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열사가 순국하자,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오빠 유우석을 비롯해 스승과 동문들에 의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이게 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가운데 열사의 주검은 흔적도 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그 영혼이라도 편히 잠드시도록 초혼묘를 매봉산 중턱에 마련하였다.
초혼묘는 6각의 뿔형태로 각 면에는 열사의 기도문을 비롯하여 비문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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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下고문실 본 日 관람객들… 죄인처럼 눈도 못 마주치죠"
남정미 기자
신혜정 인턴기자
[오늘 광복절… 서울과 도쿄의 너무 다른 모습 2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日語 해설사들이 본 일본인들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들어와 돌아갈땐 "정말 미안합니다" 매년 6만명 넘게 다녀가
유관순 열사의 감방에선 감정 잘 안 드러내는 그들도 끝내 눈물 흘리고 말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7년째 일본어 해설사로 일하는 구본식(63)씨는 늘 같은 질문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이곳을 누가 지었을까요?"
일본인 관람객들은 열이면 열 "모르겠다"고 말한다. 구씨가 "일본 사람이 지었다"고 하면 다들 의아한 눈빛이 된다. "일본 사람이 왜 지었을까요… 조선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서입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극히 차분하고 조용한 일본인들이지만 구씨의 설명이 계속되면 숙연해진다. 동료 일본어 해설사 조성태(72), 이혜섭(60), 이희숙(54), 안경실(52)씨도 똑같이 경험하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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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관람 온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사람을 좁은 공간에 세워놓는 일제강점기 고문 장비에 들어가 체험하고 있다. 관람객들에게 안내를 하고 있는 일본어 해설사 구본식씨에 따르면 이런 고문 장비들을 본 일본인 관광객들은 대부분 처음엔 믿지 못하다가 나중엔 “정말 미안하다”고 사죄한다고 한다. /윤동진 기자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세워져 일제강점기 '경성감옥'으로 불렸다. 문서로 확인된 것만으로 독립운동가 165명이 숨진 곳이다.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 흔적, 사형장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보기만 해도 몸서리 쳐지는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2010년 6만1244명, 2011년 6만2060명, 2012년 6만2315명, 2013년 6만3425명. 올해는 7월 말까지 벌써 3만1071명이 다녀갔다. 외국인 관람객 10명 중 7명이 일본인이다. 국내 일본 관광객들은 급감했지만 이곳만큼은 일본인들의 발길이 증가하고 있다.
이곳에서 처음 조상의 만행을 접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우리 선조들이 정말 그랬어요?"라는 것이다. 안경실씨는 "일본인은 자신들이 꽃을 꺾을 때도 조심스러워하는 민족이라 자부한다"고 했다. 역사관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그들은 고개를 숙인다. "우리가 남의 꽃밭에서 꽃을 망쳤습니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대문 열고 들어와 남의 집 꽃밭을 망쳤습니다."
이희숙씨는 "지하 고문실을 본 일본인들의 표정은 정말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일본인들도 지하 고문실을 보면 표정이 굳고 울지 않아도 아파하는 마음이 전달된다"고 했다.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 탄 물을 콧속으로 넣었던 물고문실, 손톱 밑을 날카로운 금속으로 찔렀던 손톱 밑 찌르기 고문 현장이 재현돼 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제자 5명과 함께 찾아온 다케오 후나비키(66) 전 도쿄대 교수도 손톱 고문 장면 앞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누가 일본인에게 이런 것을 가르쳤을까 자문했다"고 말했다. 안경실씨는 "지하 고문실을 보고 나면 대다수 일본인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해설사들과 눈도 못 마주친다"고 말했다. 최고령 조성태씨는 "설명을 듣다가 무릎을 꿇고 제 다리를 붙잡더니 '유루시테 구다사이(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한 일본인 중년남성도 있었다"고 말했다.
구본식씨는 "일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람이 안중근이라는 것에 놀라고, 일본인 교도관들이 안중근의 인품에 감화됐다는 얘기를 하면 일본 관람객들의 눈빛이 흔들린다"고 말했다.
어지간해서는 혼네(本音·본심)를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고 마는 곳이 있다. 전시장 맨 마지막 유관순 열사의 8번 감방이다. 이혜섭씨는 "유 열사의 방은 특별히 잔인한 장면은 없다"고 했다. 해설사들은 담담하게 말한다. "지금의 고등학교 2학년인 열입곱 살 소녀였다. 이곳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신조차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모교 이화여고 교장이 겨우 시신을 수습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덤조차 남지 않았다." 그런 설명만으로도 일본인 관람객들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했다가 몇 달 뒤 고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온 일본인 엄마도 있었다.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도 관람 내내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들다가도 유관순 열사 방 앞에만 오면 숙연해진다고 한다. "너희 몇 살이니? 여기 갇혔던 유관순 열사도 너희 나이였어"라는 설명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 일본어 해설사들에게 '광복절'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고문 현장이나 감옥 등을 설명할 때 '일본인들이 참 독하지만 더 독한 것은 한국 사람들'이라 설명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그렇게 모진 고문을 했음에도 절대 꺾이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나간 선조를 생각하면 광복절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2014년 3월 1일 대대적 기념행사 열린다.

