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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견문록]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秦始皇陵 兵馬俑坑),병사들의 얼굴은 화장을 했었다

문화재방송 2016. 11. 2. 03:47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秦始皇陵 兵馬俑坑)

기원전 3세기경에 진나라 왕위를 이어받아 불과 22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후
한, 조, 위, 초, 연나라등 6국을 멸망시키고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다민족 봉건적 전제제도의 중앙집권 국가를 건립한 진시황의 능은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착수하였다한다

황능의 건설에는 무려 72만명이나 되는 백성이 동원되어 38년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황제의 무덤은 실제의 도읍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소시킨 형태로 만들어졌다.
능원의 주위는 回(회)자 형태의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지고 내성의 길이는 1355m, 둘레는 3870m, 면적은 78590평방km
이를 둘러싸고 있는 외성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훨씬 방대한 규모이다.
진시황릉 주위에는 순장 무덤도 많이 발굴되는데 그 내용은 매우 풍부하고 규모도 방대하다. 근년에 발견된 진시황 병마용갱은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으로 등재됐다.
이 병마용 갱은 방대한 지역에 여러곳이 있었는데 아직도 발굴 중이라 하며 전체의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74년 중국서안 외곽의 시골 마을에서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양취위안이라는 농부는 땅속에서 발견된 도기인형의 조각과 쇳조각을 보고 이 사실을 신화사

통신 기자 (린아인)에게  알렸다. 이후 인민일보를 통해 보도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산시성 고고학 발굴팀은 1974년 7월15일 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착수 하였으며 7월21일

진시황릉에 딸린 병마용 갱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진시황 병마용, 원래 색깔이 있었다?

[중국의 고대문화 들여다보기] 진시황 병마용갱

    

진시황병마용갱 개념도ⓒ 이상기
진시황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으로부터 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전동차를 탄다. 전동차는 15인승인데, 보통 10명이 넘게 타는 경향이 있다. 차를 타는 시간은 3분 정도다. 차를 내리면 다시 출입문을 통과 1호갱 앞 정원으로 간다. 정원 뒤로 체육관 형태의 병마용박물관 건물이 보인다. 건물 상단부에 진병마용일호갱대청(秦兵馬俑壹號坑大廳)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1호갱을 먼저 보고, 3호갱을 본 다음 2호갱을 볼 것이다. 그것은 1호갱이 끝나는 지점에 3호갱이 있고, 1호갱이 시작하는 지점 쪽으로 2호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호갱 동쪽에 있는 정문을 통해 서쪽 끝까지 간 다음, 동북쪽 끝에 있는 문을 통해 1호갱을 나올 예정이다. 그리고 서쪽 끝에 있는 문을 통해 3호갱으로 들어간 다음 동쪽 끝에 있는 문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길은 자연스럽게 2호갱 서쪽 입구로 이어지고, 2호갱을 보고 동쪽 입구를 통해 나오게 된다.
1호갱 정면ⓒ 이상기
그리고 나서 2호갱 앞쪽에 있는 진열청(陳列廳)으로 가 동거마 등 출토유물을 볼 예정이다. 진열청은 전시실의 다른 표현으로, 이곳에 진시황릉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원래의 명칭은 진시황제릉문물진열청(秦始皇帝陵文物陳列廳)이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은 동거마용갱에서 발견된 동거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중국 고대 마차의 실물을 볼 수 있고, 제작기법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1978년 발굴 당시 출토된 마구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오와 열을 정확히 맞춘 병사와 말이 줄지어...
3열 횡대의 선봉군ⓒ 이상기
1호갱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체육관처럼 전망대를 만들어 놨다. 전망대는 조금 높은 곳에 있어 1호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1호갱의 군진을 보면 보병이 중심이지만, 말과 전차가 일부 편성된 군단임을 알 수 있다. 편제는 4개 부대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앞에 선봉군이 있고 가운데 중군이 있고, 좌우에 수비군이 있고, 가장 뒤에 뒤쪽을 책임지는 후위군이 있다.

