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에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채만식의 <탁류> 중)
전주와 군산을 잇는 40km의 26번국도, 왕복 4차선 넓은 도로의 이름은 '번영로'이다. 그 길 옆줄지어 늘어선 묵은 벚나무들 사이로 책장이며 의자들을 내놓은 가구점의 이름은 '전군가구'이다. '전군', 이 말은 이제 가게 상호에나 남아있는 잊혀져 가는 말이 되고 있다.
100년 전 일제는 '신작로'를 내며 헐벗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이 길이 '번영'을 줄 것이라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뼛골까지 뽑아가는 수탈'이었다. 수 대째 손발이 부르트도록 돌을 골라내 부쳐 먹던 문전옥답은 신작로로 ‘편입수용’되거나, 일제를 등에 업은 일본인 대지주들에게 헐값에 팔아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점심나절 '식은 겉보리죽 한 그릇'을 받아들고 제 손으로 제 땅을 신작로에 잡아넣는 피눈물 나는 강제노동에도 동원되어야 했다. 가을이면 겨우 건진 몇 줌의 곡식도 '공출'로 뺏기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쌀을 대신해 만주 일대에서 들여온 조를 먹었다. 이마저도 어려워지자 쌀을 살 경우에도 여물지 못한 싸라기 쌀을 사야 했다. 말이나 되로는 어림없고, 대부분이 '됫박쌀'이었다. 그 날 벌어 그 날 사는 힘든 날들이었다.
그렇게 놓인 길이 지금의 번영로가 된 '전군가도'다. 이 길은 일제에 의해 놓인 최초의 포장도로였으며, '수탈의 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벚꽃길이라는 화려한 수식의 꽃그늘 뒤에는 옛사람들의 눈물어린 신작로가 있었다. 이 신작로를 따라 김제만경의 '외들배미' 넓은 들에서 나온 곡식들은 군산항으로 실려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 임피역
주요 농장이 있는 곳마다 수탈 위해 세워졌던 역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든 것이 '신작로'만은 아니었다. 1912년 이리(익산)와 군산항을 잇는 호남선의 지선인 '군산선'이 만들어졌다. 군산선은 주요 농장이 있는 곳마다 역을 만들고 군산 내항까지 깊숙이 철도를 놓아 항구와 철로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쌀을 효과적이고 빠르게 옮기고 반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군산선 중간에 이제는 간이역이 아니라 '문화재'가 되어버린 임피역(등록문화재 제208호)이있다.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기차가 멈춘 임피역은 허리 깊숙이 적막이 진주해 있었다. 인적이끊긴 역무실 한쪽엔 냉장고 크기만 한 검정색 '미나토' 금고가 아직도 육중하게 남아 텅 빈 역사를 지키고 있었다.
1912년에 세워진 임피역은 인근의 가와사키 농장과 조선인 장영규가 운영하던 농장의 쌀들을 군산으로 실어냈다. 인근의 역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군산역에선 미야자키농장과 불이흥업의 대단위 간척농장, 개정역에선 시마타니 농장과 구마모토 농장, 대야역에선 오오쿠라 농장과 아키가 농장, 오산역에선 불이흥업의 전북농장, 이리역에선 동양척식회사 및 오오하시 농장등의 쌀과 곡식을 군산선을 통해 군산항으로 실어 날랐다. 실제로 당시 군산선의 화물목록 가운데 쌀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1910년부터 1935년까지 쌀은 화물의 81%였으며, 1926년의 경우 98.3%가 쌀이었다.
- 발산초등학교
'시마타니 금고'에 수집된 우리 문화재들
임피역에서 차를 타고 10여 분을 가면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에 이른다. 이 학교교사 뒤에는 일본인 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에 의해 건축된 독특한 건물이 있다. 반지하를 포함해 총 3층 높이의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이 건물의 이름은 '군산 구 시마타니 귀중품 창고(등록문화재 제182호)'.'시마타니 금고'로 더 잘 알려진 이 건물은 농장경영으로 쌓은 부를 이용해 문화재 수집에 열을올린 시마타니가 불법적으로 걷어들인 유물들의 안전한(?) 보관을 위해 지은 '창고'이다. 당시 미국에서 철제금고를 수입해 설치할 만큼 그는 이 건물에 많은 돈과 정성을 쏟았다. 각 층의 창문에도 이중의 잠금장치를 했을 만큼 안전을 기했다. 이 때문인지 한국전쟁 때는 사람들을 감금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해방 직전 시마타니는 일부 유물들을 일본으로 옮겼다. 그러는 사이 해방이 되자 그는 미 군정청에 한국인으로 귀화를 신청했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한 궁여지책이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부산항에서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눈물을 머금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남겨진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그 규모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트럭으로 옮길 정도였다 한다.
이 금고는 일본이 자행한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때마침 운동장을 지나던 학생에게 이 건물의 용도를 물었더니 그 대답이 명료했다. "우리 문화재 감옥이요." 시마타니가 모았던 유물들을 살펴보러 교실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탑과 석등 등 부피가 커 미처 일본으로 옮기지 못한 '시마타니의 유물들'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완주 봉림사지에서 가져온 군산 발산리석등(보물 제234호)이었다. 석등의 기둥에 새겨진 생동감 넘치는 용이 눈길을 끈다. 완주 봉림사에서 함께 옮겨진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보물 제276호) 역시 지붕돌이 낮고 평평한 백제탑의 양식이 남아 있는 고려시대 석탑의 모습이다.
이외에도 일반적으로 승탑이 팔각당형인 것에 비해 육각형의 평면을 이루는 점이 독특한 발산리육각승탑(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83호)을 비롯해 대리석재의 조선시대 석등과 오륜형의 승탑, 비석, 석탑부재 등이 제자리를 떠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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