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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문화재청이 선정한 우리나라 역사속 10대 미인 /세기의 미인 황후 시씨 / 클레오파트라의 실제 얼굴

문화재방송 2021. 11. 6. 00:07

오늘날 미인(美人)이라 함은 얼굴이나 몸매가 빼어난것을 의미하지요 그러나 옛날에는 외적(外的)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내면(內面) 아름다움(眞, 善, 知慧)이야 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여겼어요 타고난 끼와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당당하게 살아온 절세미인이야 말로 몇백년 아니 천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들을 진정한 미인으로 추앙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미인박복(美人薄福)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그런지 미인들이 겪은 사연도 구구하지만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어요 여기 문화재청이 선정한 우리나라 역사속 10대 미인들을 소개 올리도록 할께요

1. 관나부인(貫那夫人).

고구려 중천왕의 소실로 관나부인(貫那夫人)이 있었어요 본명은 전해지지 않으나 다만 '관나부인'이라는 호칭으로 전해질 뿐이지요 이로 추측해 보건대 아마도 고구려 5부중 하나인 관나부(貫那部)출신인것 같아요 기록에 따르면 관나부인은 길이가 9자나 되는 장발을 지니고 있었으며 얼굴과 몸매가 유난히 아름다웠지요 거기다가 색끼마져 타고나 중천왕이 장차 소후(小后)로 삼으려고 하였어요 이에 왕후 연씨가 질투심을 느껴 관나부인을 모함하였지요 "지금 위(魏)나라에서 천금을 주고 장발을 구한다 하니 장발미인을 위나라에 보내면 다시는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중천왕은 왕후가 관나부인을 질투하고 있는 속뜻을 알고는 이를 무시하였어요 그런데 관나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는 왕후가 자신을 해칠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먼저 선수를 쳐서 왕후를 음해할 계획을 세웠지요 왕을 찾아간 관나부인은 교태를 부리며 "왕후가 궁에서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며 "왕께서 궁궐을 비우시면 그 틈을 타서 저를 죽이려 할 것"이라고 고하였어요 그런후 중천왕이 사냥을 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가죽 주머니를 준비해 두었다가 왕이 돌아오자 "왕후가 이 가죽 주머니에 저를 담아 바다에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이대로는 무서워서 왕을 섬길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자 화가난 중천왕은 관나부인을 잡아와 "네가 바다 속에 들어가기를 원하였느냐?"라고 말하고는 관나부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대로 가죽 주머니에 담아서 서해 바다에 던져 죽게 만들었지요 그래서 여인들의 지나친 시기와 질투는 죽움을 부르기도 했어요

2. 도미(都彌)의 처(妻).

▲ 절개를 지킨 도미의 처 ... (서울 천호동 녹지공원 도미부인상)백제 도미 공 도미부인 지묘

도미(都彌)는 백제(百濟)사람인데 비록 소민(小民) 이었지만 의리와 법도를 지키며 의롭게 살았어요 그런 그에게 천하절색의 처자가 있었는데 아름답고 행실이 좋다는 소문이 자자했지요 어느날 개루왕(蓋婁王)이 이 소식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되 "자네 부인의 덕이 정결(貞潔)하다 하나 여자란 으슥한 곳에서 수작을 걸면 마음이 변하는것이다"라고 하자 도미가 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수 없으나 소인의 아내는 죽을망정 절개를 지킬것입니다" "허허 그리 장담할수 있느냐? 그럼 지금부터 내가 자네 처를 시험해 보겠노라" 하면서 도미를 궁에 잡아두고 측근을 시켜 왕의 의복을 갈아 입힌뒤 말을 태워 그 집에 이르러 도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익히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처자를 취하고자 이리 왔노라 오늘밤 이곳에 머물고 내일은 너를 데리고 궁(宮)으로 돌아가 후궁으로 삼으리라" 하였지요 그러자 그 아내가 아뢰되 "왕의 말씀을 내 어찌 어기리까.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드소서 소첩은 단장하고 들겠사옵니다" 하였어요 그러고는 여종을 단장(丹裝)하여 들여보냈지요 다음날 개루왕은 왕을 기만한 죄를 물어 도미의 두 눈을 빼고 배에 태워 강에 띄웠어요 그리고는 그 아내를 잡아와 수청을 들라 하였지요 그러자 "내 이제 남편을 잃었는데 누구를 의지하오리까. 또한 하늘같은 대왕의 청을 어찌 어기리까. 마침 몸이 더러웠으니 목욕재개하고 들겠사오니 기다려 주옵소서"라고 하였어요 그러자 개루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다려 주었지요 그렇지만 그 아내는 그 틈을 타 생사를 걸고 도망하여 강가에 이르러 통곡하였어요 그런데 별안간 배 하나가 다가와 그를 싣고 천성도(泉城島)에 가서 남편을 만났는데 그길로 고구려(高句麗)로 도망처 살았다고 하지요 이처럼 절세미인이지안 기지를 발휘하여 절개를 지킨 여인도 있어요

