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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신라 최치원 선생의 '사산비명(四山碑銘-국보)은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이다

문화재방송 2016. 12. 7. 00:53

비각 내 왼쪽이 적조탑비(국보 제315호)이다. 비신을 철제로 지탱하고 있다.

                             ▲비각 내 왼쪽이 적조탑비(국보 제315호)이다. 비신을 철제로 지탱하고 있다.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네 군데 산(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인데 신라 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857~?)은 뛰어난 문장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남긴 비문 중에서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를 일컬어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칭한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사산비명은 그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 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ㅇ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통일신라 부도비 대표


- 보령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비(국보 제8호)  

- 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국보 제47호)  

-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국립경주박물관)… 실물(實物)은 파손, 문장만 전함

-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비(보물 제138호 → 국보 제315호로 승격, 2009.12.31일)

사산비명 대부분은 당대를 살다간 고승들을 찬양하는 기록들인데 비하여 대숭복사비는 숭복사를 중창할 때 이를 기념하고 신라왕실을 찬양하는 기록인 점이 차이가 있다.
 

①문경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 寂照塔碑)-국보 제315호


용머리를 갖춘 귀부. 얼굴 앞부분이 약간 훼손되었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용머리를 갖춘 귀부. 얼굴 앞부분이 약간 훼손되었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경북 문경 봉암사의 창건주 지증대사(智證大師)의 부도비로 적조탑비(寂照塔碑)라고 부른다. 부도인 적조탑(寂照塔)과 함께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비각을 세워 그 안에 부도와 부도비를 보호하고 있으며 문경 봉암사는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인 초파일에만 개방되는 곳인지라 일반인이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 부도는 보물 제137호이며, 부도비는 보물 제138호였으나 2009년 12월 31일부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어 최치원 사산비명이 모두 국보가 되었다.
 

지증대사(智證大師)

지증대사(824~882)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9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 입산하였으며 열일곱에 계를 받고 수행하던 중 꿈속에서 보현보살을 친견하기도 하였으나 경주의 세속화 되어가는 불교를 멀리했던 듯, 경문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수행에 힘쓰다가 879년 이곳에 봉암사를 창건하였다. 창건 3년 뒤인 882년 12월 18일 저녁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로 열반하시니 세수 59세, 법랍 43년이었다.


높이 273cm의 비신 앞면은 비교적 온전해 보이지만 사실상 글자 해독이 쉽지 않다. 비신의 뒷면은 앞면과 비교하면 여러 곳이 훼손되었다. 철제로 각을 잡고 경사지게 버티고 있다.
▲높이 273cm의 비신 앞면은 비교적 온전해 보이지만 사실상 글자 해독이 쉽지 않다. 비신의 뒷면은 앞면과 비교하면 여러 곳이 훼손되었다. 철제로 각을 잡고 경사지게 버티고 있다.


스님이 돌아가신 이틀 후 현계산에 빈소를 차리고, 이듬해 1주년이 되었을 때 희양산 봉암사로 모시어 다비 후 부도를 세웠다. 헌강왕은 사람과 제물을 보내어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였고, 3년 후 임금이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내린 시호가 지증(智證)이며, 부도탑을 적조(寂照)라 내리니 부도 적조탑비(寂照塔碑, 국보 제315호)라 칭하였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내리면서 대문자가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최치원은 무려 8년 후에야(그때는 헌강왕은 죽고, 진성여왕 즉위 6년인 892년이다.) 대사의 일대기를 작성하였고, 33년이 지난 924년에야 부도비를 세웠으니 비문의 정식명칭은 유당 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有唐 新羅國 故鳳巖寺 敎諡 智證大師 寂照之塔碑銘)이다.


귀부에 비신을 꽂는 받침 부분에 새겨진 공양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귀부에 비신을 꽂는 받침 부분에 새겨진 공양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적조탑비의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는 최치원이 찬하였으나 글씨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는데 탑비에 (분황사 석혜강 서병각자 세팔십삼(芬黃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 :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새겼다)고 쓰여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모든 글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온전하게 남아있어 ‘남한에 남아있는 금석문중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최치원이 적조탑비(寂照塔碑)에 지증대사의 일대기를 쓰기를 그분의 일생에 있던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얘기는 이루 다 붓으로 기록할 수 없다며 여섯 가지 기이한 일(六異)과 여섯 가지 올바른 일(六是)로 추려서 적었다고 한다. 스님의 일대기를 포함한 그 많은 양을 필자가 직접 읽거나 해석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문화재 자료 중에 비문내용을 해석 본으로라도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각의 오른쪽에는 지증대사의 부도비인 적조탑(보물 제137호)이 있다. 스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다.
▲비각의 오른쪽에는 지증대사의 부도비인 적조탑(보물 제137호)이 있다. 스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다.


