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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선 동영상 다큐]가장 처참한 세계 2대 동계(冬季) 전투로 꼽히는 비극의 북한 장진호 전투

문화재방송 2016. 6. 25. 05:18

장진호 전투(長津湖 戰鬪 Battle of Chosin Reservoir)

 

 

장진호 전투

입력 2015-02-05 20:26:15 | 수정 2015-02-06 01:06:19 | 지면정보 2015-02-06 A35면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1950년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 위로 중공군 30만여명이 몰려왔다. 18만여명은 서부전선, 12만여명은 동부전선에 투입됐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인해전술이 시작됐다. 전황은 급변했다. 서부전선이 무너지자 유엔군에 철수령이 내려졌다. 곧 이어 동부전선이 와해됐다.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격한 미 해병 1사단 병력 1만여명은 중공군에 완전 포위됐다.

해병 1사단은 2차대전에서도 활약한 최정예부대였다. 별명은 사냥개 ‘도베르만’이었다. 지휘관 스미스 소장도 유럽과 태평양 전장을 누빈 백전용사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매복과 기습, 야간·새벽 공격에 혼이 나갈 정도였다. 전멸 위기였다. 도쿄의 사령부도 ‘잃어버린 사단’으로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적은 중공군뿐만이 아니었다. 해발 1000m의 험준한 산악과 영하 35도의 혹한은 더 치명적이었다. 중기관총에 부동액을 채워야 했고 경기관총은 주기적으로 총신을 달궈야 했다. 공중 보급품이 언 땅에 부딪혀 깨지는 바람에 탄약도 25%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차가운 전투식량을 먹고 설사에 시달렸다. 기습 때문에 침낭 속에서 잘 때도 지퍼를 닫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동상이었다. 전투 중 땀이 나면 발과 발싸개 사이에 얇은 얼음막이 생겨 금방 탈이 났다. 부상자용 수혈관이나 모르핀도 얼었다.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얼어 치료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17일간 혈투를 벌이며 중공군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극적으로 포위를 뚫고 흥남까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국제시장’에도 나오지만, 유엔군 10만여명과 피란민 10만여명의 목숨을 구한 흥남 철수는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차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冬季) 전투로 꼽히는 이 비극의 현장 장진(長津)은 영어로 초신(Chosin)이라 불린다.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어 일본어 지도를 사용한 미군이 일본식으로 읽은 결과다. 생존자 모임 초신 퓨(Chosin Few)는 ‘선택 받은 소수(Chosen Few)’를 패러디한 것이다.

당시 참전했던 스티븐 옴스테드 해병대 예비역 중장 등 노병들이 미국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세우는 모양이다. 묘비 수준의 기존 것과 달리 일반인도 참배할 규모로 만들겠다고 한다. 장진호 전투를 다룬 책은 미국에서만 세 권이나 나왔다. 국내에선 소설 한 권이 전부다. 스토리 부재라는 한국 문화계로서는 무궁무진한 장엄미(美)의 원천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출처:한국경제 

http://www.hankyung.com/news/ap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1해병사단 장병들이 눈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AP·미 해병대(USMC)

 

 

`진주만이후 미군 최대 피해` 장진호 전투

중공군 인해전술에 포위…영하30도 혹한 동상 속출
`군우리`서도 중공군 협공…`인디언 태형` 대형 참극

  • 안두원 기자
  • 입력 : 2016.05.31 17:46:14   수정 : 2016.05.31 20:46:47

 

◆ 잊힌 한국戰 영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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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1950년 겨울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에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들이 추위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진 출처 = 초신퓨(Chosin Few) 홈페이지]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이 입은 피해는 사망·실종 및 부상자 수에서뿐 아니라 짧은 기간 인적·물적 피해가 크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살상력이 더욱 강해진 무기들이 한반도에 총동원됐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측과 소련과 중국 등 공산 진영이 맞붙었던 전쟁이었다는 점이 이 같은 피해 규모를 설명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장삼열 전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장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도 안 된 시점에서 한반도라는 비교적 좁은 영역에서 전쟁이 벌어져 많은 피해가 났다"며 "앞서 전쟁에서 사용된 체계화된 전술과 경험이 집중적으로 6·25전쟁에서도 구현됐다"고 평가했다.

◆ 유해 3위, 2일 현충원 안장

6·25전쟁에서 미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전투는 '장진호(長津湖) 전투'로 기록된다.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있는 인공 호수인 장진호에서 미군 해병 제1사단은 중공군에 포위된 채 영하 20~30도의 혹한을 버텨야 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발간한 장진호 전투 관련 자료에는 "미 해병 1사단이 전사 718명,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92명, 부상 3504명이었고 비전투 손실 3659명의 대부분이 동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군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내려와 흥남 철수 작전을 할 수 있었다. 워낙 피해가 컸기 때문에 당시 미국 뉴스위크는 "진주만 이후 미군 최악의 패전"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참전용사들 6000여 명은 1983년 4월 '초신 퓨(Chosin Few)'라는 생존자협회를 결성했다.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고 'Few'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가 적다는 의미다.

장진호 전투 지역에서 발굴돼 송환된 고(故) 임병근 일병 등 6·25전쟁 전사자 유해 3위가 2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 '태형계곡' 병력 3천명 잃어

장진호 전투와 함께 미군에 큰 희생을 남긴 전투로는 '군우리 전투'가 꼽힌다.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통하는 계곡에서 미 육군 2사단과 터키군이 중공군으로부터 양쪽에서 협공을 받았던 전투였다.

1950년 11월 29일 중공군은 미 2사단 23연대와 38연대를 공격했고, 다음날 군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미 2사단은 도로에 병력이 모여 있는 가운데 중공군이 포위망을 좁히는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다. 철수를 하기 위해 '인디언 태형(笞刑·Gauntlet)'을 받는 듯한 불리한 여건에서 전투를 벌이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디언 태형은 아메리칸 인디언이 양쪽에 두 줄로 늘어서 범법자를 지나가게 하며 두들겨 패는 형벌의 일종이다. 당시 무려 3000여 명이 전사·실종되거나 적의 포로가 됐다. 미군들은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협공을 받았던 길이 10㎞ 계곡을 '태형(笞刑)의 계곡'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 육군 2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부대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후에 전투력을 복원해 1951년 2월 지평리에서 중공군에 대승을 거뒀고 현재 주한미군 지상군의 주력으로 경기도 북부 등에 배치돼 있다.

[안두원 기자]
출처:매일경제

http://news.mk.co.kr/newsRead.php?no=391300&year=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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