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네 군데 산(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인데 신라 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857~?)은 뛰어난 문장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남긴 비문 중에서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를 일컬어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칭한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사산비명은 그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 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ㅇ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통일신라 부도비 대표
- 보령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비(국보 제8호)
- 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국보 제47호)
-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국립경주박물관)… 실물(實物)은 파손, 문장만 전함
-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비(보물 제138호 → 국보 제315호로 승격, 2009.12.31일)
사산비명 대부분은 당대를 살다간 고승들을 찬양하는 기록들인데 비하여 대숭복사비는 숭복사를 중창할 때 이를 기념하고 신라왕실을 찬양하는 기록인 점이 차이가 있다.
①문경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 寂照塔碑)-국보 제315호
경북 문경 봉암사의 창건주 지증대사(智證大師)의 부도비로 적조탑비(寂照塔碑)라고 부른다. 부도인 적조탑(寂照塔)과 함께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비각을 세워 그 안에 부도와 부도비를 보호하고 있으며 문경 봉암사는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인 초파일에만 개방되는 곳인지라 일반인이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 부도는 보물 제137호이며, 부도비는 보물 제138호였으나 2009년 12월 31일부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어 최치원 사산비명이 모두 국보가 되었다.
지증대사(智證大師)
지증대사(824~882)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9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 입산하였으며 열일곱에 계를 받고 수행하던 중 꿈속에서 보현보살을 친견하기도 하였으나 경주의 세속화 되어가는 불교를 멀리했던 듯, 경문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수행에 힘쓰다가 879년 이곳에 봉암사를 창건하였다. 창건 3년 뒤인 882년 12월 18일 저녁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로 열반하시니 세수 59세, 법랍 43년이었다.
스님이 돌아가신 이틀 후 현계산에 빈소를 차리고, 이듬해 1주년이 되었을 때 희양산 봉암사로 모시어 다비 후 부도를 세웠다. 헌강왕은 사람과 제물을 보내어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였고, 3년 후 임금이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내린 시호가 지증(智證)이며, 부도탑을 적조(寂照)라 내리니 부도 적조탑비(寂照塔碑, 국보 제315호)라 칭하였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내리면서 대문자가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최치원은 무려 8년 후에야(그때는 헌강왕은 죽고, 진성여왕 즉위 6년인 892년이다.) 대사의 일대기를 작성하였고, 33년이 지난 924년에야 부도비를 세웠으니 비문의 정식명칭은 유당 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有唐 新羅國 故鳳巖寺 敎諡 智證大師 寂照之塔碑銘)이다.
적조탑비의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는 최치원이 찬하였으나 글씨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는데 탑비에 (분황사 석혜강 서병각자 세팔십삼(芬黃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 :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새겼다)고 쓰여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모든 글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온전하게 남아있어 ‘남한에 남아있는 금석문중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최치원이 적조탑비(寂照塔碑)에 지증대사의 일대기를 쓰기를 그분의 일생에 있던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얘기는 이루 다 붓으로 기록할 수 없다며 여섯 가지 기이한 일(六異)과 여섯 가지 올바른 일(六是)로 추려서 적었다고 한다. 스님의 일대기를 포함한 그 많은 양을 필자가 직접 읽거나 해석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문화재 자료 중에 비문내용을 해석 본으로라도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최치원은 비문에서 지증대사가 돌아가심에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고 기록하여 높이 칭송하였다고 한다. 최치원답다. 옛 비문을 명(銘)이라고 하면, 비문 끝에 그분의 삶을 기리는 시구를 부기하는 것인데 글쓴이가 명(銘)을 썼으면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없으면 그저 부탁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비문과 비명의 차이를 이해할 것 같다.
문경 봉암사(鳳巖寺)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도헌 지증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지증국사 비문인 적조탑비에 따르면 스님의 명성을 들은 심충이란 사람이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니 대사가 와보고 이곳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 개창된 것이다. 구산선문 중 장흥 보림사와 문경 봉암사만 현존한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戰禍)를 입어 폐허가 되어 극락전만 남은 것을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조 세종대왕 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임진왜란 때 크게 손실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번의 화재와 중건이 반복되다가 구한말 의병전쟁 때 다시 전화(戰禍)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하였다.