3. 신라의 희대의 요부 미실(美室).

신라때 미실(美室)이란 여인이 있었는데 희대의 요부였어요 신라왕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동륜) 그리고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무려 8명을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여인이 미실(美室)이었지요 화랑세기는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있고 세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는 기록으로 미실(美室)(549~606)의 뛰어난 용모와 관능적인 음행(淫行)를 지적했어요 대원신통(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여성집단)인 미실은 미진부(未珍夫)의 딸로 어머니 옥진으로부터 ‘남자를 죽이는 방사(房事)술'을 배웠지요 그로인해 절세의 미모와 절정의 색공(色功)을 갖춘 음녀(淫女)가 되었어요 미실의 첫번째 남자는 6세 풍월주인 세종이었지요 어찌나 천부적인 방사술로 세종을 홀려놨는지 화랑세기는 ‘세종이 깊이 빠져들어 거동을 못했다’고 전하고 있어요 그러나 왕실 여인들의 세력다툼에 밀린 미실은 궁에서 쫓겨나고 말지요 왕실에서 쫏겨난 미실은 곧 사다함(5세 풍월주)을 만나지요 둘은 미실의 농염한 몸짓에 밤낮없이 음행을 즐겼어요 하지만 사다함이 대가야 정벌전에 출전하게 되어 아쉽게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 사이 그를 왕실에서 쫓아냈던 지소태후가 다시 입궁을 명하였지요 원 남편인 세종이 그만 상사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어요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떠난 것을 알고는 상심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으로 죽고 말지요 미실은 이때부터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아들인 동륜태자를 꾀어 아이를 임신했으며 진흥왕마저 사랑의 노예로 만들었어요 그런 다음 동생인 미생랑(10세 풍월주)과 설화랑(7세 풍월주)마저 성의 노예로 만들었지요 미실은 개에게 물려 죽은 동륜태자의 뒤를 이어 태자가 된 금륜(훗날 진지왕)과 정을 통했으며 진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진평왕(재위 578~632)에게도 이른바 신국의 도, 즉 성교육을 시켰어요 이처럼 인륜을 넘나들며 성적 욕망을 채웠던 미실은 가히 천하의 요부(妖婦)라 아니할수 었지요 그러나 ‘신라 여인천하의 상징’인 미실은 수기 700편을 남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으며 전장으로 떠나는 애인 사다함을 위한 향가 ‘출정가’를 짓기도 하였지요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진흥왕까지도 미실과의 색사(色事) 끝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고 하니 가히 미실의 방중술은 천하 제일이 아닐수 없지요 이처럼 천하의 요부(妖婦)는 절대 한남자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했나봐요

4. 선화공주(善花公主).

