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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민속놀이 가운데 독특란 장르, 국가무형문화재 제90호 황해도평산소놀음굿

문화재방송 2018. 7. 16. 06:24

기획. 취재. 촬영. 편집;문화재사랑




국가무형문화재90호 : 황해도 평산 소놀음 굿


 

무당이 소모양으로 꾸미고 노는 굿놀이로, 농사의 풍년과 장사의 번창, 자손의 번영을 비는 뜻에서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소놀음굿은 단독으로 하지 않고 제석거리에 이어서 하는데, 이것은 제석거리가 자손의 번창과 수명을 연장하는 성격을 띠고 있어서 소놀음굿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은 기호와 해서 지방에서 놀던 놀이로 강한 종교적 성격을 띤다. 굿은 해질 무렵에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다. 굿판은 앞마당에서 6명의 여자무당이 장구와 징, 저나 피리를 가지고 굿놀이를 벌인다.


 평산소놀음굿의 순서를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1. 신청울림을 하고, 2.당산맞이 및 성수거리, 3.초가망(초부정), 4.칠성조, 5. 제석거리, 6.소놀음굿, 7.성주굿(지정닦기), 8. 장수거리(쌍작두와 작두날 위에서는 그네타기), 9. 타살거리, 10. 대감거리, 11. 조상거리, 12.터주거리, 13. 말명거리, 14.사냥굿, 15.마당굿. 경사굿이 진행되어 제석굿에 이어 소놀음굿으로 이어지면 굿판은 집안 마루에서 마당으로 옮겨진다.


마당에는 팔선녀가 내려오는 여덟 개의 무지개를 상징하는 천을 늘어뜨리고 그 밑에는 팔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는 곳이라 하여 큰 물통에 바가지 여덟 개를 띠운다. 흰장삼에 고깔을 쓴 무당은 삼불제석역으로 나와서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지상에 내려와 인간을 탄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내력을 노래한다.


블로그 대문/ 국보 제147호 울주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선사·역사시대의 조각·바위그림 및 여러 종류의 명문 유적.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71년 2차례에 걸쳐 정식 조사되었다.

 

각석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강안 암벽지대에서 있다.

이 지역은 울산과 경주를 잇는 길목지에 해당되어 울산·언양 일대의 풍부한 물산이

경주로 운반되는 교통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각석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암질은 적색 셰일이고 크기는 너비 9.5m, 높이 2.7m이다.

상부의 문양은 주로 쪼기〔彫琢〕기법을 썼으며 하부는 긋기〔線刻〕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시대 및 제작집단이 달랐음을 뜻한다


〔명문〕명문 중 확인된 글자는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인다. 원명이 새겨진 기사년은 신라 법흥왕 12년(525), 추명에 새겨진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된다.

뒤의 추명은 왕과 왕비가 이 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 곳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탁부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뜻한다. 이 곳은 사탁부의 고유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제명에는 여러 화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 곳을 찾아 도량(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는 신라 6부체제의 발전·변화과정과 내용을 규명해나가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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