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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98주년]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든 유일한 외국인 '스코필드 박사'와 3.1운동

문화재방송 2017. 2. 27. 14:07

 






 


 


풀 네임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캐나다의 감리교 선교사로

수의학자, 세균학자입니다.

 

한국 이름으로 석호필이라고 불립니다

석호필이라고 하면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이 떠오르시겠지만...

석호필이란 이름의 원조는 바로 스코필드 박사님이십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과 독립 후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셨으며

제암리 학살 사건의 참상을 보도한 박사님은

그의 활동을 기념하는 뜻으로

 

 '3.1운동의 제34인'(34번째 민족대표)이라고도

불린다고 해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 주 럭비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태어나자마자 산욕열로 어머니를 여의였고 

가난과 소아마비로 힘든 어린 생활이었다고 합니다ᅲᅲ

 

역경을 딛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수의학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나셨습니다. 


 




 

1916년 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교장 올리버 알 에비슨의 권유 서신으로

개신교 선교사 겸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조선에서 머물게 됩니다.

 

목원홍이라는 분에게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를 하셨으며

이때 자신의 한국식 이름을

 

한국인을 돕겠다란 마음을 나타내어

석호필(石虎弼)

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몇년 후 직장 동료 이갑성(李甲成)과 만나게 됩니다.

 

3.1운동의 계획을 전해 듣고

해외 정세 파악하고 3.1운동을 홍보해줄 것을 부탁받는 박사님 


 


 


 

이갑성 씨의 부탁으로

사진과 글로 해외에 알리기 시작한 박사님..

덕분에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는 도중 들리온 소식

바로 '제암리 사건'

수원의 작은 마을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의 잔해를 목격하고

 

치를 떨며

일본의 잔혹한 악행을 해외에 널리 알리게 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일본의 악행과

 일제의 비인간적인 통치방식을

드러내는 글 등 수차례 신문에 기고하셨습니다.  


 


 


 


석호필 박사를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은

 본국으로 강제 출국 시켜버리지만.




 

박사님은 캐나다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수많은 편지를 보내며

바다 건너에서도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한국의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으로 한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남은 생애 동안 3.1운동 정신을 강조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정부를 비판하였습니다.




 




 


1970년 4월 12일

81세의 나이로 서거하시며

스코필드 박사님의 공헌을 인정받아

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에 묻히십니다.

 

 석호필(石虎弼) 

그가 지은 그의 이름처럼

한국인을 도와준 그는 

우리나라의 해방 역사에 길이 남으실 겁니다


스코필드 박사 기념 전시회...3월 9일까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흉상. 서울시 제공

▲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흉상.
서울시 제공


일제 만행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다음 달 9일까지 서울시청 로비에서 열립니다.

캐나다 국적 의료 선교사인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부임한 후 일제가 벌인 제암리와 수촌리 학살 현장을 직접 찾아 사진과 글로 남겨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특히 한국에 있던 외국인 중 유일하게 3.1 만세운동 계획을 미리 통보받고 비밀리에 지원해 '민족대표 34인'이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이런 공로로 스코필드 박사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 됐습니다.

3·1 운동 98주년을 맞아 마련한 이번 전시는 박사가 직접 촬영한 제암리·수촌리 학살 현장 사진과 3·1 운동 사진, 일본의 만행을 기록한 원고 '꺼지지 않는 불꽃' 원본 등 20점을 전시합니다.




