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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서울 지방에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민속 탈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

문화재방송 2021. 4. 6. 09:05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송파나루[1]는 한강 오강[2]의 하나로, 조선 후기 전국 최대 향시 중 하나인 송파장이 서던 곳이었다. 이렇게 송파지역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품을 모아 개시하는 경기 지역의 최대 상원근거지이자 상업적 부촌이었다. 특히 송파나루는 한양이 아닌 광주유수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금난전권이 미치지 못해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자유롭게 거래가 일어나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 송파장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에 상인들의 지원으로 경제적 여건이 갖춰지며 성행하였고 이때 현재 전해지는 형태를 갖추었다. 그 뒤에도 연중행사로 명절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5월 단오와 7월 백중에는 7일씩 탈춤판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송파 지역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주변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가락동과 석촌동 일대로 이주하였고 송파장은 사라지게되었다. 주민들이 이주한 이후에도 한 두 차례 정도 산대놀이를 하긴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승이 끊기고 말았다. 1930년대에 들어 한유성과 이범만 등이 석촌리에서 윤종현에게 가면극을 전수받아 재건에 성공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들어 다시 단절되었다.

광복 후 1960년대에 들어 허호영과 허윤이 구파발 본산대 연희자 윤희중을 초빙해 송파산대놀이를 재건하여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현대에는 송파산대놀이보존회가 조직되어 석촌호수 인근에 서울놀이마당과 송파산대놀이전수회관을 만들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놀이마당에서 종종 송파산대놀이 공연이 진행되고 있으며, 행사 일정에 따라 방문하면 볼 수 있다.

닌죠본(人情本)에서 슌뽄(春本)까지 독서열이 대단했던 에도인.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일본인의 ‘끝없는’ 색탐(色貪)의 기원 

마음에 드는 여자 엉덩이 살짝 꼬집어서 ‘의중’ 떠봐 

 

고래(古來)로 사랑·성은 자연스러운 현상, 구혼 거부할 권리는 여성에게…에도시대 높은 식자율 덕분에 연애편지 쓰는 방법 담은 서적까지 출판돼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의 한 장면. 일본의 군국주의가 광기로 치달아가던 1936년, 오직 섹스에만 몰두하다 애인을 살해하고 성기를 절단해 사라진 아베 사다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이 세상에 사랑노래만큼 자주 불린 노래는 없다. 그만큼 사랑은 원초적 본능이며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질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피곤한 사랑을 왜 할까?

인간이 욕망을 추구하는 무모한 노력은 인류를 존속시켜 온 동력이었다. 인간 욕망의 ‘대표선수’가 있다. 터무니없는 지적 욕구와 본능적 욕구다. 이러한 욕망의 특징은 조건을 달지 않고 덤빈다는 특징이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성적 억압을 하는 문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초식남’이라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 있다. 풀을 뜯어 먹는 남자라는 뜻이다. 초식계라는 말이 어원인데, 초식동물 같은 성격이나 행동양식에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지칭한다.

인류는 육식동물에서 진화해 잡식성으로 발전했다가 문명화 단계에 따라 초식성에도 이르게 됐다. 초식남이란 육체적 욕망을 거세당한 서글픈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문명은 날것의 욕망을 감춰야 세련됐다고 평가한다.

남들에게 쉽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아야 살 수 있는 시대다. 일본은 역사의 시작부터 야생적 사랑이 넘치는 땅이었다. 죽음으로 사랑을 질펀하게 탕진하며 지켜내는 것을 신쥬(心中)라고 부른다. 일본의 생사관에는 ‘죽음으로써 부활시킨다’는 의식이 있다. 가부키(歌舞伎), 인형극 조루리(淨瑠璃)가 유행하면서 에도시대에는 정사 사건이 많았다. 사소한(?) 것에도 곧잘 목숨을 거는 일본인들은 사랑에도 목숨 바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인의 연애의 역사를 살펴보자.

일본 열도의 탄생을 설명하는 ‘국토 창생’ 신화의 오빠 이자나기 노미코토(伊邪那岐命)와 동생 이자나미 노미코토(伊邪那美命)의 이야기는 성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나의 남는 부분을 너의 모자란 곳에 집어넣어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데 어떠하냐?”

