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문화재방송2019. 3. 1. 05:18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의미가 깊은 해이기도 해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에 문을 닫았는데요.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고도 이 곳은 40년 넘게 감옥이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근현대 우리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상징하였던 서대문형무소를 보존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입니다.(사적 제324호)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를 이루고자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고 희생당하였던 현장입니다.
이후 1987년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로 이전하며 철거될 위기에 처했지만, 1998년 현재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여 꾸준히 복원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독립과 민주화를 위한 우리 민족의 저력과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이곳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지난 2월 19일부터 오는 4월 21일까지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이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에 이어진 일제의 무단통치는 우리 민족 역사에 다시 없을 고통과 굴종을 안겨주었습니다. 때마침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억과 맞물려 1919년 3월 1일, 우리의 민족대표 33인의 태화관에서 기미독립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레 우리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은 탑골공원에서 불붙어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번져나갔습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개최된 특별전시회를 간략하게 소개해볼까 합니다.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던 분들을 형무소로 압송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수갑이네요. 이 외에도 많은 고문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지배를 받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맞서 싸웠던 분들의 흔적이 담긴 사진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3.1운동 특별전시전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0옥사와 12옥사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특별전에서는 항일문화재 속에서 3.1운동의 가치와 대한민국의 법통성을 확인하고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기 위한 각종 사진과 유물, 독립선어서와 같은 역사적인 자료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한독립을 막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는 이렇게 감시카드까지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고문했다고 하네요. 고통 속에서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쓰셨던 분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39명의 독립운동가 분들이 중국에서 발표한 독립선어서를 비롯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담신 내용의 문서들입니다. 내용만 보더라도 이 분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목숨을 바쳐 싸웠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만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을 한 곳에 모아놓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분들이 일제의 탄압 속에서 옥살이를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어쩌면 이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관람 내내 이 분들에 대한 경건함 그리고 감사함이 마음 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옥살이를 하던 독립운동가 분들의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았습니다. 1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삶의 질도 보장받지 못한 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독립운동가분들을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립운동가분들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의 옥중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3.1운동 100주년 특별전시회는 오는 4월 21일까지 개최되는데요. 특별전을 포함하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람소요시간은 약 2시간 정도 잡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독립운동의 성지인 서대문구에서 국권을 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의 신념과 의지를 마주하는 공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리는 '100주년 특별기획전'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된다. 이른바 ‘경술국치’다. 나라가 망하고 순종이 통치권을 일왕에게 넘긴다는 양위조서(讓位詔書) 내용은 여드레가 지나 호남 땅 구례에 도착한다.
한 선비가 조약문을 읽어 내린다. 내용이 기가 막혔다. 더는 읽을 수 없어 조서를 기둥에 묶어 버린다. 그는 나라가 망했는데 무얼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문득 을사늑약 체결 이후 마음먹은 자결(自決, 의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이 떠올랐다. 밤이 깊어 4경(새벽 1∼3시)이 됐다.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한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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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에 죽음으로 항거하며 쓴 절명시
전남 광양시 광양읍 봉강면 석사리 매천 생가 마당에 세워진 절명시 시판. [사진 송의호]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沉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秋鐙揜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구나
56세에 생을 마감하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 선생의 절명시(絶命詩)다. 글 아는 선비가 500년 조선의 망국을 접하고 선택할 길은 달리 없었다. 죽음으로 항거하며 절의를 지키는 순절(殉節)뿐이었다. 선비들의 연이은 순절은 올해로 100년째를 맞는 3‧1 만세운동을 태동시키는 한 발단이 됐다.
지난 1월 전남 광양과 구례로 매천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선생이 순절한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 대월헌(待月軒) 뒤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 매천사(梅泉祠)가 들어섰다. 그는 대월헌 오른쪽 방에서 목숨을 끊었다. 매천은 절명시 4수와 유서를 쓴 뒤 더덕주에 아편을 넣어 음독한다. 그는 동생 황원에게 “세상일이 이리되었으니 선비는 당당히 죽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 정상영 회장이 전남 구례 매천사 앞에 섰다.