1963년 2월 28일 동아일보
 
<그날, 그때, 1919년 3월 1일과 오늘, 이때, 1963년 3월 1일>
 
                                                                                                                프랭크·윌리엄·스코필드
 
  3·1절에 즈음하여 스코필드 박사는 당시의 회고와 아울러, 우리 민족이 현재와 장래에 있어, 3·1정신을 통하여 명심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들어 다음과 같은 지성에 찬 글을 보내왔다.
  기미년 3월 3일
  1919년 3월 초하루는 33인의애국자들이 횡포한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을 시작한 날이므로 한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뜻깊은 날이 될 것이다.  국권을 박탈하고 자국에 동화시키려는 일본의 정책으로 인한 굴욕의 십 년은 하나의 비극이자 또한 쓰라린 경험이었다.  한국이 지닌 값비싼 자유와 언어, 그리고 고래의 관습이나 전통은 해마다 가중되던 탄압으로 차츰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1 운동의 지도자들은 문제점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전국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한국은 몇 해 못 가서 일본의 또 하나의 속주(屬州)가 되어 버리리라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조직은 훌륭한 솜씨였으며 그 실행엔 비상한 용기가 있었다.  전국의 도시와 시골이 일제히 가담한 이 투쟁은 일본의 경찰이나 헌병이 반항하는 민중을 억압하고 만세의 절규를 진압할 수 있기 전에 벌써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위대한 자유 대신에 그 대가는 감옥이 아니면 폐허 또는 죽음 그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겉으로는 실패했지만 국민은 정신적인 승리를 쟁취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정책은 계속 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국권 박탈이나 자국에의 동화란 벌써 하나의 공염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 국민은 1919년 모든 문제를 명확히 깨닫게 되었으며 가슴과 마음속의 숨은 보물을 도둑질하고 파괴하려는 모든 위협에 줄기차게 대항하였던 것이다.
  지도자간에 경쟁이 있었다면 그것은 자리나 권력을 위한 경쟁이 아니였고, 오로지 수난과 봉사를 위한 경쟁이었다.
  계묘년 3월 1일
  오늘날 우리는 한국의 분열되어 있음을 본다.  용감하고 험준하며 그림처럼 아름다운 북녘 땅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오히려 온정주의에 불과할 정도의 새로운 제국주의에 사로잡힌 잔인한 적들에게 지배되고 있다.  그들의 정치는 비인도적이고 파괴적이며 필요시에는 말살해 버리는 정치다. 
  아름다운 전야(田野)와 끝없이 굽이치는 언덕을 가진 남한은 널리 퍼져 있던 악성 부패에 응급 수술을 하고 나서 일로 회복도상에 있다.
  외과의 격의 박 장군은 환자의 상황에 대하여 이제 보고서를 작성하였으며 그것은 모든 애국적인 국민들에게 경고가 될 것이다.  부하 의사들 간의 언쟁이나 불상용으로 인해서 장군은 크게 실망하고 있으며 환자의 건강을 우려하고 있다.
  "수술 후의 상황에 변함이 없다면 회복할 가망은 없을 것이다.."
  병력을 뒤져보거나 장군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쿠데타의 첫날부터 박 장군은 헌신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부패에 대한 그의 투쟁은 조금도 늦추어지거나 흔들린 적이 없었다.  실업 상태, 허약한 경제, 농업의 위축 및 정치적 불안정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한 재건과 개혁에 노력을 쏟아 왔지만, 지나친 기우와 경험의 부족으로 인하여 약간의 과오를 범한 것이다.  해야 할 사업의 중요성과 과오의 원인을 살펴 볼 때 한층더 요구되는 것은 이해와 과감한 노력인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모든 정당들은 개인의 욕심이나 당의이익을 초월하여 국민의 복지를 가져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한결같이 주장해 왔지만 정치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기적이었음은 슬픈 일이다.  (민주주의는 자유롭게 선출된 국민대표들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말로 정의되지만, 한국의 부끄러운 민주주의는 정치인을 위한, 정치인에 의한 국민의 정부였다.)
  만일, 차기 대통령 후보를 포기한 박정희 장군의 헌신적 결단이 우리의 낯간지러운 정권욕과 이기심을 뉘우칠 기회가 되지 못 한다면 그분의 유례없는 애국적인 용단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기주의와 부패 속에서 낡은 싸움을 벌여야 될 건가, 아니면 봉사와 희생의 3·1정신을 따라야 할건가, 조속히 결단해야 한다.  우리로서 만약 올바른 선택에 실패할 때 구성원의 여지 없이 우리 한국은 매국노와 비겁자들이 날뛰는 구렁텅이로 떨어질 운명에 처할 것이다.


나도 한국의 분신, 할 말은 해야겠다
출처 : 1963년 9월 13일 한국일보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0-04-02 15:43:36                                조회 : 134


편집자 주 3·1독립 운동때부터 우리 나라를 꾸준히 도와준 스코필드 박사는 영자신문『코리안·리퍼블릭』에 보낸 <독자의 편지>에서 한국의 정쟁, 특히 국민의 당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야당간의 아귀다툼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나도 한국의 분신, 할 말은 해야겠다>

프랭크·윌리엄·스코필드

  매일 아침 나는 신문을 펼쳐 보고는 한결 분노를 느낀다.  나는 이제까지 누구에 못지않게 강력한 야당의 통합을 바라 왔다.  그렇건만 들려 온 소식은 정치적 이권을 위한 각 야당의 이기적인 아귀다툼 뿐이다.
  그네들은 많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한국 국민을 돕기 위한 대의나 정책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고사하고 국민들을 아예 옛날부터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다.  이 권력 투쟁은 한국 정치 사상 <청와대 쟁탈전>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당신네 야당 지도자들은 언필칭 박정희 장군이 비민주적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이기적인 아집에 사로잡힌 당신네들에 비할 때 그는 찬연히 빛나는 참다운 애국자로서 으뜸가고 있다.
  더욱이나 그는 정치가로서 불타는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군사정권 아래서 놀랄 만한 부정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이 시점에 처해 부정의 재판(再版)이 다시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바로 야당 지도자들의 손아귀에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참으로 슬프도다!
  권력과 권세에 굶주리고 허영에 날뛰는 야당 지도자들은 하루가 멀다고 물어뜯고 싸움만 벌여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고 말았는데, 1년이나 2년 이내에는 쉽사리 본성을 탈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네들이 저지른 과오에 억눌려 아예 자취마저 감추게 될는지는 모른다. 

  박순천 여사와 같은 다섯 사람의 여성과 박정희 장군과 같은 다섯 사람의 남성만 있다면 충분히 한국은 구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열 사람은 어디 있는가? 2년 전 쿠데타 당시 나는 '이것은 한국을 위한 최후의 기회이다."라고 쓴 일이 있었다.  이 신념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다.  그 후부터 오늘날까지 전면적인 세계의 양상은 심각하게도 악화해왔다.  나는 이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나 자신 한국의 분신으로서 의당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이여, 이 나라가 망하기 전에 제발 각성해 주기를 애절하게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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