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80.jpg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申潤福)이 그린 풍속 화첩. 종이 바탕에 담채. 세로 28.2㎝, 가로 35.2㎝.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전형필(全鎣弼)이 대판(大阪)의 고미술상에서 구입해와 새로 표구하였다. 이 때 오세창(吳世昌)이 표제와 발문을 썼다.

 

혜원(蕙園)은 화원 신윤복(申潤福)의 아호이다. 그의 자(字)는 입부(笠夫), 고령신씨(高靈申氏)였으며 그의 부(父) 또한 정조왕(正祖王)의 어용화사(御用畵師)이던 신한평(申漢枰)이었으므로 그 가업을 이어 화원이 되었다. 혜원(蕙園)의 생사년(生死年)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대체로 늦은 18세기(世紀)부터 이른 19세기(世紀) 무렵에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더불어 활동한 작가였다. 다만 김홍도(金弘道)보다 혜원(蕙園)이 약간 후배였음은 그의 부(父) 신한평(申漢枰)이 김홍도(金弘道)와 더불어 정조왕(正祖王)의 어진(御眞)을 그렸다는 『정조실록(正祖實錄)』의 기사(記事)로써 짐작이 된다.

7481.jpg 원래 혜원(蕙園)은 틀잡힌 산수화가로서도 주목받을 만한 필격을 드러낸 사람이었으나 김홍도(金弘道)와 더불어 그 당시(當時) 이른바 속화를 개척해서 오늘날 그는 풍속화가로서 그 업적을 더 평가받게 되었다. 그의 풍속화는 주로 서민사회의 생태 특히 풍류 남아들과 기녀, 주인과 여비(女婢), 양가의 부녀와 승려에 이르는 넓은 분야에 걸친 조선인(朝鮮人)들의 사랑과 색정(色情)의 생태를 그리기에 매우 재분(材分)을 발휘한 작가였다.

이 화첩은 그러한 내용은 30면(面)에 나누어 그린 작품으로서 이제까지 알려진 혜원(蕙園)의 대표적인 연작 풍속화첩이며 따라서 그의 이 부문 작품 중에서는 가장 화의(畵意)와 그 기법이 세련되어 있다. 이 작품은 미술작품으로서뿐만 아니라 당시의 적나라(赤裸裸)한 사회상의 일면과 풍부한 민속을 사실한 희귀한 자료로서도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천주교(天主敎)를 타고 침투(浸透)한 서양의 과학기술이 서울 학계에 자극(刺戟)을 주어 실사구시를 표방하는 실학파의 학문이 대두(擡頭)될 무렵이었으며 아울러 국문으로 이루어지는 서민문학이 일어나는 등 스스로 서민을 의식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러한 서민의 생태 즉 속세간사를 주제로 한 풍속화의 개척은 그러한 일련의 문화운동(文化運動)의 일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화첩은 언제 일본으로 유출되었었는지 그 경위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代)까지 일본 대판시(大阪市)에 있는 고미술상 산중상회(山中商會)의 소유이었으나 고(故) 간송 전형필씨(全鎣弼氏)가 이것을 다시 사들여온 것이다. 원래의 표장(表裝)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전형필씨(全鎣弼氏)의 소장이 된 후 새로이 제첩(製帖)하면서 첩미(帖尾)에 위창 오세창(吳世昌)의 제발(題拔)을 첨가했으며 원첩의 것으로 보이는 행서체로 된 '혜원전신(蕙園傳神)'이라는 제첨(題簽)이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