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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 과정을 거쳐 관광객에게 전시될 날을 기다리는 병사용. 병사들의 포즈가 단 한 개도 같지 않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다. | |
ⓒ 모종혁 |
"오늘날 발굴 기술에 있어 중국 고고학의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의 기술로 출토되는 도용을 완벽히 보존할 수 있다." - 자오난펑(焦南峰) 전 산시(陕西)성 고고학연구소 소장
"지금 조급하게 발굴을 서둘 이유가 없다.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용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 허판(何帆) CCTV '금일관찰' 평론가
지난 13일, 중국 내륙 산시성의 수도 시안(西安)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진 한 거대한 돔형 건물 안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1호갱 발굴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24년 만에 막 오른 진시황 병마용 1호갱 3차 발굴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관리하는 병마용박물관은 수십 명의 언론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굴단의 작업 개시를 선언했다. 지난 1985년에 2차 발굴을 진행한 지 24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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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호갱 내 미발굴지에서 작업 중인 발굴단원들. | |
ⓒ 병마용박물관 |
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이 1만4260㎡인 1호갱은 병마용박물관 내 세 갱 중 규모가 가장 크다. 1978년부터 1호갱에 대한 두 차례의 부분적인 발굴로 1000여개의 병사용, 6개의 전차용, 24개의 우마차용, 검과 창 등 각종 무기용들이 발굴됐다. 보병과 전차로 혼합 편성된 장방형 군진으로, 대략 6000여 개의 병사용과 40여 승의 전차용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1,2차 발굴 후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 이번 발굴에서는 우선 200㎡만 대상으로 하고, 차츰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다.
3차 발굴 작업은 첫날부터 큰 성과를 냈다. 앞뒤로 정렬한 4두 마차 2대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 이번 발굴을 총지휘하는 차오웨이(曹瑋) 병마용박물관 부관장은 "4두 마차 외에 채식 병마용과 토기 파편, 칠기 목기도 발굴했다"면서 "그동안 단 6개 밖에 발굴되지 않았던 채색 병마용의 발굴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발굴 현장의 들뜬 분위기와 달리 지금 중국은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인 병마용을 지금 다시 발굴해야 하냐는 것이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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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사 산과 같이 거대한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지금까지 도굴되지 않은 채 역사의 비밀은 간직하고 있다. | |
ⓒ 모종혁 |
진귀한 금은보화 한 편에 늘어선 병마용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은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진시황은 진의 군주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재위에 올랐다. 전국시대 여섯 나라들은 진을 야만국으로 멸시하고 경계했다.
진은 주변국의 견제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면서 법치주의 통치체제를 정비해 강력한 관료제와 군사력을 갖추었다. 힘을 키워나갔던 진은 노련한 외교술과 강성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국들을 하나둘씩 멸망시켰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종식했다.
오늘날 진시황이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게 된 이유는 대형 토목사업과 궁전, 왕릉 건설에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흉노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 거대하고 호화로운 아방궁,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 진시황릉 등을 건설하기 위해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을 짊어져야 했고 고된 노역에 동원 당했다.
진시황은 통일제국이 만세(萬歲)를 할 것이라 확신했지만, 민심을 잃은 국가는 유지되기 힘들었다. 각종 제도를 개혁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진은 진시황이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병마용에서 2㎞ 떨어진 진시황릉은 지난 2200여 년 동안 도굴꾼의 로망이었다. 진시황릉은 기원전 246년에 건설하기 시작해 37년 만에 간신히 완성됐다. 무려 70만 명이 동원된 대역사로, 완공 당시 전체 부지 50㎢, 봉분 높이 120m에 달했다.
진시황릉 내부의 지하궁전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금은보화와 부장품이 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수많은 도굴꾼들이 진시황릉의 보물을 노렸지만, 지하궁전으로 이르는 길은 미로와 같고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부비트랩이 있어 도굴을 막았다.
지하궁전은 진시황이 생전 살았던 아방궁을 모방하여 지어졌다. 지하궁전 내부는 천상과 지상 세계를 축소해서 만들었는데,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묘사했다.
진시황은 죽은 뒤에도 대륙을 호령코자 했다. 진시황릉에는 죽은 진시황을 모시기 위해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묘군(墓群), 평소에 타던 청동거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병마용도 진시황릉의 부속시설 중 하나로, 통일 사업을 완수한 진시황의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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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거마. 진시황이 생전 타던 마차를 2/3로 축소하여 제작한 것이다. | |
ⓒ 모종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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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1번 자리가 병마용이 처음 발견된 곳이다. 병마용은 농민들이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 |
ⓒ 모종혁 |
진시황릉 부속시설로 건설...2200여 년 만에 우연히 발견
진시황릉과 달리 병마용의 존재는 2200여 년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지하 속에 묻혀있던 병마용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지난 1974년 3월. 가뭄으로 관개용 우물을 파내려 가던 양페이옌, 양콴이 등 7명의 농민에 의해서였다.
