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사리 사지 삼층석탑과 북삼층석탑
온갖 풍상 겪어내며 오늘 이 자리에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에는 유래를 알 수 없는 돌탑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이름없는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사지(寺址) 삼층석탑(보물 제907호)이고 또 하나는 북삼층석탑(경주시문화재자료 제7호)이다. 그런데 지금은 놓인 처지가 서로 다르다.
남사리 북삼층석탑은 1973년 경주경찰서 신청사를 준공할 때 기단부만 남겨두고 지붕돌(옥개석) 3개가 경찰서 정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이 곳 주민들의 꾸준한 요청으로 1995년 드디어 옮겨 세우고 명칭도 남사리 북삼층석탑이라 명명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많이 망가졌지만 밑면에 새긴 5단의 받침은 비교적 선명하다.
반면 사지 삼층석탑은 산중 절터에 남아 있어 자태가 훨씬 돋보인다. 저 혼자 잘나기가 힘든 사정은 사람이나 탑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사지 삼층석탑은 2단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양인데, 지붕돌의 추녀가 살짝 들려 있어 날렵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간략함을 추구하는 형식이라 9세기말 작품으로 짐작된다.
- 남사저수지 배호 노래비
그 시절 국민가수 배호의 '마지막 잎새' 새겨져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남사저수지에서 만나는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는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득도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뜻밖의 수확이다. 배호는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국민가수였다. 5060세대들은 다들 배호에 열광하며 한시절을 보냈다.
가슴을 울리는 중저음으로 대중의 감성을 자극했던 배호는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신장염에 걸려 1971년 29살로 아깝게 요절했다. 활동하던 5년 동안 '누가 울어' '파도' '울고 싶어' '안녕' '0시의 이별 등 300곡 남짓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0시의 이별'은 통행금지 시작 시각에 이별한다는 노랫말 때문에 지난 시절에 금지곡이 됐던 끔찍한 에피소드가 있기도 하다.
배호 노래비가 여기 들어선 까닭은 그이가 부른 노래 '마지막 잎새'의 노랫말을 쓴 정귀문씨가 여기 출신이라는 데 있다. '마지막 잎새'는 배호가 숨을 거두기 넉 달 전인 1971년 7월에 발매된 음반에 담겨 나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한다.
- 용담정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의 득도처
배호 노래비에서 경주로 가는 방향 200m 지점 오른쪽에 조그만 도로가 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태묘(太墓)가 있다. 36살에 득도를 하고 그 뒤 동학을 포교하다가 마흔 나이에 사도난정(邪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가 묻힌 곳이다.
둘레에는 그이와 고락을 함께했던 아내와 큰아들·둘째아들의 무덤이 함께 있다.
수운 최제우 태묘는 천도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가 서 있는 탄생지, 그리고 득도를 했던 용담
정(龍潭亭)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사상의 발상지다. 태묘를 들른 다음에는 탄생지와 득도처를 둘러본다. 탄생지는 오른쪽에 있고 득도처는 왼편에 있다. 태묘에서 거리는 비슷하다.
현곡면 가정리 탄생지에는 유허비만 우뚝하다.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만든 안내판에는 '포덕(布德) 36년 후천 천황씨인 수운대신사께서 탄생하신 곳'이라 적었고 '포덕 1년 저 앞 구미산 계곡의 용담정에서 만고 없는 무극대도를 득도하시었으니, 이 겨레와 억조창생을 살리실 개벽(開闢)의 천도(天道)를 밝히시었다'고 덧붙였다. 생가터는 2012년 11월 현재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멀지 않은 용담정으로 간다. 용담정은 천도교의 성지다. 경주국립공원의 구미산지구의 중심에 해당되는데 들머리에서 용담정까지는 편안한 산길이다. 수운의 동상도 만난다. 도포를 입고 관모를 쓴 채 오른손에 책을 말아 들고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절박한 무엇인가를 외치는 듯 역동성이 뛰어나 보인다.
