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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다산 정약용의 보물 2점과 귀양지에서 부인이 보내준 치마 찢어 쓴 하피첩

문화재방송 2015. 4. 10. 07:27

정약용 초상화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잘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사상가이자 문학자로서 그의 학문 영역은 아주 광범하였다.

본관이 나주이고 부친이 화순 현감과 진주 목사를 지냈고 모친은 해남 윤씨다.

 

오늘은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보물 제1683호) 등 보물 2점을 비롯한 총 43건 142점의 유물을 남겼다.

그는 역경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고민했던 대학자였다.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보물 제1683호)
다산초당 전후좌우의 다조茶竈ㆍ약천藥泉ㆍ정석丁石ㆍ석가산石假山을 칠언율시로 읊고 이를 행서로 쓴 시의 모음.

 


다산이 유배를 가지 않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고 평탄한 관직생활만을 향유했었다면

오늘날 다산의 목민심서와 수많은 시문들은 없을 것이고 다산 또한 분명히 잊혀졌을 것이다.

 

 

                                                < 체험과 견문을 기초로 저술한 목민심서 >

  



다산은 1762년에 팔당호 부근 마재 소내에서 태어나 10여년간 벼슬살이를 한 후 40세 때부터 18년간 귀양살이를 거쳐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마재에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75세 나이로 세상을 떳다.

다산은 22세에 소과에 합격하고 28세에 과거(대과)에 급제하여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고 경기도 암행어사 등의 직책을 맡아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고 정조의 수원성 축조에도 설계에 참여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성

정약용의 일생에 중대한 전환이 되었고 당시 당파의 정적으로 부터 공격을 받은 것은 서학으로 알려진 천주교를 믿고 전파시킨 형제들과 친인척들 때문이었다.

다산은 조상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천주교에 대해 다소 유보적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학문을 좋아하는 다산도 서학에 관한 책을 분명 읽었을 것이고 천주교를 마음으로는 수긍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글에서 이따금 이를 엿볼 수 있다.

다산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과 보호로 모면되어 황해도 곡산부사로 잠깐 자리를 옮기기도 했지만 결국은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형제들과 가족들은 참수 당하고 다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강진으로 떠났다.

 

1780년대 천주교를 이끌었던 신자들이 지금의 서울 명동인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정약전·정약종·정약용·윤지충 등 10여 명의 신자가 둘러 앉은 가운데 이벽이 강론을 하고 있다. 1984년 화가 김태가 그린 그림으로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황사영백서'는 황사영이 북경 천주교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우리나라 신유옥사 등 천주교 박해 사건을 비단에 쓴 글이다. 이 사건의 발각으로 또 다른 엄청난 피바람이 이 강토에 몰아쳤다. 이 때 다산은 문초를 겪고 강진으로 유배를 간 것이다.

어쨋든 천주교 전래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이 다산의 매부이고, 맏형 정약현은 이 벽의 매부이면서 황사영의 장인이었다.

신유박해 때에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가서 숨을 거두었고, 막내형 정약종은 큰아들과 함께 참수 당했다. 또한 정약종의 부인과 아들 정하상과 딸 정정혜는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다산은 처음에는 강진 밖 주막을 '사의재'라 칭하고 4년간 두문불출한 후 강진읍 뒷산 보은산방으로 옮겨 주역연구를 몰두했고, 다시 만덕산 서쪽 '다산초당'으로 옮겨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교학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이 때 다산은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를 종종 찾아가 혜장선사와 교류하여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또한 23세 아래인 초의선사를 제자로 삼아 그에게 유학 등을 계도하기도 했고 대둔산 대흥사 승려들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다산은 이 다산초당에서 유명한 <목민심서>를 집필하여 57세 때 이를 완성했는데 이듬해에 귀양에서 풀려나 남양주 마재 소내로 돌아와 생가에서 만년을 보냈다. '여유당'은 다산 생가의 명칭이고 또한 다산이 만년에 삼은 아호이기도 하다.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보물 제481-3호)
정약용의 외증조 윤두서가 그림.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매씨상서梅氏尙書>가 위작임을 고증한 책.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

나이 열 여섯에 한 살 연하인 정약용에게 시집 온 풍산 홍씨가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어느날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빛 바랜 다홍치마를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다산에게 보냈다.

 

다산이 나이 40에 귀양을 떠난 지 10여년이 넘었고 언제 해배(解配) 될지

가늠하지 못하는 처지에, 접어든 황혼에 대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혼 때 입던 그 치마가 장롱 속에서도 빛이 바랬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탓해야 무엇을 하겠는가?

 

자식 아홉에 여섯을 가슴에 묻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누에와 함께

자식들도 키웠으니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다산의 나이 스물일곱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고 13년 뒤에 다시 귀양을 갔다. 

