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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다큐]'잊지 말자 을미참변'...일본 자객들은 명성황후를 칼로 찌르고 숨지기 전 집단 능욕

문화재방송 2015. 10. 8. 00:04

 

 잊지말자

출연:'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58),

그는 장편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통해 명성황후 시해의 충격적인 실체를 폭로했다.

 

 

 

을미사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2][3]

 

 

                                <명성황후 시해 사건 가담자들-신문사 사장, 후에 장관이 된 일본 지성인도 가담>

 

                                                                       <명성황후 국장>

 

 

 

 

윗 사진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이 담긴 에조보고서를 작성한 본인 에조입니다.

그리고 밑에 사진은 시해사건에 함께했던 20인의 사진입니다. 에조 역시 시해사건에 참여했구요.

 

20인 모두가 일본인은 아니었습니다

친일파였던 조선인들 역시 가담했었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자 일본당국은

가담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계략을 짰던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에조보고서에 대한 내용입니다.

당시 일제군이 궁궐로 침입하자, 황후는 궁녀들이 입는 옷으로 입고 궁녀처럼 분장을 합니다.

이에 일제군들은 애를 낳은 여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궁녀들의 옷을 모두 벗겨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그렇게 황후가 누군지 가려내는 일을 해냅니다.

 

그 와중에 아들 순종의 부인이었던 민씨비 역시 한 쪽 가슴이 도려지는 일이 발생하고

명성황후를 찾아내자

고종과 아들 순종 그리고 민씨비가 보는 앞에서 국모의 배와 옆구리를 세번 칼로 찌릅니다.

 

그후 국모를 조용한 뒷뜰로 끌고가, 돌아가며 일본 특유의 변태짓을 국모에게 저지릅니다.

국모의 아랫도리를 벗겨내어 국부를 확인한 뒤, 이십명이 돌아가며 강간을 합니다.

에조가 경악을 금치 못하여 차마 자신은 하지 않았을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 국모 살해에 모두가 다같이 책임을 지기 위하여

한명씩 돌아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로 난도질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이마에 칼로 십자를 그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이 모든 일을 없애기 위하여 불로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출처_ 네이트판, 위키백과, 지식인

명성황후 찌른 칼, 현재 일본 신사에서 보관

       -  시해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로 추정

       -  신사 관계자 “ 이번 공개는 극히 이례적인 일 ”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2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藤勝顯), 신사에 칼 기증

 

 

<사진 1>  쿠시다 신사 정문 (사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혜문스님)

 

 

 

<사진 2>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

               (사진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혜문스님 )


쿠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해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 등 일행에 대해,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 했다. 

 

“ 이 칼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阿部憲之介) 궁사는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취재진에게 풀러 놓았을 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 느낌이었다.

전체 길이 120㎝. 칼날 90㎝.

 칼이 뿜어 내는 살기는 방안을  서늘하게 흥분시키고 있었다.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적혀 있었다. 칼주인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궁사는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며 이 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립니다.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입니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다시 말해 사람을 베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란 분이 신사에 기증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

 

 

 <사진 3>  칼을 빼고 있는 궁사의 모습   (사진 혜문스님 )

 

 

<사진 4> 칼집에 새겨 놓은 글씨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 ’

                ( 사진 혜문스님 )

 

 쿠시다 신사측  <명성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고 기록

 

 

< 사진 5> 기증관련 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란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도 보인다  혜문스님 제공

 

 

그러나 기증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문서에는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었다. 토오가 이 칼을 기증할 당시 궁사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는  서류에는 “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 고 적혀 있었다. 그 대목을 우리가 소리내어 읽자 궁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 사진이 공개되면 혹시라도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 토오가 정말 명성황후를 절명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왕비의 침실에 난입한 사람중 하나란 것은 맞습니다. 사건 당시 왕비는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해한 사람이 궁녀일 수도 있고 ....”

궁사는 그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설명을 늘어 놓을 수록 난처해질 거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런 심경을 반영하듯 그의 얼굴은 대취한 술꾼 처럼 붉게 달아 올랐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긴장시켰다.

“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궁사는  말을 마치고서 이내 칼을 거두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외의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 한일관계의 많은 업보를 담고 있는 칼이군요. 잘 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재를 허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궁사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사진 6>  히젠도 : 한 눈에 명검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의 칼에 방안의 병풍이 반사되고 있다. ( 사진제공 혜문스님 )

 

 

토오가쯔아키(藤勝顯)는 누구인가?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 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조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 사진 7>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끝 . 매우 예리하게 연마 되어 있다.

