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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르포]김일성의 전투 명령서 등 6.25 전쟁의 실상을 알려 주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문화재방송 2016. 8. 10. 02:47

취재. 촬영. 편집:문화재사랑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힘?

황금천기자

입력 2016-08-11 03:00:00 수정 2016-08-11 03:00:00


개봉후 관광지 방문객 급증 

관객 500만 명을 넘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인기를 끌면서 이 작전과 관련된 관광지를 찾는 발걸음이 늘고 있다.  

10일 인천시에 따르면 연수구 청량산 자락에 있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하루 평균 방문객은 7월 1∼27일 679명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된 뒤인 7월 28일∼8월 5일 940명으로 38%가량 늘어났다.  

1984년 건립된 기념관에선 6·25전쟁 당시 사용된 남북한의 무기와 작전 관련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중구 연안부두에서 유람선을 타고 1시간이면 도착하는 팔미도등대를 찾는 방문객도 지난달 17∼27일 하루 평균 69명에 불과했으나 영화가 개봉된 뒤 128명으로 86%나 증가했다. 작전이 감행된 날 새벽에 대북 첩보 공작을 맡았던 켈로부대(대북첩보부대) 대원 6명이 북한군과 교전 끝에 팔미도를 탈환한 뒤 등대를 밝혀 연합군의 상륙을 도왔다. 이처럼 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길잡이 구실을 한 것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팔미도등대의 실물 모형(지름 2m, 높이 8m)도 이달부터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유람선 회사는 영화 티켓이나 기념관을 방문한 스탬프 기록을 갖고 있는 승객에게 유람선 요금을 5000원 깎아준다.

인천시는 다음 달 7일부터 시작되는 인천상륙작전 월미축제나 9·15 인천상륙작전 기념 마라톤대회 등에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초청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인천에서 6•25전쟁의 역사를 뒤바꾸다, 인천상륙작전

                



2016년 7월 27일에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할리우드 스타, 리암 니슨 부터 한국의 유명한 배우 이정재, 이범수 등 쟁쟁한 배우들이 캐스팅된데다 전쟁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영화를 보기 전에 전반적인 역사적 줄거리를 알면 이해가 더 잘 되겠지요?


『우리에겐 포기란 없다,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북한의 남침 이후 맥아더 장군이 인천지역을 이용하여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하기 위한 작전이다. 사실 이 작전은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무렵부터 구상되었지만 실행을 하는 데에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 당시의 계획은 이렇다. 미지상군을 수원부근에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미 제 1기병사단을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을 포위하려던 ‘블루하트(BLUE HEART) 계획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남진을 막지 못해 상륙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을 전선에 투입하게 되면서 이 계획은 취소 되고 말았다. 



1950년 9월 월미도 당시 사진 

이미지 출처 :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이후, 이 계획을 계속 연구하고 발전시켜서 [계획 100-B(인천)] , [계획100-C(군산)] , [계획 100-D(주문진)] 총 3개의 작전 중에 [계획 100-B(인천)]가 채택되어 인천상륙잔전의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계획이 수립된 것 이다.

 

그렇다면 왜 인천이었을까? 


인천은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이고,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실시함에 있어 북한군 주력을 압축 섬멸함으로써 소수의 희생으로 엄청난 성과를 얻을 수 있었기때문이다. 하지만, 작전 실패에 대한 우려도 많았다. 그 이유는 인천 근해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지대가 넓게 형성되어 있어서 대규모 선단의 접근이 어려워 병력, 탄약 등 지원이 어려운 점이다.


『전략에 전략을 더했던 맥아더 장군 』



맥아더 장군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낙동강 일대의 제 8군 정면에 투입되어

훈련된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 할 능력이 거의 없다” 


- 맥아더 장군의 말 中- 




맥아더 장군과 스미스 소장

이미지 출처 : 인천상륙작전기념관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주장에 1950년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았고, 1950년 9월 15일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이 시작됐다. 이 작전이 시작되기 전, 미 제 10군단을 창설하고, 군단장에서는 알몬드 소장을 임명하고, 예하에 미 제1해병대 사단(사단장 스미스 소장), 국군해병연대(사령관 신현준 대령) 등을 군단장에 임명하였다. 또한, 미 제7사단, 국군해병연대 등 총 병력 75,000여명으로 편성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인천항의 확보와 해안교두보 점령, 김포비행장 확보, 서울 탈환, 서울 근교의 진지 점령이었다. 한국해병대는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의 지휘 아래 인천시가지의 소탕전을 전개했고, 백인엽 대령이 이끄는 국군이 상륙하여 서울 탈환을 전개하였다. 



이미지 출처 : 인천상륙잔전기념관


『6•25 전쟁의 역사적인 획을 긋다 』


제 1단계로 9월 15일 새벽 5시,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서 제1파 7척이 녹색해안(GREEN BEACH)인 월미도에 상륙했다. 한국과 미국의 해병대는 월미도 정상의 105고지를 향해 공격을 시작하였고, 일부는 인천 내륙으로 이어지는 방파제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2시간 만에 완벽하게 차단하였다. 월미도를 확보한 후 미 해병대의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이었으며, 적 사살 108명, 포로 136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적색해안을 향해 진격하는 미 해병대

이미지 출처 : 인천상륙잔전기념관


15일 오후, 적색해안(RED BEACH), 청색해안(BLUE BEACH)에 상륙할 미 해병대 제 1연대대, 제5연대 전투단 병력을 태운 함정들이 인천항으로 접근하던 중이었다. 인천 및 경인 국도를 연결하는 내륙지역에 대한 도로와 목표물에 대하여 계속해서 공격을 하는 동안 인천항에 도착하여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 제 1연대 제3대대는 적색해안을, 미 제1해병 연대는 청색해안을 향해 돌격하였다. 


적색해안을 맡은 병력들은 사다리를 타고 방파제를 올라갔으며, 일부는 방파제 사이로 상륙하여 적과 교전해 8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청색해안을 맡은 병력들은 높은 해벽을 기어오르며 돌격 하였고, 다행히도 적의 공격이 없었기에 큰 피해 없이 인천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6•25 전세 반전을 위한 연합군

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박과


그 뒤로 9월 16일부터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한강으로 작전을 개시하였고, 9월 18일,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서울 수복과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다. 9월 27일에는 한국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소탕전을 전개하여 9월 28일 서울은 90일만에 수복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은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완벽한 성공으로 끝이 났다. 



인천상륙작전 영화 포스터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갈리폴리 작전과 더불어 세계 3대 상륙작전으로 꼽히는 성공적인 작전이다.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탈환의 성공은 국군 및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제고 시켰다는 것에서 큰 의의를 가졌다. 


리암 니슨, 이정재, 이범수, 정준호 등의 연기와 이재한 감독이 만든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감상하면서 그 당시의 작전에 직접 투입된 느낌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자료> 인천상륙작전기념관 홈페이지(http://www.landing915.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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