2014년 8월 27일 조선일보
교육부 주최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체 개선안 토론회
유관순 열사 누락 논란
이날 토론회에선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절반(8종 가운데 4종)이 3·1 독립운동을 기술하면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내용을 빠뜨린 것이 특히 논란이 됐다.
"친일파가 만◇유관순 열사 누락 논란
이날 토론회에선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절반(8종 가운데 4종)이
3·1 독립운동을 기술하면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내용을 빠뜨린 것이 특히 논란이 됐다.
들어낸 영웅…" 교과서 절반 유관순 누락 논란
홍후조 고려대 교수는 "역사를 전공한 집필자들이 유관순 열사를 모를 리가 없는데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일부러 뺐을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결국 집필자의 편향된 역사 인식을 교과서에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있기에 기술하지 않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친일 전력의 박인덕이 해방 후 유관순을 발굴해 이화 출신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라며 "북한에선 당연히 유관순을 모르고 우리나라 교과서엔 1950년대에야 들어갔다는 것이 2009년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라고 주장했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면서 '유관순 열사 누락' 논란도 뜨거운 쟁점이 될 전망이다
출처:조선일보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27/2014082700368.html?csmain
입력 : 2014.08.27 05:36
[사설] 유관순마저 '친일파가 만든 영웅'으로 몰아가는 사람들
현재 고등학교에서 쓰이는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절반인 4종이 일제하 3·1 독립운동을 기술하면서 3·1운동의 상징적 인물 중 한 사람인 유관순 열사에 대해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유관순에 대한 서술이 없는 교과서는 북한 정권 수립을 미화하고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해 논란을 일으켰던 좌편향 계열 교과서들이다.
25일 교육부 주최로 열린 '한국사 교과서 발행 체제 개선안 토론회'에서 나온 춘천교대 김정인 교수의 발언을 보면 이렇게 된 사정이 짐작이 간다. 고려대 홍후조 교수가 "역사를 전공한 교과서 집필자들이 유관순 열사를 모를 리 없는데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일부러 뺐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김정인 교수는 "유관순은 친일 경력이 있는 (이화여전 선배) 박인덕이 해방 후 발굴해 이화 출신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라며 "북한에선 당연히 유관순을 모르고, 우리나라 교과서엔 1950년대에야 들어갔다는 게 최근의 연구 성과"라고 했다. 김 교수는 우파 성향 교학사 교과서가 발행된 이후 이를 집중 공격해왔다.
유관순은 고향 천안에서 3·1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붙잡혀 18세 나이에 감옥에서 숨졌다. 그의 부모도 독립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죽음을 당했다. 유관순은 유언에서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라고 했다.
유관순이 민족 독립의 제단(祭壇)에 목숨을 바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좌편향 교과서 집필자들은 마치 유관순의 항일 행적이 조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교과서에 싣지 않았다. 김 교수가 "북한에선 당연히 유관순을 모른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왜 우리 교과서가 북한을 따라야 한다는 것인지 저의(底意)를 묻고 싶어진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27일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國定化) 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역사교육을 손아귀에 쥔 세력들이 이렇게 자기 입맛대로 아이들을 끌고 가려 하니까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발행하겠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교육부는 지금이라도 학교에서 유관순의 독립을 위한 희생을 가르칠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의주로 247 현저동 101번지
지하철 이용시
지하철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독립공원 방향, 1분 소요)
버스 이용시
현저동 또는 독립문정류장에서 하차
●● 문의 02)360-8590~1 /홈페이지 : www.sscmc.or.kr
한국 교과서가 빼먹은 유관순, 日교과서는 어떻게 기술했나

- 김아사
- 프리미엄뉴스부 기자
- E-mail : asakim@chosun.com
- 아사(阿斯)는 아침이란 뜻이다. 고조선의 도읍인 ..
- 아사(阿斯)는 아침이란 뜻이다. 고조선의 도읍인 아사달에서 따왔다. 굶어 죽음과는 거리가 먼 뜻이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2012년부터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조선비즈에서 국회와 증권부를 거쳐, 조선일보 프리미엄뉴스부에서 일하고 있다.