근래 들어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과 주지 동춘 스님 후임 원행, 법연 스님 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있으나 수도 도량이라는 봉암사의 명성에 비하여 이런저런 절집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은 어쩐지 낯설어 보인다.
아무튼,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으로 개창한 봉암사는 고려 태조 18년 정진 대사가 계실 때는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며 정진할 만큼 위세를 떨쳤으며,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가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봉암사를 찾았다’고 할 만큼 유서 깊은 절이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원을 세웠다.
결사 도량, 봉암사를 찾아온 '봉암사 결사'를 시작으로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등 20인이 참여하여 정진하는 곳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었다.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1972년 향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하기에 이르러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 성역화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의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토록 하였다.
1984년 6월 제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는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하고 특별수도원으로 삼으니 관할 지방정부와 함께 봉암사는 물론 인근 희양산 전역의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군부대 출입보다 더 엄하게 금지된 곳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은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초파일)에만 봉암사를 개방하여 탐방이나 기도하러 들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봉암사는 그래서 더 유명한지도 모른다.
②보령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郎慧和尙 白月葆光塔碑)-국보 제8호
충남 보령에는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한 중심지였던 성주산문의 성주사 옛터가 남아 있는데 이 황량한 폐사지에 승탑은 없이 탑비만이 보호비각 안에 서 있으니 이것이 바로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낭혜화상(郎慧和尙) 부도비이다.
성주사 터는 최근 어느 정도 정리되고 울타리도 쌓아 나름대로 차분해 보이지만 관리인도 안 보이고 입장료도 받지 않는 넓고 평평한 옛터에 5층 석탑과 석등 하나, 나란히 선 3층 석탑 세 개, 그리고 금당이 들어선 흔적이 있을 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저 황량해 보이는데 이래 봬도 전성기 때는 불전이 50칸, 행랑이 800칸, 고사(庫舍)가 50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전각과 탑, 불상들이 모두 재현된다고 하여도 저 뒤쪽 한 켠에 서 있는 보호비각 안의 탑비 하나만은 못할 터이니 바로 국보 제8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郎慧和尙 白月葆光塔碑) 때문일 것이다.
낭혜화상(郎慧和尙, 801~888년)
신라 후기의 승려.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이고, 법명이 무염(無染)이며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 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으며 그 뒤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선 수행에 몰두하였으며,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년), 25년 만에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며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열반한 지 2년 뒤에 부도와 비를 세웠으니 진성여왕 4년인 890년이다. 진성여왕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大郎慧(대낭혜), 사리탑을 白月葆光(백월보광)이라 하사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은 5천여 자에 이르는데 사촌 동생 최인곤이 글을 썼고, 이 지방 특산물인 높이 2.63m의 남포 오석의 비신에 또박또박 새긴 글씨는 누구의 솜씨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 이 비는 통일신라 탑비 중에서 가장 크고,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에서도 가장 당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보령 성주사(聖住寺)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로 그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했다.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언급되었고 또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왓조각에 오합사 글자가 있어 확실하다.
이 오합사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어찌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위세가 약해지고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어느 지방호족이 또한 어느 고승을 만나 크게 중창하면서 되살아 난 것이라면 이곳 보령지역의 호족 김양과 낭혜화상 무염국사에 의하여 중창되었을 것이다.
무염국사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 붙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임진왜란 때 모조리 불타버리고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9천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고, 그 뒤쪽으로는 3개의 삼층석탑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어 그동안 3탑을 세운 절집이 없었으나 어떤 형태 어떤 의미인지 설명이 쉽지 않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두 번째로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 부도비를 찾아보았다. 낭혜화상은 봉암사의 지증대사보다 6년 늦게 입적하였으나 기록을 찾아보니 사후 2년 만에 비석이 세워졌으며 부도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지증대사는 먼저 돌아가셨지만, 사후 8년 뒤에야 일대기가 작성되고, 다시 33년 뒤에야 부도비가 세워졌으니 정작 먼저 돌아가셨지만, 부도비는 30년 이상 늦게 세워져 사산비문중 봉암사 지증대사비가 가장 늦게 세워진 연유이다. 그래서인지 국보로 승격도 가장 늦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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