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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르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정선아리랑' 들으며 '정선 고을'기행

문화재방송 2021. 10. 10. 01:04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우리나라 영서·영동지방에 분포되어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고장 민요 정선(旌善) 아리랑은 일명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 널리 불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인 조선조 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 왕조를 섬기던 선비들 가운데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松都)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 동안 산 나물을 뜯어 먹고 생활하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세하여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을 한시로 읊은 것이 지금에 정선 아리랑 가사로 인용된 것이 많다.

그때의 선비들은 이러한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알려 주면서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며. 그 후 사화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과 폭정시(暴政時)에 고달픈 민성(民聲)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 『아리랑. 아리랑』하는 음율(후렴구)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 (또는 경복궁 중수시)라고 한다.

한일 합방 후부터 일제 말엽까지에는 나라없는 민족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를 거치는 동안 사상이 담긴 노래는 탄압됨에 따라 애정과 남·여 관계의 정한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이 불리어 졌으며. 예로부터 전하여 지는 노래와 함께 오늘날 우리 나라의 독특한 가락을 지닌 민요(民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색

첫째, 이 민요는 오래 전까지 아라리로 불리워 왔으며 그 가락은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니고 있다.

둘째, 다른 민요와 같이 한가지의 일이나 하나만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부른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상을 노래한 것이다.

셋째, 그때 그때의 지닌 감정을 속임 없이 전래의 가락에 맞추어 부름으로써 가사가 많다.

넷째, 합창이 아니고 뜻이 통하는 노래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르고 혹 후렴을 달아서 합창하는 예도 있다.

다섯째, 자연과 인생을 비유하여 노래한 것과 진리를 노래한 것이 많다.

여섯째, 율창으로 부르던 한시(漢詩)는 전하지 않고 풀이되어 부르던 노래만 전한다.

일곱째, 낙향 선비들에 의해 불려진 노래는 한시가 인용된 것이다.

여덟째, 장소를 가려서 동년배들끼리만 부르는 외설적인 노래도 있다.

아홉째, 한문을 숭상하던 지난 날이었기에 체계적으로 남겨진 기록이 없다.

열번째, 다른 지방으로 흘러 나간 정선아리랑의 가락은 많은 변천을 가져오며 그 지방의 아리랑으로 지금도 흘러퍼지고 있다.

현재 채록된 정선 아리랑은 생활편 317곡(27%), 인간 관계편 347곡(29%), 이성편 136곡(12%), 환경편 157곡(14%), 기타 185곡(16%) 등 총 1,200여수가 발굴 전해지고 있다.

창 기능보유자로는 최봉출·유영란·김병하 씨가, 전수교육 보조자로는 김남기·김형조·김길자 씨가, 전수장학생으로는 홍동주·신기선·정도진·전금택·배귀연, 김순덕 씨가 일반 전수자로는 박봉석·이승열·이순옥 등이 아리랑의 폭넓은 전승 보급을 위하여 활동하며 이들이 전수회를 구성 매주 수요일 정선 문화예술회관에서 개강하는 전수교실 참여 및 관내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활발한 전수활동을 하고 있다.

원문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749

 

예로부터 기녀들은 속옷차림부터 섹시했다.

 

신윤복, <청루소일>, [혜원전신첩], 조선, 종이에 채색, 28.2×35.6cm, 국보 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미인도>, 조선, 비단에 채색, 114.0×45.5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신윤복, <연당의 여인> 부분

조선시대 기녀와 기방문화

 

원래 조선시대 기녀(妓女), 기생(妓生)은 조선초기부터 관청에 속해있는 관노비로서 천민신분이었다.
궁중행사 등 공식적인 행사에 춤과 노래를 제공하는 여악(女樂), 내의원·혜민서 등에서 의술을
시행하는 의녀(醫女), 여성 관련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다모(茶母), 궁중의 바느질을 담당하는
상의원 소속 침선비(針線婢)등도 이에 속했다.\

그러나 기녀의 주요임무는 각종 행사에서 가무, 악을 담당하는 일이었던 만큼 국가소속 전문
예술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가 되면 점차 궁중행사에서 여악(女樂)을 동원하여 가
무를 시연하는 일이 줄어들고, 꼭 필요한 경우에는 지방의 외방관기를 부른 다음, 공연 후에
돌려보내는 등 관기로서의 역할이 현저히 줄어든다.


