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 일본어:
한일 병탄 조약(韓日倂呑條約)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지 마시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한일 합방 늑약(韓日合邦勒約) 또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도 호칭한다.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병합 조약 직후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스스로 목슴을 끊었고 대대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 4편을 남긴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현 선비
전남 광양시 석사리의 매천이 태어난 집. <사진작가 | 황헌만>
매천은 세종 조 명승 황희의 후손이지만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장수 황진의 10대 후손이다.
진주성 싸움에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 장수의 혼이
매천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국의 소식을 듣자 비탄에 빠진 선비 매천은
참다운 선비가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선비정심의 본질을 보여 준 것이 매천의 자결이었다.
매천의 절명시 4수(친필). <사진작가 | 황헌만>
유서(遺書)는 떨리는 손으로 쓰여졌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라는 유서는 비장하기보다 오히려 담담한 선비의 일상적인 담론으로 느끼게 한다
이렇게 읊어서 죽는 이유를 또 설명했다. 나라에 벼슬하여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고 녹을 받아 생활한 적도 없으니 나라에 충성하려는 생각보다는 인간된 도리, 선비된 도리를 다 하려 할 뿐이다. 다만 북송 때의 진동처럼 간신들을 처단하자는 독한 상소를 올려 죽음당한 일을 못하고, 겨우 남송 때의 윤곡처럼 나라의 망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나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의 의기는 더욱 굳세게 보인다. 1 매천집. 1911년 상해에서 발간됐다. 친구 김택영이 상해로 망명해 출판사에서 일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문집이다. 2 황현 묘.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퇴락한 무덤이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듯하다.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 ~ 1905)충정공의 자결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은 허울만 남은 나라가 되자 같은 달 30일 민영환은 왕조의 몰락에 책임을 지고 자결로 속죄했다. .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유서>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하는 가운데 모두 멸망하려 하는도다.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께서 이를 어찌 헤아리지 못하리오? 나 영환은 다만 한번 죽음으로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데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 더 분발하여 힘쓰기를 더 하고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여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나도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라.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으로 고하노라.....
민영환 선생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하였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 났다는 이른바 "혈죽(血竹)"사건은 당시 1906년 7월5일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어 커다란 화제가 됐다. 더욱이 발견된 대나무 잎의 숫자는 45개로 민영환의 나이와 같았다고 하여 더욱 놀라웠다고 한다.
광복 이후 대나무를 고이 수습하여 보관하고 있던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여사는 이를 폭 8cm, 길이 50cm 정도의 나무 상자에 보관하여 자줏빛 보자기로 쌓아 1962년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 고대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인 기쿠다가 촬영한 혈죽 사진과 1906년 안중식이 그린 혈죽도(血竹圖)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등 많은 인사들이 뒤이어 자결하였고, 전국 곳곳에서 義兵이 일어 났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며, 중국은 이어도에 대한 야욕은 물론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까지 자기 역사라는 이른바 '동북공정'을 국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어려운 때에 우리는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신 충정공 민영환 선생과 매천 황현 선생 등 무수한 순국열사의 애국충정을 기려야 한다.
일본이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 100년 후를 예비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는 국사 교육을 도외시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특히 일본의 침략 전술은 소리없이 차근 차근 교활하게 전개하는 사실을 우리는 직접 겪은바 있다.
개항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항상 침략의 촉수를 감추고 자신을 한국 독립의 지지자는 물론 근대화의 후원자로 포장하였다. 예컨대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지방自主之邦”임을 내세워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개화파의 마음을 잡고, 1894년 “시정개선施政改善”을 표방하며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갑오내각의 성립을 지원하였다. 나아가 1895년 청일전쟁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인정”케 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마치 한국의 독립 전쟁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04년 일왕은 러일전쟁 선전 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한다고 함으로써 침략 전쟁을‘동양평화의 성전’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말의 민족지성들은 일찍부터 일제 침략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을사늑약’의 체결 시기에 와서야 침략성을 깨닫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항일 역량을 키우고 조직하는 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나아가 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므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1895년 청일전쟁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인정”케 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마치 한국의 독립 전쟁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04년 일왕은 러일전쟁 선전 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한다고 함으로써 침략 전쟁을‘동양평화의 성전’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말의 민족지성들은 일찍부터 일제 침략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을사늑약’의 체결 시기에 와서야 침략성을 깨닫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항일 역량을 키우고 조직하는 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나아가 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므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경술국치 104주년..잊혀져가는 치욕의 역사SBS 박아름 기자 입력 2014.08.29 21:00 수정 2014.08.29 21:45
104년 전 오늘(29일)은 일본이 우리 국권을 침탈한 경술국치일입니다. 광복절과 달리, 달력에 표시조차 안 돼 있습니다. 관련된 유적은 방치돼 있습니다. 물론 수치스러운 역사이지만,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날을 오히려 더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뉴스 인 뉴스, 박아름 기자입니다. <기자> 서울 남산에 자리한 이곳은 104년 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가 조약을 맺은 곳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의 현장인데, 지금은 아무 건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흔적이 유일하게 하나 남아 있다고 하는데, 어떤 상태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쉬어가는 디딤돌로 보이는데, 알고 보면 경술국치 당시 이곳에 세워져 있던 일본 공사의 동상 기반석입니다. 보시다시피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설명도 없어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하야시라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일본 공사로 근무했던 사람이거든요. 을사늑약 당시에 조약 당사자라는 의미도 있고요.] 건물터에는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지난 2010년 민간단체가 세운 비석만 하나 놓여 있습니다. 정부나 시 차원의 관리가 전혀 안 되니, 역사적 장소라는 걸 알기 어렵습니다. [김인영/전북 전주 : 그냥 쉬는 공간 아니에요? (역사적 배경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드나요?) 여기가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광복과 달리 '국치'에 대한 역사는 거의 잊혔습니다. 민간연구소에서 식민 시대 유물이나 친일 행적 자료를 모으고 있지만 전시할 공간은 없습니다. 중국은 일제 침략을 받았던 7월 7일을 대대적으로 기립니다. 올해는 시진핑 주석이 참석해 일본의 과거사 역주행을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침략자였던 일본조차 8월 6일 원폭 투하일에 기념식을 엽니다. 경술국치일인 오늘, 우리 정부는 아무런 행사도 열지 않았습니다. [윤경로/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 :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듯이, 자랑스러운 역사만 역사가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기억함으로 인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치욕의 역사도 분명 역사입니다. 기억하기 싫어도 잊지는 말아야,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역사학자들은 강조합니다. (영상취재 : 김세경, 영상편집 : 최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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