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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놀이로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의 경수대에서 전승되던 탈춤.
18세기 중엽 이속(吏屬)이었던 안초목(安草木, 초목은 첫목 역할을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이 남쪽의 어느 섬으로 유배갔다가 귀향하여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탈춤을 많이 발전시켰다는 설이 전해져 온다. 이 설은 탈춤 의 역사적 성립 및 발전과 함께 고찰되어야 할 과제이다.
조선시대 전기까지 가면희(假面戱)를 포함한 산대희(山臺戱)나 나례희(儺禮戱)는 궁중과 지방관아에 전승되었다. 1634년(인조 12년) 이러한 공적인 의식이 폐지된 이후 거기에 참여했던 연희자들이 사직동이나 아현동을 중심으로 발전시킨 것이 본산대탈춤이다. 본산대란 산대도감(山臺都監)에 소속되었던 연희자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본산대탈춤이 지역으로 퍼져, 지역적 특성이 더해져서 발전한 것이 봉산탈춤이라 할 수 있다. 탈춤의 발전에는 지방 이속들의 역할이 컸으며, 봉산의 안초목도 그런 인물의 하나이다. 봉산탈춤이 단오놀이가 된 것은 북한 지역의 기후와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 것이다. 곧, 단오놀이를 위해서 2층 관람석의 사용권은 공연 비용을 내는 상인들에게 맡겨졌다. 탈판은 낮에는 남자들의 씨름판과 여자들의 그네뛰기에 사용되었고, 밤에는 장작불을 피워놓고 밤새도록 탈춤을 추었다.
1915년경부터 사리원으로 옮겨 경암산 아래에서 전승되었다. 황해도(해서 지역)에 널리 전해져 오는 탈춤의 한 종류이다. 해서 지역에서는 가면희나 가면극을 고유어로 탈놀이 혹은 탈놀음이라고 하지 않고 탈춤 혹은 놀탈이라고 했다. 사리원으로 옮기게 된 것은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고 행정기관의 이전에 따라 도시화와 경제력이 켜졌기 때문이다. 이 탈춤은 다른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고, 배역의 활달한 춤과 뛰어난 연기로 국내 최고의 탈춤으로 명성을 떨쳤다.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일제의 전통민속 탄압, 광복 이후의 혼란기, 북한정권 수립 이후의 민속행사 제지로 파탄의 길을 걷게 되었다. 6·25 이후 사리원에서 월남한 노장 역의 김진옥(金辰玉)과 놀량창 사자마부 역의 민천식(閔千植)에 의해 복원되었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으며, 젊은 계승자들의 우수한 기량과 지속적인 세계일주 공연으로 오늘날 국제적인 한국전통극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놀이 준비는 군민에게 비용을 거두어 탈을 만들고 무당의 의상을 차용하여 약 한 달간 읍내에서 떨어진 백운암(白雲庵)에 가서 합숙하며 연습을 했다. 봉산에서는 경수대 앞에 나지막한 축대를 쌓아 그 위에서 놀았으나, 사리원에서는 경암루 앞 광장에 28개로 나뉜 반원형 다락을 매고 안마당에 멍석을 깔아 탈판을 마련하였다. 이 28개 다락 중 탈판 오른쪽 제3의 구획을 탈막[改服廳]으로 썼다. 놀이는 길놀이, 고사, 무동춤으로 이루어진 전편과 탈놀이로 이루어진 후편으로 구별된다. 길놀이는 탈놀이에 출연하는 일부가 악공의 주악을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이때 원숭이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장난한다. 행렬이 광장에 이르면 연희자와 관람객이 모두 어울려서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지정된 탈판으로 가서 본격적인 탈춤을 시작한다. 원숭이와 사자는 놀이판이 좁아지면 관객을 정리하기도 한다. 탈춤을 마치면 탈을 태우는 소제(燒祭)를 치르면서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의 무사를 축원한다.
18세의 소녀 이애리사가 '황성옛터'를 부르다 3절에서 흐느끼자 단성사는 울음바다로
이애리사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일제강점기인 지난 1928년 <황성옛터>를 불러 '국민가요'로 칭송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극단 취성좌(뒤에 조선연극사)가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이애리수 자신도 이 노래의 노랫말과 선율에 담긴 비통한 감정을 가누지 못하여 3절을 부르다가 흐느껴 울어버린 해프닝이 생겼다.
