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구한말·일제강점기에 만든 태극기 3건 지정 예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만든 태극기와 광복군 유물 등 항일독립운동사 유산들이 대거 국가보물과 근대문화재가 된다.문화재청은 12일 열린 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 회의 결정에 따라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1880년대의 ‘데니 태극기’와 1919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 진관사 태극기’, 1941년 애국지사 백범 김구가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은 ‘김구 서명문 태극기’를 국가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이날 발표했다.또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의 ‘서명문’과 ‘축하문’ , 광복군 기관지 <광복> (光復) , 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 ,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를 근대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데니 태극기’는 1886~1891년 조선 정부의 외교·내부 고문을 지낸 미국 외교관 오웬 니커슨 데니 (1838~1900)가 1891년 1월 귀국하면서 가져갔다가 1981년 후손이 한국에 기증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로 182.5㎝, 가로 262 ㎝로 현재 국내에 전하는 옛 태극기 가운데 가장 크다. 데니가 조선에 머무른 마지막 해인 1890년이 제작 하한연대로 추정되는데, 현재 실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여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쪽은 “1882년 국기를 제정해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조선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증명하는 유물이자 , 일제강점기 독립 열망의 상징이 된 태극기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점과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큰 태극기라는 점 등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아 보물로 지정할 사유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세로 44.3㎝, 가로 62㎝ 크기의 작은 태극기다. 1 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김구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묵서 글귀 143자를 적어 현지에 전도사로 와있던 벨기에 신부 샤를 메우스에게 준 유물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메우스 신부는 독립지사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에게 태극기를 전했고 , 이를 후손들이 보관하다 ‘안창호 유품 ’ 중 하나로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19세기 ~20세기 초 제작 태극기 중 정확한 제작 시기와 전래 경위가 알려진 유일한 유물이며, 1942년 6월 임시정부가 제작 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제작되어 태극기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정보를 주는 자료로도 평가된다.
서울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
‘진관사 태극기’는 지난 2009년 5월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 내부 벽체를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국내 사찰에서 처음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 ,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에서 주요 거점 구실을 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사례란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큰 유물로 꼽힌다.문화재청은 지정 예고된 3건의 태극기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 의견을 듣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이밖에 지난 6월 근대문화재 등록이 예고됐던 ‘서윤복 제 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 메달’과 ‘공군사관학교 제 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이날 문화재 등록이 확정됐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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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07472.html
1919년 3월 1일 온 국민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칠 때에도, 광복의 기쁨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빌 때에도, 우리 야구가 세계를 제패하고,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에도, 우리 곁에는 언제나 태극기가 있었다. 이렇듯 태극기는 1883년 국기로 제정된 이후, 130여 년의 세월을 대한민국과 함께 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원장 이상진)은 태극기의 국기(國旗) 제정(1883.3.6.)을 계기로, 3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민족의 얼과 염원 담은 태극기의 변천사 한눈에 본다”로 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17일부터 누리집(http://www.archives.go.kr)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 편집자주
이번에 제공되는 기록물은 총 45건(동영상 5, 사진 21, 문서 4, 우표 · 엽서 · 포스터 6, 유물 9)으로, 태극기의 변천과정과 국경일 및 기념일 등 각종 행사에 사용되었던 태극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번 기록물에는 국가기록원 소장 기록물뿐만 아니라 독립기념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기록물도 포함되어 있다.
임시정부 ·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1921년, ⓒ독립기념관)
특히, 서비스 기록물 중 미국정부가 한국인의 독립투쟁 의지를 기념하기 위해 1944년 발행했던 태극기 우표와 광복 1주년을 맞아 발행된 기념우표 및 엽서가 눈에 띈다. 또한, 광복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선거인 5·10 총선거 포스터에는 ‘기권은 국민의 수치,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라는 표어와 함께 태극기가 실려 있어 선거권 행사를 애국심 차원으로 연결시킨 점이 특이하다.
- 태극기(‘63), 북녘에 태극기를(’71), 가장 오래된 태극기(‘81) 등 동영상 5건
- 서울 수복 후 태극기 게양(‘50), 3.1절 행사 태극기 입장(‘52),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56), 휴전선 대성동마을 태극기 게양(‘71) 등
사진 21건 - 대한민국 국기제정에 관한 건(‘49), 국기게양방법(’50) 등 문서 4건
- 광복 1주년 기념우표(‘46), 태극기 달기 특별기간 포스터(’98) 등 우표·엽서·포스터 6건
- 데니 태극기(1890년 경),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45) 등 유물 9건
5·10 총선거 포스터
(1948년, ⓒ국립민속박물관)
우리나라의 국기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사용되었던 국기 형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882년 9월에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으로 가던 중, 배 위에서 ‘태극 · 4괘’ 도안의 기(旗)를 만들어 사용했고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1883년 3월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 · 4괘’ 도안의 기를 국기로 제정 · 공포했다. 하지만 당시 국기제작에 관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태극기는 다양한 형태로 제작됐다.
