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당시,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는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감옥인 '서대문형무소(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가 있다. 이곳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대한민국 국권 침탈을 시작하면서 만든 시설로, 1908년 경성감옥으로 만들어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후
1998년 사적(史蹟)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1854∼1908), 이강년(1858∼1908), 이인영(1867∼1909) 등
후기 의병의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했다. 1908년 10월 당시, 수감자 2,019명 중
내란죄는 192명, 폭동죄 44명, 강도죄 710명, 절도죄 314명, 준강도가 134명 등이었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본감옥을 세웠다.
이미지 크게보기 서대문형무소 전경, 서대문형무소 감옥(오른쪽) /조선 DB
식민 지배와 저항의 시대
독립을 위해 저항했던 조선인 수용시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특히 한용운(1879∼1944), 유관순(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 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른 것은 잘 알려져있다. 이 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문서로 확인된 것만으로 독립운동가 165명이 숨졌으며,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갖은 핍박과 고문, 사형까지…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재소자에 대해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또한 옥사 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동사(凍死)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형편은 처참했다.
오늘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가보면, 일제의 잔혹한 고문 흔적,
사형장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 탄 물을 콧속으로 넣었던 물 고문실,
손톱 밑을 날카로운 금속으로 찔렀던 손톱 밑 찌르기 고문 현장 등이 재현돼 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정치·사회문제로 관련하여 간첩 및 사상범이 많이 투옥되었다.
특히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투옥되어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이해되기도 한다.
역사공원으로 조성돼, 독립운동가 기리는 교육현장으로 이곳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곳이다. 1945년 해방 때까지 국권을 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와 1970년대 민주화 인사가 수감되는 등 굴곡을 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왼쪽부터) 지하 고문실 전경, 고문실, 벽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이버전시관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했다.
1998년에는 역사관을 개원하여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했다.
역사관은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 동, 역사전시관 등으로
구성돼 독립정신과 자유·평화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대문독립공원과 역사관을 방문하면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옥사와 작업장과 함께
전시관 등을 둘러 볼 수 있다.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김구·안창호·여운형·한용운
등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있다.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담은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다.
이미지 크게보기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한 각종 행사가 열려온 서대문형무소 /조선 DB 역사 반성 없는 일본 과거, 일본은 식민 지배와 함께 제암리 학살, 731부대 생체 실험, 도
쿄 한인 대학살 등 수많은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역사적 사실에도 일본 정부와 일부 우익 세력은 과거사를 부정하고 있다.
한국이 일제의 불의에 항거했던 3·1 운동을 기념하고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등의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强占)하에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의 시기.
우리 민족의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의 단절의 시기였다.
1904년 2월, 러시아와 전쟁중이던 일본은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성립시키고
내정간섭의 발판을 만들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른바 '보호정치'를 펴 외교권을 대행하는 등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갔다. 이어 1907년 7월에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또한, 정미 7조약을 강제하여 통감이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친 통치권을 쥐도록 했으며,
한국인 대신(大臣) 밑에 실권을 장악하게 하는 일본인 차관을 두는 차관정치를 실현했다.
또한 '한국 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를 통해 한국의 사법권을 탈취했으며,
이어 한국군대를 해산하였고,
한·일 경찰관을 통합해 한국 경찰관을 일본 관헌의 지휘감독하에 두었다. 마지막 단계로 1910년 8월 22일
합병조약 체결을 강행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식민화 침략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친일파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 내각, 이용구·송병준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했고,
미국·영국 등 열강국들의 묵인도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은 한국 병합을 달성한 뒤,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지배를 강행했다.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는 시대에 따라 다소 정책의 변동이 있었으나,
일관된 정책은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고유성(固有性) 말살 및 우민화(愚民化),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이었다. 일제강점기 35년은 제1기 무단통치 시기(1910∼1919),
제2기 문화통치(민족분열통치) 시기(1919∼1931),
제3기 민족말살통치(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 시기(1931∼1945)의 3시기로 구분된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조약이었지만, 일본은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의 동의
없이 강제로 조약을 맺었다. 그 증거로 을사늑약 문서에 제목이 없었고, 고종의 사인이나 옥새가 찍히지 않았으며,
일본 천황의 도장조차 찍히지 않았다. (강제로 맺은 조약이므로 여기서는 '늑약'이라 썼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포츠머스 조약, 일본과 미국 사이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 일본과 영국 사이의 제2차
영 · 일 동맹 등으로 일본은 조선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1905년 일본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동원하여 을사늑약 인준을 강요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은 조약 체결을 반대했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이들을 '을사5적'이라고 한다.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대한 제국의 정치·외교권을 행사하기 위해 통감부를 설치했고,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1910년 경술국치으로부터 1945년의 광복까지 35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일본의 통치기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단행한 일본은 이로부터 대한제국을 '조선'이라 개칭하고,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했다.
칙령 제319호로 보다 강력한 통치기관으로서 조선총독부 설치령을 공포한 데 이어,
그해 9월 30일에는 총독부 관제 및 소속관서 관제를 공포하고 10월 1일부터 이를 실시했다.
일본 왕의 직속으로서 조선을 통괄하는 조선 총독은 육·해군 대장으로 선임하고, 위임받은 범위 안에서 육·해군의 통솔과
조선방위를 담당했다. 또 모든 정무를 통괄하여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일왕에게 재가를 받을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 총독으로는 앞서 통감으로서 경술국치를 성립시켰던 육군 대장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취임해 동화정책을 시정방침의 기본으로 삼고, 민생의 생활개선·식산흥업의 진흥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먼저 치안 확보를 제일의 과제로 삼고 강력한 무단정치로 한민족을 탄압했다. 1918년 7월부터 경복궁 구내에 새 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여 1926년 10월에 대리석
건물의 청사를 완공했다. 일제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때까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탄압과 착취·민족말살 정책의 수행기관으로 존속하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과 함께 해체되었다.
3·1운동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이자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ㆍ천안 아우내ㆍ정주 곽산ㆍ남원 광한루ㆍ
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해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는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고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ㆍ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ㆍ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서대문형무소 일대는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작년에 개봉한 영화 '밀정'에서도 그 배경이 됐다.
'밀정'은 경성과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는 1920년대 의열단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밖에도 '흑수선' '광복절특사' '한반도' '아가씨' 등 수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영화 '밀정', '흑수선', '한반도', '광복절특사' 스틸컷 각종 기관에서 추천하는 여행지로도 꾸준히 소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소개한 '전국 걷기 좋은 길 10선'에 포함된 안산 자락길 코스와 함께,
많은 매체에서 추천한 광복절 기념 여행지에 필수 코스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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