매천의 절명시가 지난달 언론에 일제히 재조명됐다. 순절로부터 3년이 지난 1914년. 35세 승려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 매천을 기린 한시를 지어 유족에게 전한다. 인근 구례 화엄사에 강연하러 왔다가 매천을 잊지 못한 것이다. ‘의리로써 나라 은혜를 갚으시니/한 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이승에서 끝나지 않은 한을 저승엔 남기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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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력 번득이는 시 2500여 수 남겨
문화재청이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돌을 맞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이 친필 추모 시 이미지를 공개하고 있다. ‘문화재에 깃든 100년전 그날’이란 특별전이다.
구례 서시천 체육공원에 세워진 '매천황현선생시비'
매천은 문장가이면서 동시에 지사였다. 글과 행동은 일치했다. 문사로서 그는 시인이자 사가였다. 감성과 통찰력이 번득이는 시 2500여 수를 남기고 또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매천이 태어난 곳은 구례 남쪽 광양시다. 백운산 앞자락 광양읍 봉강면 석사리에는 초가인 생가 매천헌이 복원돼 있다. 방문을 열자 동그란 안경 너머 눈동자가 강렬한 눈에 익은 매천의 초상화가 있었다.
1911년 채용신이 사진을 보고 그린 황현 초상화. [사진 광양시 제공]
문화관광해설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6년 여름 이곳에 들러 초상화 앞에 큰절을 올리며 선생의 비판정신을 기렸다”고 설명했다. 생가 왼쪽 600m 떨어진 곳에는 묘소 등이 있는 매천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묘소 앞과 그가 은둔했던 구례군 만수동 구안실 매천(梅泉)샘 옆 매화는 지금쯤 움을 틔웠을까.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沉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秋鐙揜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구나
56세에 생을 마감하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 선생의 절명시(絶命詩)다. 글 아는 선비가 500년 조선의 망국을 접하고 선택할 길은 달리 없었다. 죽음으로 항거하며 절의를 지키는 순절(殉節)뿐이었다. 선비들의 연이은 순절은 올해로 100년째를 맞는 3‧1 만세운동을 태동시키는 한 발단이 됐다.
지난 1월 전남 광양과 구례로 매천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선생이 순절한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 대월헌(待月軒) 뒤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 매천사(梅泉祠)가 들어섰다. 그는 대월헌 오른쪽 방에서 목숨을 끊었다. 매천은 절명시 4수와 유서를 쓴 뒤 더덕주에 아편을 넣어 음독한다. 그는 동생 황원에게 “세상일이 이리되었으니 선비는 당당히 죽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 정상영 회장이 전남 구례 매천사 앞에 섰다.
매천의 절명시가 지난달 언론에 일제히 재조명됐다. 순절로부터 3년이 지난 1914년. 35세 승려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 매천을 기린 한시를 지어 유족에게 전한다. 인근 구례 화엄사에 강연하러 왔다가 매천을 잊지 못한 것이다. ‘의리로써 나라 은혜를 갚으시니/한 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이승에서 끝나지 않은 한을 저승엔 남기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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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력 번득이는 시 2500여 수 남겨
문화재청이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돌을 맞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이 친필 추모 시 이미지를 공개하고 있다. ‘문화재에 깃든 100년전 그날’이란 특별전이다.
구례 서시천 체육공원에 세워진 '매천황현선생시비'
매천은 문장가이면서 동시에 지사였다. 글과 행동은 일치했다. 문사로서 그는 시인이자 사가였다. 감성과 통찰력이 번득이는 시 2500여 수를 남기고 또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매천이 태어난 곳은 구례 남쪽 광양시다. 백운산 앞자락 광양읍 봉강면 석사리에는 초가인 생가 매천헌이 복원돼 있다. 방문을 열자 동그란 안경 너머 눈동자가 강렬한 눈에 익은 매천의 초상화가 있었다.
1911년 채용신이 사진을 보고 그린 황현 초상화. [사진 광양시 제공]
문화관광해설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6년 여름 이곳에 들러 초상화 앞에 큰절을 올리며 선생의 비판정신을 기렸다”고 설명했다. 생가 왼쪽 600m 떨어진 곳에는 묘소 등이 있는 매천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묘소 앞과 그가 은둔했던 구례군 만수동 구안실 매천(梅泉)샘 옆 매화는 지금쯤 움을 틔웠을까.