아무튼, 최치원은 비문에서 지증대사가 돌아가심에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고 기록하여 높이 칭송하였다고 한다. 최치원답다. 옛 비문을 명(銘)이라고 하면, 비문 끝에 그분의 삶을 기리는 시구를 부기하는 것인데 글쓴이가 명(銘)을 썼으면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없으면 그저 부탁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비문과 비명의 차이를 이해할 것 같다.


문경 봉암사(鳳巖寺)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도헌 지증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지증국사 비문인 적조탑비에 따르면 스님의 명성을 들은 심충이란 사람이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니 대사가 와보고 이곳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 개창된 것이다. 구산선문 중 장흥 보림사와 문경 봉암사만 현존한다.


팔각원당형의 탑으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 하대와 중대를 올리고 앙련의 상대석이 탑신을 받친다. 중대석 받침에는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의 형상인 가릉빈가를 새겼으며, 그 위 중대석에는 무릎 꿇고 합장하는 공양상이 보인다. 그 오른쪽이 정면에 해당하는데 보주, 보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리기가 있어 이 탑에 사리를 모셨다는 상징이다.
▲팔각원당형의 탑으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 하대와 중대를 올리고 앙련의 상대석이 탑신을 받친다. 중대석 받침에는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의 형상인 가릉빈가를 새겼으며, 그 위 중대석에는 무릎 꿇고 합장하는 공양상이 보인다. 그 오른쪽이 정면에 해당하는데 보주, 보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리기가 있어 이 탑에 사리를 모셨다는 상징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戰禍)를 입어 폐허가 되어 극락전만 남은 것을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조 세종대왕 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임진왜란 때 크게 손실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번의 화재와 중건이 반복되다가 구한말 의병전쟁 때 다시 전화(戰禍)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하였다.

근래 들어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과 주지 동춘 스님 후임 원행, 법연 스님 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있으나 수도 도량이라는 봉암사의 명성에 비하여 이런저런 절집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은 어쩐지 낯설어 보인다.


사리 몸돌 역시 8각형인데 앞뒤로는 자물쇠를 채운 모습을 새겼고 그 좌우에 사천왕을 새겨 사리를 지키게 하였다.
▲사리 몸돌 역시 8각형인데 앞뒤로는 자물쇠를 채운 모습을 새겼고 그 좌우에 사천왕을 새겨 사리를 지키게 하였다.


아무튼,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으로 개창한 봉암사는 고려 태조 18년 정진 대사가 계실 때는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며 정진할 만큼 위세를 떨쳤으며,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가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봉암사를 찾았다’고 할 만큼 유서 깊은 절이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원을 세웠다.


그 위로 팔각지붕을 실감 나게 새겼으며 노반, 복발, 보주의 상륜부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 위로 팔각지붕을 실감 나게 새겼으며 노반, 복발, 보주의 상륜부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결사 도량, 봉암사를 찾아온 '봉암사 결사'를 시작으로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등 20인이 참여하여 정진하는 곳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었다.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1972년 향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하기에 이르러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 성역화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의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토록 하였다.

1984년 6월 제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는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하고 특별수도원으로 삼으니 관할 지방정부와 함께 봉암사는 물론 인근 희양산 전역의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군부대 출입보다 더 엄하게 금지된 곳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은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초파일)에만 봉암사를 개방하여 탐방이나 기도하러 들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봉암사는 그래서 더 유명한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지붕돌 한쪽이 깨어졌다.



봉암사 대웅전 왼쪽으로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적조탑을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②보령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郎慧和尙 白月葆光塔碑)-국보 제8호


충남 보령에는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한 중심지였던 성주산문의 성주사 옛터가 남아 있는데 이 황량한 폐사지에 승탑은 없이 탑비만이 보호비각 안에 서 있으니 이것이 바로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낭혜화상(郎慧和尙) 부도비이다.