그러한 내용은 712년에 편찬된 역사서 [고지키(古史記)]의 전반부를 장식한다. 간단한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교·성기라는 단어를 포함해 성을 묘사하는 문장이 가감 없이 등장한다.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은 성에 대해 개방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두 신의 결합으로 일본 열도와 여러 신을 탄생시킨다.

일본인의 성에 관대하고 개방적인 성문화의 면면은 중세 모노가타리(物語)에서부터 에도시대의 남녀의 정사 장면을 흥미 본위로 쓴 책인 [슌뽄(春本)], 일반 서민의 애정 생활을 묘사한 풍속 소설인 [닌죠본(人情本)]에 잘 보인다. 현대의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도 그 전통은 여전하다. 기독교적인 성에 대한 원죄의식 따위는 일본 문화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사랑과 성은 원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 당시에 남자가 여자 집을 방문하는 방처혼(訪妻婚)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남자의 구혼에 대해 거부할 권리와 능력은 여자가 갖고 있었다. 방처혼은 에도시대까지 농촌의 남자가 밤에 여자의 침소에 잠입하던 요바이 풍속으로 이어진다.

요바이가 사라진 것은 길어야 50~60년 전

 

요바이(夜這い). 어원은 남자가 여자에게 호소하며 구혼하는 것이다. 밤중에 성교를 목적으로 타인의 침실에 침입해 밤을 새고 아침에 나온다. 옛 일본의 부부관계는 여자가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했다. 남녀는 각자 따로 살고 여자의 집에 남자가 다니는 형태였다.

759년에 편찬된 [만요슈(萬葉集)] 12권에 “이웃 마을에 요바이 갔다. 큰 칼의 끈도 풀지 않았는데 동이 텄구나”는 구절이 있다. 다이쇼시대까지 농어촌을 중심으로 각처에서 행해지던 습속이다. 전후(戰後)의 고도 성장기 직전까지 각지의 농어촌에 남아 있었다. 도쿠가와시대에는 법령·번법(藩法)·향촌 규약 등으로 금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혼인제도의 강제가 아니었고 풍습 교화 차원의 계도에 그쳤다.

메이지 유신에는 근대화를 도모해 메이지 정부가 문명화와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국민 도덕 향상의 명목으로, 일부일처제의 확립, 순결 사상의 보급을 강행해 요바이 척결의 법적 기반을 정비했다.

남성이 여성의 처소에 다니는 경우가 많았지만, 반대인 지역도 있었다. 혼인·며느리·결혼 등의 글자를 옛날에는 요바후(よばふ), 요바히(よばひ)라고 불렀다. 이것은 부르다(呼ぶ)의 재활용형으로 구혼을 위해 남자가 여자의 집을 다니는 것을 의미했다. 옛 혼인은 결혼 후에도 남자가 여자 처소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것도 요바이라고 불렀다.

남녀는 각각 살고 있어 아내 침실로 남편이 다니는 형태였다. 결혼이란 가족 몰래 밤사이 다녀가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다니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원래 각지의 공동체에 있어서는 ‘일부일부제(一夫一婦制)’라고 하는 개념도 희박하고, 중혼(重婚)·요바이는 당연했다.

과거 농촌에서는 ‘마을의 처녀와 과부는 젊은이의 것’이라는 여성 공유의식을 보여주는 말이 있었다. 근대화 이전의 농촌에는 와카모노구미(若者組)가 있었다. 촌락 내에서 혼인의 규제나 승인을 통해 요바이에 관한 일정한 규칙을 마련했다. 요바이가 왕성해진 것은 남북조시대부터 가마쿠라시대에 걸친 중세이며, 촌락 공동체의 와카모노구미는 풍류라고 불리는 화려한 축제의 리더였다.

일본 사회에서 요바이가 사라진 것은 길어야 50~60년 전에 불과하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진행한 메이지 정부는 요바이 풍습을 없애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소멸하기 시작했다. 전기의 보급과 더불어 성공률이 떨어지자 자연 쇠퇴하게 된 것이다.