선화공주(善花公主)는 신라 진평왕(新羅 眞平王)의 셋째 딸로서 미모가 탁월하였다고 하지요 이 예쁜 공주에게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에 ‘마를 캐는 아이(薯童·서동)’라고 불린 소년이 있었지요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던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갔어요 첫눈에 반한 그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결심하고 계략을 꾸몄어요 ‘선화공주는 남몰래 밤마다 서동을 만난다’는 가사의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동네 아이들이 부르도록 하였지요 결국 이 노래를 들은 진평왕은 공주를 귀양 보냈고 궁 밖에서 기다리던 서동은 그녀를 맞이 했어요 신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서동은 훗날 백제(百濟) 무왕(武王)의 위에 오르게 되었고 선화공주(善花公主)는 황후(皇后)가 되었지요 이처럼 절세미인에게는 짝이 따로 있는지도 몰라요

5. 수로부인(水路夫人).

수로부인(水路夫人)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전하는 미인으로 신라 향가 해가(海歌)와 헌화가(獻花歌)의 주인공이지요 이 중 ''해가''의 내용에 따르면 수로부인(水路夫人)의 용모는 세간에 견줄이가 없어 산이나 못을 지날 때면 갖가지 신물(神物)들에게 붙들림을 당했다고 하지요 한번은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던 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어요 이때 수로부인이 벼랑에 핀 척촉(躑躅,진달래꽃)을 갖고 싶어 했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마침 암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이를 꺾어 주면서 《헌화가》를 지어 바쳤다고 하지요 그런데 수로 부인이 임해정(臨海亭)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 부인을 바닷속으로 끌고 갔어요 그때 한 노인이 순정공에게 "근처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부르게 하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이 나올 것이다"고 하여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로 부인이 나왔다고 하지요 이처럼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가끔 산과 바다를 지날때면 신들도 수로부인의 미모에 반해 여러번 신물(神物)에게 붙잡혀 갔었다고 하네요 신들 까지도 흡모한 수로부인의 미색은 어느정도 였을까요?

6. 기황후(奇皇后).

기황후(奇皇后)는 고려(高麗)사람 자오(子敖)의 딸로서 공녀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건너간 뒤 제2황후에까지 책봉된 미녀이지요 원나라는 해마다 고려에서 공녀를 차출해갔어요 목은 이색은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실정이었지요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고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의 친정 부모를 위로하였어요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하였지요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는 원나라생활을 하면서 부처에게 많은 기도를 하였어요 그러자 고려인 출신 내시 고용보(高龍普)를 만나게 되었지요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필요했어요 뛰어난 미모에 총명하고 타고난 색끼까지 있었지요 기씨 소녀라면 황제 원 혜종을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혜종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어요 그러던중 그 특유의 미모를 발판으로 승은을 입게 되어 원 혜종의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어요 1339년 기씨가 황태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達獵)를 낳자 이듬해 제2황후에 책봉되었지요 그러나 1366년 명나라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에게 연경이 함락되자 기황후(奇皇后)는 몽골 내지로 쫓겨 갔고 그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지요 한때는 자신의 고향인 고려를 쥐락펴락하던 당대의 미인중의 한명이었어요

7. 어우동(於于同).

