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재. 촬영. 편집. 내레이션:헤리티지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 국가무형문화재 '줄타기'
줄타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줄 놀음의 하나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단지 곡예기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 공연예술인 줄타기는 음악 반주에 맞추어 줄타기 곡예사와 바닥에 있는 어릿광대가 서로 재담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줄타기 연행(演行)은 야외에서 한다. 줄타기 곡예사가 재담과 동작을 하며 노래와 춤을 곁들이는데, 곡예사가 줄 위에서 다양한 묘기를 부리는 동안, 어릿광대는 줄타기 곡예사와 재담을 주고받고, 악사들은 그 놀음에 반주를 한다. 줄타기 곡예사는 간단한 동작으로 시작하여 점점 더 어려운 묘기를 부리는데 무려 40가지나 되는 줄타기 기술을 몇 시간 동안이나 공연한다.
줄타기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918~1392)에 처음 등장하며 그 이후로 현재까지 꾸준히 그 기예가 전수되고 있다. 줄타기는 많은 사람들이 널리 즐기던 활력 넘치는 전통 공연예술이었다. 1976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줄타기를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보존·전수하고 있다.
현재 줄타기보존회와, 정부로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58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김대균(金大均)은 한국의 고유한 줄타기를 전승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블로그 대문 : 능산리고분군
[문화유산 답사기]부여의 재발견 - 사라진 왕국의 숨겨진 후원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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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남지
123년 동안 백제의 왕도였던 부여. 천년 세월이 깃든 역사의 보물 창고다. 작은 도시 곳곳에는 옛 백제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부소산성, 정림사지, 궁남지 등등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한 멋을 느낄 수 있는 부여로 떠나보자. 글 | 최갑수 여행작가 |
지난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대한민국의 12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등재된 유적지구는 부여, 공주, 익산에 분포되어 있는 총 8개의 유적을 말하는데, 부여의 부소산성과 정림사지를 비롯해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익산시의 왕궁리 유적을 포함하고 있다. 백제 역사유적들은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고대 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의 특출한 증거라는 점 등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들 가운데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응축하고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부여일 것이다. 우리에게 백제 멸망의 현장으로 알려진 낙화암을 비롯해 수도 부여를 지키던 부소산성 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가을볕 아래를 거닐며 사라진 왕국의 찬란한 역사를 더듬어보자.
백제를 산책하다
▲ 백마강
부여 초입,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부여 지도를 펼친다. 백마강이 부여의 중심을 지나며 크게 휘돌아 흐르는 것이 보인다. 백마강은 부여 사람들이 금강을 일컫는 이름으로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의 천정대에서 시작해 낙화암, 구드래나루를 거쳐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약 16㎞를 흐른다. ‘삼국사기’에는 백강, ‘일본서기’에는 백촌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마(白馬)는 ‘큰 나라’라는 뜻으로 백마강은 ‘큰 나라가 있는 강’을 의미한다.
이 백마강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 부소산성이다. 위례성(서울), 웅진(공주)에 이어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던 사비(부여)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부여 여행 일정은 부소산성을 들른 후 가까운 정림사지와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 등의 차례로 돌아보는 것으로 잡으면 된다.
부소산은 평소 왕과 태자들이 즐겨 찾는 후원이었다. 산 정상과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은 유사시에 피신처 구실을 했고 왕성을 지키는 보루 역할도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백제 성왕 16년(서기 538년)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로 도읍을 옮긴 뒤로 강성해진 백제는 이전보다 더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부소산은 부여 북쪽에 있는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구릉이다. 산성이라는 이름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오르는 길은 완만하기 그지없다. 소나무, 왕벚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 사이로 산책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아이들과 노약자도 쉽게 걸을 수 있다. 부여 사람들은 산책하듯 거닌다. 둘레는 약 2.2㎞. ‘부소’라는 말은 소나무의 옛 이름이다.