선봉군은 3열 횡대로, 매열마다 68명의 병사가 활과 노를 들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러므로 선봉군은 좌우로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선봉군 병사의 수는 204명이다. 선봉군 뒤의 중군은 9개 부대로 이루어져 있다. 개개 부대는 5m 깊이의 땅 속, 3m 높이의 토담 안에 4열 종대로 서 있다. 각 열마다 33명이 서 있고, 앞부분에 4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배치되어 있다.
1호갱 조망ⓒ 이상기
말과 마차로 이루어진 전차는 보병과 연합 전술을 수행한다. 이곳 중군 병사는 창, 검, 과, 장창, 극, 노 등을 들고 있다. 좌우 수비군은 4열 종대로, 각 열에 38명의 병사가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전투용어로 좌우익을 형성해, 적이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아준다. 군단의 후방을 담당하는 후위군은 적의 배후 기습을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전망대에서 군진을 파악한 우리는 이제 1호갱의 북쪽 가장자리로 난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한다. 옆으로 가면 개개 병사용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병사용은 신분에 따라 장군용, 장교용, 사병용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맡은 임무에 따라 궁병, 노병, 보병, 기병으로 나누어진다. 궁병과 노병은 활과 쇠뇌를 사용해 멀리 있는 적을 사살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군진의 맨 앞에 서서 적과 싸운다.
병마용ⓒ 이상기
노병은 무릎을 구부리고 쏘는 궤사(跪射)노병과, 서서 쏘는 입사(立射)노병으로 나누어진다. 보병은 창, 검, 극으로 무장을 하고 백병전을 벌인다. 기병은 말을 타고 적을 공격하거나 마차를 끄는 병사를 말한다. 중국의 한족은 북방 기마민족에 비해 기병 운용능력이 떨어져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그것은 뛰어난 기병 하나가 보병 10명을 무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기병은 마차 기병 또는 안마(鞍馬) 기병으로 보인다.

병마용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깨진 병마용의 복원ⓒ 이상기
뒤로 가면서 보니 목이 빠진 병사용이 여럿 보인다. 자세히 보니 목을 별도로 제작해 끼워 넣었음을 알 수 있다. 1호갱의 앞부분 절반이 어느 정도 복원되어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 뒷부분 절반은 아직도 수습과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연구원들이 땅속 토담 안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넘어져 깨어지고 부서진 도용의 파편을 주워 모아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넘어져 깨지고, 떡처럼 엉키고 붙은 흙덩어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이들 조각을 맞추고 붙여 몸통을 만들고 줄과 끈으로 묶어 고정시킨 병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는 머리도 끼워 넣었다. 교통사고로 부서진 몸을 외과수술로 봉합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들 모두에게는 번호가 붙어 있다. 앞부분에 오와 열을 맞춰 정연하게 서 있는 병마용들도 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다시 재배치되었을 것이다.
토담과 나무 기둥ⓒ 이상기
일부 연구원은 현장을 측량하고 도면을 그리고 있다. 병마용의 수습과 복원도 중요하지만, 이들 병마용을 수용하고 있는 갱도의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의 모습을 확인하고 정확히 재현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1호갱은 동서 길이 230m, 남북 길이 62m의 장방형 구조물로 11개의 갱도가 있다. 갱도의 깊이는 5m이고, 바닥에 검은 벽돌을 깔았다. 갱도마다 3m 높이의 격리 토담을 쌓고,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 서까래 모양의 각목을 평행하게 설치하고, 이를 토대로 천정목을 연결했다. 그 위에 다시 횡목을 덧대고 그 위에 황토를 덮었다. 그러므로 동서로 긴 형태의 집 또는 군막사 형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현재 토담 기둥 위쪽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없다. 발굴과 복원을 위해 모두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발굴을 통해 병마용들이 2000년 이상의 지하세상을 청산하고 밝은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채색 도용ⓒ 이상기
그렇지만 그로 인해 병마용의 채색이 바래고 없어지는 문제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병마용은 원래 색깔이 칠해져 있었다. 청, 황, 홍, 녹, 갈색에 흑백이 결합된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병마용은 대개 4단계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가장 먼저 태토를 가지고 병마용의 부분을 만든다. 사람은 크게 얼굴, 몸통, 손, 발과 다리로 이루어진다. 말은 몸통, 머리, 목, 귀, 사지, 꼬리로 이루어진다. 이들을 만든 다음 부분을 결합시켜 병용과 마용을 완성한다.