본명은 박어우동(朴於宇同)이지요 가족으로는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 어머니는 정귀덕(鄭貴德). 오빠는 박성근(朴成根) 이었어요 조선시대 당시 금기에 가까운 간통사건을 일으켰기에 가문에서 파문되어 성을 뺀 어우동(於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지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뒤 왕손인 종실 태강수(泰康守) 이강와 혼인을 했는데 태강수 이강은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타고난 미색은 있었으나 시집간지 얼마않되어 방사에 미흡했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이동은 이혼할 속셈으로 아내 어우동이 집에 온 은장이와 바람이 났다고 모함했는데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져서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를 실행치 않고 오히려 어우동을 내쫏았어요 황당하게 소박을 맞고 홀몸이 된 어우동은 그때부터 결심하였지요 이왕 이렇게 된거 남자를 사귀라고 옆에서 꼬드긴 여종도 있었어요 어우동은 남편에게 복수하는 길은 많은 사람들과 정분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수산수, 방산수를 비롯한 왕족들, 과거 급제자 홍찬 등 양반들 그 외에 양인과 노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애정 행각을 벌였어요 그러다 보니 몸은 더욱 뜨거워 지고 남자없이 못자는 음녀(淫女)가 되었지요 꼬리가 길면 밟피는법 어우동과 간통을 한 촌부가 치졸하게 간통사실을 승정원에 신고했어요 그로인해 옆에서 꼬드긴 여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지요 그러나 어우동은 간통죄가 아니라 강상죄로 처형되었는데 강상죄는 패륜이나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 처벌받는 엄청나게 무거운 중벌이었어요 양반집안 출신의 여성이 양인을 비롯한 천민과 노비 십여명과 정을 통한 희대의 간통사건이라 사회의 파문이 컸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가 남긴 시와 작품은 파괴되거나 불태워졌으며 유감동, 황진이, 허난설헌, 이구지, 대방군부인 송씨 등과 함께 오랜시간 동안 부도를 어긴 여성으로 매도당해 지탄을 받아 왔어요 또한 장녹수, 문정왕후, 장희빈 등과 함께 조선의 악녀로 비판 받아 왔지만 마침내 1910년에 대한제국이 망하고 나서야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지요 그의 대표작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를 남겼는데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낙화암 선 지도 참으로 오래겠지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는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리

8. 장녹수(張綠水).

장녹수(張綠水)는 본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종이었지만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도 능해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숙원(淑媛)에 봉해졌지요 외모 자체는 평범하여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지만 몸매가 탁월하고 엄청난 동안(童顔)이라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10대 소녀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하지요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다고 하는데 연산군의 아명(兒名)을 부르며 데리고 놀았는데 때리고 꼬집고 조롱했다고 하니 어떤식으로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추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지요 하지만 그가 왕(王)의 총애(寵愛)를 이용하여 국사에 간여하며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을 부추기자 뒤이어 일어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참형을 받았어요 그래서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 했나봐요

9. 황진이(黃眞伊).

황진이(黃眞伊, 1506년? ~ 1567년?)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지요 중종·명종때(16세기 초, 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明月)이었어요 중종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아요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렸지요 황진이는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어요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였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지요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失傳)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대부분 멸실되었어요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하였지요 그는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어요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야사(野史)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오지요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 《영초월시(?初月詩)》等 수많은 작품과 시조를 남겼어요 지금도 풍월을 좋아하는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황진이 사내라면 한번쯤 품고 싶은 희대의 절세미인 이었지요

10. 장희빈(張禧嬪).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1701년) 장희빈(張禧嬪))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지요 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이었어요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본관은 인동(仁同)이지요 아버지는 역관(驛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인 윤씨였어요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적인 여인이지요 희빈 장씨는 본래 소의(昭儀)의 신분에 있었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보지 못한 숙종의 총애를 받아 원자 균(훗날 경종)을 낳으며 희빈으로 책봉되었지요 그리고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사사되고 남인이 집권하자 장희빈(張禧嬪)은 인현황후(仁顯王后)를 폐출하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어요 하지만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에 성공하자 인현황후(仁顯王后) 민씨가 복위되며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지요 이를 시기한 장희빈(張禧嬪)이 밤마다 저주를 내렸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사사되었어요 인현왕후전이나 수문록 등의 소설 야사에서는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숙종실록 등 정사기록은 주례의 규정에 따라 사사할수 없음을 언급하고 목을 메어 자결하였음을 알수 있는 기록들이 있지요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다시 황후로 복권되었지만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사망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가 즉위하자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을 위시한 노론인들이 또 폐위하였어요 아무튼 죽어서도 편치않은 삶을 살다간 비운의 여인이었지요 -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조동렬(일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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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v.daum.net/v/20200715090604020

 

신데렐라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오스트리아가 사랑하는 '세기의 미인' 황후 시씨

"어떻게 그런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분이 황제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로부터 황제이자 이종사촌인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1830~1916)와 결혼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시씨(Sissi)는 진정으로 기뻐했다. 너무나 잘생기고 친절한 청년 아닌가? 다만 본능적으로 그녀는 두려웠다. 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이. 그러나 왕관의 무게를 느끼기에는 너무 어렸다. 시씨는 막 열여섯 살이 된 소녀에 불과했다. 원래 황제의 배필로 내정된 사람은 친언니 헬레네였다.