조선후기는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이 이루어져 서울이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간계층이 생겨나게 되고 이들은 도시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여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울의
 향략적인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이러한 여가생활의 발전은 새로운 기악(妓樂)의 수요를 창출하였고 국가에서 주어진 역할이
축소된 기녀는 적극적으로 민간의 수요에 응하게 되어 활발하게 활동한다.

서울의 신흥 중간계층은 지방에서 올라온 기녀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면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기방을 열어 도시민에게 유흥을 제공하였다.
또한 기녀는 천민이어서 별도로 나라에서 주는 녹(綠)이 없이, 생계수단을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 했으므로, 민간에서의 유흥수요에 더욱 적극적으로 부응했으리라 여겨진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중 한 면인 <청루소일>은 기방의 한때를 묘사한 그림인데, 생황을 들고
마루에 앉아 손님과 상대하는 기녀와 시종을 거느리고 어딘가에서 막 들어오는 기녀가 그
려져 있어 당대 기방의 면모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기녀들은 하류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시대의 "패션의식적인"사회집단으로서 대중으로부터 주목받고 대중의 기호를 장악하며, 그들의 복식행동은 대중으로부터 강한 수용을 받게 되면서 대중의 의복 행동에 크게 영향력을 미치는 "유행선도자"였음을 보게 된다.

 경국대전은 기생에게 금은의 수식과 능라의 의복을 입을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기생들은 복식금제에 있어서 많은 특혜가 주어져 복식이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는데, 옷감은 중국제 비단을 비롯한 고급 소재를, 색상에 있어서도 붉은색, 노랑색 등 화려한 색상과 수를 놓거나 무늬있는 화려한 직물을 사용하였다. 신발에 있어서도 가죽신에 수를 놓은 화려한 신을 신었음은 물론,
 금은으로 된

노리개와 일체의 장신구 등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머리치장에 있어서도 고가의 가체로 얹은

머리를 높게 하였고 여기에 화려하고

다양한 머리 장식으로 그 사치함을 더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차림으로

치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직업상 남성의 눈을

끌기 위해 여성적 매력을 드러내기 위한 차림새를 하였다. 즉 저고리 길이는 가능한 한 짧게 입어 흰 치마허리가 나오게 하고, 겨드랑이 살이 보일 정도로 입었다. 한편 아래로는 치마 밑에 많은 속옷을 입어 하체를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고, 속곳이 보이도록 입음으로써 스스로의 Erotic을 드러내려 하였다.

또한 이런 면은 유교적 사회에서 남녀 내외법에 의해 쓰여진 쓰개도 이들에게는 자신의 얼굴을 타인이 볼 수 있도록 형식적이고 장식적인 쓰개로 용도가 변경된 것을 볼 수 있다.

기녀의 치마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 형태면에서 길이가 땅에 끌릴 정도로 길고 폭은 넓게하여 풍성하게 잡아 입었다.

둘째, 그 색상과 소재면에서(복식금제에 많은 혜택을 입어) 도홍, 남색, 진홍색, 백색, 옥색 등에 중국산 등 수입 비단을 비롯한 고급 비단과 용무늬, 꽃무늬, 난무늬, 봉황무늬 등이 수놓은 비단치마를 입음으로써 저고리에 버금가는 사치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보행시에는 특이한 착용방식이 있었는데, 치마 꼬리를 뒤에서 앞으로 오게하여 가슴까지 치켜 올린 후 가슴판에 붙이고 걷는 것으로 이때 속에 입은 속옷들이 의도적으로 노출되게끔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허리띠를 맴으로써 가는 허리와 볼륨있는 둔부 그리고 속옷들이 보이게 함으로써 에로틱한 실루엣을 연출하였다.

