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2년 전 역사의 현장
3.1운동은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던 거대한 독립운동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설움 가득한 외침은 또 다른 해외 식민지 국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의 5·4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준 울림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3.1운동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립하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장재언)
탑골공원
1919년 3·1운동 직전에 촬영된 탑동공원(탑골공원)의 팔각정.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가 천제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본떠 세운 건축물이다.
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그날이 밝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청명했다. 33인의 민족대표는 ‘먼 길’을 떠나는 채비를 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하루 전인 2월 28일 종단을 이끌 후계자를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한 데 이어, 이른 새벽 천도교 청년들을 소집해 마지막 훈시를 했다.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해 해를 끼칠 자도 있으니 매사를 성실히 참고 견뎌라. 우리 국권 회복에 대해서는 차후 세계 지도의 색채가 바꾸어질 때 각 열국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시킬 날이 올 것이다.…” (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기독교 감리파 대표 이필주(1869∼1942)도 덕수궁 옆 정동교회 사택에서 영문을 모르는 식구들을 위해 마지막 가족 예배를 올렸다.
서울 중앙교회 전도사인 김창준(1890∼1959) 역시 거사의 길을 나섰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되는 어린 아내와 노부모의 생계가 걱정됐지만 ‘가정보다는 조국’이라는 불타는 애국심이 먼저였다.(‘김창준 회고록’) 이들 민족대표는 가족이 일제의 보복을 당할까 봐 3·1운동 참여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3만500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지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오늘의 거사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이종일은 홀로 남겨질 어린 손녀(이장옥)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지만, 성사(聖師·손병희)가 전날 민족대표들과의 최종 회합에서 “가족 생활비로 1인당 매월 10원씩 지불할 것”이라고 약속한 말로 위안을 삼았다. (이종일의 일기 ‘묵암비망록’)
종로구 경운동에서 이종일이 기도를 올리던 그 시각, 인근 북촌 계동의 중앙학교 운동장은 바닥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전단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일찌감치 등교하던 학생들은 한 장씩 주워보고는 아연 긴장했다.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서였다. 그때 교장 송진우가 숙직실에서 내려와 학생들이 서성대는 곳에 다가왔다. 전단 한 장을 주워 보더니만 빙그레 웃으면서 “너희들 공부 잘하라”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넓은 운동장을 횡단해서는 쏜살같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숙의 ‘죽사회고록’)
송진우는 독립선언서를 처음 보는 척 시치미를 뗐으나, 이숙 등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한 ‘교장 선생님’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은 진작에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 등을 통해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행동대 조직을 구축하도록 지도했다.(‘고하 송진우전기’, 현상윤의 ‘3·1운동 발발의 개요’)
학생조직은 후에 기독교 측 박희도, 이갑성 등이 가세해 중등학교 대표들까지 포함하는 조직으로 확대됐다. 거사 하루 전인 2월 28일, 학생대표들은 승동교회 예배당에서 최종적으로 독립선언서 살포, 거리 시위 등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3월 1일 새벽 경성에서는 중앙학교뿐 아니라 10여 개의 공·사립중학교와 네댓의 전문학교 등지에 격문(檄文)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시내 곳곳의 집집에도 배포됐다.
오전, 중앙학교 학생들은 평상시와 같이 수업을 했다. 상급생들은 오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술렁거렸고, 영문을 모르는 하급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현상윤이 가르치는 수업시간. 그런데 현상윤은 수업 내용과 관계가 없는 제1차 세계대전, 파리평화회의 전망, 민족자결주의 등등의 얘기로 한 시간을 채웠다. 그는 수업을 마치면서 영어로 “굿 찬스, 굿 찬스(good chance·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의미심장한 힌트를 주었다. (이희승, ‘내가 겪은 3·1운동·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태화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조선요리점인 태화관. 을사늑약, 한일강제병합 등이 모의된 이 터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자 했다.
독립운동의 ‘굿 찬스’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독립선언서 배포와 군중 동원 행동대 역할을 한 학생대표들은 각기 맡은 반의 급장을 통해 탑동공원(탑골공원)으로 집결하도록 밀통했다. 낮 12시 정오를 알리는 남산의 오포(午砲) 소리가 집결 신호였다.