황제와 헬레네는 1853년 8월 황실 휴양지인 바트 이슐에서 만나 약혼할 예정이었다. 정확하게는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헬레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여동생 시씨를 동행시키면서 모든 일이 엉클어졌다. 황제가 첫눈에 시씨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황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결정에 반항하며 시씨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조피는 당황했으나 시씨도 자신의 조카딸이니 황제가 원하는 결혼을 시켜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만난 지 3일 만에 약혼했고, 결혼식은 다음 해인 1854년 4월 24일로 잡혔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씨는 남은 9개월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과 궁정 예법을 익혀야 했다. 자유롭게 자란 시씨에게 예비 황후 교육은 힘겨웠다. 그녀는 어렴풋이 '불행'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며 애써 그 단어를 지웠다. 그녀는 황제의 사랑을 굳게 믿었다.

빈이 자랑하는 '세기의 美人'

빈은 문화와 예술, 역사를 파는 도시다. 에너지 음료 레드불과 크리스털 전문 기업 스와로브스키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세계적 브랜드가 없는 오스트리아가 여전히 부자인 이유다. 그런 만큼 빈의 콘텐츠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음악으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부자(父子)가 있다. 비발디, 말러, 쇤베르크, 카라얀 등은 시대를 초월하는 대가(大家)이지만 이 도시에선 명함 내밀기가 망설여진다. 미술로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오스카어 코코슈카가 있고, 건축으로는 오토 바그너와 아돌프 로스가 있다. 정신의학의 아버지 프로이트, 대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작가 호프만슈탈과 츠바이크도 빈의 자식들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600년 수도였으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명단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뜻밖의 인물, 바로 시씨라는 여인이다.

이미지 크게보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였던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왼쪽). ‘시씨’라는 애칭으로 더욱 친숙하다. 오른쪽은 시씨 박물관이 있는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 /게티이미지코리아

그 증거가 호프부르크(Hofburg)에 자리 잡고 있는 그녀만을 위한 박물관이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궁(本宮)이다. 조선왕조의 경복궁인 셈이다. 시씨는 황후였다. 제국의 주인인 황제도 아니고, 합스부르크 왕조 출신도 아니었다. 그런 그녀만을 위한 박물관이 호프부르크에 있는 것이다. 그 어떤 황제도, 심지어 마리아 테레지아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영광이다. 도대체 왜? 그녀의 인생이 갖는 비극적인 마력(魔力) 때문이다.

링 슈트라세를 사이에 두고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과 마주 보고 있는 영웅광장과 맞닿아 있는 거대한 건축군(群)이 호프부르크다. 방의 수만 2600개에 이른다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중심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중정(中庭)이 나온다. 한가운데 로마 황제를 흉내 낸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 황제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다. 궁과 바깥을 연결하는 문들의 좌우에는 그리스신화의 가장 인기 있는 주인공, 헤라클레스의 업적을 나타내는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시씨 박물관은 바로 이곳에 위치해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빠져든다.

