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탁, 우현, 우현보, 우길생, 우배선을 배향하고 있는 낙동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880 월곡역사공원 내 월곡역사박물관 바로 뒤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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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將) : 우배선(禹拜善), 참급(斬級) 9, 사살(射殺) 26, 작살(斫殺) 11 (합계 46)
▲ 정노위(定虜衛) : 도언수(都彦守), 참급 5, 사살 15, 작살 10 (합계 30)
▲ 별시위(別侍衛) : 김암회(金岩回), 참급 2, 사살 10 (합계 12)
김성일의 장계 내용 일부 |
(우배선은) 국가의 한 자 창이나 한 말 군량도 쓰지 않고 자기 재산을 내어 무기를 짓고 군사를 먹이며 수없이 많은 적을 죽이고 참수하였으니 옛 명장에서 찾더라도 (이만한 장수는) 많이 얻지 못할 것입니다. 대구의 적이 해가 넘도록 웅거하여 (경상)좌도의 장수가 합하여 공격한 지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머리 하나 얻지 못하였으며 우리측 군사의 죽은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는데 우배선은 성주와 대구의 경계(인 화원현)에 끼어 있으면서 혹 밤에 습격하기도 하고 혹 (적을) 맞아 싸우기도 하여 매번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 용감한 재주를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신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그 인품을 고루 물으니 본래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으로 재주와 기국이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글을 읽다가 왜변(임진왜란) 뒤에 활 쏘고 말달리기를 익혔으니 이는 이 때를 당하여 얻기 어려운 인재입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이 상황에서는 발탁해서 재주껏 다하게 해주시옵소서. |
또 적군을 죽인 방법 - 목을 베어 죽였는가(참급), 화살을 쏘아 죽였는가(사살), 찔러 죽였는가(작살) - 에 따라 그 숫자를 하나하나 밝혀두고 있다.
약관 24세에 초유사로부터 장군 임명 받아
본문의 '장(將)'은 의병장 또는 가장(假將, 전쟁 중 임금의 결재를 받을 겨를이 없는 상태에서 왕권을 대신하는 초유사나 감사가 인정한 장군)을 뜻한다.
'의병군공책'의 원문은 우배선(1569~1622)을 때로는 의병장, 때로는 가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장이라는 직명이 사용된 것은 1592년 전란 발발 즉시 24세의 새파란 나이로 즉각 창의했던 우배선이 일찍부터 많은 전공을 세워 그해 9월 하빈현(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서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로부터 장군 사령을 받은 사실에 근거한다.
본문의 '참급 9'는 우배선 의병장(또는 가장)이 적군 9명의 목을 직접 거뒀다는 사실을 말한다. 우배선은 또 26명을 직접 활을 쏘아 사살했고, 11명을 칼로 베어 죽였다. 이수건의 논문 <월곡 우배선의 임진왜란 의병 활동>에 따르면, 이 전과를 집계한 시기는 대략 1593년(선조 26) 5월 말 또는 6월 초로 보인다.
▲ 우배선 창의 유적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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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정노위 도언수, 별시위 김암회'에서 보듯이, 우배선은 적을 죽인 전과를 의병 구성원 89명 개인별로 정리해뒀고, 각 의병들의 직역(職役, 직책과 역할)도 밝혀뒀다. 개인별 전과의 내용을 합계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별시위 : 도덕웅 5, 허몽수 20, 허응성 16, 손경로 8, 허진 7, 갈덕부 12, 전응로 5, 이운건 14, 조억수 3, 박두무 7
▲ 정병(正兵) : 진애사 12, 송학년 33, 배연상 3, 진광인 10, 김억수 4, 장가미 5, 이궁경 2, 허응수 14, 박득 10, 송준복 3, 조모노산 7, 김언경 5, 공덕 5, 허도랑 10, 허유문 4, 서응기 23, 허춘우 3, 서애산 3, 허응부 4, 송태수 2, 도붕 1, 도수부 22, 손봉수 6, 도부인 3
▲ 기관(記官), 향리(鄕吏) : 석백 22, 석기운 14
▲ 수군(水軍) : 김명원 2, 손다음사리 5, 신수인 2, 최관 6, 장일천 5, 김말응덕 5, 빙동 5, 최어질개 7, 반운세 4, 강오을미 2, 신은축 3, 조언심 3, 박순경 6, 김언몽 5, 도세원 3, 최금동 18, 이명계 8, 김국세 14, 장몽기 51, 강하수 2
▲ 중군(中軍) : 송호림 3, 전응내 2, 이언춘 3, 이희창 6, 성란 6, 이철매 14, 손기 21, 손흥지 4, 김순천 5, 김한*(1자 미상) 2
▲ 보인(保人) : 진오을미 7, 이득춘 3, 조사충 7, 백운기 2, 김희원 2, 박송 15
뿐만 아니라 우배선은 노비들의 전공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 사노(寺奴) : 백천수 3
▲ 관노(官奴) : 충수 12
임진왜란 때 봉기한 의병장 본인의 가계, 신분, 직책과 역할 등은 많이 밝혀져 있지만 그가 거느린 의병군 병사의 정확한 인원과 개인별 신분 및 직역에 대해서는 거의 규명된 바가 없다.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우배선은 관련 내용을 상세히 남겼다. 그래서 우배선의 기록은 2002년 1월 2일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 2002년부터 문을 연 월곡역사박물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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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배선의 기록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660 월곡(月谷)역사공원 안의 월곡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2002년 5월에 개관한 월곡역사박물관은 옛날 농기구와 생활용품 500여 점을 볼 수 있는 1층 200평, 보물 1334호인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군공책> 및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교지(교첩)> 일괄 4종 15점 34건을 비롯해 역대 선조들의 교지와 서간문 등 800여 점의 문서와 7000여 권의 고서적이 보관돼 있는 2층 200평으로 구성돼 있다. 지하 20평에는 별도의 수장고도 있다.