아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축하문, 3.1운동 당시 태극기 제작에 사용된 목판(독립기념관 소장, 기미독립선언서(원본)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유관순) 전,후면
이봉창 의사 선서문
윤봉길 의사 선서문
이봉찬 의거에 필요한 자금 송금 증서
이봉창 의사의 친필과 봉투
심훈 친필원고 상록수(원본),
이육사 친필 원고
루즈벨트 외교서한(원본), 대한민국건국강령 영문본(원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日아사히, '3.1운동 100주년' 보도.."일본, 시대를 잘못 읽었다"
입력 2019.02.2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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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 "日 한반도 지배 저항 전국운동"..日 신문 논조 큰 차이 극우 산케이 "文대통령, 테러리스트묘 참배..과거 지향적" 주장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의 주요 신문인 아사히신문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관련 역사와 배경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1919년 동아시아 정세를 돌아보는 기획 기사를 27일 지면에 실었다.
아사히는 '기로의 1919…동아시아 100년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100년 전 3.1운동과 조선, 중국, 일본의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신문은 '독립선언 비폭력 내걸고 대항'이라는 소제목으로 당시 조선의 상황을 전하면서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 파고다 공원을 군중이 메운 가운데 독립 선언서가 낭독됐다는 설명과 함께 선언서의 내용과 의미를 적었다.
1932년 일본 오사카에 모여있는 일제 헌병들 [교도통신 제공]
그러면서 한일합병 이후 조선 민중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빼앗기고 헌병 감시하에 침묵을 강요당했다며 3.1운동 당시 수십만명이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했다.
아사히는 독립운동이 조선 전역에 확대됐고 민중이 비폭력의 정신을 내걸고 일본 군경에 맞섰다며 밤중에 산 위에서 봉화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경찰이 오면 다른 산으로 이동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 3.1운동 후 일본 군경의 탄압이 극히 가혹해졌다면서 재일 사학자 강덕상의 '현대사자료 조선2편'을 인용해 "사격 시간 3분간 즉사한 자 51명"라는 기술이 군 보고서에 적히기도 했다고 알렸다.
마이니치 전신인 도쿄니치니치신문 1919년 3월 3일 자 지면 [2019.02.14 송고]
아사히는 특히 독립선언서를 일본에 와서 일본 정치인과 학자에게 보낸 독립운동가 임규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신문에 따르면 임규는 1919년 3월 1일 밤 스스로 일본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들고 도쿄역에 도착한 뒤 이를 200통 인쇄했다. 체포 후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당시 총리 등 90명의 정치인, 학자 20인, 주요 신문사와 잡지사, 대학에 보냈다.
이 신문이 독립선언서의 내용 중 주목한 것은 일본에 대한 메시지였다.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등의 표현이다.
아사히는 조선의 이런 외침이 일본 사회에 퍼지지는 못했다며 '역사평론'이라는 잡지가 독립선언서를 게재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알렸던 것은 패전(한국의 광복) 후인 1948년 6월호에 이르러서였다고 설명했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고려박물관에서 열린 '3ㆍ1 독립운동 기획 전시회'에 전시된 3ㆍ1운동 전개 과정 지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신문은 그러면서 1차 세계대전 후 민족 자결주의 흐름이 퍼졌고 전쟁을 '불법화'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일본은 당시 '전쟁이 이익을 남겨준다'는 것만 배웠다며 일본이 당시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었고 이는 동아시아에 갈등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3.1운동 100주년에 대해 일본 주요 신문 중에서는 아사히신문 외에 마이니치신문이 소개했다.
마이니치는 이 날짜 지면에 문답 형식으로 3.1운동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저항해 전국적으로 퍼진 운동이라고 전했다.
반면 다른 주요 언론들은 전날 문재인 대통령의 '친일 청산' 발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판을 소개하는 데 분주했다.
특히 극우 독자들이 많은 산케이신문은 "문 대통령이 김구, 안중근, 윤봉길 등 일본 요인을 암살해 일본이 테러리스트로 보는 인물의 묘를 참배하며 항일을 칭송하려 하고 있다"며 "변함없이 과거 지향적이다"고 억지 주장을 폈다.
3.1운동 100주년과 100년 전 동아시아 상황을 소개한 일본 아사히신문의 27일자 기사 [아사히신문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