우타가키(歌垣). 지금도 중국 서남부 지역이나 인도차이나에서 볼 수 있는, 남녀가 산에 올라 서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관습이 있다. 일본에도 집단 맞선 축제 관습인 우타가키가 고대에 존재했다. 노래 발생의 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타가키 행사의 하나로, 예를 들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먹는다든지 남녀 그룹이 즉흥적으로 노래를 주고받았다.

메이지시대 초기 들어 남녀 혼욕 금지돼

 

여기서는 서로 번갈아 노래를 부르면서 배우자를 선택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결혼에 이르기도 한다. 우타가키의 중요한 포인트는 서로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를 때 가능한 한 길게 이어지도록 한다는 점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노래에 대답할 수 있도록 일부러 노골적인 성적표현을 사용하기도 하고 상스러운 표현을 한다는 것이 우타가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노래에 대답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혼자서 쓸쓸히 늙어갈 거요”라고 남성 그룹이 노래를 부르면 “당신들의 유혹에 응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신분 높은 약혼자가 있기 때문이에요”라며 여성 그룹이 반발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구 기독교 문화에 비해 일본에서는 본능적 성애에 대한 금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동성애도 금기가 아니었다. 특성상 여성 부재의 무가(武家) 사회나 승려들 사이에서는 남색의 전통이 존재했고, 에도시대 문학에서는 동성애가 중요한 모티브의 하나였다. 사무라이 상하 간의 남색을 슈도(衆道)라고 표현하고 출세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대항해시대 일본에 온 서양인들은 일본의 남색 만연 현상을 보고 경악하기도 한다. 게다가 처녀성이나 동정을 숭배하는 관습은 없었다. 시대가 변하고 혈통을 중시하며 이에(家)를 계승하는 사무라이 사회 안에서는 에도시대 이후 간통을 엄격하게 따졌고 혼전 성 경험도 꺼리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유교를 수용하면서 금욕적 윤리가 인구 10%에 해당하는 무가사회에서 자라났다. 서양의 기독교적 청교도주의가 들어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성문화를 강하게 지배한다. 서구열강의 시선을 의식해 메이지시대 초기에는 남녀 혼욕과 외설적 문화의 판매를 금지했다.

또한 형법상 ‘간통죄’를 적용했고, 민법상 ‘사생아’라는 단어를 제도적으로 사용했다. 그러자 성을 경멸하고 숨기려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공인된 부부 관계 외의 성행위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분위기가 정착됐다.

시대적 분위기는 나쁜 습관을 고쳐 잡는 교풍(矯風)운동, 공창제도를 폐지하는 폐창(廢娼)운동, 여성해방운동을 일으켰다. 이와 더불어 여성의 처녀성을 존중하면서 순결과 정조관념이 강해졌고 자위(自慰)를 악으로 간주하는 관념까지도 생겼다. 일본 전통 속에 있었던 촌락사회에서의 젊은 남녀 그룹인 와카모노구미, 무스메구미(娘組) 등을 통한 성교육 관습도 금지됐다.

결국 성문화의 전통은 근대화·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일본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규제받았다. 하지만 이와 같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근대적 금욕주의’ 이면에도 서민들의 전통적인 성 의식은 여전했다. 금욕적 시대인 근대를 거쳐 성(性)을 둘러싼 현대 일본은 오늘의 자유연애 시대를 맞고 있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사랑은 와카(和歌)와 문학의 주요 소재였다. [만요슈]는 4516수로 돼 있는 방대한 가집(歌集)이다. 천황·귀족으로부터 서민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이 생활을 노래하고 사랑을 읊었다. 자연과 사계를 완상하는 노래, 사랑의 노래, 색채 풍부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노래는 사랑 노래다. [만요슈]의 사랑 노래를 쇼몬카(相聞歌)라 부른다. [고금와카슈(古今和歌集)]에서도 사랑 노래(戀歌)를 볼 수 있다. 사랑 노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하다.