            (사진제공 혜문스님

명성황후 시해만행 사과 요구 기자회견
기사등록 일시 : 2015-10-07 14:41:19   프린터

한국디지털뉴스 이정근  기자 =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공사의 지령을 받은 일본인 괴한들이 경복궁내 건청궁을 급습해 명성황후를 칼로 참혹하게 베어 시해했고 시신을 불태워 버린 반인륜적인 극악무도한 야만적 만행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피를 토하고 심은 심정이다.

 

 

시민단체 활빈단(活貧團 대표 홍정식)외 애국시민사회단체는 국익수호에 앞장서는 활빈단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오늘  120년전 조선의 국모를 잔인하고 수치스럽게 살해하고 그 뒤에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던 일본의 잔인함과 무책임을 강력하게 성토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세계사에 비일비재하지만 명성황후 시해와 같이 침략 대상이 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하고 시신마저 불태워버린 나라는 지구촌에 일본 외에는 없다.

 

 

왜국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후 독도를 침탈하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 조선 물자들을 수탈해 갔으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젊은 남자들을 강제징용해 착취하고 젊은여자들을 종군위안부 성노예로 끌고 가 잔인한 반인권적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잔인함이 끝이 없는 나라가 일본이다.

 

한국인이 탈리오의 동해보복(同害報復)법칙대로 일본 천황부인을 윤간,시간 능욕후 칼질해 죽이고 시신을 소각한다면 일본국민이 가만 있겠는가?

 

우리는 시대가 변해 일본과의 우호적인 교류가 빈번하지만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에는 설설기고 벌벌 떨면서 한국에는 갖은 모진 만행을 저지르고도 사죄 한번도 없이 후안무치한 뻔뻔함을 보이는 데 국민적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한번이라도 명성황후 시해 만행에 정중한 사과가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한세기를 넘어 120년동안 일체 사과를 하지 않아 남북8천만 동포는 피가 꺼꾸로 솟는 심정이다.

 

이와함께 우리는 일본 정계와 사회가 일제국주의 환상에 젖은 극우정치세력에 의해 패권적 침략주의로 되돌아 가려는 극우경화로 동북아 평화를 깨려는 의도를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 일본왜놈의 칼에 베어 비극적인 결말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120주년을 맞아 지구촌의 악귀(惡鬼)인 귀태(鬼胎)나라인  일본국의 각성을 촉구하며  한국정부와 국민에 대해 일본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석고대죄 사과와 배상을 다시한번 강력하게 요구한다.

 

우리는 미국 등에 업힌 일본 아베정권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집단적자위권을 강화해 평화헌법 개정후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적 침략군국주의로 되돌아가려는 음모와 계략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결연히 분쇄할 계획이다

 

우리는 침략과거사 반성없이 동북아에서 군비확장으로 한중일 갈등을 고조시키는 일본을 응징할 구국결사활동에 나설 것을 내외에 천명한다.


출처:한국디지털뉴스

http://koreadigitalnews.com/board/view.php?&bbs_id=sub&doc_num=17481&daumnews=on

韓시민단체, 명성황후 시해 칼 ‘히젠도’ 폐기 日외무성에 요구

입력 2015-10-09 00:44

 

韓시민단체, 명성황후 시해 칼 ‘히젠도’ 폐기 日외무성에 요구 기사의 사진
을미사변 120년을 맞아 한국 시민단체가 명성황후 시해 때 쓰인 일본 낭인의 칼을 폐기하라고 일본 정부에 공식 요구했다. 

혜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와 최봉태 변호사 등이 참여하는 히젠도(肥前刀) 환수위원회는 히젠도 폐기 요청서를 8일 도쿄의 일본 외무성으로 발송했다고 혜문 대표가 밝혔다.

히젠도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경복궁의 황후 침전에 난입한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도오 가쓰아키(藤勝顯)가 1908년 후쿠오카(福岡) 소재 구시다(櫛田) 신사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혜문 대표는 “구시다 신사의 히젠도 봉납기록에는 ‘조선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는 문구가 적혀있다”며 “도오 가쓰아키가 을미사변을 기념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칼집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一瞬電光刺老狐)’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밝혔다. 

최 변호사는 “히젠도는 범행에 사용했던 것으로 검찰이 압수해야하는 물건이지 사사로이 민간에서 소장할 물건은 아니다”며 “근대 법치국가 성립 이후 살인에 사용된 흉기가 압수되지 않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의구 기자 egkim@kmib.co.kr

출처: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940405&code=61111111&cp=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