본래 월곡역사공원 일대 7000여 평 땅은 단양우씨 열락당 종중 소유였는데, 종중에서 시민들을 위한 공원 부지로 기부했다. 월곡역사박물관 뒤에는 단양우씨 선조들인 우탁, 우현, 우현보, 우길생, 우배선을 배향하는 낙동서원도 있다.
임진왜란 연구의 귀한 자료 남긴 우배선
▲ 우배선 의병장이 전투 내용을 직접 기록한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 자료>는 임진왜란 상황을 말해주는 귀한 사료로 인정되어 국가 보물 1334호로 지정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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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은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 - 군공책>을 '조선 중기의 의병장·문신인 월곡 우배선 장군의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과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 자료들 중 '우배선을 비롯해 그 부하 의병 88명의 군공'을 적어둔 '의병군공책'에 대해 '특히 전국적으로 유일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전공(戰功) 보고서로 임진왜란 때 대구 지방의 의병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 '의병군공책' 중 '사노 기총'의 전공에 관한 기록 부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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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 기총 부분의 원문은 이어 '계사년(1593) 1월 14일 대구추격(追擊, 따라가며 공격), 3월 11일 조암대전(祖岩大戰, 대구 달서구 조암동에서 벌인 큰 전투), 4월 22일 대구추격, 5월 13일 대구하래시추격(下來時追擊, 대구로 내려올 때 기습), 5월 5일 대구야작, 5월 11일 대구야작' 하고 계속된다.
전투 월일, 장소, 전투 방식까지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유일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군)들의 전공 보고서'라는 평가를 얻은 것이다.
보물 1334-2호인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교지(교첩)>은 '월곡 우배선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에 관한 것'이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고,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선무원종공신 |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공신을 책봉한다. 그런데 1604년 6월 24일에 처음으로 확정된 공신 명단 104명에 의병은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한다. 선조가 자신과 함께 압록강까지 도망갔던 사람들을 주로 공신에 임명한 탓이다. 선조는 명나라와 외교를 담당하는 대신들, 그리고 옆에서 자신을 보좌한 사람들이 제일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시 24명, 왕의 말을 끄는 이마(理馬) 6명 등이 포함한 첫 공신 명단에 의병은 한 명도 넣지 않았다. 선조는 지방의 장수들이 잘못해서 임진왜란 때 나라가 곤욕을 치렀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 발발에 대한 대비, 군사 전략의 수립과 운용, 인재 등용과 적재적소 배치 등 모든 분야에서 무능력을 드러냈던 선조 자신과 대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신 책봉에 백성들과 무장들의 비난이 쇄도하자 선조는 할 수 없이 1605년 4월 공신을 추가(원종)로 지정하게 된다. 이를 원종공신이라 한다. 전란 중 일어난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공신은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으로 대별된다. 선조와 함께 압록강까지 도망갔던 자들을 임금을 호위했다고 해서 호성(扈聖)공신이라 하고, 적과 직접 싸운 사람들을 선무(宣武)공신이라 한다. |
작은 의병 부대로 엄청난 적 '척살'
월곡역사박물관의 '월곡'은 임진왜란 의병장 우배선의 호를 딴 명칭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우배선은) 성주 화원현에서 태어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화원과 대구 일원을 중심으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조정으로부터 의병 활동의 포상으로 합천군수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604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면서 '이들이 올린 전공은 참살 63명·사살 604명·작살 110명으로 작은 의병부대의 전과로는 엄청난 수'라고 평가하고 있다.