남녀 비율 2대 1, 주도권은 여성에게

 

헤이안시대의 모노가타리(物語)문학에서도 [이세 이야기]과 [겐지 모노가타리] 등 귀족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다수 있다. 이 시대는 남자가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다니는 가요이콘(通い婚)이 통례였다. 남녀는 시간을 만들어 사랑을 키우다가 여자 측 부모가 승낙하면 부부가 됐다.

헤이안시대 남녀의 윤리는 뒤에 봉건시대와 비교해서 아직 자유로웠다. 귀족의 남성은 여러 명의 여자와 병행적으로 관계를 가진다. 어떤 남자의 아이가 여기저기의 다른 여성에게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떤 여성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인지 몰랐다. 이런 남녀 윤리가 바뀐 것은 봉건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중세 때는 불교 계율의 하나인 여자를 범하지 말라는 영향을 받았다. 특히 남성 사회 측에서 연애를 위험시하고 혹은 거리를 둬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권문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남성이 부역, 조세의 대상이 됐다.

또 여성을 재산으로 파악하고, 교환이나 증여의 대상으로 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연애를 사회 질서를 파탄시킬 가능성 있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에도시대의 유교문화에도 계승돼 연애를 한정적으로 파악하는 윤리관과 가족제도·사회규범에 대한 헌신을 찬양하는 문화가 생겼다.

메이지시대에는 중류 계급에서는 가문을 계승하기 위해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주는 중매결혼이 많았다. 남성에겐 결혼은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결혼 후의 자유로운 연애·성애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지위가 있는 남자가 배우자 이외에 애인을 갖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사회도 기혼 남자가 미혼 여성과 교제하는 것에는 관용 있었지만, 기혼 여성이 애인을 갖는 것은 법률상 허용되지 않았다.

메이지부터 다이쇼까지 문화인을 중심으로 낭만주의의 영향도 있고, 연애결혼이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이 확산됐다. 다이쇼 시대에는 연애결혼을 동경하는 여성과 보수적인 부모와의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본 여성은 쇼와시대부터 연애소설을 탐독하고 점을 쳤다. 연애운 문구의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거나 점쟁이와 연애 상담을 했다. 연애 성취의 부적을 사서 보는 일이 유행했다. 일본 남성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에도시대 초기 무사가 많았던 에도에서는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았으며,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2대 1이었다. 여성은 잡아 끄는 손이 많은 귀중한 존재였다. 그 때문에 에도에서 자란 아이들 사이에서는 연애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물론 여성이었다. 데이트의 권유도 프러포즈도 여성으로부터가 지극히 당연했고, 남성은 의중에 둔 여성에게 연문을 써 오로지 회신을 기다렸다.

남존여비의 시대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의외로 여성이 리드했다. 좋은 여자는 성적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에도시대 이전의 여성에게도 당연히 우아함이 요구됐지만 당시의 우아함이라는 표현은 요염함이라고 하는 의미가 강했다.

“에도시기 초기까지의 우아한 여자는 품위가 있고, 풍류와 우아한 멋을 이해하고 사람의 미묘한 사정에 민감하고 남성의 권유를 함부로 거절하지 않으며 연애의 정취와 정사를 즐긴다”고 정리하는 학자도 있다. 결국 가정적인가 여부가 문제시되지 않고 어쨌든 풍류를 이해하는지 여부, 연애나 정사를 즐기는가에 비중을 뒀다.

에도 여성이 선호하는 남자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힘쓰는 일이 많던 시대 보통으로 사는 남성에게도 울퉁불퉁하게 근육이 붙어 있고 거리에는 훈도시 한 장으로 활보하는 육체노동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여성은 흔해빠진 남성의 육체미에는 별로 감동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반대로 조루리에 자주 묘사되는 ‘여자에게 인기가 있는 미남자란 돈과 권력은 없는 법’이라고 하듯 얼굴이 얼굴색이 하얗고 싹싹한 남자가 인기가 있었다.

얼굴 하얗고 싹싹한 남자가 ‘인기’

 

남자다운 개성을 연출하는 멋진 수염도 별로였다. 매끈한 피부를 멋지게 여겨 남성도 족집게로 수염을 하나씩 뽑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더욱이 치열이 고르고 하얗게 빛나는 이가 단연 인기였다. 남성들은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만든 칫솔로 양치질에 정성을 기울였다.