실제로 고종의 외교고문이었던 데니(Owen N. Denny)가 소장했던 태극기(1890년 경)나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했던 태극기(1907) 등 광복 이전의 태극기를 보면 태극의 문양과 괘의 위치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원복 태극기(ⓒ독립기념관):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이 일본군과
싸울 때 지녔던 태극기로, 상단에 ‘불원복(不遠復, 조국의 국권을 곧
회복할 것이다.)’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1945년, ⓒ독립기념관) : 광복군 대원으로
활약한 문수열이 전우 이정수에게 선물 받은 태극기로, 태극기 흰 면
에는 광복군 대원 70여명의 친필이 적혀 있다.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1950년, ⓒ독립기념관) : 6.25전쟁
에 참전한 건국대학 법률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서명한 태극기이다.
태극기에는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용맹한 우리 역군’ 등의 글귀가
담겨 있다.
광복 이후,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국기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하여 오늘날의 「국기제작법(문교부고시 제2호)」을 확정했고, 1972년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실시했으며, 현재는 2007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에 의해 국기에 관한 사무 전반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인 태극기는 구한말 이후 국권회복과 대한독립의 굳은 염원과 결의를 보여주었다. 또한 정부수립 이후에는 국경일과 국가행사에 게양되었으며, 올림픽 · 월드컵 등 국제경기에서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은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 조국의 국권을 곧 회복할 것이다)’이라는 글자를 새기며 조국의 국권 회복을 기원했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1921년 신년축하식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며 대한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또한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입단 기념촬영에도 태극기는 어김없이 광복을 향한 염원의 상징으로 함께 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선수촌 입촌식(1948년, ⓒ독립기념관)
서울 수복 후 태극기 게양(1950년)
제15회 광복절 기념 시가행진(1960년)
휴전선에서 광복절 기념 대형 태극기 게양식(1962년)
제5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태극기 카드섹션(1966년)
광복 이후에도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3·1절 및 광복절 행사 등 정부의 주요 행사에 태극기가 게양됐고, 경축 시가행진을 할 때에는 맨 선두에 대형 태극기가 등장하며 행사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한편, 6.25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국군은 태극기 위에 승전을 다짐하는 글귀를 새기며 조국수호의 의지를 불태웠고, 서울을 수복했을 때에는 구(舊) 중앙청 건물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기쁨을 함께 했다.
또한, 태극기는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의 온몸에 휘감기며 환희의 상징으로 사용됐고, 선수들의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한 응원의 도구로도 한 몫을 담당했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가로 60m, 세로 40m의 초대형 태극기가 경기장 응원석에 휘날리며 모든 국민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카자흐에 특사파견
1등급 대한민국장 추서…특사단에 '암살' 출연 배우 조진웅 포함
16∼17일 국민추모 기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 안장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서울=연합뉴스)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광복절인 15일 저녁 한국으로 돌아온다. 2021.8.12 [김진석 작가 사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scoop@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범현 임형섭 기자 = 올해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이뤄진다고 청와대가 12일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위해 오는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한다.
특사단에는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민주당 우원식 의원과 이번에 '국민대표'로 선정된 배우 조진웅 씨가 포함됐다.
조진웅 씨 파견은 영화 '암살'과 '대장 김창수'에 독립투사의 역할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긴 점이 고려됐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광복절인 15일 저녁 한국에 도착하며, 16일과 17일 이틀간의 국민 추모 기간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특히 정부는 이번 유해 봉환에 맞춰 홍범도 장군에게 애국심 고취 및 민족 정체성 함양 등의 공로를 인정해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홍범도 장군은 1962년 2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유해 봉환은 16∼17일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에 맞춰 성사됐다. 홍범도 장군은 현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돼 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4월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당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가 협조할 것을 약속해 양국이 실무협의를 진행해 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SNS에 올린 글을 통해 "독립군을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라며 "코로나19 때문에 늦어졌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지난해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추진됐으나, 코로나19로 인해 1년가량 연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홍범도 장군은 101년 전인 1920년 최진동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뒀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유해 봉환은 80여년간 이어 온 양국의 우정을 되새기는 기회"라며 "카자흐스탄에 남은 홍범도 장군의 묘 역시 지속적으로 관리되도록 양국이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민족이 독립운동사의 영웅으로 기리고 있는 분인 만큼 최고의 예우를 다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kbeom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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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
[문화재방송(www.tntv.kr)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