가수가 부르던 노래를 중단한 것은 큰 실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관중들의 감동을 일으켜 객석에서는 오히려 폭풍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재청이 터져 나왔다. 이애리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노래를 불렀으나, 순조롭게 흐르던 선율이 어느듯 흐느끼면서 또 다시 노래반, 울음반이 되고 말았다.
가수도 관객들도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고, 떠나갈 듯한 박수 속에 앵콜이 요구되어 다음 막의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회자의 말은 묻히고, 일곱번이나 앵콜을 받아야 했다.
관중들은 열광하며 따라 불렀고, 언제나 노래의 3절에 이르러서면 가수와 관중 모두가 노래 반, 눈물 반이 되어버렸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눈물의 합창이 나오게 되자, 종로서 임석 일본 경관이 무대 위로 올라가 공연을 중단시켰고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이 노래의 작사자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종로서에 끌려가 밤을 세워가며 조사 받고서야 풀려난 적이 있었고, 총독부는 한때 이 노래에 대해 금지곡 처분을 내리기도 했으며, 대구의 한 보통학교에서 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2년 발매된 <황성옛터>의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판매되면서 그 인기를 증명했다.
그러나 이씨는 1930년대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나 가정주부로 생활하며 종적을 감췄다. 이씨는 개성 출신으로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하며 막간 가수로도 무대에 올랐으며, 18세 때 <황성옛터>를 부르며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그는 22세 때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광대를 며느리마지할 수 없다는 안강한 결혼 반대에 부딪힌다.
결국 두 젊은이들의 선택은 막다른 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 할 바에야 함께 세상을 떠나자는 것. 더구나 이때는 이름난 사람들의 자살사건이 많아서 사회적인 걱정거리가 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실제로 이애리수와 같이 빅터레코드사에 전속돼 있던 여자 가수 강석연이 음독자살을 해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동맥을 잘라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관 주인이 발견, 병원에 연락,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마침내 아버지는 여기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하겠다."는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아들과 이음전의 혼인을 승낙한다. 그러나 혼인 승낙에는 매우 엄격한 조건이 뒤따른다.
첫째는 결혼식은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끝까지 지켜졌다. 배동필씨가 14년 전에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만 61년 동안 함께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늦게나마 결혼식을 올렸을 만도 한데 이음전 여사는 "약속은 지킨다"면서 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혼인 조건은 지키기가 더 어려운 일이었다."며느리가 대중 예술인이었다는 얘기를 절대로 발설하지 마라."였다. 당시 뿐만 아니라 나중에 아들딸을 낳은 후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레코드 취입 때나 가수 활동 때 찍은 사진 등도 모두 없앴고 연예계 사람이나 언론사 사람들과의 접촉도 일정 금지였다.
매우 지키기 힘든 조건이지만 이음전 여사는 이것도 철저하게 지켜냈다. 장남인 배두영씨가"누나들은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생(연세대)이 돼서야 내 어머님이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세 번째 조건은, 일단 며느리가 된 이상 가수고 배우고 모든 것을 잊고 배씨 집안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배동필씨와 이음전 여사는 가정을 꾸미게 된다. 1934년에 첫딸을 낳고, 이어서 둘째 딸과 큰 아들, 작은 아들 등 2남 7녀, 9남매를 두었다. 9남매의 어머니로서, 그토록 사랑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또한 엄격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그녀는 삶의 무게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말없이 살아온 것이다.
'황성옛터’ 이애리수씨 노환으로 별세 향년 99세.
경향신문 2009. 3. 31
경기 일산 백송마을의 한 아파트형 요양시설에서 살아온 이씨는 2009년3월 26일부터 건강 상태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해왔다.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는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을 담은 가사와 구슬픈 곡조로 인기를 끌었다. 고려 옛 궁궐터인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에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빗댄 가사 덕분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에도 전국적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 국민가요가 됐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이 노래는 1928년 단성사에서 열린 극단 취성좌 공연의 막간 무대에서 18세 가수 이애리수씨의 노래로 처음 소개됐다. 1932년 음반으로 발매된 후 무려 5만장이나 팔렸다.
22세에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집안에서 반대하자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혼, 2남7녀를 낳아 기르면서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씨의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3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용인 가톨릭공원묘지. 유족으로는 장남 배두영씨 외에 7녀가 있다.
<문주영기자 mooni@kyunghyang.com>
황성 옛터 - 남인수
1.
황성 옛 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3.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속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 터야 잘있거라
황성 옛터
(왕 평 작사, 전수린 작곡, 1959년, 지구레코드)
(원곡 : 이애리수[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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