보안을 철저히 했던 때문일까, 경성 시내는 평소처럼 조용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이윽고 종로2가의 탑동공원은 꾸역꾸역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학생들로 삽시간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중앙학교는 상급생에서 하급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교가 텅 빈 바람에 이날로 예정된 졸업식은 취소됐다.
탑동공원의 팔각정을 중심으로 삼밭에 심 박히듯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1897년 조성된 탑동공원은 이전부터 크고 작은 집회와 행사가 열린 곳이자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한민족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공간이기도 했다. 경기대 건축학과 안창모 교수에 의하면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에 건축된 팔각정은 고종 황제가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는 제사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쏙 빼닮도록 지은 구조물이었다.
또 대한제국의 군악대가 공원 서편에, 대한자강회를 잇는 대한협회가 공원 동편에 자리 잡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1969년 3월 발행된 한국은행권 오십 원 지폐 앞면에 팔각정 모습이 그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탑동공원은 조선이 당당한 자주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선언의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오후 1시 30분경. 약속 시간이 다 돼 가는 데도 민족대표인 듯한 사람들은 탑동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 시각, 민족대표들은 탑동공원에서 불과 300여 m 거리의 태화관(서울 인사동)에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민족대표들이 일경(日警)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탑동공원의 흥분한 학생·군중과 경찰의 충돌을 우려해 장소를 변경한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무엇보다도 ‘비폭력’을 중요시했다.
요릿집 태화관을 민족대표들의 회합 장소로 선택한 데도 까닭이 있었다. 장안의 명물인 조선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은 원래 조선왕조의 순화궁(順和宮) 터였고, 이후 이완용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었다.
1905년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밀의,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1910년 강제 병탄 조약 준비 등 대한제국을 능멸하고 없애는 행위가 모두 이 집에서 벌어졌다. 바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신석호, ‘(개설) 3·1운동의 전개·3·1운동 70주년 기념논집’)
태화관 주인 안순환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 즉 궁중 연회의 최고 주방장을 지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사퇴한 그는 명월관과 태화관을 차린 배일(排日)사상가였다. (‘고하 송진우전기’)
태화관 산정별실(山亭別室)에 자리 잡은 민족대표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이종일이 인쇄해온 독립선언서 100여 장을 훑어보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등 기독교 측 대표 3인은 지방 행사에 갔다가 경성에 늦게 도착해 이날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병조는 상해로 건너가 불참한 대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고 2선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로 한 함태영이 참석했다.
원문보기
cafe.daum.net/millennium7/J2A4/3650?q=3.1%EC%9A%B4%EB%8F%99
서대문형무소역사관, 3·1운동 기념행사 온라인 진행
3.1절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올해는 온라인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매년 3만여 명 참여, 비대면으로 안전하게
서대문구(구청장 문석진)는 삼일운동 102주년을 맞이하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주최로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가 열린다고 19일 밝혔다. 자료화면(2019년, 100주년)
자료화면(2019년, 100주년)
|
3·1운동 알린 첫 외신 보도 中 ‘차이나 프레스’ 지면 찾았다
유원모 기자 입력 2019-02-19 03:00수정 2019-02-19 08:18
한시준 교수 상하이 도서관서 확인
크게보기3·1운동 소식을 해외 언론 중 가장 먼저 알린 차이나프레스(대륙보)의 1919년 3월 4일, 8일, 11일, 15일자 지면(왼쪽부터). 상하이시립도서관에서 신문 원본을 확인한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11일자와 15일자에 평화와 자주 독립을 염원한 3·1 독립선언서 내용이 소개돼 있다”며 “당시 민족대표 측으로부터 외교통신 업무를 맡은 현순 목사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 제공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을 만세의 울림으로 물들게 한 3·1운동 소식을 해외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보도한 중국 영문 일간지 ‘차이나 프레스(대륙보)’의 1919년 3월 4일자 1면 지면이 처음 확인됐다. 차이나 프레스는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시발점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기사 원문을 확인하지 못해 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상하이시립도서관 문서보관소에서 소장 중인 1919년 ‘차이나 프레스’의 원본 사진을 18일 본보에 공개했다. 한 교수는 “첫 보도가 나온 1919년 3월 4일 보도를 포함해 8일자, 11일자, 15일자 등 3·1운동 소식을 보도한 차이나 프레스의 나흘 치 신문 원문을 지난해 12월 상하이시립도서관에서 찾았다”고 밝혔다. 해외 여러 언론사 가운데 중국 상하이의 차이나 프레스에 3·1운동 소식이 처음으로 실린 배경에는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1880∼1968)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국내를 넘어 해외 곳곳에 3·1운동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현 목사의 여정을 소개한다.
