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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기녀들에게 '교방굿거리춤'이 있다면 한량들에게는 '동래한량춤(東萊閑良춤)이 있다.

문화재방송 2021. 1. 5. 20:49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죄송합니다.동영상이 업 데이트 안 되면 CHROME으로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동래한량춤(東萊閑良춤)은 부산광역시 동래 지역 한량들이 추었던 춤이다. 2005년 12월 27일 부산광역시의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동래한량춤은 동래의 지역색이 강하고, 독특한 춤가락이 가미된 남성춤이다. 이 춤은 예로부터 동래 지역 한량들이 추었던 춤으로서 전체적인 춤사위는 이 지역에서 전래되는 덧배기, 배김사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정하게 정해진 춤의 형식이나 구성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량들이 놀이판을 벌일 때 흥이 고조되면 즉흥적으로 추는 개인적인 춤인 허튼춤(입춤)을 중심으로 한, 호방하고 선이 굵은 홑 춤인 남성무로서의 여유와 함께 마당춤과 기방춤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본래 동래 지역의 관속들이나 기방을 출입하는 한량들이 췄던 춤인 만큼 천박하지 않고 기품이 있으며, 동시에 즉흥적이며 개인적인 춤사위의 짜임새를 가지고 있는 예술성이 높은 춤이다. 또한 기방이라는 협소한 장소에서 자기 나름의 멋을 부리며 추는 입춤이므로 개인의 창조력과 함께 동작이 섬세하고 한량기가 있는 춤이다.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인 문장원은 동래권번을 드나들던 마지막 춤꾼으로서 충분히 농현이 묻어나는 춤사위 등 예능보유자로서 손색이 없는 동래의 대표적인 춤꾼이다.

한량춤은 지역마다 춤사위에 따른 반주음악의 내용이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으나, 교방청이나 권번 등에서 한량들이 여흥으로 췄던 무용의 역사성을 감안하면 대개 지역 특성에 맞는 시나위 가락으로 일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래한량춤은 큰 의미로는 동래 덧배기춤의 기본 형태를 바탕으로 동래야류의 양반춤, 굿거리춤, 입춤 및 동래학춤의 선행 예능으로 동래 지역 모든 남성무의 기본이 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민속춤이라 할 수 있다.

사적으로 지정된 연산군 묘와 광해군 묘에서 얻은 교훈

<멀리 보이는 섬이 연산군과 광해군의 유배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

<향토자료 28호 강화도 교동 읍내리>

 

조선10대 왕인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1506년 9월2일 교동으로 유배되어 11월 6일 31세로 사망시 까지
2개월 4일 동안 교동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離安置-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됐다.

 

중종실록 원년 9월 7일의 기록을 보면


심순경(沈順經), 최한홍(崔漢洪), 유계종(柳繼宗), 이곤(李坤)등이 폐왕을 교동에 안치하고 와서 복명하고서 이어 아뢰기를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圍籬)한 곳이 몹시 협착하여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찬물(饌物)을 통하고 말을 전할 뿐 이였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 여시(女侍)들이 목 놓아 울부짖어 호곡 하였습니다. 신 등이 작별을 고하니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다.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연산군의 병사에 대해 학질 감염설이 있지만, 11월 겨울의 학질 감염도 이해할 수 없고 일부에서는 독살설도 주장하고 있어 그의 죽음은 의혹으로 남아있다.

 

중종(中宗) 7년(1512) 12월에 폐비(廢妃)된 연산군의 부인(夫人) 신씨(愼氏)가 상언(上言)하여 묘(墓)를 강화(江華)에서 양주군(楊州郡) 해등면 원당리(현(現) 도봉구(道峰區) 방학동(放鶴洞))으로 이장(移葬)하기를 청하여 중종(中宗) 8년(1513) 2월 20일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移葬)하고 양주군(楊州郡) 관원(官員)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묘(墓)의 시설은 대군(大君)의 예우(禮遇)로 장례하여 봉분(封墳)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향로석(香爐石) 재실(齋室)이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사초지(莎草地) 문인석(文人石) 등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사적 제362호 서울 도봉구 방화동에 있는 연산군 묘역. 의정궁주(가운데)와 딸·사위(맨 앞) 묘도 함께 있다.>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800여 년된 은행나무가 연산군묘를 지키고 있다>

 

宗社幽靈不念誠(종사유령불염성) 종묘사직 영혼이 내 지성을 생각지 않아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 어찌 이다지도 내 마음이 상하는지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 해를 이어 네 아들이 꿈 같이 떠나가니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변탁영)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을 적시네.