그 다음 이들 용에 채색을 한다. 다음이 1000℃ 내외의 고온에서 이들을 구워내는 일이다. 이처럼 병마용은 4단계 과정을 거쳐 도용(陶俑)으로 완성되었다. 병마용이 2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도 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었던 것은 이렇게 도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현재처럼 훼손된 것은, 일부는 습기로 탈색되고, 일부는 전란으로 인해 깨지고 부서지고 불에 탔기 때문이다. 설사 20세기까지 채색이 유지되었더라도 발굴 후 자연적으로 탈색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병마용의 복원ⓒ 이상기
사실 4, 5호갱의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고고학적 발굴과 복원기술이 좀 더 발달한 다음을 기약하는 측면도 있다. 아무리 고고학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발굴은 곧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곳 1호갱도 앞부분은 정연하지만 뒷부분은 발굴과 복원으로 어수선하고 휑한 편이다. 마치 운동장에 병마용을 세워놓은 것처럼 말이다. 

3호갱은 지휘부, 사령부에 해당하는 군막
4필의 마용ⓒ 이상기
1호갱을 다 보고 나온 우리는 3호갱으로 들어간다. 3호갱은 凹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면적이 500㎡도 안 돼 병마용갱 중 규모가 가장 작다. 이곳에는 병용 66명, 마용 4필, 목제 전차 1승이 있다. 병용도 전투병이 아니라 호위병이다. 이들은 의장용 병기인 동수(銅殳)를 들고 요자형의 양 옆에 2열 또는 3열로 정렬해 있다. 그리고 요자형 가운데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지휘부 마차가 배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3호갱은 지휘부, 사령부에 해당하는 군막(軍幕)으로 볼 수 있다. 나는 군막을 자세히 살펴본다. 말과 마차 그리고 병사 중 마차는 현재 없다. 그것은 마차가 목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마차가 놓였던 자리는 사각형이며 바닥보다 조금 높다. 마차 뒤로는 말과 마차를 다루는 어수용(御手俑)이 넷 서 있다. 어수용은 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임금이나 장군이 탄 마차를 부리는 역할을 한다.
병마용 세트ⓒ 이상기
네 마리 말은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갈기와 귀 그리고 꼬리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이에 비해 호위병의 목은 상당수 떨어져 나갔고, 이들이 들고 있던 동수도 사라지고 없다. 또 깨지고 쓰러진 채로 놓여있는 병용도 여럿 보인다. 3호갱은 서쪽으로 들어가 내부를 한바퀴 돌아본 다음 동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갱을 나오면서 보니 1호갱 모형 세트를 만들어놓고 들어가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일부 관광객이 그곳에 들어가 포즈를 취한다. 그런데 이게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다. 판공처(辦公處)에서 일부 업자에게 특혜를 준 것인지, 아니면 국영으로 운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세트는 2호갱에도 만들어져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226067&dable=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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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 과정을 거쳐 관광객에게 전시될 날을 기다리는 병사용. 병사들의 포즈가 단 한 개도 같지 않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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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발굴 기술에 있어 중국 고고학의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의 기술로 출토되는 도용을 완벽히 보존할 수 있다." - 자오난펑(焦南峰) 전 산시(陕西)성 고고학연구소 소장

"지금 조급하게 발굴을 서둘 이유가 없다.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용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 허판(何帆) CCTV '금일관찰' 평론가

지난 13일, 중국 내륙 산시성의 수도 시안(西安)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진 한 거대한 돔형 건물 안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1호갱 발굴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24년 만에 막 오른 진시황 병마용 1호갱 3차 발굴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관리하는 병마용박물관은 수십 명의 언론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굴단의 작업 개시를 선언했다. 지난 1985년에 2차 발굴을 진행한 지 24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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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호갱 내 미발굴지에서 작업 중인 발굴단원들.
ⓒ 병마용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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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이 1만4260㎡인 1호갱은 병마용박물관 내 세 갱 중 규모가 가장 크다. 1978년부터 1호갱에 대한 두 차례의 부분적인 발굴로 1000여개의 병사용, 6개의 전차용, 24개의 우마차용, 검과 창 등 각종 무기용들이 발굴됐다. 보병과 전차로 혼합 편성된 장방형 군진으로, 대략 6000여 개의 병사용과 40여 승의 전차용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1,2차 발굴 후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 이번 발굴에서는 우선 200㎡만 대상으로 하고, 차츰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다.

