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네임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캐나다의 감리교 선교사로
수의학자, 세균학자입니다.
한국 이름으로 석호필이라고 불립니다
석호필이라고 하면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이 떠오르시겠지만...
석호필이란 이름의 원조는 바로 스코필드 박사님이십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과 독립 후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셨으며
제암리 학살 사건의 참상을 보도한 박사님은
그의 활동을 기념하는 뜻으로
'3.1운동의 제34인'(34번째 민족대표)이라고도
불린다고 해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 주 럭비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태어나자마자 산욕열로 어머니를 여의였고
가난과 소아마비로 힘든 어린 생활이었다고 합니다ᅲᅲ
역경을 딛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수의학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나셨습니다.
1916년 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교장 올리버 알 에비슨의 권유 서신으로
개신교 선교사 겸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조선에서 머물게 됩니다.
목원홍이라는 분에게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를 하셨으며
이때 자신의 한국식 이름을
한국인을 돕겠다란 마음을 나타내어
석호필(石虎弼)
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몇년 후 직장 동료 이갑성(李甲成)과 만나게 됩니다.
3.1운동의 계획을 전해 듣고
해외 정세 파악하고 3.1운동을 홍보해줄 것을 부탁받는 박사님
이갑성 씨의 부탁으로
사진과 글로 해외에 알리기 시작한 박사님..
덕분에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는 도중 들리온 소식
바로 '제암리 사건'
수원의 작은 마을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의 잔해를 목격하고
치를 떨며
일본의 잔혹한 악행을 해외에 널리 알리게 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일본의 악행과
일제의 비인간적인 통치방식을
드러내는 글 등 수차례 신문에 기고하셨습니다.
석호필 박사를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은
본국으로 강제 출국 시켜버리지만.
박사님은 캐나다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수많은 편지를 보내며
바다 건너에서도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한국의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으로 한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남은 생애 동안 3.1운동 정신을 강조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정부를 비판하였습니다.
1970년 4월 12일
81세의 나이로 서거하시며
스코필드 박사님의 공헌을 인정받아
외국인 최초로
국립 현충원에 묻히십니다.
석호필(石虎弼)
그가 지은 그의 이름처럼
한국인을 도와준 그는
우리나라의 해방 역사에 길이 남으실 겁니다
스코필드 박사 기념 전시회...3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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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흉상.
서울시 제공
캐나다 국적 의료 선교사인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부임한 후 일제가 벌인 제암리와 수촌리 학살 현장을 직접 찾아 사진과 글로 남겨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특히 한국에 있던 외국인 중 유일하게 3.1 만세운동 계획을 미리 통보받고 비밀리에 지원해 '민족대표 34인'이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이런 공로로 스코필드 박사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 됐습니다.
3·1 운동 98주년을 맞아 마련한 이번 전시는 박사가 직접 촬영한 제암리·수촌리 학살 현장 사진과 3·1 운동 사진, 일본의 만행을 기록한 원고 '꺼지지 않는 불꽃' 원본 등 20점을 전시합니다.
나도 한국의 분신, 할 말은 해야겠다 |
출처 : 1963년 9월 13일 한국일보 |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0-04-02 15:43:36 조회 : 134 |
<나도 한국의 분신, 할 말은 해야겠다> 매일 아침 나는 신문을 펼쳐 보고는 한결 분노를 느낀다. 나는 이제까지 누구에 못지않게 강력한 야당의 통합을 바라 왔다. 그렇건만 들려 온 소식은 정치적 이권을 위한 각 야당의 이기적인 아귀다툼 뿐이다. 박순천 여사와 같은 다섯 사람의 여성과 박정희 장군과 같은 다섯 사람의 남성만 있다면 충분히 한국은 구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열 사람은 어디 있는가? 2년 전 쿠데타 당시 나는 '이것은 한국을 위한 최후의 기회이다."라고 쓴 일이 있었다. 이 신념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다. 그 후부터 오늘날까지 전면적인 세계의 양상은 심각하게도 악화해왔다. 나는 이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나 자신 한국의 분신으로서 의당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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