빠른 출세도 아니었지만 인생의 황금기에 유배를 가야만 했던 다산으로 인하여 

가정 경제는 거의 부인 홍씨의 몫이었다.

 

38세에 얻은 농장도 세 살이 되던 해에 죽었고,

귀양지에서 그 소식을 들은 다산이나 혼자 그 일을 감당을 했어야 했던 부인 홍씨,

모두 애절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적고는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비통해 했다.

 

말없이 여섯 폭의 다홍치마가 보내 왔지만 다산은 그 치마를 잘라서 만든 서첩에

“노을 치마”란 뜻인 “하피첩(霞피帖)”이라 표지를 썼다.

찾아 온 황혼에 순응을 하자는 뜻으로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현재는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힘을 내자는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산은 그 치마폭으로 하피첩을 만들었다.

 

"내가 강진 귀양지에 있을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활옷이었다. 붉은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 빛도 엷어져서

글씨를 쓰기에 마침맞았다. 마침내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보낸다.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것이고,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하면 틀림없이

뭉클한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곧 붉은 치마(홍 군, 紅裙)을

돌려 말한 것이다.

가경 경오년(1810) 초가을 다산(茶山)의 동암(東庵)에서 정약용 쓰다."

 

아들에게 쓴 시구(詩句)

病妻寄敝裙, 千里托心素, 歲久紅己褪, 悵然念衰暮, 裁成小書帖, 聊寫戒子句, 庶幾念二親, 終身鐫肺腑. 몸져누운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하피첩의 '하피(霞帔)'란 중국 당송(唐宋) 시대 신부가 입은 혼례복을 말하는 데,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비(妃), 빈(嬪)들이 입던 옷이다. 여기에서 하피란 다산의 부인 풍산 홍 씨가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색 치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제대로 쓰자면 홍군(紅裙), 즉 '붉은 치마'라고 써야 옳지만 이는 해석하기 나름으로는 '기생'이라는 다른 뜻도 있기 때문에 그냥 붉을 하(霞), 즉 노을 하를 써서 '하피(霞帔)'라고

한 것이다.

한편 그로부터 3년 뒤 다산은 시집 간 외동딸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서첩을 만들고 남은 천 조각에 한 해 전에 혼인한 외동딸에게 줄 그림을 그렸다. 꽃이 벙근 매화 가지에 올라탄 멧새 두 마리를 그려넣은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가 그것이다. 유배 시절 장남 학연이 두어 차례 다녀간 적은 있지만,

아내와 외동딸은 그 긴 세월 동안 얼굴 한번 볼 수가 없었다. 하나 남은 딸의 시집가는 날도 함께 해주지 못했으니 아비 된 자로서 다산의 심경이 오죽했으리요

 

 

 

▲ 매조도 다산이 외동딸에게 그려준 매화와새 그림으로,

 

그 아래 이를 그린 사연을 적었다 ⓒ 고려대박물관 소장

          翩翩飛鳥 息我庭梅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 왔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 삼으려무나
          華之旣榮 有賁其實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

 

옛 사람들의 절제된 애정 표현, 그러나 그 정신적 교감은 현대 누구도 따르지는 못할 것이다.

다산은 18년의 유배에서 풀려서 집에 온 때가 58세,

그러나 둘은 다시 18년을 같이 살다가 75세에 별세를 하였다.

 

다음은 다산이 작고 하시기 전 병중이지만 회혼례(결혼 61주년)를 위하여 지은 시.

회혼례 며칠 뒤에 별세를 하셨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칠순 나이에 신혼의 기분을 연상할 수 있는 그들의 정신 세계,

신혼은 더불어 누리는 것이니 부인 홍씨 역시 그에 상응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고 불과 몇 달이 지났을까,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다.

 이때 다산은 이미 해배 명령이 떨어져 곧 여기를 떠나야 할 처지였다. 저 어린 것이 여기 혼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이 어린 딸 홍임을 위해 똑같은 크기의 그림 한 폭을 더 그렸다.

똑같은 매조도(梅鳥圖)인데 여기에선 멧새가 한 마리다. 이 그림은 실제 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古枝衰朽欲成搓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擢出靑梢也放花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何處飛來彩翎雀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應留一隻落天涯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정약용이 시를 써 넣은 산수도. 그림 작가 미상.

 

 

 

정약용이 시를  써 넣은 어도魚圖. 그림 작가 미상.