넷째, 치마의 여밈에 있어서는 주로 오른쪽으로 여미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섯째, 착장 실루엣에서는 두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치마 허리로 가는 허리를 강조한 반면, 치마는 둔부쪽을 풍성하게 강조하여 마치 종을 엎어 놓은 듯한 볼륨있는 실루엣과 또 다른 하나는 허리띠로 가는 허리를 강조하여 묶어 허리띠 위와 아래로 마치 호리병 같은 실루엣을 만들고 치마를 속옷들이 보이게 치켜 묶어서 입는 것이었다.

 양반녀 역시 기녀와 마찬가지로 치마 속에 속옷을 겹겹이 끼어 입어 둔부를 부풀리는 실루엣을 쫓고 있어, 이러한 실루엣이 조선후기 상·하류층 모두의 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치마의 여미는 방향에 따라 일반녀와 기생이 구분되었는데, 일반녀는 왼쪽으로 기생들은 오른쪽으로 여미었다. 

 

1920년대 기생들의 패션감각

 

 

몸매가 드러나도록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1920년대)

2
1 한복에 숄을 두르고 있는 모습(1920년대)
2 분홍저고리, 보라색 치마를 입고 우산을 들고 있는 기생 오산월(1920년대)

   

양장 차림의 기생 김영월(1920년대)

 

기생들의 새로운 스타일은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그들의 차림새를 따르고 싶어 하도록 만들었던 것만 아니라 남성들까지도 자신의 처첩에게 그 옷차림을 본받게 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대저 복장에 있어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들의 아양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첩에게 권하여 그것을 본받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익히게 한다. 아, 시례(詩禮)가 닦이지 않아 규중 부인이 기생의 복장을 하도다! 모든 부인들은 그것을 빨리 고쳐야 한다.” 아마도 많은 반가 여성들이 기생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그들의 옷차림을 따랐나 보다.

기생들은 화려한 장신구와 값비싼 옷감으로 꾸미는 것뿐만 아니라 착장법에도 변화를 주었다. 치마 끝자락을 한 바퀴 돌려 가슴 위까지 바짝 치켜 올리며 몸에 꼭 맞게 입음으로 몸매가 드러나게 되는 간접노출의 효과도 연출하였다. 그리고 서구문물도 쉽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우리의 복식문화에 접목시켰다. 두루마기 위에 서양식 숄을 두른다던가, 한복 차림에 양산을 들거나, 쪽진 머리에 앞머리를 내려 이마를 살짝 덮는 등 무조건 신문물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서양복식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해 나가던 예술인뿐만 아니라 과감한 패션을 선보이며 당시의 유행을 이끌어가던 패션의 선도자이기도 하였다.

<자료출처:인터넷 검색창에서 모셔왔습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본부장 정성조)와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은 코로나19 장기화로 힘든 국민을 위로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21년 제2회 조선왕릉문화제를 11월 7일까지 6개 왕릉에서 개최한다.


  조선왕릉을 직접 방문하는 국민들을 위해서는 왕릉의 다양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다채로운 공연을 왕릉 현장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하고, 직접 왕릉을 찾기 어려운 국민을 위해서는 조선왕릉을 주제로 한 공연 영상을 온라인으로 볼 수 있게 하거나 온라인 체험프로그램을 통한 비대면으로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


  행사는 한글날인 오는 9일 오후 7시 50분 여주 영릉 세종대왕릉에서 온라인으로 펼쳐지는 개막식(한국문화방송(MBC) 유튜브 생중계)을 시작으로 다음날인 10일부터 세종대왕릉(영릉), 동구릉, 서오릉, 선정릉, 융건릉, 홍유릉에서 11월 7일까지 펼쳐진다.
  * 한국문화방송 뉴스 유튜브 주소: https://www.youtube.com/c/MBCNEWS11


  올해는 조선 왕릉에서 다양한 경험을 직접 해보는 ‘스스로 체험 프로젝트’가 준비됐다. 지난해 동구릉에서 실시해 반응이 좋았던 도장 인증행사를 올해는 서오릉에서도 같이 진행한다. 행사 참가자들은 동구릉 9곳의 능이나 서오릉 5곳의 능에서 방문 인증 도장을 찍으면 기념품(그립톡)을 받을 수 있다. 