3차 발굴 작업은 첫날부터 큰 성과를 냈다. 앞뒤로 정렬한 4두 마차 2대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 이번 발굴을 총지휘하는 차오웨이(曹瑋) 병마용박물관 부관장은 "4두 마차 외에 채식 병마용과 토기 파편, 칠기 목기도 발굴했다"면서 "그동안 단 6개 밖에 발굴되지 않았던 채색 병마용의 발굴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발굴 현장의 들뜬 분위기와 달리 지금 중국은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인 병마용을 지금 다시 발굴해야 하냐는 것이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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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사 산과 같이 거대한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지금까지 도굴되지 않은 채 역사의 비밀은 간직하고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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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귀한 금은보화 한 편에 늘어선 병마용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은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진시황은 진의 군주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재위에 올랐다. 전국시대 여섯 나라들은 진을 야만국으로 멸시하고 경계했다.

진은 주변국의 견제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면서 법치주의 통치체제를 정비해 강력한 관료제와 군사력을 갖추었다. 힘을 키워나갔던 진은 노련한 외교술과 강성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국들을 하나둘씩 멸망시켰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종식했다.

오늘날 진시황이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게 된 이유는 대형 토목사업과 궁전, 왕릉 건설에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흉노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 거대하고 호화로운 아방궁,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 진시황릉 등을 건설하기 위해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을 짊어져야 했고 고된 노역에 동원 당했다.

진시황은 통일제국이 만세(萬歲)를 할 것이라 확신했지만, 민심을 잃은 국가는 유지되기 힘들었다. 각종 제도를 개혁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진은 진시황이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병마용에서 2㎞ 떨어진 진시황릉은 지난 2200여 년 동안 도굴꾼의 로망이었다. 진시황릉은 기원전 246년에 건설하기 시작해 37년 만에 간신히 완성됐다. 무려 70만 명이 동원된 대역사로, 완공 당시 전체 부지 50㎢, 봉분 높이 120m에 달했다.

진시황릉 내부의 지하궁전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금은보화와 부장품이 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수많은 도굴꾼들이 진시황릉의 보물을 노렸지만, 지하궁전으로 이르는 길은 미로와 같고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부비트랩이 있어 도굴을 막았다.

지하궁전은 진시황이 생전 살았던 아방궁을 모방하여 지어졌다. 지하궁전 내부는 천상과 지상 세계를 축소해서 만들었는데,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묘사했다.

진시황은 죽은 뒤에도 대륙을 호령코자 했다. 진시황릉에는 죽은 진시황을 모시기 위해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묘군(墓群), 평소에 타던 청동거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병마용도 진시황릉의 부속시설 중 하나로, 통일 사업을 완수한 진시황의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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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거마. 진시황이 생전 타던 마차를 2/3로 축소하여 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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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1번 자리가 병마용이 처음 발견된 곳이다. 병마용은 농민들이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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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부속시설로 건설...2200여 년 만에 우연히 발견

진시황릉과 달리 병마용의 존재는 2200여 년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지하 속에 묻혀있던 병마용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지난 1974년 3월. 가뭄으로 관개용 우물을 파내려 가던 양페이옌, 양콴이 등 7명의 농민에 의해서였다.

병마용의 발견은 중국을 흥분시켰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말기로, 홍위병의 광란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상태였다. 1971년 발견되어 발굴 막바지였던 마왕퇴(馬王堆)와 더불어 잃어버린 중국 역사를 복원하는 대사건이었다.