3·1운동 전세계 알린 벽안의 기자…가옥 '딜쿠샤'와 돌아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2.28 06:00
#나이 22살의 청년은 아버지를 따라 배에 올랐다. 광산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조선. 1897년 서울에 살기 시작한 앨버트 테일러와 조선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4살이나 어린 아내 메리 테일러를 만난 건 그로부터 20년 뒤의 일이었다. 신혼살림은 서울 충정로7길 부근의 '작은 회색 집'에서 시작했다.
3·1운동과 앨버트 테일러
앨버트 테일러. 3·1운동과 독립선언서를 세계에 알렸다. 사진 서울시
#1919년 2월 28일. 미국 AP통신 임시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앨버트는 고종의 국장(國葬) 취재를 마치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가 아들을 출산해 병원을 들른 그에 눈에 병원 침대 속 감춰진 종이뭉치가 들어왔다. 한국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단박에 '독립선언서'를 알아봤다. 황급히 기사를 쓴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생에게 기사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같은 해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3·1운동이 보도된다.
벽안의 이방인이 해낸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4월 15일 당시 수원(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주민을 집단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사건 다음 날 현장을 방문해 불타는 마을을 촬영하고, 생존 주민을 취재해 일본의 탄압을 세계에 알렸다.
3·1운동을 세계로 알린 사나이…'딜쿠샤'를 짓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인 '딜쿠샤'의 옛모습. 사진 서울시
서울에 살던 앨버트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곳에 땅을 사들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의 '딜쿠샤'란 이름도 붙였다. 1924년 붉은 벽돌집이 완공됐지만 2년 뒤 낙뢰로 불에 탔다. 앨버트는 1930년 같은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다.
일제의 압박은 그에게도 이어졌다. 1941년 앨버트 가족은 일제에 의해 연금됐고, 이듬해 강제 추방됐다.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6년 뒤 캘리포니아에서 숨을 거뒀다. 아내 메리는 생전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해와 함께 그해 한국을 방문했다. 앨버트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장됐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딜쿠샤'
오는 3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딜쿠샤' 전시관. 온라인 사전예약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다. 사진 서울시
방치되다 국가 소유가 된 딜쿠샤는 이후 집 없는 서민들의 공동주택으로 쓰이기도 했다. 잊혀지던 딜쿠샤를 찾아낸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앨버트의 아들이 서일대 김익상 교수에게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1년 뒤인 2006년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66년 만에 서울을 찾아 딜쿠샤를 돌아봤다.
2015년 브루스 테일러마저 사망하자 이듬해 서울시는 원형복원에 들어갔다.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딜쿠샤가 등록되면서 복원속도는 빨라졌다.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는 지하 1층~지상 2층의 건물로,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복원 공사를 마쳤다. 서울시는 이번 3·1절을 기해 '딜쿠샤'를 개방하기로 했다. 앨버트가 강제 추방된 지 약 80년 만이다.