 

이상 자료와 사진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전재했습니다...又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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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 ‘하피첩’ 7억5000만원 최고가 낙찰

    서울옥션 1차 고서적 경매… 파산 저축은행 보유품 대상

    입력 2015-09-15 02:13
    다산 ‘하피첩’ 7억5000만원 최고가 낙찰 기사의 사진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아내 홍씨 부인이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부쳐오자 여기에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직접 짓고 글씨를 써서 보냈다. 1810년(순조 10년), 그의 나이 49세 때 쓴 이 ‘하피첩((霞辛脾ㅃ育뻠?치마로 만든 첩·사진)’에는 절절한 부성애가 녹아 있다.

    서울옥션은 예금보험공사가 파산한 저축은행으로부터 받은 고서적을 대상으로 14일 진행한 제1차 고서경매에서 보물 제1683-2호인 이 하피첩이 최고가 7억5000만원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하피첩은 본래 네 첩이었으나 세 첩만 전한다. 

    또 월인석보 권9, 권10은 7억3000만원에 낙찰됐다. 조선 세조 5년(1459년)에 간행된 월인석보는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사용례와 한글 서체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경국대전 권3은 2억8000만원, 이한진 전예 경산전팔쌍절첩은 2억원,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는 1억7000만원에 판매됐다.

    이밖에 대혜보각선사서와 대승기신론의기가 각각 1억500만원에 팔리는 등 경매에 나온 보물 고서적 18점이 1억원 이상에 모두 낙찰됐다. 91점이 거래된 서울옥션 제1차 고서경매의 판매 총액(낙찰가)은 42억3100만원으로 집계됐다. 

    보물 고서적 경매에는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문화재단과 문화재단에 소속된 미술관 ▲종교재단(개인 재산으로 설립된 단체 제외) ▲사립 미술관과 박물관 ▲공공성을 띤 비영리기관과 단체만 응찰이 허용됐다. 예금보험공사는 경매로 회수된 금액을 파산 저축은행 피해 예금자 보호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출처:국민은행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243374&code=13110000&cp=du

    [만물상] 茶山 '하피첩'

    입력 : 2015.09.16 03:00

    고미술계에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뻔한 문화재가 기적같이 구출된 이야기들이 전한다. 간송미술관 겸재(謙齋) 화첩이 그렇다. 1934년 무렵 한 골동상이 용인의 세도가 별장에 묵었다. 사랑방 아궁이 앞에 종이뭉치가 쌓여 있었다. 골동상은 비단으로 꾸민 책자 하나를 발견하고 아찔했다. 화성(畵聖) 정선이 금강산을 여행하고 그린 작품을 모은 화첩이었다. 골동상은 "어차피 불쏘시개 할 거니 내게 파시오" 했다. 값은 20원. 쌀 한 가마니가 15원 할 때였다. 화첩은 몇 배 거액에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한테로 갔다.

    ▶요즘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2005년 수원 어느 모텔 주인이 건물을 고치려고 실내에 있던 파지(破紙)들을 마당에 내놓았다. 폐품 모으는 할머니가 지나가다 달라고 했다. 주인은 할머니 수레에 있던 이상한 책자에 눈이 갔다. 그는 책자와 파지를 맞바꿨다. 그러곤 혹시나 싶어 KBS '진품명품'에 내놓았다. 감정위원인 고미술 전문가 김영복은 책을 본 순간 "덜덜 떨렸다"고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이었다. '진품명품'은 감정가 1억원을 매겼다.

    [만물상] 茶山 '하피첩'
    ▶다산 '하피첩'이 그제 서울옥션 경매에서 7억5000만원을 받고 국립민속박물관에 팔렸다고 한다. 이 유물은 개인 수집가 손에 들어갔다가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건 때 압류되는 운명에 처했다. '하피'는 옛날 예복의 하나다. '붉은 노을빛 치마'란 뜻이 담겼다.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던 죄로 1801년 마흔 나이에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경기도 양수리 마재에 남았던 아내 홍씨는 남편 귀양 10년째 되는 해 자기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 홀로 떨어져 고생하는 남편을 애틋해하는 마음을 신혼 시절 색 바랜 다홍치마에 담았다. 그 치마에 다산이 아들 둘에게 주는 당부의 말을 쓰고 이를 재단해 책자처럼 만든 것이 '하피첩'이다. 다산은 치마 한 조각을 남겨 매화와 새를 그린 족자를 만들어 시집가는 딸에게도 주었다.

    ▶"부지런함(勤)과 검소함(儉),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한평생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치마에 아버지가 따뜻한 사랑을 담아 쓴 글씨, 세상에서 이보다 값진 보물이 있을까. 19년 유배에서 돌아온 다산은 새색시를 맞은 지 꼭 60년 되는 날, 일흔다섯 나이에 아내 곁에서 눈을 감았다. 아내도 2년 뒤 남편 뒤를 따랐다. 국립박물관에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다산 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하피첩'이 세상을 떠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5/201509150418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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