<연산군이 계속되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

교통편
1) 4호선 미아역, 수유역, 쌍문역에서 버스 130번, 1144번 환승 ~ 연산군묘/정의공주묘 하차
2) 1, 4호선 창동역 1번 출구 버스 1161번 환승 ~ 연산군묘/정의공주묘 하차
걷기 코스
연산군묘 입구 ~ 연산군묘 ~ 정의공주묘 ~ 성빈 원씨묘/임영대군 오산군계 묘역 ~ 방학동 성당 ~ 마애불(장수산악회) ~ 방학능선 ~ 원통사 ~ 무수골 ~ 성황당 ~ 1호선 도봉역

 

 


 

<사적 제363호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9의 광해군과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1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 일부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 : 인조)을 왕으로 세웠다.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연산군과 같이 위리안치(圍離安置-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됐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 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자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 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 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 지가 있었다. 짐작컨대 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는 알 수 없지만 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 려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의 아내 유씨도 화병을 얻어 죽게 된다.

이제 광해군은 혈혈단신이 됐다.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인목대비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계속됐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 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 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 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 년 귀양생활 18년 수 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로 귀양 가면서 남긴 칠언율시가 있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風吹飛雨過城頭)
후덥지근한 장독(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瘴氣薰陰百尺樓)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滄海怒濤來薄暮)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碧山愁色帶淸秋)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歸心厭見王孫草)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客夢頻驚帝子洲)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故國存亡消息斷)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烟波江上臥孤舟)


성묘

<사적 제365호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무덤 '성묘,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5 >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이며 광해군을 낳은 공빈 김씨의 무덤이다. 공빈김씨는 명종 8년(1533)에 태어나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광해군을 낳은지 2년만인 선조 10년(1577), 25살로 요절했다.

광해군이 사후에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 한 것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왕위까지 빼았긴 뒤 유배지에서 사무치게 어머니를 그리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모자의 무덤은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사무치는 회한의 눈물을 삼키고 있다.

<광해군묘 가는 길>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의 광해군묘로 가는 길은 찾기 어렵다. 사릉관리소의 안내를 받아 영락교회묘지 길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광해군묘'라고 붙은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1만7천여 평의 광해군묘는 길가 숲 속에 숨어있어 찾는 발길을 어렵게 하며 수백 년 지난 지금도 쓸쓸히 감춰져 있다. 초라한 묘소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교훈>

연산군과 광해군은 닮은 점이 많다. 반정에 의해서 폐위된 조선의 두 명뿐인 국왕이라는 점에서 닮았고,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폐위된 이후 유배지도 같았다. 강화도의 교동도라는 섬이 그곳이다. 그런데 유배 직후 보여준 삶은 완전히 달랐다. 연산군이 유배 직후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반면, 광해군은 유배 후에도 꿋꿋이 긴 삶을 살았다. 광해군이 교동도를 거쳐 최후의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목숨을 거둔 것은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조선 국왕 전체로 보아도 영조(83세), 고종(68세)에 이어 세 번째로 긴 수명을 누렸다.

두 왕의 수명에 차이가 있었던 원인은 개인적인 건강이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두 왕의 성장 배경 또한 이와 무관치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산군은 알다시피 적장자로 왕위에 올라 궁궐에서 그야말로 호사롭게 생활한 왕이었다. 특히 사치와 향락 생활에 젖어 전국의 기녀들을 뽑아 수시로 잔치를 베풀어 ‘흥청망청’(흥청은 연산군 때의 기생으로 훗날 흥청망청 고사의 연원이 된다)한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화려한 궁궐에서 호사로운 음식만을 먹었던 연산군에게 유배라는 폐쇄된 공간과 거친 음식은 삶을 재촉하는 한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는 다르게 광해군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 정식 왕세자가 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왕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전장을 누볐고, 국왕 재임 시에는 임진왜란의 후유증 극복과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처럼 거친(?) 생활 경험은 유배라는 극한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고 결국에는 그의 장수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에서 조선시대 왕의 사례를 살펴보았지만 태조, 광해군, 영조처럼 젊은 시절 전쟁에 참여하거나 부지런한 활동을 하면서도, 소박한 밥상을 즐긴 왕이 장수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 최장수 왕 영조가 화려한 궁중 요리보다는 소박한 밥상을 즐겼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식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체질에 맞는 소박한 밥상을 즐기면서 경제적 이익과 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도 좋을 듯하다.

-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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