“무위도식하는 놈이 이를 닦아”라고 하는 오래된 센류(川柳, 5·7·5 형식의 단시)를 보면 도락이 지나쳐서 재산을 말아먹는 젊은 남자가 유흥을 위해 이를 닦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만남의 장소는 축제 때 극장이나 찻집을 이용했다. 기본적으로 여성이 자유스럽게 활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젊은 여성들은 특별한 날에 옷을 차려 입고 나가서 거기서 남녀가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는 마음에 드는 귀여운 여자가 있으면 말을 거는 대신 여자 뒤로 따라가 엉덩이를 살짝 꼬집어 의중을 떠봤다고 한다. 이때 여자가 응하면 찻집에 가서 데이트를 했다.

나름 자유연애의 시대여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보내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인 연애방식이었다. 이 시대 세계 각국과 비교해도 문화수준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던 것 같다. 데라코야(寺子屋)라는 서당 덕분에 일반 시민의 식자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연애편지 글쓰기 방법을 담은 서적까지 출판됐고 확실히 상대를 유혹할 결정적인 대사 등이 가득 실렸다.

데이트는 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찰 뒤편이나 나무그늘 등에서 몰래 행해졌다.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찻집에 갔다. 겉모습은 주방, 안에 독실이 있는 러브호텔 같은 시설을 이용했다. 그 대부분이 외부로부터 은폐된 연못 같은 것이 있어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면서 요리가 나올 때까지의 사이에 밀어를 속삭이는 느낌으로 운치 있는 데이트를 즐겼다.

에도시대부터 전전(戰前)에 걸쳐 결혼의 7할은 중매결혼이었다. 서민은 비교적 자유로운 연애를 즐겼지만 무가 계급, 부잣집 상인들은 집안의 존속을 위해 결혼 상대를 맞선을 통해 골랐다. 에도시대의 맞선은 알선자가 선택한 장소로 여성을 데려간 뒤 숨어서 남성의 얼굴·스타일·행동거지를 관찰하도록 했다. 그리고 남성이 마음에 들면 중매쟁이에게 여성이 부채를 맡긴다. 그 부채를 여자 집에 전해주는데 그걸 여자 측이 받으면 약혼이 성립됐다.

대부분의 서민의 집에는 목욕탕이 없고, 에도인은 목욕탕을 자주 이용했다. 입구에는 남녀 따로따로 입구가 있었지만 안에 들어가면 남녀 혼욕이 일반적이었다. 부잣집 딸은 유모 두 명을 데리고 가서 단단히 몸을 보호 받았다. 동네 아가씨 중에는 서로 알몸이 되는 것을 구실로 맞선 장소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확실하게 목욕탕에서 중매 맞선을 시키자”는 센류도 있을 정도이다.

일본어로 ‘연애(戀愛)’라는 표현은 1847~48년의 메드허스트의 [영화사전(英華辞典)]에 보이는 것이 가장 오래됐다. ‘love’의 역어가 아니라 오늘의 ‘연애’의 뜻으로 사전에 등장한 것은 메이지 20년(1887년)의 [불화사림(佛和辭林)]이다. 불어 ‘amour’의 역어로 ‘연애’라는 단어가 맞춰진 것이 최초라고 한다.

다만 정착은 늦어서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는 메이지 20년에 러브(ラブ)라고 가타가나로 표기했다. 그 이전에는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연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색(色)·정(情)·연(戀)·애(愛) 등으로 지칭했다.

메이지시대 이후 남녀관계는 ‘풍류’로서의 ‘이키’(粹)라는 관념에서 ‘신성한 연애(戀愛)’라는 관념으로 이행이 근대 도시 지식인들을 통해 확산됐다. 일본에도 불교적 허무사상에서 연애의 영원화를 도모하기 위해 육체적인 성 접촉을 단념하는 이른바 ‘이키’의 미풍이 에도시대 유곽을 통해 싹트고 서민들 사이에도 유포되고 있었다. ‘이키’는 연애의 대상을 소유하지 않고, 동경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에 그 미학의 특징이다.

