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다. 미술관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그리고 다음 날이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지금,
그가 추구한 미학을 붙잡기로 다짐한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마음 상하지 말고, 나의 있는 모습 그
대로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자는 생각과 함께.
'딱딱한 미술관' 싫다면… 야외 전시장 어떠세요?
이미지 크게보기다양한 조각과 나무 100여 종이 어우러진 성곡미술관 조각 정원. 계절 따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미술관이라 하면 흰 벽에 작품이 다닥다닥 걸려 있는 공간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미술관에 익숙하지 않거나 어렵게 느낀다면 야외 전시장에 가보는 게 좋다. 자연과 작품이 어우러져 한결 상쾌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야외 미술관'이다.
서울 옛 경희궁 터인 경희궁길에 자리한 성곡미술관은 광화문에서 불과 몇백m 떨어진 곳에 있다. 1995년에 지어진 사립 미술관이다. 제1·2전시장 사이에 있는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조각 정원이 나타난다. 김윤화, 조성묵 등의 조각 작품이 100여 종 나무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도심 속 작은 숲이다. 정원을 한 바퀴 도는 데 10분이 채 안 걸린다. 차 소리보단 새소리, 비가 온다면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전시를 관람하면 정원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며, 정원만 가길 원하면 티켓 부스에서 입장권(음료 한 잔 포함 5000원)을 사면 된다. 월요일 휴무.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 (02)737-7650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도 숨겨진 정원이 있다. 조선 시대 세워진 정자로 200년 전 흥선대원군의 쉼터였던 석파정(石坡亭)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6호인 이곳은 현재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야외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년 1월 15일까지 석파정 야외 공원에서 진행되는 '거닐다, 숲'전(展)에선 조각가 김우진, 김원근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예술은 물론 마지막 가을 잎새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다. 관람료 9000원. 월요일 휴무. 종로구 부암동 201. (02)395-0100
晩秋… 자전거 트레일러 여행, 정지용 '향수' 100리길을 달리다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여행을 충북 옥천, 정지용 생가에서 시작하기로 한 건 순전히 시 '향수' 때문이다. 시와 37번 국도와 대청호와 금강 변이 펼쳐진 50㎞ 남짓한 길을 따라가다가, 쉬고 싶을 때 쉬고, 눌러앉고 싶을 때 퍼질러질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 옥천 정지용 생가서 시작 37번 국도와 대청호·금강변 따라 50㎞
향수(鄕愁)는 갈 수 없을 때 가장 짙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흙에서 자란 마음이 집을 잃을 때, 문득 몸이 허할 때 오한처럼 스미는 것. 시인 정지용이 젖은 눈으로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노래했던 것. 고향이 없는 자는 없으며, 그것은 지명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다. 만추(晩秋). 온 지구가 서둘러 이사 가는 계절. 짐을 꾸려라. 그리고 페달을 밟는 것이다. 자전거에 실린 그 조촐한 이삿짐은 발길 닿는 모든 향수의 길목에 부려놓을 세간이 되리니.
지난 11일 찾은 충북 옥천 ‘향수100리 자전거길’. 자전거에 트레일러를 매달고 호수와 산과 한적한 논밭이 펼쳐진 시골길을 달린다. 들판은 비어도 색을 남기고, 스스로 풍경이 된다. 저 풍경 어디서든 마음 내키는 곳에 멈춰 자리를 깔면 거기가 곧 거처가 되는 여행. /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여행을 충북 옥천, 정지용 생가에서 시작하기로 한 건 순전히 시 '향수' 때문이다. 90년 전에 시인이 된 남자의 이름 때문이고, 이곳의 '향수 100리 자전거길' 때문이다. 시와 37번 국도와 대청호와 금강 변이 펼쳐진 50㎞ 남짓한 길을 따라가다가, 쉬고 싶을 때 쉬고, 눌러앉고 싶을 때 퍼질러질 것이다. 차에 싣고 온 자전거를 내리고, 자전거 뒤에 트레일러를 연결한다. 그 위에 텐트·침낭·코펠·식기류 등 15㎏ 정도 무게의 짐을 올린다. 정지용 생가 앞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까치밥으로 남은 홍시 몇 개.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궤 웨 앉았나.'(홍시) 움직일 시간이다. 페달을 밟는다. 묵직하니, 이제야 뭔가 떠나는 기분이다.
이미지 크게보기자전거에서 내려 트레일러를 바라본다. 짐 무게 때문에 달리는 게 녹록지 않지만 배낭 멘 채 페달을 밟지 않아도 되니 훨씬 편하다.
10분쯤 달리면 교동저수지가 나온다. 가을볕을 받아먹은 물이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데크 길을 따라 여유로운 평지 구간이 펼쳐진다. 명색이 자전거길이라곤 하나, 대부분 국도 변. 출발 20분 만에 내리막길에서 크게 굴렀다. 전날 내린 비로 노면이 미끄러운 데다, 젖은 낙엽이 많아 자전거가 자주 휘청댄다. 트레일러의 무게 탓에 내리막에선 무섭게 속도가 붙는다. 도로에 이동 차량이 많지는 않으나,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넘어진 데가 자꾸 쓰리다. '뉘우침이야 가장/ 행복스런 아픔이여니!'(뉘우침) 진정 그러하다.