왕릉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와 왕릉 영상을 결합한  ‘왕릉을 듣다’ 시청각 프로그램도 준비됐다. 건원릉의 억새풀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 순창원에서 지내는 제향 소리, 세종대왕릉의 정자각에서 들리는 빗소리를 능별로 별도 설치된 스피커로 생생하게 들으며 태블릿으로 영상을 같이 볼 수 있다.


  이와 별도로 서오릉은 온라인 프로그램으로 ‘능온 프로젝트(서오릉 야별행)’를 마련하였다. 왕릉을 야간에 탐방하는 ‘서오릉 야별행’을 집에서도 즐길 수 있도록 가상현실(VR) 도구와 조족등(照足燈)을 조립할 수 있는 별도의 꾸러미를 제작해 신청자에게 제공한다. 19일(300명)과 26일(300명)에 네이버 예약시스템을 이용해 신청하면 무료로 꾸러미를 우편으로 받을 수 있다.


  또한, 조선왕릉문화제의 대표 행사인 ‘채붕-백희대전(동구릉, 서오릉, 세종대왕릉)’과 ‘홍유릉 오페라(홍유릉)’, ‘융건릉 야조(융건릉)는 사전에 제작된 공연 영상과 사진들을 왕릉에 설치한 스크린과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여 직접 공연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게 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릉인 홍릉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홍유릉 오페라 ‘나는 조선에서 왔습니다’는 1893년 고종임금이 미국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조선관을 개관하면서 궁중악사를 파견한 내용을 담았다. 거문고 연주와 판소리가 31명의 오케스트라 합주와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극으로, 조선왕릉문화제 기간동안 홍유릉 입구에 마련된 스크린을 통해 영상으로 상영하고, 주연배우들의 사진으로 꾸민 촬영구역도 마련해뒀다. MBC에서 10월 31일 밤 12시 30분에 방송으로도 볼 수 있다.


  정조 임금과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융건릉을 무대로 펼쳐지는 공연인 ‘융건릉 야조(정조의 꿈-야조(夜操))’는 1795년 윤 2월 12일(넷째날/을묘원행) 정조가 어머니(혜경궁 홍씨)와 함께 현륭원을 참배하고 서장대에서 주야간 군사훈련을 참관한 기록을 활용하여 창작한 공연이다. 관람객들은 융릉으로 가는 길에 마련한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으며, 사진촬영 구역에서 기념촬영을 할 수 있다.


  ‘채붕-백희대전’은 조선 시대에 선대왕이 돌아가신 뒤 3년 상을 치루고 난 후에 종묘에 신위를 부묘한 후에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가요(歌謠)를 불렀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기획한 전통연희이다. 왕이 능을 참배하고 환궁(還宮)하는 길에 어가 행렬을 맞이할 때, 또는 선대왕의 신위를 종묘에 모시고 난 후 백성들 앞에서 선보이는 연희와 백희 공연이나 무대를 일컫는다. 채붕-백희대전 영상은 동구릉과 서오릉, 세종대왕릉 재실 앞에 설치한 스크린에서 볼 수 있으며, 이곳도 사진촬영 구역이 따로 마련되었다.


  조선왕릉문화제를 위해 준비한 모든 공연 영상들은 ‘조선왕릉문화제 유튜브(https://url.kr/9fjqpn)에서 조선왕릉문화제 기간에 순차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왕릉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국민들을 위해서 올해 처음으로 ‘찾아가는 왕릉문화제’도 선보인다. 경남 진주성(10.30.~10.31.)과 경북 경주 교촌 한옥마을(11.6.~11.7.) 일원에서 ‘채붕-백희대전’ 공연이 날짜별로 오후 2시에 펼쳐진다. 이와 함께 ‘융건릉 야조를 만나다’ 야외 전시 세트가 설치되고 ‘창덕궁 달빛기행’을 비대면 체험으로 꾸민 ‘궁-바퀴를 달다’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된다. 창덕궁 차비(差備)와 나인이 사전 신청한 학교들에 에 직접 찾아가 학생들에게 가상현실(VR) 카드보드와 청사초롱을 만들게 하며 창덕궁 달빛기행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은 이번 행사가 보다 많은 국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에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조선왕릉이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에게 치유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문화재방송.한국(www.tntv.kr)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