성주사 터는 최근 어느 정도 정리되고 울타리도 쌓아 나름대로 차분해 보이지만 관리인도 안 보이고 입장료도 받지 않는 넓고 평평한 옛터에 5층 석탑과 석등 하나, 나란히 선 3층 석탑 세 개, 그리고 금당이 들어선 흔적이 있을 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저 황량해 보이는데 이래 봬도 전성기 때는 불전이 50칸, 행랑이 800칸, 고사(庫舍)가 50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전각과 탑, 불상들이 모두 재현된다고 하여도 저 뒤쪽 한 켠에 서 있는 보호비각 안의 탑비 하나만은 못할 터이니 바로 국보 제8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郎慧和尙 白月葆光塔碑) 때문일 것이다.


낭혜화상(郎慧和尙, 801~888년)

신라 후기의 승려.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이고, 법명이 무염(無染)이며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 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으며 그 뒤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선 수행에 몰두하였으며,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년), 25년 만에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며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열반한 지 2년 뒤에 부도와 비를 세웠으니 진성여왕 4년인 890년이다. 진성여왕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大郎慧(대낭혜), 사리탑을 白月葆光(백월보광)이라 하사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은 5천여 자에 이르는데 사촌 동생 최인곤이 글을 썼고, 이 지방 특산물인 높이 2.63m의 남포 오석의 비신에 또박또박 새긴 글씨는 누구의 솜씨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 이 비는 통일신라 탑비 중에서 가장 크고,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에서도 가장 당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보령 성주사(聖住寺)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로 그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했다.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언급되었고 또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왓조각에 오합사 글자가 있어 확실하다.

이 오합사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어찌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위세가 약해지고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어느 지방호족이 또한 어느 고승을 만나 크게 중창하면서 되살아 난 것이라면 이곳 보령지역의 호족 김양과 낭혜화상 무염국사에 의하여 중창되었을 것이다.

무염국사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 붙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임진왜란 때 모조리 불타버리고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9천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고, 그 뒤쪽으로는 3개의 삼층석탑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어 그동안 3탑을 세운 절집이 없었으나 어떤 형태 어떤 의미인지 설명이 쉽지 않다.


▲성주사 터 전경. 앞쪽으로 5층 탑과 석등, 뒤쪽으로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서 있으며 왼편 뒤쪽 보호각이 부도비이다.
▲성주사 터 전경. 앞쪽으로 5층 탑과 석등, 뒤쪽으로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서 있으며 왼편 뒤쪽 보호각이 부도비이다.



▲낭혜화상 부도비는 노천에 있었으나 얼마 전 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낭혜화상 부도비는 노천에 있었으나 얼마 전 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보통 부도탑과 부도비가 한 쌍으로 세워져야 하나 아쉽게도 부도비만 홀로 서 있고 부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부도탑과 부도비가 한 쌍으로 세워져야 하나 아쉽게도 부도비만 홀로 서 있고 부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호각 주변에는 부도의 일부로 보이는 좌대 등 석재들이 흩어져 있지만 정작 제 짝인지는 알수 없다.
▲보호각 주변에는 부도의 일부로 보이는 좌대 등 석재들이 흩어져 있지만 정작 제 짝인지는 알수 없다.



▲보호각 안의 부도비 모습. 하필 관람객 눈높이에 굵직한 보호각 가로막대를 질러놓았다. 참 무감각하다.
▲보호각 안의 부도비 모습. 하필 관람객 눈높이에 굵직한 보호각 가로막대를 질러놓았다. 참 무감각하다.



▲보호각 안의 부도비 모습. 하필 관람객 눈높이에 굵직한 보호각 가로막대를 질러놓았다. 참 무감각하다.
▲보호각 안의 부도비 모습. 하필 관람객 눈높이에 굵직한 보호각 가로막대를 질러놓았다. 참 무감각하다.



▲부도비의 귀부.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의 머리와 몸 일부가 아쉽게도 파손되었다.
▲부도비의 귀부.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의 머리와 몸 일부가 아쉽게도 파손되었다.