딜쿠샤 전시관 돌아볼까
앨버트 부부가 사용하던 당시 유물들. 앨버트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는 당시 사용하던 유물을 기증했다. 사진 서울시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의 삶의 흔적이 담긴 1920년대를 복원했다. 2층 전시실엔 당시 언론활동을 비롯해 딜쿠샤의 건축 복원 과정을 볼 수 있게 해놨다. 3월 1일을 기해 공개되는 딜쿠샤 전시관은 매주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입장은 무료지만 사전 예약을 해야만 둘러볼 수 있다. 하루 4차례 관람이 진행되며, 1회당 가능 인원은 20명이다.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을 통해서만 신청할 수 있다.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이자 유물 기증자인 제니퍼 테일러는 “이번 개관으로 한국의 독립투쟁에 동참한 서양인 독립유공자가 재조명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은 “서대문형무소, 경교장 등 딜쿠샤 전시관 인근 항일운동 관련 클러스터를 통해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분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출처: 중앙일보] 3·1운동 전세계 알린 벽안의 기자…가옥 '딜쿠샤'와 돌아왔다
news.joins.com/article/24001676
['푸른 눈의 抗日운동가' 윌리엄 린튼의 3·1운동 증언 실은 美신문 첫 공개]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손에 손에 태극기만 든 채 전국 곳곳의 거리로 "
윌리엄 린튼(왼쪽 사진) 선생이 1919년 5월 미국 애틀랜타 저널에 일제 치하 한국의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한 기사(오른쪽).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다. /한남대 제공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1919년 5월 '푸른 눈의 항일운동가'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린튼(한국 이름 인돈·1891~1960)의 3·1운동에 대한 증언을 보도한미국 애틀랜타의 지역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 기사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제강점기 한국 현실과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쓴 글이다. 린튼이 1956년 세운 한남대학교(구 대전대학)가 최근 교내 아카이브에서 이 기사를 발견했다.
린튼은 전북 군산의 3·1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 국권 회복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21세에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3·1운동 당시 28세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쫓겨났다가 광복 이후인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서학교를 운영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우리 정부는 201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기사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 신문은 3·1운동을 '세계사(史)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봉기'라고 평가했다.
린튼은 이 신문에 "3·1운동은 한국이 최초로 일본의 압제하에서 자국의 무기력함에 대해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한 첫 번째 시도"라며 "그것은 폭력 없는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3월 1일, 인구 30만 명의 수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 행진했다. 폭력과 무질서는커녕, 일본 정부가 군중을 해산하려고 할 때 저항조차 없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을 뿐이다. (중략) 잡혀온 한국인들로 감옥에 더 이상 자리가 없자, 군부는 기병대대를 보내 수백 명의 한국인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더 강한 군사력을 투입했고,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총검에 쓰러져갔다."
그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다. "한국의 운명은 동맹국가에 달려 있다"며 "파리평화회의는 3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민족의 민족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말살해온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한국 국민의 봉기에 응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린튼의 손자인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은 "할아버지는 일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분"이라며 "이 기사는 한국인들이 자유독립을 위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28/2015022800210.html?news_Head1
만세운동 세계에 알린 석호필… 조국 독립 외친 ‘세브란스의 33인’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0) 스코필드와 세브란스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학과 교수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3·1운동 당시 해부학 실습실에 독립선언서를 숨긴 장면을 담은 기록화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19년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였으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연소자였던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 이갑성 남대문교회 집사(국민일보 2월 21일자 31면 참조)에게 거사 일정을 전해 듣고 서울시내 만세시위 현장을 직접 촬영해 세계에 알렸다. 그해 4월 일제가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양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하자 현장으로 달려가 참상을 촬영하고 관련 보고서를 남겨 일제의 잔학무도함을 고발했다.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몸으로 서양인 그 누구보다 거세게 일제에 항거한 의학자이자 선교사였던 프랭크 W 스코필드(석호필·1889~1970) 박사 이야기다.
스코필드 박사가 잠들어 있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한강과 동작대교를 굽어보는 애국지사묘역 96번이 그의 무덤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외국인은 단 3명이다. 그중 2명은 6·25전쟁 당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화교로 동양인이다. 서양인으로는 스코필드 박사가 유일하다. 그의 묘비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란 유언이 새겨져 있다
도와주던 소년 가운데 한 사람이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다. 정 총재는 지난 4일 서울대 수의대에서 열린 추모기념식에 참석해 “박사가 내주신 학비로 중·고교를 다녔다”면서 “박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한없이 자상하고 따듯한 은인”이라고 말했다.
정 총재는 앞서 연세대 의학사연구소가 엮은 ‘세브란스인의 스승, 스코필드’란 책에 기고한 글에서 “박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면서 “영어 성경 공부를 비롯해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의 대부분을 그에게서 배웠다”고 회고했다. 특히 “약자에겐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이 생각난다”고 전했다.
