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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찬란했던 시간 속으로의 산책...'옛 절터를 찾아'<수난의 역사를 딛고…귀향 준비 마친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 현모탑'>

문화재방송 2021. 2. 1. 00:13

1957년 잘못 복원된 1만2000조각…2016년 전면 해체 후 작업

국보 101호 지광국사 현묘탑은 그 아름다움과 달리 숱한 수난을 겪었다. 한국전쟁 때인 1950년엔 폭격을 맞아 산산조각 났고(왼쪽 사진), 1911년엔 법천사터에서 반출돼 서울 명동으로 옮겨졌으며(가운데), 1957년 복원됐지만 불완전해 늘 훼손 위험을 안고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10년 상처 씻은 ‘지광국사탑’ 고향 간다

입력 :2021-01-20 17:12ㅣ 수정 : 2021-01-21 02:25

원주 법천사지에 있던 ‘국보’ 고려 승탑
일제강점기 서울·오사카로 잇단 반출
한국전쟁 때 파손돼 시멘트·철근 덧칠

문화재청, 보존처리 작업 5년 만에 끝
복원 장소는 원위치·전시관 등 논의 중

 

▲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5년간의 복원을 마치고, 원래 있던 강원 원주로 귀향을 앞두고 있다. 사진은 문화재보존과학센터 관계자가 탑신석 표면 보정 작업을 하는 모습.
문화재청 제공

일제에 의해 반출된 뒤 10여 차례 이전되고, 한국전쟁 중에 폭격을 당하는 등 한국 근대사의 고난과 상처를 품은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5년간의 보존 처리 끝에 제 모습을 되찾으며 110년 만에 귀향할 채비를 마쳤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20일 “2016년부터 진행한 지광국사탑 보존 처리 작업을 최근 완료했으며, 연구 결과를 담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보존·복원Ⅲ’ 보고서를 발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에 공개했다”고 밝혔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에 세워졌던 고려시대 국사(國師) 해린(984~1070)의 승탑이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적이고 화려한 승탑으로 평가받는다.

▲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5년간의 복원을 마치고, 원래 있던 강원 원주로 귀향을 앞두고 있다. 사진은 보존 처리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기기 이전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뒤뜰에 놓여 있던 지광국사탑.
문화재청 제공

지광국사탑의 비운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이 탑을 해체해 원주에서 서울로 반출하며 시작됐다. 명동의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진 탑은 이듬해 중구 남창동의 와다 저택 정원으로 이동했다가 그해 5월 일본 오사카로 넘어갔다. 조선총독부의 반환 요청으로 1912년 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원래 있던 원주가 아니라 경복궁에 자리잡았고, 그 후로도 경복궁 내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크게 파손돼 1957년 복원 작업을 벌였지만 치밀한 고증 없이 시멘트와 철근 등으로 보존 처리해 2005년, 2010년 두 차례 정기조사와 2014년 특별종합점검 등에서 다수의 균열과 복원 부위 탈락 등이 발견됐다. 특히 모르타르로 복원된 옥개석(지붕돌)과 상륜부는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추가 훼손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5년 9월 탑의 전면 보수를 결정하고 2016년 3월 석탑을 완전 해체한 뒤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겨 보존 처리를 진행해 왔다.

보존 처리는 모르타르를 걷어 내고, 결실된 부재를 새로운 석재로 제작하며, 유리건판과 실측도면을 바탕으로 결실 부분의 도상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전체 29개 부재 중 19개에 대해 부분적으로 신석재를 사용했으며, 옥개석과 앙화(꽃이 위를 쳐다보는 모양의 조각), 보륜(탑 상륜부 원형 모양의 부재) 등의 부재는 절반 정도를 신석재로 복원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신석재는 지광국사탑이 있던 원주에서 채석해 탑이 조성될 당시 석재와 가장 유사한 재료를 사용했다. 탑신석 사리공(사리를 넣는 구멍)에서 발견된 옥개석 파손 부재 조각과 법천사지에서 발굴된 하층 기단 갑석(돌 위에 포개어 얹는 넓적한 돌) 조각도 원래 위치에 복원했다.