▲왼쪽에서 보는 귀부의 머리부분은 다소 괜찮아 보인다. 비석을 꽂는 거북 등위의 좌대(碑坐 : 비좌)는 뭉글뭉글 구름 모양으로 떠받치고 아랫부분에는 안상과 꽃무늬를 새겨 화려하다.
▲왼쪽에서 보는 귀부의 머리부분은 다소 괜찮아 보인다. 비석을 꽂는 거북 등위의 좌대(碑坐 : 비좌)는 뭉글뭉글 구름 모양으로 떠받치고 아랫부분에는 안상과 꽃무늬를 새겨 화려하다.



▲뒤에서보니 등판에는 겹 육각형 무늬가 뚜렷하고 등줄기를 타고 긴 띠를 두른 끝에 꼬리가 한번 흔든 모습으로 보인다.
▲뒤에서보니 등판에는 겹 육각형 무늬가 뚜렷하고 등줄기를 타고 긴 띠를 두른 끝에 꼬리가 한번 흔든 모습으로 보인다.



▲오석에 새긴 글씨가 5천 자가 넘는다는 비신. 기계로 한 듯 또박또박 정확하게 새겼다.
▲오석에 새긴 글씨가 5천 자가 넘는다는 비신. 기계로 한 듯 또박또박 정확하게 새겼다.



▲이수에는 제목을 써넣는 題額(제액) 부분이 평평하게 남겨져 있고 그 주위로 구름과 용이 뒤엉켜 있다.
▲이수에는 제목을 써넣는 題額(제액) 부분이 평평하게 남겨져 있고 그 주위로 구름과 용이 뒤엉켜 있다.


이러한 부도비나 각종 비석을 둘러볼 때마다 금석문에 관한 지식이 모자람이 안타깝다. 비석에 쓰인 상태로 한자를 읽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한 현실이므로 가능하다면 한자 원본과 해석본을 비치해서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또한, 관련된 서적을 폭넓게 읽어서 사전에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탐방객들의 도리라고 본다. 아직 더 견문을 넓히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탑비에서 바라본 성주사 터. 뒤에는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그 앞에는 금당 터, 그 앞에는 5층 석탑과 석등이 보인다.
▲탑비에서 바라본 성주사 터. 뒤에는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그 앞에는 금당 터, 그 앞에는 5층 석탑과 석등이 보인다.



▲왼쪽 석탑은 보물 제47호, 중앙은 보물 제20호, 오른쪽은 충남유형문화재 제26호이다. 왜 이렇게 다른지는 알 수 없다.
▲왼쪽 석탑은 보물 제47호, 중앙은 보물 제20호, 오른쪽은 충남유형문화재 제26호이다. 왜 이렇게 다른지는 알 수 없다.



▲1층 몸돌에는 자물쇠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사리를 보관하고 굳게 잠갔다는 표현인 듯하다.
▲1층 몸돌에는 자물쇠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사리를 보관하고 굳게 잠갔다는 표현인 듯하다.



▲1층 몸돌에는 자물쇠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사리를 보관하고 굳게 잠갔다는 표현인 듯하다.
▲1층 몸돌에는 자물쇠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사리를 보관하고 굳게 잠갔다는 표현인 듯하다.



▲삼층석탑 앞에는 금당 터가 축대 위로 솟아 있고, 그 가운데에는 꽤 큰 규모의 불상 좌대가 보인다. 애초 뒤쪽의 3층 석탑 세개는 제자리가 아닌 듯 하다니 앞쪽의 5층 탑과 함께 일탑일금당 형식인듯 하다. 소문에는 거대한 철불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삼층석탑 앞에는 금당 터가 축대 위로 솟아 있고, 그 가운데에는 꽤 큰 규모의 불상 좌대가 보인다. 애초 뒤쪽의 3층 석탑 세개는 제자리가 아닌 듯 하다니 앞쪽의 5층 탑과 함께 일탑일금당 형식인듯 하다. 소문에는 거대한 철불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금당에 오르는 계단. 좌우측의 돌사자 상은 1986년에 도난당하여 새롭게 깎아 세웠다고 한다.
▲금당에 오르는 계단. 좌우측의 돌사자 상은 1986년에 도난당하여 새롭게 깎아 세웠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 보물 제19호이다. 그 앞의 석등까지 제대로 갖추었다.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 보물 제19호이다. 그 앞의 석등까지 제대로 갖추었다.