용담정에는 수운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수운 최제우는 보국안민을 고민하는 가운데 젊은 한 시절을 떠돌아다니며 유람을 했다. 용담정은 그의 아버지인 근암 최옥이 학사(學舍)로 쓰던 곳으로,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와 1860년 4월5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시천주(侍天主) 계시를 받고 득도한 곳이다.
최제우가 이 해 포덕을 시작한 동학은 양반 지배집단의 부패와 세도정치가 더없이 심해지고 크고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당대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동학 하면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을 한울 같이 섬기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행하면 세상은 평화롭고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동등하지 못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교세를 넓혀가던 최제우는 이단사교(異端私敎)로 좌도난정(左道亂政)과 요언혹민(妖言惑民)을 했다는 죄명으로 붙잡혀 1864년 대구성 남문 밖 관덕정에서 효수당한다. 앞서 수운은 1863년 탄압을 예상하고 도통(道統)을 최시형에게 넘기는데 최시형(1827~1898)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최제우의 보국안민 사상을 이어간다.
최제우에 이어 최시형이 앞장서 이끌게 된 동학은 벼슬아치(官) 위주 정치에서 백성(民) 위주 정치로 바꾸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였다.
최제우에게서 비롯된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는 2012년 올해로 포덕(布德) 153년. 인내천과 사인 여천은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가,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 중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 나원리 오층석탑
순백색 청신함에 비례미
이제는 경주 신라 나들이다. 먼저 구미산 지구에 있는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제39호)을 둘러본다.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높이 8.8m 거대한 석탑으로 구조가 짜임새 있고 비례가 아름답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1996년 석탑 해체수리 공사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이 탑은 100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이끼가 끼지 않고 순백색을 잘 간직하고 있어청신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원백탑'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돌탑이 있었던 절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오히려 그게 신기하다.
숱하게 그 아름다움을 칭송받아 온 감은사지 삼층석탑보다 덜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 돌탑에서 받는 감흥역시 크다. 문화재와 역사 유물이 넘쳐나는 경주지만 여기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보배다.
다음은 손순유허비(경상북도기념물 제115호)다.
신라 흥덕왕 때 효자로 칭송이 높았던 손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빗돌이라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 같은 내용을 현실에서 확인하니 느낌이 새롭다.
손순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손순의 자식이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은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부모는 다시 얻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식을 산에 묻으러 갔다. 묻으려고 땅을 파니 거기서 돌종이 나와 집에 가지고 와 울렸다. 소리는 당연지사 대궐에까지 크게 들렸다. 임금이 사정을 알아보고는 집과 쌀을 내리고 아이를 묻지 못하게 했다.
경주 오류리 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는 수령이 450년이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자매의 이루지 못한, 그래서 슬프고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는 나무다. 자매가 죽은 자리에는 등나무가 생겼고 청년이 죽은 자리에는 팽나무가 나왔다. 등나무 두 그루는 팽나무 한 그루를 휘감고 오른다. 이 등나무의 꽃잎을 말려 신혼부부의 베개에 넣어주면 부부의 애정이 두터워진다고 하며, 사랑이 식어 버린 부부가 잎을 삶아 먹으면 사랑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 진덕왕릉·태종무열왕릉·김유신장군 묘
무덤 셋을 한꺼번에 견주면서 보다
무덤 세 곳을 함께 돌아본다. 진덕왕릉과 태종무열왕릉, 김유신장군 무덤이다. 무심히 보면 별로 다르지 않고 같은 무덤이다. 진덕왕릉은 입장료가 없지만 태종무열왕릉과 김유신장군묘는 입장료를 받는다. 진덕왕릉은 구미산지구에 들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먼저 찾아가는 경주 진덕왕릉(사적 제24호). 진덕왕(?~654)은 선덕왕(?~647)에 뒤이은 신라 두 번째 여왕으로 본명은 승만(勝曼)이며 마지막 성골 출신 임금이다.
