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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다큐]영하 35도의 혹한 속에 30만 명의 중공군에게 포위 당한 미 해병 1사단, 포위망을 뚫고 남하할수 있었기에 '흥남철수 작전' 성공

문화재방송 2021. 1. 14. 11:30

2차대전 당시의 '스타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장진호 전투'는 세계 2대 동계(冬季)전투로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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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입력 2015-02-05 20:26:15 | 수정 2015-02-06 01:06:19 | 지면정보 2015-02-06 A35면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1950년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 위로 중공군 30만여명이 몰려왔다. 18만여명은 서부전선, 12만여명은 동부전선에 투입됐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인해전술이 시작됐다. 전황은 급변했다. 서부전선이 무너지자 유엔군에 철수령이 내려졌다. 곧 이어 동부전선이 와해됐다.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격한 미 해병 1사단 병력 1만여명은 중공군에 완전 포위됐다.

해병 1사단은 2차대전에서도 활약한 최정예부대였다. 별명은 사냥개 ‘도베르만’이었다. 지휘관 스미스 소장도 유럽과 태평양 전장을 누빈 백전용사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매복과 기습, 야간·새벽 공격에 혼이 나갈 정도였다. 전멸 위기였다. 도쿄의 사령부도 ‘잃어버린 사단’으로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적은 중공군뿐만이 아니었다. 해발 1000m의 험준한 산악과 영하 35도의 혹한은 더 치명적이었다. 중기관총에 부동액을 채워야 했고 경기관총은 주기적으로 총신을 달궈야 했다. 공중 보급품이 언 땅에 부딪혀 깨지는 바람에 탄약도 25%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차가운 전투식량을 먹고 설사에 시달렸다. 기습 때문에 침낭 속에서 잘 때도 지퍼를 닫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동상이었다. 전투 중 땀이 나면 발과 발싸개 사이에 얇은 얼음막이 생겨 금방 탈이 났다. 부상자용 수혈관이나 모르핀도 얼었다.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얼어 치료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17일간 혈투를 벌이며 중공군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극적으로 포위를 뚫고 흥남까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국제시장’에도 나오지만, 유엔군 10만여명과 피란민 10만여명의 목숨을 구한 흥남 철수는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차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冬季) 전투로 꼽히는 이 비극의 현장 장진(長津)은 영어로 초신(Chosin)이라 불린다.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어 일본어 지도를 사용한 미군이 일본식으로 읽은 결과다. 생존자 모임 초신 퓨(Chosin Few)는 ‘선택 받은 소수(Chosen Few)’를 패러디한 것이다.

당시 참전했던 스티븐 옴스테드 해병대 예비역 중장 등 노병들이 미국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세우는 모양이다. 묘비 수준의 기존 것과 달리 일반인도 참배할 규모로 만들겠다고 한다. 장진호 전투를 다룬 책은 미국에서만 세 권이나 나왔다. 국내에선 소설 한 권이 전부다. 스토리 부재라는 한국 문화계로서는 무궁무진한 장엄미(美)의 원천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출처:한국경제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20519751

얼어서 전사한 병사들

전사자의 시신은 차에 태우고 병사들은 걸어서 남하

군목이 전사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흥남 철수 작전

 


6.25 전쟁 중 중국군의 참전으로 밀리기 시작한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철수 작전이 이루어졌고, 원산 지역에 있던 미군도 해안이 있는 흥남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피란민들은 영하 27도의 추위속에 배를 타고 남쪽으로 탈출하기 위하여 약 10만여 명이 흥남으로 모여들었습니다.

△ 흥남항에서 배를 타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피란민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그러나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무기와 장비가 실려있어 " 피란민 수송은 어렵다" 하였습니다.

△ KTV(한국정책방송원) 제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이에 당시 국군 제 1군단장인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미 10군단 고문의 설득으로
마침내 수송을 허락하였습니다.

△ KTV(한국정책방송원) 제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드디어 피란민 승선이 허락되었고,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대규모 피란민과 군인을 안전하게 철수시켰습니다.

△ 흥남 철수

이동할 때 승선인원 천명인 배에 만 명을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 KTV(한국정책방송원) 제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이 작전에 동원된 배 중 하나였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시 마지막으로 남은 상선이 되었습니다.

피란민의 희망 <메러디스 빅토리호>

아직도 남은 인원은 1만 4천여 명,
이 배의 정원은 60명,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어
태울 수 인원은 13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긴박한 순간!

이 배의 선장과 미 10군단 지휘관은 배에 선적해 있던 무기와 차량, 장비 등을 모두 버리고 피란민을 태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KTV 제작(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피란민의 승선이 완료된 후 버린 무기와 장비 등은 폭파시켰습니다.
마침내 1만 4천여 명의 피란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3일간의 항해 끝에 거제도 장승포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습니다.

항해 중에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였고,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으며,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하였습니다.