일찍이 기타무라 도코쿠은 “‘상사상애(想思想愛)’가 아닌 ‘이키’와 같은 ‘의사연애(疑似戀愛)’는 근대적 개념인 연애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이키’를 근대문학에 도입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일본인에게 연애의 본질적 의미는 ‘반하는’ 것이며, ‘자신을 잃고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모습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스스로를 회복하게 됐을 때 사랑은 비로소 도취 상태에서 눈을 뜨는 것이다.

에도시대의 연애 미의식을 말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키워드가 이키(粋)다. 에도시대 후기 게이샤의 기풍에 대해 평가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옷차림과 행동이 깔끔하고 세련돼 보기 좋다고 느껴지는 모습을 말한다.

영육일치의 시대 넘어 초식계의 시대로?

 

[이키의 구조(いきの構造)]를 저술한 구키 슈죠(九鬼周造)는 ‘이키’의 개념에 ‘체념’을 더해 전통을 관통하는 ‘무상관’을 부가함으로써 일본 독자적인 미 의식으로 결정지었다. 이키는 에도에서는 이키라고 발음하는 한편 간사이(關西) 지방에서 ‘스이’라고 읽었다. 양자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설과 전혀 다르다고 하는 설의 두 가지가 있다.

‘이키’는 본래는 ‘기세’이며, ‘의기’ ‘기세’ ‘건방짐’ 등, 기세가 충실한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말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이 에도 초기의 유곽 등에 남녀의 정신적 ‘진심’이나 ‘순결함’을 기리는 의미에서의 미의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퓨어(pure)를 의미하는 스이(粋)의 글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키는 ‘스이’의 염려유미(艶麗優美)를 추구하는 경향에 대해서, 표면적은 산뜻하고 불쾌감이 없는 ‘내면적인 미’를 강조하고 있다.

문예상에서의 ‘이키’는 이 시기의 풍속소설에 많이 이용됐던 것으로부터, 여성중심의 미의식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또 풍속소설인 닌죠본뿐만 아니라 그 사랑 이야기의 지향은 음곡·연극·조루리·우키요에 등 위에서도 전개돼 에도의 꽃이란 호색이라는 것을 좋다고 하고, 사람이 이키를 통해 사랑을 하는 것은 안타까움을 간직한 것으로 아름답게 파악한다. 첫사랑·성애·부부애·이혼·신쥬·남색·노인의 사랑·색정이나 연애를 입구에서 인생의 깊은 곳을 바라보는 듯한 에도 사람들의 생태가 그려져 있다.

‘이키’란 그 반대어의 촌스러움을 뜻하는 ‘야보(野暮)’와 함께 현대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에도의 ‘멋’이며, 그 실제로는 단순미의 지향, ‘서민의 생활’에서 태어난 미의식이다. 연애란 ‘여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때 거기에 내면적인 미를 강조해 어떤 때는 ‘체념’의 경지를 숨기는 것으로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사무라이 정신 같은 것이다.

서양에도 연애에 있어서 기사도 정신이라고 하는 미적 규범이 있지만, 그것을 ‘일본적인 것’으로 보면, 이 ‘이키’야말로 일본 남자의 미적 규범이었다. 그것이 죠닌(町人)이 주역의 시대가 돼 그 긍지를 행동하는 역할이 남성으로부터 여성으로 옮겨 가는 것도 이 에도시대의 연애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다이쇼 시기(1912~26) 연애붐의 선구자였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구리야가와 하쿠손(廚川白村, 1880~1923)은 [근대의 언어]에서 브라우닝의 시를 인용한 “Love is best”라는 유행 문구를 만들고 영육일치의 연애, 연애 없는 결혼을 부정하는 연애지상주의를 펼쳤다.

그는 연애의 역사를 3단계로 나누고 고대를 본능의 시대, 중세를 금욕의 시대, 근세를 영육일치의 시대로 명명했다. 이제는 영육일치의 시대를 넘어 초식계의 시대가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 필자 최치현은?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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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3783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12)] 일본인의 ‘끝없는’ 색탐(色貪)의 기원

마음에 드는 여자 엉덩이 살짝 꼬집어서 ‘의중’ 떠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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