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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공지] '고향을 빼앗긴 월미도 원주민들의 눈물'이 12월 15일 오후 2시20분 KBS 1 TV에 방송됩니다.

문화재방송 2017. 12. 13.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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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0일 월미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월미도 미군폭격사건 등 월미도 역사 다룬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출간

인천 중구 월미공원에서 열린 '월미도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에서 행사 후반부에 희생자의 넋을 달래는 진혼굿이 진행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매년 9월15일 인천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린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이 가족과 친구를 잃고 고향을 떠나게 된 상처로 남아있다.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인천 월미도 주민들의 이야기다.

강변구씨가 쓴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서해문집 펴냄)는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월미도에 숨은 아픈 역사를 되짚는 책이다.

인천상륙작전 5일 전인 1950년 9월10일. 미군 해병대 전폭기 네 대가 월미도 상공에 나타났다. 전폭기들은 아침 7시부터 낮 12시까지 120가구 600여명이 살고 있던 민간인 거주지역에 네이팜탄 95발을 투하했다. 이 일로 주민 100여명이 숨졌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월미도를 떠났다. 왜 미군은 남한의 민간인에게 폭탄을 투하했을까.

   

책은 미군이 민간인 마을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폭격 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월미도에 주둔하는 인민군의 규모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미군이 월미도 민가에 적의 병력이나 무기가 숨겨져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불확실성 제거 차원에서 폭격을 감행했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났던 월미도 원주민들은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를 계속 해왔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월미도의 관리권이 미군 기지에서 다시 한국 해군기지로, 인천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월미도 원주민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2008년 2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대해 58년 만에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과 위령사업 진행, 명예회복 조치 강구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그러나 여전히 별다른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출판사에서 어린이 역사책을 만들어왔던 저자는 어느 날 우연히 읽은 월미도 관련 신문기사를 보고 월미도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는 이제는 80대가 된 원주민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역사를 파고들어 '그날'을 재구성했다.

저자는 "월미도 주민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희생'됐다기보다는 폭격으로 인해 '학살'됐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어 대한민국을 구한 인천상륙작전이 민간인학살이라는 '전쟁 범죄'에 크게 빚지고 있다며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료시민으로서 이 일에 관심을 둘 것을 촉구한다. 296쪽. 1만3천900원.

zitrone@yna.co.kr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월미공원 일원에 주둔하면서, 월미도 원주민들은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 소금창고에서 임시거주하면서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군 헌병이 입구에서 총을 들고 서 있는데, 들어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원주민들은 말했다.
 
1971년 월미도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하자, 1972년 우리나라 해군이 소유지를 강제 징발해 국방부로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 원주민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리고 2001년 인천시가 국방부에서 토지를 매입하는 동안에도 인천시는 월미도 원주민들과 한 번도 협의 없이 매매계약을 체결한 뒤 월미전통공원으로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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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블로그 대문>
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歲寒圖)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 중 최고 걸작을 꼽으라면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 때 그린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가로 69.2㎝, 세로 23㎝ 크기인 이 작품은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청나라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겨울에도 꿋꿋한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 답례로 그려준 것이지요.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함으로써 극도의 절제미를 보여주고 있답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해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한 것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청나라에 가져가 학자 16명의 제영(題詠·제목을 붙여 쓴 시)을 받았답니다. 이후 이상적의 제자인 역관 김병선이 가지고 있던 세한도는 1930년쯤 일본인 후지쓰가가 구입해 44년 도쿄로 가져간 것을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1903∼81)이 설득해 그해에 다시 환수했다는군요. 후지쓰가는 48년에 숨지고

그의 집은 폭격을 맞았다니 세한도는 하마터면 재가 될 뻔했지요.

<蛇足>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도에서 8년 3개월(1840~1848년)동안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세한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귀양간 사람과 가까히 하면 모함을 받을 우려가 있어 모두가 멀리했으니 얼마나 외로웠으랴 !

제주도로 유배온지 3년째인

1842년 11월 13일, 그의 뒷바라지를 하던 아내 예안 이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추사는 언제나 부인에게 한글로 편지를 썼는데 지금도 13편이 전해오지요.


"월하노인 통해 저승에 하소연해

다음 세상에는 우리 바꾸어 태어 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은 천 리 밖에 살아 남아

그대에게 이 슬픔을 알게 하리"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의자하듯, 부인에게 먹기  좋은 음식 등을 보내달라든 그가 얼마나 슬폈으랴 !

이렇게 외로운 가운데에도 추사 선생에게 중국의 귀한 책을 가져다 준 제자 이상적이 얼마나 고마웠으랴 !

나 역시 척추 수술이후 걷기 어려워 거의 누워 지내는 심정을 세한도가 잘 나타낸 것 같아서..더 .더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