△ KTV 제작(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항해 중에 태어난 아기들에게 미국 선원들은 가적의 아기를 뜻하는 '미라클 베이비'라 부르며, 각각 '김치 원'부터 '김치 파이브'까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출처] 흥남 철수 작전|작성자 디모데명

영화 ‘국제시장’의 명장면 흥남부두 철수작전

 

 

 

↑사진은 흥남철수작전 당시 흥남부두에 모인 군인들과 피란민들의 모습이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위되자

함경도 흥남항에서 10만5천명의 군인과 9만8천여명의 피란민, 차량 1만7천500여대, 화물 35만 톤을

193척의 함대에 싣고 거제 장승포항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영화 ‘국제시장’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질곡의 우리 현대사를 눈물을 흘리며 회상하게 하였다. 이 영화는 어렸을 때 흥남 부두에서 미군 군함에 오르던 중에 실종된 여동생을 찾으려 배를 내려간 아버지와 생이별한 장남의 험난한 일생을 그린 영화이다. 주인공은 대략 해방직전인 1944년이나 1943년생이다. 1960년생인 필자보다 16~17년 선배 세대인 셈이다.

‘국제시장’은 오프닝신으로 참담했던 흥남 부두의 피난 장면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스케일로 화제를 모으는 ‘흥남 철수’ 장면은 수십만 피난민이 느꼈던 전쟁의 위기감을 스크린에 생생하게 담아냈다. 사람이 파도처럼 몰려들던 흥남 부두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당시 피난민들을 태웠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거대한 군함들까지 그려낸 그 시절 그 모습은 블록버스터 전쟁영화 못지않은 스케일을 보여준다.

↑ 컴퓨터그래픽으로 거대한 군함과 피란 인파를 구현해 낸 흥남부두 철수 장면.

↑ 흥남 부두의 윤덕수 가정

남한으로 탈출하려고 흥남부두에 모인 피난민 인파. 영화 국제시장.

↑ 피난민을 수송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거대한 군함들. 영화 국제시장

↑ 배에 승선하려고 임시로 친 그물사다리를 필사적으로 올라가는 피난민들. 영화 국제시장.

 

↑ 어린 딸을 안고 화물선 갑판 위로 그물사다리에 매달려 올라 가는 윤덕수의 아버지

↑ 배에 올라 타는 피난민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피난민을 가득 태우고 흥남부두를 출항한 138.7m의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군함들. 영화 국제시장

형제자매여, 그대는 전쟁사상 가장 참혹하고 처절했던 삶과 죽음의 막장을 인간승리의 드라마로 연출해낸 흥남철수작전을 기억하는가. 이때 흥남에서 철수하는 병력만 10만 5000명(미군과 국군), 차량 1만 8000대, 각종 전투물자 35만 톤이 동원되는 어마어마한 군사작전 속에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피난민 10만이 몰려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흥남철수작전이 주는 교훈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탈출에 성공한 군사작전에 있다기 보단 피난민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휴머니즘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한국인은 인종, 국적, 종교를 초월한 사람 우선의 상징,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號)를 알고 있는가? 고난의 역사를 망각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그 당시 피난민 수송선에 얽힌 기막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쟁물자는 또 만들면 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며 피난민을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전쟁물자 전부를 부두에 버린 후 7000톤 급 화물선에 1만 4000명을 태우고 자유의 땅 대한민국으로 향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50년 12월 20일 흥남부두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피던 미국 국적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아(Meredith Victory)호의 레너드 라루(Leonard P. Larue) 선장은 인산인해를 이룬 피난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북한 피난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다. 그들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그들의 아이들이 있었다. (빌 길버트의 기적의 배중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탑승정원이 60명인 화물선이었다. 그런데 승무원 47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더 탈 수 있는 인원은 고작 13명이었다. 하지만 고민하던 그는 “저 사람들을 너의 배에 태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전쟁물자 25톤을 부두에 버린 후 임시사다리를 만들어 화물선 위에 피난민을 가득 태웠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 선원이었던 미국인 로버트 러니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그 배안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갑판에는 쓰레기와 사람들의 배설물로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물도 화장실도 없는 화물선에 1만 4000명이 들끓는 급조도시(急造都市)의 불결함을 상상해 보세요… 영하 20도 강추위를 이기기 위해 아이들을 품속에 넣은 부부가 서로 껴안고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 1950년 12월 함경도 흥남 철수 당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가득 메운 피란민들,

이들은 12월 21일 흥남을 출발하여 느린 속도로 부산으로 내려와 12월 24일 밤 거제에 도착했다.

▲ 자유를 갈망하며 남한으로 탈출하려는 흥남부두의 피난민 인파

▲ 배에 승선하려고 임시로 친 그물사다리를 필사적으로 올라가고 있는 피난민들.