어긋난 황제의 사랑과 황후의 自由

프란츠 요제프 황제(위 사진)와 시씨 박물관. /위키피디아

'시씨'라는 애칭으로 더욱 잘 알려진 그녀의 본명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Elisabeth von Wittelsbach·1837~ 1898)다.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였던 뮌헨에서 비텔스바흐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왕가의 방계였던 탓에 시시는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포센호펜성(城)에서 자유롭게 자랐다. 그녀의 운명은 언니를 따라갔다 만난 사랑 때문에 뒤바뀌었다. 사랑이란 마법에 사로잡힌 그녀는 황제 한 사람만을 믿고 자유로운 일상과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어린 소녀를 낯설고 엄격한 빈으로 데려왔으면서 정작 그녀에게 '사랑'을 보여주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새벽에 일어나 잠드는 시간까지 국사(國事)에 매달려야 했다. 제국은 넓고 할 일은 많았으며, 성실한 황제는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그녀는 비정한 궁정 사회에 홀로 남겨졌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는 자신을 향한 궁정 귀족들의 멸시와 질투를 온몸으로 느꼈다.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귀족들에게 그녀는 바이에른에서 온 촌뜨기, 자신들의 우상인 황제를 앗아간 연적(戀敵)에 불과했다. 이모이자 시어머니인 조피의 간섭은 둘의 결혼 생활을 더 힘들게 했다. 조피는 손주들을 데려다 자신이 직접 길렀고, 시씨가 아이들을 만나는 것조차 허락을 받도록 했다. 빈은 그녀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 되어 갔다.

死後에도 누리지 못한 자유

황후는 빈에서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마음의 상처는 서서히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침이 나고 몸이 아팠다.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눈빛은 생기를 잃었다. 그녀는 건강 회복을 이유로 여행을 떠났고, 황제는 마지못해 황후의 여행에 동의했다. 시씨는 포르투갈에서 지중해의 코르푸섬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을 여행했다. 1889년 1월 30일 아침, 시씨에게 외아들이자 제위(帝位) 계승자인 루돌프가 빈 근교 마이어링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를 닮아 열정적이고 자유주의자였던 루돌프는 궁정의 억압적 분위기와 완고하게 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황후는 검은 상복을 입고 유럽을 떠돌았다. 마치 유령처럼. 그렇게 방랑하기를 십 년. 1898년 9월 10일, 시씨는 스위스 제네바의 호숫가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의 칼에 맞아 숨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처구니없고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자신을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살인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마리 발레리 공주)는 측면에서 보면 시씨의 죽음은 자살에 가까웠다. 황후의 살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세상은 알지 못할 거야." 측근이 들었다는 이 황제의 독백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다만 황제가 줄 수 있는 사랑과 황후가 꿈꾸던 자유가 같은 계절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했을 뿐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와 행복이 달랐기 때문에.

시씨는 생전에 그러했듯이 사후(死後)에도 빈을 떠나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여행했던 곳 중 가장 아름다웠던 그리스의 코르푸섬을 마지막 안식처로 정했다. 자유는 사후에도 주어지지 않았다. 황실은 그녀를 빈 황실 전용 묘에 안치했다. 그녀에게 합스부르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족쇄였던 것이다.

시씨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장소는 호프부르크지만, 그녀를 추억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장소는 빈 시민공원 후미진 곳에 있다. 그곳에는 시씨의 기념 동상 하나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다. 동상은 사진 속 그녀처럼 단아하고 고요하다. 이곳에선 볕이 들면 화단의 꽃이 만발하고, 볕이 지면 그녀의 고독이 피어오른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권력일 수도, 재산일 수도, 명예일 수도,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시씨는 그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행복한 적이 없었다.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빈에 올 때마다 이곳을 들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유의 가치를 되새긴다. 시씨가 직접 지은 시(詩)의 한 구절과 함께.

'그리고 하릴없이 이 거래를 저주하고 있다. 자유를 맞바꾼 이 거래! 자유, 너를 잃어버린.'

시씨의 헝가리 사랑… 동병상련? 백작 때문?

헝가리 민족지도자 줄러 언드라시.

시씨의 헝가리 사랑은 유명했다. 이유는 뭘까? 자유를 사랑하고 기질이 억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헝가리의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헝가리의 말과 역사를 배웠고 헝가리 자유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헝가리의 민족지도자인 줄러 언드라시(Gyula Andra ssy· 1823~1890) 백작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워낙 친밀해서 온갖 루머가 떠돌았다. 정말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어쨌든 시씨는 남편인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수립에 기여했고, 언드라시는 헝가리 왕국의 총리대신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대신을 오랫동안 지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3/2018082300386.html

 

클레오파트라 실제 얼굴이라는데...