괴짜 철학을 좋아한다. 거시 경제와 정치 분야도 관심사다. 두 영역을 품을 수 있는 기자가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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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4종이 유관순 열사를 다루지 않아 논란이 된 가운데, 일본의 초·중·고 검정(檢定) 교과서에는 유 열사의 항일 운동 기록이 자세히 묘사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일 본지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를 통해 입수한 일본 교과서는 3·1운동을 언급하면서 유 열사를 주도적 인물로 설명했다. 지난 1999년 오사카(大阪) 서적이 발행한 소학(우리의 초등학교 과정) 사회 6학년 교과서에는 “지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16세 학생이었던 유관순은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서울의 독립운동을 얘기하고, 우리도 들고일어나자고 호소해 아우내 만세 운동을 주동했다”며 “일본군에 붙잡힌 유관순은 일본인은 우리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 죄인으로서 심판받아야 할 것은 일본인들이라고 재판정에서 진술했다”고 기술돼 있다.
짓쿄(實敎) 출판이 지난해 발행한 고교 일본사 교과서는 “유관순은 투옥돼 1920년 10월 16세에 사망했다”고 전한 후 탑골공원에 있는 3·1운동 독립 부조를 가리켜 “일본의 무력 탄압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기술했다.
- 짓쿄 출판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3·1운동 부조/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제공
이외에도 시미즈(淸水) 서원, 도쿄(東京) 서적, 테이코쿠(帝國) 서원, 니혼분쿄(日本文敎) 출판 등이 펴낸 중학교 교과서에도 유 열사를 언급하는 내용이 담겼다.
교과서는 교육부가 집필진을 구성해 제작하는 국정(國定) 교과서와 출판사가 집필진을 자체적으로 꾸려 교과서를 만들고 이를 교육부에 승인 받는 검정(檢定) 교과서, 시도교육감의 승인을 받아 사용할 수 있는 인정(認定) 교과서로 나뉜다.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국정, 중 고교 교과서는 검정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규정상 검정 교과서를 만드는 집필진에 유관순 열사 등 특정 인물을 무조건 포함하라고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부가 검정 교과서 집필자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집필 기준을 제시하긴 하지만, 이 기준은 특정인을 서술하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 열사와 같이 항일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을 교과서에서 아예 다루지 않는 것은 실수이거나 좌편향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곽정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은 “일본의 교과서도 기술하는 유 열사의 항일 운동 기록을 우리가 외면하는 것은 독립운동 역사를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Chosun.com 단독] "말발굽 짓밟혀도 非폭력 저항… 세계史서 가장 주목할만한 봉기(蜂起)"
이옥진 기자
입력 : 2015.02.28 03:00 | 수정 : 2015.02.28 15:13
['푸른 눈의 抗日운동가' 윌리엄 린튼의 3·1운동 증언 실은 美신문 첫 공개]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손에 손에 태극기만 든 채 전국 곳곳의 거리로 쏟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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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린튼(왼쪽 사진) 선생이 1919년 5월 미국 애틀랜타 저널에 일제 치하 한국의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한 기사(오른쪽).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다. /한남대 제공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1919년 5월 '푸른 눈의 항일운동가'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린튼(한국 이름 인돈·1891~1960)의 3·1운동에 대한 증언을 보도한미국 애틀랜타의 지역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 기사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제강점기 한국 현실과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쓴 글이다. 린튼이 1956년 세운 한남대학교(구 대전대학)가 최근 교내 아카이브에서 이 기사를 발견했다.
린튼은 전북 군산의 3·1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 국권 회복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21세에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3·1운동 당시 28세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쫓겨났다가 광복 이후인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서학교를 운영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우리 정부는 201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기사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 신문은 3·1운동을 '세계사(史)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봉기'라고 평가했다.
린튼은 이 신문에 "3·1운동은 한국이 최초로 일본의 압제하에서 자국의 무기력함에 대해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한 첫 번째 시도"라며 "그것은 폭력 없는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3월 1일, 인구 30만 명의 수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 행진했다. 폭력과 무질서는커녕, 일본 정부가 군중을 해산하려고 할 때 저항조차 없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을 뿐이다. (중략) 잡혀온 한국인들로 감옥에 더 이상 자리가 없자, 군부는 기병대대를 보내 수백 명의 한국인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더 강한 군사력을 투입했고,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총검에 쓰러져갔다."
그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다. "한국의 운명은 동맹국가에 달려 있다"며 "파리평화회의는 3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민족의 민족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말살해온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한국 국민의 봉기에 응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린튼의 손자인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은 "할아버지는 일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분"이라며 "이 기사는 한국인들이 자유독립을 위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