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힌 한국戰 영웅들 ◆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이 입은 피해는 사망·실종 및 부상자 수에서뿐 아니라 짧은 기간 인적·물적 피해가 크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살상력이 더욱 강해진 무기들이 한반도에 총동원됐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측과 소련과 중국 등 공산 진영이 맞붙었던 전쟁이었다는 점이 이 같은 피해 규모를 설명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장삼열 전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장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도 안 된 시점에서 한반도라는 비교적 좁은 영역에서 전쟁이 벌어져 많은 피해가 났다"며 "앞서 전쟁에서 사용된 체계화된 전술과 경험이 집중적으로 6·25전쟁에서도 구현됐다"고 평가했다.
◆ 유해 3위, 2일 현충원 안장
6·25전쟁에서 미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전투는 '장진호(長津湖) 전투'로 기록된다.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있는 인공 호수인 장진호에서 미군 해병 제1사단은 중공군에 포위된 채 영하 20~30도의 혹한을 버텨야 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발간한 장진호 전투 관련 자료에는 "미 해병 1사단이 전사 718명,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92명, 부상 3504명이었고 비전투 손실 3659명의 대부분이 동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군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내려와 흥남 철수 작전을 할 수 있었다. 워낙 피해가 컸기 때문에 당시 미국 뉴스위크는 "진주만 이후 미군 최악의 패전"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참전용사들 6000여 명은 1983년 4월 '초신 퓨(Chosin Few)'라는 생존자협회를 결성했다.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고 'Few'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가 적다는 의미다.
장진호 전투 지역에서 발굴돼 송환된 고(故) 임병근 일병 등 6·25전쟁 전사자 유해 3위가 2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 '태형계곡' 병력 3천명 잃어
장진호 전투와 함께 미군에 큰 희생을 남긴 전투로는 '군우리 전투'가 꼽힌다.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통하는 계곡에서 미 육군 2사단과 터키군이 중공군으로부터 양쪽에서 협공을 받았던 전투였다.
1950년 11월 29일 중공군은 미 2사단 23연대와 38연대를 공격했고, 다음날 군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미 2사단은 도로에 병력이 모여 있는 가운데 중공군이 포위망을 좁히는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다. 철수를 하기 위해 '인디언 태형(笞刑·Gauntlet)'을 받는 듯한 불리한 여건에서 전투를 벌이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디언 태형은 아메리칸 인디언이 양쪽에 두 줄로 늘어서 범법자를 지나가게 하며 두들겨 패는 형벌의 일종이다. 당시 무려 3000여 명이 전사·실종되거나 적의 포로가 됐다. 미군들은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협공을 받았던 길이 10㎞ 계곡을 '태형(笞刑)의 계곡'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 육군 2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부대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후에 전투력을 복원해 1951년 2월 지평리에서 중공군에 대승을 거뒀고 현재 주한미군 지상군의 주력으로 경기도 북부 등에 배치돼 있다.
[안두원 기자]
출처:매일경제
◆ 유해 3위, 2일 현충원 안장
6·25전쟁에서 미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전투는 '장진호(長津湖) 전투'로 기록된다.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있는 인공 호수인 장진호에서 미군 해병 제1사단은 중공군에 포위된 채 영하 20~30도의 혹한을 버텨야 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발간한 장진호 전투 관련 자료에는 "미 해병 1사단이 전사 718명,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92명, 부상 3504명이었고 비전투 손실 3659명의 대부분이 동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군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내려와 흥남 철수 작전을 할 수 있었다. 워낙 피해가 컸기 때문에 당시 미국 뉴스위크는 "진주만 이후 미군 최악의 패전"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참전용사들 6000여 명은 1983년 4월 '초신 퓨(Chosin Few)'라는 생존자협회를 결성했다.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고 'Few'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가 적다는 의미다.
장진호 전투 지역에서 발굴돼 송환된 고(故) 임병근 일병 등 6·25전쟁 전사자 유해 3위가 2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 '태형계곡' 병력 3천명 잃어
장진호 전투와 함께 미군에 큰 희생을 남긴 전투로는 '군우리 전투'가 꼽힌다.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통하는 계곡에서 미 육군 2사단과 터키군이 중공군으로부터 양쪽에서 협공을 받았던 전투였다.
1950년 11월 29일 중공군은 미 2사단 23연대와 38연대를 공격했고, 다음날 군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미 2사단은 도로에 병력이 모여 있는 가운데 중공군이 포위망을 좁히는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다. 철수를 하기 위해 '인디언 태형(笞刑·Gauntlet)'을 받는 듯한 불리한 여건에서 전투를 벌이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안두원 기자]
출처: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