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보다 대한민국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 순국선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순국선열’이란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하거로 인해 순국한 사람들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를 지칭합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우리나라 영토, 백성, 글, 정신을 소중히 여긴 많은 사람들.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 그들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 바로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인 ‘순국선열’이란 무슨 말일까요?
사전적 의미의 ‘순국선열(殉國先烈)’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조(先祖)의 열사(烈士)를 뜻합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를 뜻하고
있습니다.
순국선열은 생존했던 애국지사와 더불어,
한국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순국선열의 날’은 숭고한 순국선열의 활동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현재화한다는 의미에서 광복절만큼이나 뜻 깊은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순국선열의 날’의 유래
‘순국선열의 날’은 왜 11월 17일일까요?
바로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한 것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였습니다.
1939년 11월 21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池靑天)과 차이석(車利錫)을 비롯한 6인은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殉國先烈共同記念日)’로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원안은 의결되어 순국선열의 날이 시작되게 된 것이죠.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의 추모행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광복 초기에는 민간단체가, 1955년 이후에는 정부 주관으로,
또 1962년 이후부터는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였습니다.
1970년 이후에는 정부 행사 간소화 조치로 인해 현충일 추념식에 포함되어 거행되었지만,
독립유공자 유족들의 오랜 여망과 숙원에 따라 1997년에 순국선열의 날이
다시 정부기념일로 복원됨에 따라서 정부가 추모행사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순국선열의 노래]
온 겨레 나라 잃고 어둠 속 헤매일 때
자신을 불살라서 횃불마냥 밝히시며
국내외 광복 전선서 오롯이 목숨 바친
님들의 그 충절이 겨레의 얼 지켰네
우리는 순국선열을 우러러 기리면서
그 후예다운 떳떳한 새 삶을 다짐한다 [내용 출처 : 국가보훈처]
(왼쪽부터- 한용운, 윤봉길, 김좌진, 이봉창, 강우규, 안창호, 안중근,
유관순, 신채호, 민영환, 나석주)
이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1905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실질적으로
침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잊지 않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제정했던 것이 ‘순국선열의 날’의 시작이었다
오늘은 그날... 77회!
선열들의 헌신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긴다
이강연 의병장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승아에게 유언하며 보냄)
네 아비의 평생에 품은 단층은 왕가의 일에 죽고자 한 것인데, 이제 뜻을 이루니 또 무엇을 한탄하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지 말고 정신을 수습하여 네 아우를 데리고 그날 옥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
國恥民辱(국치민욕)/나라의 수치, 백성의 치욕 乃至於此(내지어차)/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不死何爲(불사하위)/죽지 않고 어찌 하리오. 父葬未成(부장미성)/아버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國權未後(국권미후)/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하였어니 不忠不孝(불충불효)/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 死何暝且(사하명차)/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랴.
|
고광순 의병장이 사용하던 '불원복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광장에 위치
민족의 魂 그릇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되새기기 위해
조성된 작품입니다. 내부에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순국선열 추모비
제77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개최
▸ 17일(목)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 컨벤션홀에서 거행 ▸ 호주 및 카자흐스탄 기념식, 순국선열․애국지사 영령 합동추모제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행사 열려 ▸ 슬로건「순국선열 정신 이어받아, 튼튼한 대한민국 꽃피우자」 |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대일항쟁기에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순국선열의 위훈을 기리는『제77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17일(목) 오전 11시에 백범김구기념관 컨벤션홀(효창공원 내)에서 개최된다고 밝혔다.
□ “순국선열 정신 이어받아, 튼튼한 대한민국 꽃피우자”라는 주제로 열리는 기념식에는 국무총리를 비롯한 원로애국지사 및 독립유공자 유족, 독립운동관련단체장, 정부 및 각계 주요인사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순국선열의 날 약사보고, 독립유공자 정부포상과 국무총리 기념사, 기념공연, 순국선열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 특히, 이번 순국선열의 날을 계기로 새로이 공적이 확인된 12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 포상이 이루어지며, 기념식에서는 국무총리가 수상자 5명에 대하여 유족에게 훈장을 전수할 계획이다.
□ 또한, 지방에 거주하여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하여는 지방보훈관서장을 통해 전수할 계획이다.
□ 이로써 광복이후 포상된 독립유공자는 총14,576이며 금년에 포상된 인원은 3ㆍ1절, 광복절 계기 포상자를 포함하여 총 312명이다.
□ 특히, 제77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미국 LA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강혜원(女, '95애국장)・김성권(男, '02애족장, 강혜원의 夫) 부부 독립유공자의 유해봉환 행사를 16일(수)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봉영식(오전 11시)를 대전현충원에서 영결식(오후 4시)과 안장식을 거행함으로써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또한, 호주와 카자흐스탄에서도 현지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 카자흐스탄에서는 19일(토) 알마티독립유공자후손협회 주관으로 알마티 한국교육원에서 독립유공자 후손과 고려인, 교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개최되며,
‣ 호주에서는 17일(목) 광복회 호주지회 주관으로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현지 교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 등 행사를 갖는다.