▲ 우배선 장군 동상은 2002년 10월 건립되었다. 동산은 그가 선비이자 의병장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서책과 무기를 함께 배치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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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역사공원을 찾아 우배선 장군의 동상부터 참배한다. 무릇 동상, 비석 등 눈에 보이는 기념물들이 가장 먼저 답사자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법이니 이는 당연한 발걸음이다. 동상 뒷면에 새겨져 있는 '동상 건립 취지문'을 읽는다.
"이 동상은 우리 민족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왜침인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으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부하들과 침식을 같이 하고 그들의 가족을 내 가족같이 보살펴 주었으며 부하들에게는 투철한 호국정신을 심어주어 각처의 전투에서 다대한 전과를 올려 대구 성주 지방 제1의 의병 부대로 만든 그 공적을 후세에 전함으로 청소년들에게 역사교육과 애국애족하는 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이곳 단양 우씨 열락당 종중에서 국고 보조금 일부를 보태어 서기 2002년 10월 동상을 세웠다."
취지문에 '대구 성주'로 표현된 것은 우배선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화원현(縣)이 지리적으로는 대구 일원이지만 당시 행정구역상 성주목(牧)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군공책'의 본래 이름이 '성주 화원 의병군공책'인 것도 그래서이다.
부하들과 침식 같이 하고 그들 가족을 내 가족처럼 보살피다
동상 앞면에 새겨져 있는 '월곡 우배선 장군의 생애'도 읽어본다. '단양 우씨 판서공파 파조 우홍명의 제6대 종손'인 우배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감히 일어나 생명과 재산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모아 싸워 그때마다 이겼다. 이 소식을 들은 초유사 학봉 김성일 선생은 그 공적을 높이 찬양하여 조정에 표창하여 줄 것을 청원하였'는데 '선조대왕께서도 승전 소식을 들으시고 기뻐하셨으며, 명나라 중원군 장수 이여송의 참모 여응종은 그가 쓴 <조선기>에 우배선은 24세의 약관 서생임에도 의병을 인솔하여 싸울 때마다 이기고 많은 적을 무찔렀다고 극찬하였다.'
그리하여 우배선은 '국가가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역사에 남기기 위한 선무원종공신 심사 때 장군을 일등공신으로 녹훈되었고 그와 관련된 34건의 문헌은 국가 보물 1334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장군은 '합천, 금산 및 낙안군수를 역임했으며 종2품 관직인 겸사복장을 봉직한 것을 끝으로 고향에 돌아와서 정사(열락정사)를 세우고 후배 양성에 힘쓰다가 서기 1621년 11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다사면 나정리 벌지마을 뒷산에 있다.
▲ 우배선 장군의 애마인 용마(龍馬)를 기려 세워진 의마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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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 조암동은 우배선이 1592년 10월 19일과 1593년 3월 18일에도 접전했지만 특히 1593년 3월 11일에 왜적을 크게 무찔렀던 전투 장소다. 이날 우배선 의병군은 왜적을 71명이나 참살했다.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숲으로 변해버렸지만, 조암동 지역은 건축 바람이 한창이던 2006년 7월 26일 그 인근에서 대구 지역 최초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당연히 그곳은 임진왜란 당시 무인지경이었다. 그저 야생마들이나 서식하는 광활한 벌판이었다.
그런데 야생마 중 한 필이 특별히 성질이 사나워 도무지 사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1592년 5월 23일 우배선이 소문을 듣고 들판으로 들어가 따뜻히 달래니 말이 순순히 따라왔다. 말은 조련을 거쳐 우배선의 애마가 됐는데, 뒷날 전쟁이 일어나 대구 근교 각지에서 왜적과 혈전이 벌어졌을 때 크게 주인을 도왔다. 교전 중 왜적의 총탄이 쏟아져 우배선이 위급에 빠진 찰나 애마가 기민하게 움직여 줘 사상(死傷)을 모면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아무도 조련 못하던 야생마가 우배선의 애마로
우배선이 1622년 53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말은 먹이를 마다한 채 줄곧 슬피울다가 사흘만에 숨을 거뒀다. 사람들은 주인을 따라죽은 이 애마를 "용마(龍馬)"라 부르면서 장지산 기슭에 의마총(義馬塚)을 썼다. 그후 100년 세월이 흘러 의마총은 일제 식민지 시절 수몰됐다. 후손들은 다시 1968년 의마총이 있던 터에 의마비(義馬碑)를 세웠다. 이들이 의마비를 건립한 핵심 취지는 우억기가 짓고 우종묵이 쓴 비문 마지막에 강건한 문체로 새겨져 있다.