그들 중엔 추락해 사망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피란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모습

피란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모습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전쟁물자를 전부 부두에 내린 레너드 라루 선장은 갑판 위에 피난민 1만 4천명을 가득 태웠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 배는 일찍이 없었다. 배에 오른 1만 4천명의 피난민은 앉을 자리 없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꼿꼿이 섰다. 화장실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다. 모든 인원이 승선하는데 16시간이 걸렸으며. 당시 영하 20도의 강추위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12월 21일 흥남을 출발하여 아주 느린 속도로 부산으로 내려와 12월 24일 밤(성탄절 이브) 거제에 무사히 도착했다. 놀랍게도 이 많은 사람들이 갑판위에서 모진 추위와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이 3일을 여행하여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무사히 거제항에 도착했다. 배위에서 5명의 아기도 태어났다. 이 배는 나중에 기적의 배라는 별명이 붙었다.

흥남 철수작전 총지휘관 알먼드 장군의 부관 알렉산더 헤이그(후에 국무장관)도 “그들이 적국(敵國) 국민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 일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문제’라는 것이 그때의 확신이었다”고 술회했다.

왜 그때 사람들은 한국동란 중 죽기 살기로 이북을 탈출하였던가? 종북 좀비 신은미는 그 이유를 아는가? 국보법 폐지하고 광화문 광장에서 김일성 만세라고 외칠 수 있어야 민주주의라는 종북좌파 박원순은 대답해 보거라.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땅이 아니기에 이북 동포들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흥남 부두에서 그렇게 피 눈물을 흘리며 북한을 탈출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절대악이다. 필자도 아버지의 고향이 이북 황해도인 실향민 2세이다.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흥남부두에서 군함을 타기 위해 달려가는 윤덕수의 가정

16시간을 인내하며 피난민 1만 4천명을 배에 태운 레너드 라루 선장은 말년에 그날을 회고하며, 그 작은 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우고도 단 한 사람의 사고 없이 전원을 무사히 수송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며 감격해 했다고 한다:

“나는 가끔 그 항해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작은 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싣고 끝없는 위험을 넘으면서 한 사람의 영혼도 상하지 않고 항해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 성탄절의 파도 위에서 분명하고 잘못일 수 없는 메시지가 내에 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한국 해안의 을씨년스럽고 비통한 바다위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나의 배의 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종북 토크쇼를 열어 북한을 미화, 찬양한 신은미 같은 좌빨이 새겨들어야 할 정의로운 사람의 양심의 소리가 아닌가. 영화 ‘국제시장’은 정치색이 전혀 없는 영화이다. 그러나 종북 좀비 신은미와 뇌구조가 비슷한 좌파 매국세력은 이 영화 때문에 심기가 무척 불편할 것이다. 좌파 매국평론가와 좌빨들은 입 닥치고 종북영화 ‘동막골’이나 다시 보거라.

흥남철수의 ‘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박사 이야기도 안 할 수가 없다. 당시 10군단 민사부 고문이었던 젊은 한국인 의사(醫師) 현봉학은 군사작전이기 때문에 민간인은 태울 수 없다는 미 10군단장 알몬드 사령관을 붙들고 이렇게 애원했다고 한다.

“저 불쌍한 피난민을 그대로 버리고 가면 저들은 공산당에게 다 죽습니다. 저들을 살려 주십시오. 저들을 구해야 합니다. 저들은 공산당이 싫어 자유를 찾아 나선 사람들입니다. 저들을 살려 주십시오.”

고(故) 현봉학 박사는 194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의사로,

1950년 흥남 철수 때 미국 측을 설득해 9만8000여명의 피난민을 미군 수송선을 통해 대피시킨 실존인물이었다.

( 사진은 '국제시장'의 한 장면 )

알몬드 장군은 그의 애절한 호소에 감동되어 흥남 부두에서 긴장과 공포 속에 떨고 있는 피난민을 군인과 함께 철수시키기로 약속한다. 흥남을 탈출한 피난민 10만은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으로 피난 올 수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피난민을 수송해 준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과 알몬드 장군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한편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가슴 벅찬 메시지를 선사하는 영화로 호평받으며 전 세대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제시장’은 개봉 3주차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을 이어갔다.

 

written by 유석근 목사 (알이랑 코리아 대표)

 

 

 

어렸을 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군함에 오르던 중에 실종된 여동생을 찾으려

배를 내려간 아버지와 생이별한 장남의 험난한 한 평생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은 서독광부로 가 탄광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월남건설 노동자로 가 불구가 되어 가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동생들을 대학 보내고 시집 보내고,

부산 국제시장에 점포를 사 집안을 일으킨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70대 늙은이가 된 주인공은 방에 들어가 아버지를 그리며 흐느껴 운다.

“아버지, 저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하면서...

그때 거실에서는 가족들과 자식들과 손주들이 웃고 떠들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두 장면이 한꺼번에 화면에 뜬다.

 

그를 평생 지탱한 것은 “너는 우리 집안의 장남이니,

아비가 없을 때 네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선인(善人)의 외면은 밝고 꿋꿋하지만,

내면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거운 책임감과 짙은 외로움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슬픔이 웅크리고 있다.

 

 

관련기사: < 64년 전 겨울, 흥남 부두, 지옥과 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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