□ 17일 오후 2시에는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회장 김시명) 주관으로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 앞에서『제77회 대한민국 순국선열․애국지사 영령 추모제전』이 거행된다.
□ 부산과 대구, 인천, 경기 등에서도 광복회 시․도지부 주관으로 오전 11시에 각각 기념식이 거행되며, 17일 오후 7시에는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 주관으로 KBS춘천방송총국 공개홀에서 춘천의병아리랑제가 개최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지역별로 다양한 행사가 실시된다.
□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1905. 11. 17)을 전후해 수많은 애국지사가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망국일인 11월 17일을『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하여 순국선열을 추모해왔다.
□ 광복 이후에는 광복회와 민간단체가 주관이 되어 추모행사를 거행해 오다 1997년 5월 9일 정부기념일로 제정․공포하고, 그 해부터 국가보훈처 주관의 정부 기념행사로 거행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포상 전수대상자 명단
독립유공자(서훈자) | 수상자 | ||||
성 명 | 훈 격 | 운동계열 | 주요공적 | 관계 | 성 명 |
故 성배호 (成培鎬) | 건국훈장애족장 | 3ㆍ1운동 | ㆍ1919년 3월 충남 홍성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 ㆍ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 | 외증손 | 이성훈 (男,54세) |
故 이응열 (李應烈) | 건국포장 | 국내항일 | ㆍ1941년 서울에서 일제정책을 비판하고 조선독립을 역설 ㆍ체포되어 10개월여의 옥고 | 외손녀 | 이재경 (女, 50세) |
故 이보경 (李輔卿) | 대통령표창 | 3ㆍ1운동 | ㆍ1919년 3월 경기도 부천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 ㆍ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 | 손 | 이준서(男, 49세) |
故 최덕주 (崔德柱) | 대통령표창 | 3ㆍ1운동 | ㆍ1919년 4월 전남 강진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 ㆍ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받음 | 손 | 최재국 (男, 61세) |
故 한국초 (韓國初) | 대통령표창 | 3ㆍ1운동 | ㆍ1919년 4월 경기도 안성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 ㆍ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 | 외손녀 | 박영숙 (女, 63세) |
잔혹한 IS보다 더 잔혹한 일본제국 군인들
일본군의 잔학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총칼에 순국 하셨습니다.
일본은 1880년경 부터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일본군을 주둔시켜
갖가지 만행을 자행한 후 결국은 나라를 송두리째 빼았아 점령 하드니
그래도 모자라 다시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점령 하려고 합니다.
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전 세계에 고발합시다.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독립군-죽일 놈들
일본군 놈들에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놈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기 투철한 의병대들 모습.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개를 풀어 인간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총살로 생을 마친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뒷편 일본군이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독립군 병사를 작두로 목을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아 놓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수 없는
최악의 형벌을 자행 했었다.
죽은시신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을 시켰다.
온 마을이 유해로 가득하고 일본의 원폭 피해처럼 보인다.
손을 뒤로 묶고 물에 수장하는 처형.
처형이라기 보다 학살이라고 하는게 맞을것 같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사정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눈을 감고 있다.
생매장 되어지고 있는 양민들. 일본놈들의 잔혹함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들은 숨이 끊어질때 까지 대한독립을 원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일본군들이 처형하기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지독한 고문.
하의가 벗겨지고 혹독한 고문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무 벌목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 난뒤 결국 모두 처형되었다.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입가에 미소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일본도로 목을 자를려고 고개를 새우고 있다.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죽음을 기다리는 양민들 일본인 감시아래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생매장된 양민들 가족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죽은사람의 표정에서 일본인의 잔혹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 뒤 처참한 광경. 교랑에
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라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 져있다.
강간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엉덩이에 총상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
좔영 하였다.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군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강간후 살해했다.이런 여성보급을 당담하는 일본군을 항상
여러명의 한국여성을 데리고 다녔다.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 에게는 긴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1937년)허탈한 아버지 죽은 어린 자식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있을 만큼 어이가 없는 학살 이였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당 했던 참혹한 현장.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군이 1943년 후퇴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들이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이성 잃은 일본군. 일본군은 여성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가 있다.
부녀자 강간. 일본 병사의 손을잡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난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흐르는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부녀자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차마 설명 할수 없음)
손에 실반지가 보인다. 단란했던 가정을 등지고 결국
정신대로 갈것이다. 여성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한숨 뿐이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짤러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대학살 (1923년)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한국교포 약 5천명을 피살 하였다. (몽둥이,죽창 으로 학살)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3명의 의병 총살 현장.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서대문 형무소뒤 야산 공동
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한것인다.
어린아이들 까지 죽여 불태워 졌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는 사진속에는 피할수가 없다.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된 유해들.
잔혹한 행위로 소리없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족속들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참아 볼수 없는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일본군인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맞어서 내장이 나온 상태.
일본군 종궁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이곳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근심이 가득한 한국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강제로
하는수 없이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노리게로 끌려 갔다.
종군 위안부에 들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게 하여 찍은 사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위안부의 휴식시간.
일본병사 근무지에도 불려간 종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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