 

단장은 마쳤으나 지광국사탑의 귀향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2019년 문화재위원회가 원주로 이전 결정을 내렸지만 정확한 복원 장소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천사지 내 원위치에 놓는 방안, 이 자리에 보호각을 세워 복원하는 방안, 사지 내 건립 중인 전시관으로 이전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문화재청 이종희 유형문화재과장은 “원주시와 긴밀히 협의해 지광국사탑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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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시간 속으로의 산책...'옛 절터를 찾아'

 

옛 절터를 찾아가는 여행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여행이다. 폐사지(廢寺址)라는 말 자체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절의 옛 흔적을 말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곳에 화려한 볼거리는 거의 없다. 이 여행은 상상의 여행이자 시공간을 초월한 시간탐험과도 같다.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그곳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 원주의 화려한 옛날을 보다

문막에서 2차선 국도를 따라 한적한 농촌 마을 사이로 한참을 달려 원주 거돈사지를 찾아간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족히 200미터가 넘는 너른 절터가 이곳에 있었을 거돈사의 규모를 말해준다. 지금은 삼층석탑과 원공국사승묘탑비만이 제 모습을 지키고 있을 뿐,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주춧돌과 부처를 모셨던 좌대만이 남아 있다. 1984년 처음 유적 보호공사를 시작해 몇 차례의 발굴과 복원 정비 사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니, 이전에는 이마저도 제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돈사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절터가 있다. 신라시대 말기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크게 번성했던 법천사 터다. 거돈사지가 너른 면적으로 펼쳐져 있는 것과 달리 법천사지는 절터 한가운데 마을이 들어와 있고 길까지 나 있어 규모와 형태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절의 입구인 당간지주의 위치와 발굴 조사 중인 곳곳의 흔적을 퍼즐 맞추듯 연결하면 거대한 절터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 건물이 19동이나 있었고, 우물도 세 곳이나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족히 짐작할 수 있겠다.
원주의 또 다른 폐사지인 흥법사지에서는 더욱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절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고 흥법사지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만이 남아 옛날에 이곳에 큰 가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 한강 물길 따라 자리한 가람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이토록 큰 사찰들이 들어선 것은 어떤 배경 때문일까? 그리고 왜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야 했을까? 그 해답은 지리적 여건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남한강 유역에 속하는 원주는 한반도 중심에서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는데, 특히 부론면은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다. 물길을 따라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됐고, 너른 논과 밭은 마을이 더욱 크게 번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그래서 교통과 경제의 흐름에 중요한 길목인 남한강 유역은 예부터 이 유역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한다고 할 만큼 중요한 위치로 자리잡았다.
중요한 지역인 만큼 서로 차지하려는 세력들 사이에 전쟁도 잦았는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 이후,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원주는 격전지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세력이 많이 약화된 데다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거대했던 가람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 이름 없는 보물들의 보고

 

홍천 물걸리에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여럿 있지만 이름조차 찾지 못한 절터도 있다. 절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그저 마을의 이름을 따서 물걸리사지라 불리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홍양사가 있던 장소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는 절터 한편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각을 지어 절터에서 발굴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대좌(보물 제543호), 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를 보관하고 있다.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 곳이라기에는 너무 소박해 보이는 건물의 모습에서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달라진 시대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쓸쓸함이 스친다.

- 첩첩산중에 묻힌 찬란한 불교 문화

양양 미천골 자연휴양림은 태백산맥 줄기의 깊은 계곡에 위치한 숲이다. 그 숲을 찾아 험난한 산길을 돌고돌아야 선림원지에 닿는다. 가는 길 내내 이렇게 깊은 산속에 있었던 선림원은 어떤 곳이었을지 궁금하다.
선림원은 804년(신라 애장왕 5년)경 순응법사가 창건한 곳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화려한 불교 문화를 바탕으로 크게 융성했던 사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완전히 매몰된 이곳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8년. 신라시대의 동종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 종은 상원사 범종, 에밀레종과 함께 통일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일부 파편만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새롭게 일어서다

치열했던 한국전쟁은 전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봉황이 머문다는 건봉사도 폐허로 만들었다. 건봉사는 한때 승려 수만 700명이 넘고 규모가 766칸에 이르는 영동 지역 최고의 사찰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왜구에 맞서 싸운 곳으로 유명한데, 적게는 700명에서 많게는 6,000여명이 이곳에 모여 싸움에 나섰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건봉사는 이후에도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던 호국사찰이었다.
그러나 이곳 고성은 한국전쟁 당시 휴전을 앞두고 치열하게 대치했던 전장의 한가운데였기 때문에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일하게 남은 불이문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지금은 옛 절터 옆으로 새롭게 복원된 건물이 들어서며 옛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화려하고 웅장했던 가람이 무너지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이 지속됐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지만, 가장 크고 위협적인 것은 전쟁이었다. 목숨을 빼앗고 재산을 빼앗아 가는 전쟁은 값진 문화유산도 파괴해버린 것이다.
텅 빈 이곳에서 남아 있는 흔적을 밑그림 삼아 그 위에 상상의 가람을 세워본다. 그곳에서는 웅장한 대웅전이 세워지고 화려한 불상과 탱화, 단청 그리고 은은한 목탁 소리와 풍경소리가 살아난다.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길에서 만난 이야기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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