부소산성의 여행은 사비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길은 소나무가 울창한 데다 널찍한 돌이 깔려 있다. 처음 만나는 곳은 삼충사. 백제 삼충신인 성충과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삼충사를 지나면 백제시대 왕과 귀족들이 계룡산 연천봉에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하루를 계획했다는 영일루, 백제시대 곡물을 저장했던 창고인 군창지가 차례로 나타난다. 군창지를 지나면 반월루. 전망 좋은 누각이다. 부여읍내와 구드래 들판, 반월형으로 읍내를 감싸고 도는 백마강까지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반월루 뒤 산책로 안쪽 길가엔 복원해 놓은 백제 때 수혈주거지(현대식 건물)가 있다.
반월루에서 낙화암이 가깝다. 낙화암은 부소산성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하지만 삼천궁녀가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타사암(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는 훨씬 사실적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의 단단하고 너른 바위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는데, 이는 1929년 겉치레로 세워둔 것이다. 백화정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낙화암에서 10분쯤 걸어 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규모가 작은 삼국시대 사찰이지만 방문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법당 뒤에 있는 고란약수 때문이다. 한 잔을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이곳 방문객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기가 될 수 있다’는 경고문에도 모두 한 잔 넘게 들이켠다.
석탑, 참 곱다
▲ 정림사지 5층석탑
부여의 백제 때 이름은 사비다. 백제가 일군 600년 넘는 역사 중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사비의 품에서 탄생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당시 사비에는 13만호가 살았다고 한다. 중국 사서인 ‘주서’ 중 백제전에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왕도 사비는 나당연합군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불타고 스러졌다. 다행스럽게도 탑 하나가 남아 그 시절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이 석탑만이 백제 말 123년의 도읍기를 통틀어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 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며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고대 삼국시대 석탑의 원형을 밝혀주는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소정방탑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문에 대당평백제비(大唐平百濟碑)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하며 노블하며 그레이스한 우아미의 화신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정림사탑이야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백제 미학의 상징적 유물’이라고 덧붙였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를 지닌 이 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이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크고 작은 석재들을 정갈하게 조각한 뒤 조립한 탑은 백제 장인들의 선도적인 미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배흘림 양식의 기둥을 세우고 층마다 넓은 지붕돌을 올렸다. 특히 부드러운 목재를 깎은 듯 지붕돌의 네 귀 단부를 살짝 들어올린 솜씨에는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다. 또 기단부가 매우 좁고 낮아 마치 탑이 땅에서 솟아난 듯한 느낌을 준다. 얼핏 목탑의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것이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정림사지 석탑 앞에 서 있는데 옆에 서서 한참 동안 석탑을 바라보던 아저씨가 툭, 한마디를 던진다. “거 참, 곱다.” 우아한 기품이 우러나는 탑은 손을 대어 한 번 쓰다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게 만들 정도다.
5층석탑 뒤 복원된 강당 안에는 키 큰 석불이 모셔져 있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08호)이다. 돌로 된 중절모를 쓴 듯한 멋쟁이 석불이다. 탑은 백제 때 지어졌지만 석불은 고려 때 것이다.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위적이다. 비바람에 닳아 둥글둥글한데, 그가 짓고 있는 온화한 미소와 조화롭게 어울린다.
정림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바로 옆에 자리한 정림사지 박물관을 찾는 것이 좋다. 박물관 건물은 불교의 상징인 ‘卍(만)’ 자 모양을 연상시킨다. 중앙 홀을 중심으로 진입로, 전시실, 관리실 등이 사방으로 날개를 뻗고 있는 듯하다. 발굴 당시부터 현재까지 정림사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시했고, 중앙 홀에는 정림사를 축소 복원한 모형이 설치돼 사찰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또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삼존불입상, 소조불, 도용편 등 각종 유물과 복제본이 있으며, 석탑 전돌과 사찰 기와를 제작하는 과정과 탑을 축조하는 과정도 모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림사지를 나와 길을 하나만 건너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백제 문화의 진수로 손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세기의 보물로 백제 공예품의 절정을 보여준다. 6세기 말 백제 부여시대에 제작된 금동대향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전체 높이 62.5㎝.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위에 연꽃 모양의 향로 몸체가 사뿐하게 얹혔다. 뚜껑 부분에는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산봉우리에는 온갖 것들의 형상이 빚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말 타고 사냥하는 사람도 있고 신선들도 노닌다. 호랑이와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여러 동물도 보인다. 하나같이 금방이라도 살아움직일 듯 생동감 있다. 뚜껑의 손잡이 부분은 봉황이 날아갈 듯 깃털을 움직이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봉황 바로 아래에는 다섯 악사가 각각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백제의 우아한 정원
▲ 능산리고분
부여를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궁남지다. 궁남지는 ‘궁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삼국사기’에 ‘궁궐의 남쪽에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를 파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적 제135호. 634년 무왕 시절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이라고 한다. 3만3000㎡(1만평) 정도에 이르는 지금의 궁남지는 1965년에 복원한 것인데, 원래 규모의 3분의 1 정도라고 한다.