세브란스의전 시절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석호필(石虎弼)이란 한국 이름은 스코필드 박사가 스스로 지었다.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바위와 같은 우직함(石), 불의를 참지 않는 용맹함(虎), 그리고 따듯한 배려와 도움(弼)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강대국들로부터 고립돼 고난을 겪은 한국인을 사랑했던 근면한 영국계 캐나다 이주민이었다. 목회자였던 선친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 한 기독교인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국에 자원한 선교사였다.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간절히 추구하다 일제에 의해 20년에 쫓겨나지만, 해방 후인 58년 국빈 자격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70년 별세했다. 생전인 68년 독립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으로 훈장 포장 표창 등을 받은 세브란스 구성원은 총 33인이다. 세브란스의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를 만하다. 교수 학생 간호사 직원 등 전체 직군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醫史)학과 교수는 “54년 독립장을 받은 세브란스의전 설립자 올리브 에비슨 선교사를 포함해 다양한 직군의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한마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데는 세브란스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세브란스병원 지붕 바로 아래의 옥탑방인 해부학 실습실에서 독립선언서와 유인물이 비밀리에 제작·보관됐다. 경남 김해 출신 배동석은 김해 마산 함안 등의 3·1운동을 주도해 학생 가운데에선 드물게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21년 숨졌다.
송영록은 개성 만세운동을 조직했고, 김병수는 고향 군산으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전북 최초 만세시위를 촉발했다. 충남 공주의 양재순, 경북 안동의 이주섭, 평양의 곽권웅, 평북 선천의 고병간이 세브란스 출신으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세브란스 간호사들은 19년 3월 5일 당시 병원이 있던 남대문 정거장 앞 만세시위에서 일경의 총칼로 다수의 부상자가 생겨나자 붕대를 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정숙 노순경 박덕혜 이도신 김효순 박옥신 윤진수 이성완 이아주 장윤희 체계복 등이 체포됐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김마리아 선생(국민일보 3월 14일자 31면 참조)이 주도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참여해 독립운동가 옥바라지와 독립자금 모금 등을 도왔다.
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세브란스 졸업생들이 활동한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 1회 졸업생이자 김구의 손위 동서였던 신창희는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도우며 임시정부 군의와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활동했다. 역시 1회 졸업생인 주현측은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를 역임했다. 그는 18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후배 신현창과 함께 삼일의원을 개원해 병원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여 교수는 “세브란스는 선교사들이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한국 사람이 주체가 돼 한국 사람들을 돌봤기에 한국인의 주체적 활동을 막는 일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72082&code=23111668&cp=du
3.1절 마다 떠 오르는 "34번째 민족대표 석호필 박사"
[데일리안 김선영 기자]문화와 정보의 홍수로 글로벌화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매년 한 번씩 나라에 대한 경외감과 주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기념일이 있다. 바로 삼일절이다.
매년 돌아오는 3월 1일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로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이다.
◇ 3.1절 기념 동판화 |
그러나 세대가 바뀌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날이 갈수록 국경일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있는 안타까움을 직면하게 된다. 비단 3.1절 뿐만아니라 8.15 광복절과 한글의 날 등 국민들 의식속에 국경일은 단지 달력속의 빨간날짜이자 하루종일 게으름을 떨수 있는 날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다시금 태극기 사랑하기 같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운동이 시기적절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숨어있는 애국자의 재조명과 같은 것도 유익한 사회운동이라고 생각된다.
올해로 88주년을 맞이한 3.1절을 앞두고 네티즌들이 한창 열광해 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석호필'이라는 애칭을 가진 배우 마이클 스코필드가 출연하는 '프리즌 브레이크'라는 드라마로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감옥에 가서 탈출극을 벌이는 동생의 이야기이다.
그가 이처럼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는 까닭은 극의 재미는 물론이거니와 과거 '맥가이버'라는 캐릭터 뺨치게 머리가 좋아서 감옥을 신출귀몰하게 탈출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석호필'이라는 애칭이 한몫 톡톡히 하고있다.