 

으레 클레오파트라라고 하면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비비안리의 이미지를 연상하곤 했는데

특히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맡은 클레오 파트라는, 생전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등,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아주 예쁜 이미지였는데 말이죠.

각종 문헌이나 자료부터 그림이나 조각 등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실물이라며 각양각색의 모습이 돌아다니고 있는데요.

우리가 여태 생각하던 클레오파트라 이미지와는 상이한, 너무 달라서 놀라울 정도입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가장 근접한 클레오파트라 실물 이미지를 복원했다고 하는데요.

바로 이 모습이라고 하는데 믿어지시나요? 일단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에 가깝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얼굴이 말입니다. 여장 남자인지 남장 여자인지. 무엇보다 예쁘지가 않아요. 참...

환상이 깨진다고나 할까. 정말 클레오파트라 실물 맞나요? 아무튼 인터넷에 클레오파트라 리얼 이미지로 뜨길래 의아해서 올려봅니다.

세기의 미인이란 건 그 시대상을 반영한 주관적 잣대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네요.

출처:

https://blog.naver.com/goodinj/222287543167


'70년 만에 전우 곁으로'…영국군 무명용사 3인 부산에 안장

송고시간2021-11-04 10:09

 

 

김지헌 기자기자 페이지

중국군 저지 글로스터대대 소속 추정…파주 설마리·파평산전투서 전사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국내 발굴 유엔참전용사로는 첫 안장

2016년 06월 경기 파주 마지리 무명243고지 발굴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70년 전 머나먼 이국땅에서 자유진영을 위해 싸우다가 숨진 무명의 영국군 3명이 전우들 곁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11일 유엔 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을 맞아 무명용사 3구의 유해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한다고 4일 밝혔다.

안장되는 3구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2016∼2017년 경기 파주 마지리와 마산리 인근에서 부분 유해로 각각 발굴했다.

한·미 공동 감식 결과 유해의 주인공들은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대대 소속으로 1951년 4월 벌어진 설마리전투와 파평산전투에서 혈전 중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설마리전투는 1951년 4월 22∼25일 설마리 계곡에서 글로스터대대 800여 명이 중국군 3개 사단 4만2천 명의 남하를 막으려 사력을 다한 전투다.

이들은 유엔기념공원 영국군 묘역에 묻혀 꼭 70년 만에 전우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2017년 5월 경기 파주 마지리 무명243고지 발굴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안장식은 '부산을 향하여'(턴 투워드 부산)라는 표어아래 유엔사령부에 근무하는 영국군 장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 운구를 시작으로 하관, 허토, 헌화, 묵념 순으로 진행한다.

안장식 이후 유엔군 전사·실종자 4만896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명비 앞에서 국제 추모식이 이어진다. 오전 11시 정각에 맞춰 부산시 전역에 추모 사이렌이울리고 1분간 묵념하게 된다.

추모식을 처음 제안한 캐나다 참전용사 빈센트 커트니씨가 '전우에게 바치는 시'를 낭독하고,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유엔 참전용사의 헌신을 기억하는 추모 비행을 펼친다.

유엔 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은 2007년 커트니씨가 6·25전쟁 참전 전사자들이 안장된 유엔묘지가 있는 부산을 향해 묵념할 것을 제안한 이래 매년 11월 11일 11시를 기해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올해 행사에는 한국 정부 초청으로 오는 8∼13일 방한하는 8개국 60여 명의 유엔참전용사와 가족들이 함께해 자리를 빛낸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감사 영상 메시지를 보내고 김부겸 국무총리를 비롯해 마르타 루시아 라미레스 콜롬비아 부통령, 마이크 프리어 영국 국제통상부 부장관, 황기철 보훈처장, 각국 주한 외교사절 등이 참석한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했고 1955년 11월 한국 국회는 이곳 토지를 유엔에 영구 기증했다.