궁남지 한가운데의 ‘뜬 섬’에는 포룡정(泡龍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있다. 이는 백제 무왕의 어머니가 궁남지에 살던 용이 나타나자 의식을 잃은 뒤 무왕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탄생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뜬 섬으로 이어지는 나무 다리를 건너면 정자로 들어갈 수 있다.
궁남지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어릴 적 이름이 서동으로 불렸던 무왕은 신라의 국정을 탐지하라는 밀명을 받고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해 서라벌로 잠입한다. 그리고 어느날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서동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마다 몰래 안고 간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직접 지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번지자 왕은 결국 선화공주를 내쫓았고, 무왕은 기다렸다는 듯 백제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신접 살림을 차린 곳이 바로 궁남지터다.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분들의 모습이 포근하게 다가온다. 신라의 거대한 왕릉과 달리 소박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전문가들은 이곳의 여린 듯 부드러운 고분을 두고 ‘백제의 곡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여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백마강 건너에 자리한 백제문화단지다. 백제 왕궁과 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한 사비성에는 왕궁 및 능사, 생활문화마을, 위례성, 고분공원, 역사문화관 등이 들어서 있다.
입구인 정양문을 지나면 사비궁이 나온다. 백제문화단지에 재현된 사비궁은 궁궐의 중심이 되는 천정전과 문사전, 무덕전 등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천정전은 사비성의 상징적 공간으로 신년하례식, 사신 접견 등 왕실의 중요 행사 때만 사용하던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백제 사비 시기의 중궁을 재현한 중궁전, 왕의 집무실 등을 볼 수 있다.
사비궁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목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능사’다. 능사는 백제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능산리에서 발굴되었던 것을 원형과 똑같은 크기로 이곳에 재현했다고 한다. 능사의 건축, 색채, 조각품 등은 백제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백제문화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는 역시 생활문화마을. 백제시대 귀족부터 군관 가옥, 그리고 중류계급과 서민계급의 집들을 재현해 놓았다. 군관 계백의 집, 건축가 아비지의 집, 의박사 왕유릉타의 집, 불상조각가 도리의 집 등이 있다. 생활문화마을 위에 자리 잡은 위례성은 한성 백제(BC 18~AD 475)의 도읍을 재현해 놓은 공간으로 위례궁, 고상가옥, 개국공신 마려의 집 등이 당시 백제의 건축과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여행 정보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이용해 남공주IC로 나와 ‘부여·이인’ 방면으로 가면 된다.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여행 고속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2시간 소요. 대전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구드래나루터 주변으로 음식특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구드래돌쌈밥(041-836-9259)의 쌈밥과 나루터식당(041-835-3155)의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장원막국수(041-835-6561)는 오래된 가정집을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외할머니댁이 생각나게 한다. 육수는 새콤하고 달콤하다. 면은 메밀 함량이 높아 가위가 굳이 필요 없다. 끼니 때마다 요란한 줄이 대문 밖에 진풍경을 만든다. 롯데부여리조트(041-939-1000, www.lottebuyeoresort.com), 백제관광호텔(041-835-0870), 스타팰리스모텔(041-833-3005) 등이 있다.
출처 | 주간조선 2375호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mcate=M1002&nNewsNumb=20150918409&nidx=18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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