◇ 생전의 석호필 박사의 모습 |
석호필이란'스코필드'라는 영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데서 유래한 것인데 실은 근래에 화제가 되고 있는 스코필드 박사(Frank W. Schofield, 1888~1970.4.12)의 한국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기미년 3월 1일 대한민국의 민족운동이자 힘없는 백성들이 나라를 강점하고 있던 일제에게 무력으로 대항했던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사람의 독립투사였고 민족의 대표였다.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민족대표 33인에 석호필박사가 새롭게 재조명 되면서 '33인이 아닌 34인'이라는 역사의 증명과 함께 3.1절에 방영될 다큐멘터리도 준비된 것으로 알고 있다.
1919년 3·1운동의 '34번째 독립운동가'로 꼽히는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균학 전문 의료선교사를 자원, 한국 땅을 밟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및 위생학을 가르치면서 이상재 이갑성 오세창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 3·1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그는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고 있는 민중과 일제의 만행을 사진으로 찍어 해외에 알렸다.
유관순 등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한 그는 이듬해 3·1운동 목격담인 '끌 수 없는 불꽃'을 해외에서 출판하려다 출국 직전 암살당할 뻔했다.
그는 카메라와 펜으로 무장하고 한국의 독립과 일제 강점기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1920년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할 때도 총독에게 청하여 옥고를 겪고 있는 이상재·이갑성·오세창 등 독립지사를 일일이 면회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강제 추방된 그는 캐나다로 돌아간 뒤 한국 상황을 알리며 1955년까지 토론토 병원에서 일했다. 해방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1969년 한국에 영구 귀국, 서울대 수의대에서 강의하면서 사비를 털어 장학금으로 쾌척하는 등 후학을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최초로 묻힌 유일한 외국인이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고 독재 정권에도 항거했으며 1970년 지갑과 여권만을 유품으로 남긴 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훈장(1960)과 건국훈장 독립장(1968)을 추서했다.
◇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국립묘지에 안장된 석호필박사 ⓒ 연합뉴스 |
석호필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온통 마이클 스코필드의 정보만 인터넷을 점유하고 있지만 똑같은 이름의 석호필이 3.1절을 맞이해 재조명되면서 서구화 개인화 되는 21세기의 대한민국 국민 가슴에 시누대처럼 시퍼런 애국심이 돋아나길 바란다.
3.1절 이날 만큼은 태극기에 경건한 마음을 담아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과 의지로 지켜온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잠시 순국선열들을 위해 작은 기도라도 올려보자./ 김선영 기자
3.1운동의 성지 제암교회와 석호필 박사 석호필 박사가 촬영한 제암리 현장 일본의 잔학성은 독일 나찌보다 더 했다. 이 날은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일본 군대와 경찰들에 의해 제암리 주민들이 총칼에 찔려 입구에 태극기와 프랑카드가 게양되어 있어 3.1절 분위기가 난다. 제암교회의 입구 맨 앞쪽 중앙 쯤 되는 위치에 '3.1운동 순국 기념탑'에는 다음과 같이 일제의 잔학상이 기록되어 있다. 기념탐 그 오른편으로 20년 전에는 보이지 않던 조형물이 보였다. 카메라를 손에 든 석호필 박사(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동상이다. 옆에는 자전거가 한 대 조형물로서 함께하고 있다. 석호필 박사의 동상(전경) 석호필 박사의 동상 옆으로 부가적인 해설이 담겨있는 부조가 있었다. 해당 부조에 담겨있는 내용들을 소개한다. 부조를 바라다 보았을 때 맨 왼쪽으로 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사진을 촬영했다.
내용에는 석 박사의 약력과 업적이 한글과 영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3.1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석 박사가 조사했다는 제암리 대학살의 전말에 대한 보고서 내용이다. 석판화라고나 할까? 그림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기념탑 뒷쪽에는 '3.1정신교육관'이 있다.
(제암교회/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우리 민족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를 안고 있다.
독일 나찌의 전범들을 재판했듯이 일본 천황 및 잔학행위를 한 전범들을 제대로 재판했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매국노들과 일본의 앞잡이들, 하수인들에 대한 명확한 재판이 있었어야 한다. 1945년 5월 8일 항복한 독일의 경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 평화를 깨뜨리고 특정 민족을 잔인하게 대학살한 아돌프 히틀러에 대하여 1945년 11월 20일 부터 열린 국제군사재판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형법 제250조 전체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그나마 독일의 역사를 바로잡기에 그 기초를 다졌다. 현재까지도 도피 중인 전범들을 공소시효없이 추적하여 단죄 중이다 그 결과 일본과는 달리 국제사회에 대한 반성을 천명하였고, 진정한 명예를 되찾고 선진국 대열에서 떳떳하게 활동한다 지금도 독일의 총리들은 국제사회에 대하여 자신들의 역사적 잘못을 인정하고 명확하게 사과를 표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지도자들은 102년이 지난 지금도 정반대다.
