라요 나를 어쩌고 가시랴오(중략) 동방작약 춘풍시의 꽃피거든 오시랴오 높다란 상상봉이 평지가 되거든 오시랴오 조그마한 조약돌이 크다란 광석이 되어 정이 맞거든 오시랴오…”
본디 이 ‘오리정 이별’ 대목은 “정정렬 나고 <춘향가> 다시 났다”는 말처럼 춘향가를 새롭게 쓴 서편제 정정렬 바디(유파)에서부터 비롯된 대목이다.
구슬픈 계면의 서편제와 달리 동편제 춘향가에는 ‘오리정 이별’ 대목이 들어 있지 않다.
<그때에 춘향이가 오리정에 나가 이별했다는 말이 있으나… 육방관속이 오리정에 나가 늘어 있는데 체면 있는 춘향이가 서방이별 헌다 허고 오리정 삼도 네거리 길에 퍼벌리고 앉어 울 리가 있겠느냐. 꼼짝달싹도 못허고 담 안에서 이별을 허는디…>
꿋꿋한 우조의 동편제에는 <쑥대머리>도 없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 찬자리에 생각나느니 임뿐이로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이별후로 일장 수서(手書)를 못 받았으니 부모봉양 글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그러는가 (중략) 손가락에 피를 내어 이 사정을 편지할까, 간장의 썩은 물로 임의 화상을 그려볼까. (중략) 옥중고혼이 되거드면 무덤 근처 섰는 나무는 상사목(想思木)이 될 것이요 무덤 앞에 있는 돌은 망부석(望夫石)이 될 것이니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임방울 명창이 불러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 20만장이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음반 판매고를 올린‘쑥대머리’. 쑥대머리 귀신형용으로 적막옥방에 칼 쓰고 앉아 이별한 님을 그리는 춘향의 절창이 동편제를 근간으로 삼은 영화 <춘향뎐>(감독 임권택)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