<삼국사기>는 '타고난 자질이 풍만하고 고우며, 키가 일곱 자나 되고 손을 내리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다'고 했다. 진덕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를 받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7년 동안 반란을 진압하고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안으로 힘을 기르는 한편 대당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적절하게 견제했다. 진덕왕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임금으로 평가된다.
진덕왕릉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삼국사기>는 임금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사량부는 경주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 지금 있는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고,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뒤늦은 것이다.
이를 들어 진덕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능들 가운데 주인을 정확하게 아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진덕왕릉도 그렇다.
여기 왕릉은 걸어 들어가는 둘레 솔숲도 멋지고 가로세로 지르며 이어지는 오솔길은 오히려 다른 어떤 왕릉보다 운치있다. 맑은 하늘 아래 내려쬐는 햇살, 어둑어둑한 솔숲 그늘에서 바라보니 무덤 자리가 더없이 환하다.
진덕왕릉을 떠나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어귀에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이 있다. 진덕여왕에 이어 등극한 태종무열왕 김춘추(604~661)는 진골 최초 임금으로 백제는 멸했으나 삼국통일을 보지는 못했다.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꼽히며 우리 역사상 조종(祖宗)법 묘호를 받은 첫 임금이다.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붙이는 이름인 묘호(廟號)에, 조(祖)나 종(宗)이 들어간 첫 보기라는 얘기다.
이렇게 대단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그이가 묻힌 태종무열왕릉은 다른 무덤들보다 장식이 소박해 무덤가를 두르는 호석(護石)조차 없다. 덕분에 왕릉을 둘러싼 울창한 솔숲이 한층 선명하게 다가온다.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크기는 한데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다고 한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사람을 편하게 하는 구석도 있는 것 같다.
태종무열왕릉은 신라 경주에서 주인공이 뚜렷하게 확인되는 유일한 왕릉이라 한다. 바로 앞에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가 새겨져 있는 덕분이다.
이 빗돌은 맏아들 법민(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해(661년)에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고 글씨는 둘째 아들 인문이 썼다. 귀부는 조각이 섬세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여섯 마리 용이 새겨져 있는 이수는 화려하고 웅장하며 사실적이고 역동적이다.
김유신장군묘(사적 제21호)는 밑둘레가 50m, 높이가 5.3m로 무열왕릉보다 규모는 작지만 장식이 대단하다.
김유신(595~673)은 후대에 왕으로 추존된 하나뿐인 신하다. 사후 150년 즈음인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김유신 무덤은 십이지신상 호석(護石)이 가장 눈에 띈다.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인데, 모두 의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살짝 비틀었다. 얕게 새겼지만 솜씨는 매우 세련돼 있다는 평을 받는다.
경주에는 여기 말고 진덕왕릉을 비롯한 다른 여러 왕릉에도 12지신상이 있지만 어느 것도 김유신 장군 묘의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들를 국립경주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잘 알려져 있는 박물관이다. 어쩌면 여기 있는 유적·유물을 살펴보는 것만해도 하루이틀 갖고는 모자랄 수도 있다.
여행쪽지 - 남사리 사지 삼층석탑(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 234-2), 남사리 북삼층석탑(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 313-4), 수운 최제우 태묘(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75), 수운 최제우 탄생지(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 용담정(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나원리 오층석탑(경북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676), 손순유허비(경북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623), 진덕왕릉(경북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산48), 태종무열왕릉(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1), 김유신장군묘(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7-10), 국립경주박물관(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 개관 오전 9시~오후 6시(토요일·공휴일은 1시간 연장, 3월~12월 중 매주 토요일은 오전 9시~오후 9시 야간연장 개관), 휴관 1월 1일, 매주 월요일-옥외전시장은 휴관일에도 무료개방). 입장료는 무료(유료특별전시는 제외), 문의:054-740-7500 / 홈페이지 : gyeongju.museum.go.kr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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