한국 독립을 위해 뛴 푸른 눈의 사업가, 조지 쇼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조지 루이스 쇼(이하 '조지 쇼' 또는 '쇼')는 아일랜드계와 일본계의 혼혈 영국인 기업가였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조선인의 망명 계획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1963년에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외국인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아일랜드와 조선 비극의 아일랜드 식민지史… 英착취로 200만명 굶어죽어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와 연락을 긴밀히 하기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국내로 드나드는 요충지인 단동에 교통국 지부를 개설했다. 이 교통지부가 바로 조지 쇼가 운영했던 이륭양행 건물 2층에 있었다. 임시정부의 교통국 지부이자 비밀아지트였던 조지 쇼의 이륭양행 /출처='인간적인 책' 실패하기는 했지만, 1919년 11월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망명 계획도 이륭양행을 통해 진행되었다. 대동단* 총재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쳤던 동농 김가진도 임시정부에 가담하기 위해 상해로 갈 때 조지 쇼의 배를 타고 망명할 수 있었고, 의열단의 김원봉이 거사를 위해 무기를 국내로 밀반입할 때도 조지 쇼가 적극 도왔다. 외국인이었던 그가 운영하던 회사와 선박은 치외법권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권한이 미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 * 대동단: 1920년 2월 전협·최익환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대동신문>을 비밀히 발간하는 한편, 전 법부대신 김가진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구한국의 왕족 의친왕을 국외로 탈출케 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추대함으로써 외교적 효과를 얻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김가진은 먼저 상해로 출발하고 의친왕은 상복으로 가장, 만주의 안둥까지 갔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대동단 사건). 의친왕 이강(왼쪽), 의친왕이 탈출한 대동단 사건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1920년 6월 30일자 지면. /조선일보 DB 사진= 서대문형무소 /조선일보 DB 안둥으로 돌아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그는 환영 만찬에서 "일제의 체포와 구속에 결코 위축되지 않고 앞으로도 정의를 위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1921년 1월 그가 상해를 방문했을 때 한국 임시정부는 대규모 환영 집회를 열어주었다. 쇼는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다"라고 말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수여한 공로 훈장(금색공로장)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일제는 쇼를 탄압하기 위해 그의 일본인 처남을 동원해 이륭양행 인수를 기도하고 쇼의 압록강 항로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경쟁사를 지원하기도 했으나 쇼는 영국총영사관 등을 이용해 굴하지 않고 싸워나갔다. 일본 제국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며 평생을 항일운동에 바쳤던 조지 쇼는 놀랍게도 일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도, 부인도 모두 일본인이었고 며느리까지 일본인이었다. 후대에 와서 조지 쇼의 아내는 일본인 여성 사이토 후미였고, 중국인으로 알려져 있었던 조지 쇼의 어머니가 사무라이 집안 출신의 일본인임이 밝혀졌다. 또한 쇼의 아들 역시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결혼증명서를 통해 밝혀졌다. 그의 아내 사이토 후미도 후에 남편을 도와 항일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여시동 '인간적인 책', 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3) 건국훈장 독립장 정장 /국립중앙박물관 50년 만에 수여된 '건국훈장 독립장' 2015년, 독립기념관 선정 '4월의 독립운동가' 또, 쇼가 세상을 떠난 지 72년이 지나고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인 2015년, 8월 12일에 쇼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시와 외고손녀 조지아 사시가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두 사람은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을 참배하고, 청와대 오찬에도 참석했다. 레이첼은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한국 독립에 힘을 보탠 선조가 대단히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시(가운데)와 외고손녀 레이첼 조지아 사시(왼쪽)가 2015년 8월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가족과의 오찬에 참석해 앉아 있다. /연합뉴스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03/2016060300951.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