▲삼층석탑 오른쪽 뒤편의 민불 하나. 여러 곳이 없어지고 파손된 후 어색하게 보수한 석불 입상이다.
▲삼층석탑 오른쪽 뒤편의 민불 하나. 여러 곳이 없어지고 파손된 후 어색하게 보수한 석불 입상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두 번째로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 부도비를 찾아보았다. 낭혜화상은 봉암사의 지증대사보다 6년 늦게 입적하였으나 기록을 찾아보니 사후 2년 만에 비석이 세워졌으며 부도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지증대사는 먼저 돌아가셨지만, 사후 8년 뒤에야 일대기가 작성되고, 다시 33년 뒤에야 부도비가 세워졌으니 정작 먼저 돌아가셨지만, 부도비는 30년 이상 늦게 세워져 사산비문중 봉암사 지증대사비가 가장 늦게 세워진 연유이다. 그래서인지 국보로 승격도 가장 늦게 되었다.

③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雙磎寺 眞鑑禪師塔碑)-국보 제47호

매화를 보기 위하여 해마다 연초가 되면 아직 추위도 채 가시지 않은 섬진강 하류 전라도땅 광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건너편은 경상도 하동땅,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그 유명한 화개장터이다.

하동에서 화개장터까지 섬진강변을 따라 벚꽃길 80리라 통칭하며, 다시 화개장터에서 골짜기로 꺾어들어가 화개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천변 왼쪽은 오래된 십리 벚꽃길, 남여가 함께 걸어가면 혼인하게 된다는 일명 혼인길이며 천변 오른쪽 더 늦게 생긴 도로변에도 심어놓은 벚꽃이 이미 무성하여져서 해마다 봄이면 이 화개천변을 따라 화려한 꽃대궐이 펼쳐진다.

바로 이 화개천변 십리벚꽃길이 끝날 즈음에 있는 절이 쌍계사(雙磎寺)이며, 세번째 소개할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가 이곳에 있다. (소개하는 순서가 3번째라는 뜻이지 사산비명에 따로이 순서가 있는것은 아니다.)
 

진감선사(眞鑑禪師, 774~850년)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 속성은 최(崔)씨. 전주(全州) 금마(金馬) 사람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법을 구하려는 뜻이 간절하여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 창주(滄州)에 가서 신감(神鑑)에게 출가하니, 얼굴이 검다하여 흑두타(黑頭陀)라 불리웠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앞서 당나라에 가 있던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다니다가 도의는 먼저 귀국하고 스님은 종남산에서 3년 동안 지관을 닦은 뒤에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하다가 흥덕왕 5년(830) 귀국하여서는 상주 노악산의 장백사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가서 화개곡의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창건한 玉泉寺(옥천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진감선사 혜소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들여와 대중화 시켜 많은 대중을 교화하였으며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문성왕 12년(850), 나이 77세, 법랍 41년에 이 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헌강왕이 시호 진감선사(眞鑑禪師) 탑호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였다. 정강왕 때 옥천사를 쌍계사라 고치고,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비(碑)를 세우니 국보 제47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이다.


하동 쌍계사(雙磎寺)

쌍계사는 신라 진성왕 21년(722)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이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지금 이곳에 절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에 유학하던 진감선사가 귀국하여 퇴락한 삼법 스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였고, 그 후 정강왕 때 쌍계사로 바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이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선수행을 하는 선원(禪院),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강원(講院), 부처의 계율을 익히는 율원(律院)을 갖추어야 총림이라고 하는데 그동안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를 일컬어 5대총림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를 추가하여 8대총림으로 하였는데 쌍계사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다.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 국보 제47호)

쌍계사의 전신 옥천사(玉泉寺)를 크게 중창한 진감선사를 기리는 탑비로 헌강왕이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탑호를 내렸으며 진성여왕 1년(887)에 세워졌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가 모두 남아있다. 현재 대웅전 앞마당에 있으며, 비신의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외곽을 철제 틀로 덧붙여 보존하고 있고 글씨도 마멸이 심하나 다행히 영조 1년(1725)에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존되고 있다 한다.