1951∼1954년에는 유엔군 전사자 약 1만1천 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었고 이후 7개국 용사 유해가 조국으로 이장되면서 현재 11개국 2천311구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2015년 5월 프랑스군 출신 고(故) 레몽 베르나르씨를 시작으로 6·25전쟁 참전 후 생존해 귀국했다가 숨을 거둔 뒤 유지에 따라 이곳으로 돌아와 묻힌 참전용사 13명도 있다.

보훈처는 영국군 무명용사 안장과 관련해 "비록 신원이 아닌 국적만 확인돼 무명용사로 안장되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엔 참전용사 유해가 국내에서 발굴된 뒤 안장되는 첫 사례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이어 "올해는 대한민국 유엔 가입 30주년과 유엔기념공원 조성 70주년"이라며 "무명용사 안장식과 유엔 참전용사 추모식이 많은 국민의 관심 속에서 유엔 참전용사의 헌신을 기억하고 국제평화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포스터

(서울=연합뉴스) 국가보훈처는 4일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포스터를 공개했다. 보훈처는 오는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영국군 무명용사 3인의 안장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포스터의 양귀비 꽃은 영연방 국가의 보훈 상징으로, 안장되는 3구 유해에 대한 추모의 의미다. [국가보훈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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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na.co.kr/view/AKR20211104059200504?input=1179m

창덕궁관리소,「국립국악원과 함께 창덕궁 풍류」개최 / 11.9.~12 오전 11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소장 문영철)와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이 함께 추진하는 「국립국악원과 함께하는 창덕궁 풍류」가 오는 9일부터 12일까지 매일 오전 11시 창덕궁 후원 가정당에서 총 4회에 걸쳐 펼쳐진다.


  이번 행사는 창덕궁 전문해설사의 깊이 있는 해설과 함께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대조전 권역과 화계(花階, 계단식 화단)를 둘러 본 후 가정당에서  궁중무용과 음악을 관람하는 행사다. 가정당은 일반국민들이 활용할 수 있게 대여가 가능한 궁궐 전각으로 평상시에는 비공개 관람구역이나 이번 행사에 한해 한시적으로 공개한다.   
  * 전각대여: 전각 활용을 위하여 회의·교육·세미나 등 소규모 모임을 위해 개방하는 전각


  오색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후원을 병풍삼아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국립국악원 문주석 학예연구사의 해설과 진행으로 ‘청성곡’, ‘춘앵전’, ‘거문고 산조’, ‘가곡’ 등 우리 음악과 춤의 진수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공연은 3회까지는 만 7세 이상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며, 마지막 회는 다문화가족을 초청하여 평소 접하기 어려운 궁중 무용과 음악을 감상하는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오는 5일 오전 10시부터 ‘11번가 티켓’(https://ticket.11st.co.kr)에서 선착순(1회당 입장 인원 40명)으로 예매하면 되며 관람료는 성인 1명 당 1만 5,000원이다.


  자세한 사항은 창덕궁관리소(www.cdg.go.kr)와 국립국악원(www.gugak.go.kr) 누리집을 참고하거나 전화(창덕궁관리소 ☎02-3668-2300/국립국악원☎02-580-3300)로 문의하면 된다.


  창덕궁관리소는 이번 프로그램 외에도 국립국악원과 협업으로 영상 2편(도살풀이춤 양길순팀, 해금·첼로·피아노 3중주 조은진팀)도 제작한다. 국악인(Gugak in 人) 행사를 위한 이 영상들은 문화재청과 국립국악원 유튜브에 게재될 예정으로, 세계유산 창덕궁의 숨은 아름다움을 널리 알릴 것으로 기대한다.
  * 문화재청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chluvu/featured
  * 국립국악원 유튜브 https://www.youtube.com/user/gugak1951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는 앞으로 유관 기관과의 지속적인 협업으로 문화유산 향유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궁궐이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온 국민이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문화재방송.한국(www.tntv.kr)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방송.한국(www.tntv.kr) 캠페인]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