이미지 크게보기장계관광지 내 대청호가 정면으로 펼쳐진 억새밭 근처에 짐을 풀고 쉰다. 바람 불 때마다 이파리 서걱거리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귀를 달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낮잠 좀 자다가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이후 속도를 조절하며 조심조심 간다. 30분쯤 가면 장계관광지가 나온다. 1986년 대청호 주변 6만평 부지에 조성됐는데, '긴 시냇물'이라는 뜻의 장계(長溪)가 대청호에 이르러 덩치 큰 절벽과 어울리니 제법 웅장한 풍광을 자아낸다. 지용은 호수를 노래하는 시를 많이 남겼는데, 이곳 바위며 조형물이며 곳곳에 지용의 시가 적혀 있다. 바람이 촉촉하니, 잠시 쉬었다 가야겠다.
억새밭 근처에 트레일러를 몰고 가 접이식 의자와 탁자를 편다. 나부끼는 억새가 성냥 같다. 바람이 성냥을 켜니, 대청호 너머 절벽에 단풍이 불붙는다. 그 불이 하나 둘 물 위로 떨어진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호수) 나무에서 까마귀가 운다.
한참을 달려 안남면사무소를 지나 10분쯤 더 가면 둔주봉. 해발 384m의 이 봉우리 꼭대기에 서면 한반도 지형을 닮은 산자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등산 모드로 전환. 얕은 산인 줄 알고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다. 보폭을 넓게 했는데도 정상까지 25분 정도가 걸린다. 정상에 닿으니 진짜 좌우 반전된 한반도 지형의 산자락이 내려다보인다. 금강 줄기가 그 산을 휘돌아 나가고 있다. 등산객들이 전부 이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이미지 크게보기밤, 금강변 자갈밭에 자전거를 몰고 가 텐트를 친다. 물을 끓여 차를 마신다. 손바닥만 한 손전등을 켜고 책도 한 권 읽는다.
이제부터 금강휴게소까지 여유로운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해 9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아름다운 자전거 여행길 30’을 선정해 발표하면서 “‘향수 100리 길’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 구간”이라고 발표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안남면 연주리~지수리 구간은 정말 황금빛 게으른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길이 펼쳐진다. 가끔 소의 흔적(?)이 바퀴를 가로막지만, 어디선가 볏짚 타는 냄새가 찬 바람에 실려올 때 코가 맑아진다. 막 푸른 싹을 내밀고 있는 보리밭과 억새의 늙은 털이 선명한 조화를 이룬다.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옛 이야기 구절)
담 낮은 집들을 병풍처럼 두른 비포장길을 건너 오른편에 금강 변이 펼쳐지는 완만한 평지 구간이 나온다. 공사 구간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 천천히 달린다. 오후 6시쯤 되니 해가 진다. 멀리 금강휴게소가 불을 켠다. 더 달리면 고인돌이 있는 안터 선사공원이 나오는데, 여길 돌아 출발지로 돌아가면 코스 완주다. 하지만 완주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다리도 뻐근한데, 근처 자갈밭으로 내려간다.
‘인기척 그친/ 다리 몫에 다다르니/ 발아래선 졸졸졸 잔물결/ 호젓한 밤 이야기에 짙어 간다.’(석취) 짐을 부려놓고, 의자와 탁자를 꺼낸다. 물을 끓이고, 집에서 가져온 원두를 조금 덜어 휴대용 그라인더에 넣고 천천히 간다. 까맣고 진한 곡식의 향수가 피로를 잠재운다. 물을 붓고 기다렸다가, 한 모금 입으로 흘려 넣는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일지 모르겠다. 오후 7시가 되자 사방이 캄캄해진다. 산등성이가 자세한 윤곽을 잃고 자전거 타이어처럼 둥글어진다. 텐트를 친다. 침낭을 깔고, 휴대용 랜턴을 켠다.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향수)이 서툴게나마 완성된다. 늦가을의 밤, 11월이 가고 있다.
사랑의자전거 옥천사랑복지센터 옥천역 앞 자전거 대여소. 자전거 200대 보유. 1일 대여료 성인 1만5000원. 헬멧·장갑은 무료.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힘에 부칠 경우 전화하면 무료로 픽업해준다. 내년 1월 정지용 생가가 있는 옥천 구읍으로 이전 예정. (043)733-1319.
■선광집 1962년에 문을 연 생선국수 전문점. 생선국수(5000~6000원)와 도리뱅뱅이(7000~1만5000원)가 유명하다. 첫째·셋째 주 월요일 휴무.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 162-8. 오전 10시 30분~오후 6시. (043)732-8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