탑비의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짓고 쓴 명문장이며 모두 2,417자의 해서체 글씨가 신품(神品)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중 하나로 우리나라 금석문의 으뜸으로 꼽힌다.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진감선사탑비. 귀부, 비신, 이수가 모두 온전하게 남아있지만 비신 앞면은 부분적으로 깨어졌다.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진감선사탑비. 귀부, 비신, 이수가 모두 온전하게 남아있지만 비신 앞면은 부분적으로 깨어졌다.

 

▲부득이 비신의 측면과 후면으로 철판 틀을 짜서 외곽을 감싸듯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철근으로 뒷면을 지지하고 있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비슷하다.
▲부득이 비신의 측면과 후면으로 철판 틀을 짜서 외곽을 감싸듯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철근으로 뒷면을 지지하고 있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비슷하다.
▲이수는 용틀임이 실감나게 비틀려 새겨졌고 앙화위에 보주가 올려져 있다. 중앙 네모진 부분은 두전(頭篆)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비석의 제목 제액을 쓴다. 또는 비신의 가장 윗줄에 제목(題額 : 제액)을 쓰며 대부분이 전서체로 쓰기에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진감선사탑비는 두전(頭篆)에 전서체로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쓰여 있다.
▲이수는 용틀임이 실감나게 비틀려 새겨졌고 앙화위에 보주가 올려져 있다. 중앙 네모진 부분은 두전(頭篆)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비석의 제목 제액을 쓴다. 또는 비신의 가장 윗줄에 제목(題額 : 제액)을 쓰며 대부분이 전서체로 쓰기에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진감선사탑비는 두전(頭篆)에 전서체로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쓰여 있다.
▲귀부는 다른 탑비에 비하여 발도 작고 용머리도 실감이 덜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귀부는 다른 탑비에 비하여 발도 작고 용머리도 실감이 덜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진감선사탑비

진감선사(眞鑑禪師) 부도, 보물 제380호

앞서 답사한 봉암사 지증대사 부도는 부도비와 함께 나란히 보호비각 안에 모셔져 있었고, 성주사지 낭혜화상 부도는 부도비만 서 있을 뿐 찾을 수 없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그러면 쌍계사 진감선사 부도는 어디 있을까?

쌍계사 북쪽 능선, 불일폭포 가는 길 중간에 서 있는 부도 하나를 진감선사의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아쉽게도 관련기록이나 명문이 없는 탓이다. 게다가 이 부도는 몸돌이 제짝이 아닌 듯 아무 장식이나 조각 없이 다른 부분과 제대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쉽게도 필자는 진감선사 부도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 부도까지 직접 올라가보질 못 하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불일폭포도 볼겸 산행삼아 올라가 보려 한다. (문화재청 사진으로 대신한다.)

▲쌍계사 부도로 불리는 팔각원당형 부도. 부도를 받치는 기단부는 상대석은 앙련으로, 하대석은 복련으로 중대석을 포함하여 장구형태를 이룬다. 그 위에 얹힌 몸돌이 아무 장식없이 팔각모양이며, 지붕돌이 얹혀있는데 팔각모서리 귀꽃의 일부가 깨어졌다.
▲쌍계사 부도로 불리는 팔각원당형 부도. 부도를 받치는 기단부는 상대석은 앙련으로, 하대석은 복련으로 중대석을 포함하여 장구형태를 이룬다. 그 위에 얹힌 몸돌이 아무 장식없이 팔각모양이며, 지붕돌이 얹혀있는데 팔각모서리 귀꽃의 일부가 깨어졌다.
쌍계사

쌍계사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왼쪽에 쌍계(雙磎), 오른쪽에 석문(石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 2개가 좌우로 나뉘어져 있는데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고 전해온다. 찻길이 바위 바깥쪽으로 생기는 바람에 찻길만 따라 올라가면 못 볼 수도 있다.


출처:시니어 조선 김신욱 명예기자

원문보기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16/2014071601212.html



<蛇足>

천부경(天符經)은 천제 환인이 다스린 환국으로부터 말로 전해진 글이다. 원본인 글이 없던 시절에 말로 전해진 ‘말 천부경’이 녹도문 내지 신지 전자로 적은 ‘전자 천부경’이 됐다가, 후에 최치원이 이를 당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81자의 한자로 풀이한 것이 ‘서글 천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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