"인간사회에도 윤리를 모르고 충의를 저버린 예가 허다하건만 이성에 밝지 않은 야생마가 영걸을 알아보는 형안(炯眼, 밝은 눈)으로 복종하고 순치(馴致, 말이 부드러워 짐)되어 주인 위한 충성으로 국난에 공헌하고 주인의 하세(下世, 타계) 있자 3일만에 순사(殉死, 주인을 뒤따라 죽음)하는 단성(丹誠, 불변의 정성) 충과 열을 겸전하였으니 충의지절이 어찌 마필(馬匹, 말)이라 소홀하리오. 도의가 퇴폐(頹廢, 무너짐)한 오늘날 그 정신을 만세에 전하고 그 영(靈, 영혼)을 위무(慰撫, 위로)코자 그 의리를 글로 새겨 편민(片珉, 한 조각 돌)을 세워 계이명(繼以銘, 새겨서 이어지게 함) 하노라."
▲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우배선은 열락정사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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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광해군 3) 경상도좌수영 우후 임기를 마친 우배선을 고향으로 돌아와 월곡정사(月谷精舍)를 짓고 자연에 묻혀 산다. 그 이후 여러 차례 벼슬을 하라는 권유가 왔지만 모두 사양한다. 그가 타계한 후 87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 선비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덕동서원을 짓고 열락당(悅樂堂) 현판을 단다. 이때 월곡정사에도 같은 현판이 걸린다.
덕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된다. 1965년 우종식·우종묵 형제가 사비를 들여 서원을 재건한다. 이때부터 덕동서원은 낙동서원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우탁, 우현, 우길생, 우현보, 우배선 다섯 분을 제향하게 된다.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우탁은 두 편의 탄로가(歎老歌)로 국민들에게 익숙한 고려 때의 대학자다. 간혹 '우탁'과 '탄로가'라는 말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하더라도 교과서에서 종종 보았던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치려 했더니 / 백발이 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와 '춘산에 눈녹인 바람 언뜻 불고 간 데 없다 / 잠시만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여 / 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하는 내용을 보면 '아!' 하며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다.
▲ 월곡선생창의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일한 우억기 선생을 기념하는 비가 낙동서원담 옆에 세워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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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고려 충숙왕이 원에 잡혀갈 때 수행했던 대학자로, 우탁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다시 그의 수제자는 '흥망이 유수(有數, 운수가 있음)하니, 만월대(고려의 궁궐)도 추초(秋草, 가을의 시든 풀)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 왕위를 이어옴)이 목적(牧笛, 목동의 피리)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 고려의 충신)이 눈물겨워 하노라'라는 시조를 남긴 원천석이다. 원천석은 이방원의 스승이었지만 그가 태종이 되자 벼슬을 하지 않고 산에 숨어 살았다.
1362년(공민왕11)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성을 되찾아 공신으로 책록된 우길생은 우탁의 아들이다. 우현보는 우길생의 아들로, 선죽교에서 피살된 정몽주의 시신을 모두가 두려워해 아무도 거두지 못할 때 홀로 나서서 안장(安葬)한 고려 충신이다.
▲ 사재를 희사하여 낙동서원을 재건한 우종식 선생을 기려 세워진 기념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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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역사공원에는 월곡역사박물관, 낙동서원, 열락당, 의병장 우배선 선생 창의 유적비(遺蹟碑, 남긴 자취를 기념하는 비), 의마비, 성균관 부관장 우종식 공적비, 성균관 부관장 우억기 기적비(紀績碑, 업적을 기념하는 비) 외에도 또 볼 것이 있다. 파리장서비와 순국지사 우병기 추모비가 그 둘이다. 파리장서비는 우배선 창의유적비 옆에 있고, 순국지사 우병기(禹丙基) 추모비는 박물관 왼쪽 뒤편에 있다.
우배선 장군의 나라사랑을 이은 파리장서운동 참가와 독립 순국
이곳의 파리장서비는 우씨 문중의 또 다른 자부심이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 '파리 장서'를 제출하는 유림의 서명 운동에 참여한 선비 대표는 모두 137명이었다. 그 중에 우성동, 우찬기, 우하교, 우경동, 우승동 등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는 이곳 월촌 출신이 6명이나 포함됐다. 박선정의 논문 <월곡 우배선과 덕동 및 낙동서원>은 이에 대해 '한 문중에서 이렇게 많이 서명한 일은 아주 드물며, 이로 인해 많은 애국지사가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우씨 문중 애국지사의 비가 바로 순국지사 우병기 추모비이다. 우병기(1903~1944) 지사는 동지들을 규합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 군자금을 보내던 중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청진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감된 대전형무소에서 1944년 10월 26일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건국포장,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월곡역사공원, 과연 '역사' 공원이다. 우배선 의병장의 정신이 500년 이상 서려온 이 땅에 썩 어울리는 힘찬 이름이다.
▲ 순국(독립)지사 우병기 추모비(왼쪽)와 파리장서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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