중국정부는 1년여의 기초 조사 끝에 막대한 유물이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1976년 1호갱 전시관을 시공했다. 1호갱 주변에서는 2호갱부터 4호갱까지 잇따라 발견됐다. 2호갱과 3호갱의 규모는 각각 6000㎡와 520㎡. 규모는 1호갱보다 작지만 군대 편제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병마용의 배치는 중국 고대 군대 편제와 같은 좌·중·우 3군으로,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된다. 3군을 보급, 지원하는 4호갱도 있으나 완성되지 못한 채 빈 갱으로 남아있었다.

1978년 5월 1호갱 전시관 완공을 앞두고 첫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중국은 문혁 기간 동안 대학이 문을 닫아 전문적인 발굴인력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몇몇 학자의 지도에 따라 60명의 고고학 연수생과 100여명의 군인이 발굴에 동원됐다.

전시관 막바지 공사와 발굴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1호갱 현장은 항상 어수선했다. 발굴에 참여한 한 대학교수는 "1979년 건국 30주년에 병마용박물관을 개관해야 했기에 발굴과 유물 수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적으로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병마용은 머리와 몸통, 팔, 다리 등을 따로 빚은 뒤 조합해 구워 완성했다. 병사용은 키 175~195㎝의 늠름한 체격인데 실제 사람과 흡사하다. 병사들의 포즈는 단 한 개도 같지 않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다.

진시황을 호위하여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마음과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병마용은 곧 이집트 피라미드, 바빌론 공중정원 등 고대 7대 기적에 더해져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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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군대 편제상 우군에 해당하는 2호갱.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하고 발굴은 중단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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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호갱 중 유일하게 발굴이 모두 완료된 3호갱. 3호갱은 군대 지휘부에 해당한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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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후 손상과 부식 심각.. "100년 후 탄광처럼 변한다"

오늘날 병마용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세계인이 가고 싶어 하는 유적지다. 1987년 12월 유네스코는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만리장성, 자금성, 막고굴(莫高窟)과 함께 중국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작년 8월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대표 선수단의 운동복은 병마용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됐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미라3: 황제의 무덤>에서는 미라 대신 병마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대내외적인 명성과 달리 알려지지 않은 그늘도 있었다. 병마용은 발굴 및 수습, 복원, 전시 과정에서 적지 않게 훼손당했다. 병마용은 땅에 묻혀있을 당시 선명한 색채를 유지했지만, 발굴 후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또 1985년 1호갱 2차 발굴에서 출토된 장군용은 수습 과정에서 실수로 머리 부분이 부서졌다.

발굴 과정에서 손상되거나 퇴색한 병마용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1개의 병마용을 제대로 복원하는 데 최소 한 달이 걸린다. 그러나 퇴색한 색깔의 복원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퇴색뿐 아니라 세균에 의한 대규모의 병마용 부식이 진행 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 해 200만 명 이상 병마용을 보러 관광객들이 드나듦에도 별다른 환기 대책 없이 1호갱을 개방하다 보니 갱내부의 실내 공기가 전시중인 병마용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우톄(周鐵) 병마용박물관 연구원은 "갱내부에서 48종의 곰팡이 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차오쥔지(曹軍驥) 중국 지구환경과학원 대기환경소장은 "병마용을 이대로 방치하면 100년 뒤 병마용은 심각하게 부식해 탄광처럼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정부도 발굴이 종료된 3호갱 외에 2호갱에 대해서는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하고 다시 묻은 뒤 본격적인 발굴을 미루고 있다. 일반 중국인들은 현 시점에서의 발굴보다 후세에게 그대로 물려주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17일 중국 포털 신랑(新浪)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네티즌 4100여 명 중 62.5%는 발굴과 보존에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기에 대규모 발굴은 피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31.1%만이 기술상 문제가 없기 때문에 1호갱을 모두 발굴해야 한다고 답했다. 병마용 1호갱의 발굴 재개는 중국에게 풀기 힘든 숙제거리를 안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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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용 1호갱 전경. 전체 면적 1만4260㎡ 중 발굴되지 않은 1만㎡이 이번 3차 발굴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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