병마용의 발견은 중국을 흥분시켰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말기로, 홍위병의 광란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상태였다. 1971년 발견되어 발굴 막바지였던 마왕퇴(馬王堆)와 더불어 잃어버린 중국 역사를 복원하는 대사건이었다.
중국정부는 1년여의 기초 조사 끝에 막대한 유물이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1976년 1호갱 전시관을 시공했다. 1호갱 주변에서는 2호갱부터 4호갱까지 잇따라 발견됐다. 2호갱과 3호갱의 규모는 각각 6000㎡와 520㎡. 규모는 1호갱보다 작지만 군대 편제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병마용의 배치는 중국 고대 군대 편제와 같은 좌·중·우 3군으로,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된다. 3군을 보급, 지원하는 4호갱도 있으나 완성되지 못한 채 빈 갱으로 남아있었다.
1978년 5월 1호갱 전시관 완공을 앞두고 첫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중국은 문혁 기간 동안 대학이 문을 닫아 전문적인 발굴인력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몇몇 학자의 지도에 따라 60명의 고고학 연수생과 100여명의 군인이 발굴에 동원됐다.
전시관 막바지 공사와 발굴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1호갱 현장은 항상 어수선했다. 발굴에 참여한 한 대학교수는 "1979년 건국 30주년에 병마용박물관을 개관해야 했기에 발굴과 유물 수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적으로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병마용은 머리와 몸통, 팔, 다리 등을 따로 빚은 뒤 조합해 구워 완성했다. 병사용은 키 175~195㎝의 늠름한 체격인데 실제 사람과 흡사하다. 병사들의 포즈는 단 한 개도 같지 않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다.
진시황을 호위하여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마음과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병마용은 곧 이집트 피라미드, 바빌론 공중정원 등 고대 7대 기적에 더해져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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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군대 편제상 우군에 해당하는 2호갱.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하고 발굴은 중단된 상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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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호갱 중 유일하게 발굴이 모두 완료된 3호갱. 3호갱은 군대 지휘부에 해당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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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후 손상과 부식 심각.. "100년 후 탄광처럼 변한다"
오늘날 병마용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세계인이 가고 싶어 하는 유적지다. 1987년 12월 유네스코는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만리장성, 자금성, 막고굴(莫高窟)과 함께 중국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작년 8월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대표 선수단의 운동복은 병마용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됐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미라3: 황제의 무덤>에서는 미라 대신 병마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대내외적인 명성과 달리 알려지지 않은 그늘도 있었다. 병마용은 발굴 및 수습, 복원, 전시 과정에서 적지 않게 훼손당했다. 병마용은 땅에 묻혀있을 당시 선명한 색채를 유지했지만, 발굴 후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또 1985년 1호갱 2차 발굴에서 출토된 장군용은 수습 과정에서 실수로 머리 부분이 부서졌다.
발굴 과정에서 손상되거나 퇴색한 병마용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1개의 병마용을 제대로 복원하는 데 최소 한 달이 걸린다. 그러나 퇴색한 색깔의 복원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퇴색뿐 아니라 세균에 의한 대규모의 병마용 부식이 진행 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 해 200만 명 이상 병마용을 보러 관광객들이 드나듦에도 별다른 환기 대책 없이 1호갱을 개방하다 보니 갱내부의 실내 공기가 전시중인 병마용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우톄(周鐵) 병마용박물관 연구원은 "갱내부에서 48종의 곰팡이 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차오쥔지(曹軍驥) 중국 지구환경과학원 대기환경소장은 "병마용을 이대로 방치하면 100년 뒤 병마용은 심각하게 부식해 탄광처럼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정부도 발굴이 종료된 3호갱 외에 2호갱에 대해서는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하고 다시 묻은 뒤 본격적인 발굴을 미루고 있다. 일반 중국인들은 현 시점에서의 발굴보다 후세에게 그대로 물려주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17일 중국 포털 신랑(新浪)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네티즌 4100여 명 중 62.5%는 발굴과 보존에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기에 대규모 발굴은 피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31.1%만이 기술상 문제가 없기 때문에 1호갱을 모두 발굴해야 한다고 답했다. 병마용 1호갱의 발굴 재개는 중국에게 풀기 힘든 숙제거리를 안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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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용 1호갱 전경. 전체 면적 1만4260㎡ 중 발굴되지 않은 1만㎡이 이번 3차 발굴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나게 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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