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문화재방송.한국 www.tntv.kr

동영상

[동영상 다큐'6.25 특집'강화도 청소년들의 불타는 호국정신]6.25전쟁의 숨은 영웅,'여성의용군'

문화재방송 2018. 6. 24. 01:57


<동영상 다큐-강화도 청소년들의 불타는 호국정신>


기획. 취재. 촬영. 편집. 내레이션;문화재사랑 김종문



대학생동아리 자주 구월산 유격대 이정숙 대장의 아들 김광인 선생과 만난 대학생 동아리 자주
 
   현재 대외활동 플러스 소속 대학생팀 “U-Turi”의 이름으로 6.25 여성의용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교육과 캠페인을 진행중이다. 사진은 프로젝트가 게시되어 있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현재 대외활동 플러스 소속 대학생팀 “U-Turi”의 이름으로 6.25 여성의용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교육과 캠페인을 진행중이다. 사진은 프로젝트가 게시되어 있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6.25 전쟁의 숨은 영웅 여성의용군

내가 6.25 전쟁 당시 활약했던 여성의용군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오는 6.25전쟁기념일을 앞두고 관련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나는, 자료를 찾던 중 불현듯 당시 여성들의 활약상이 궁금해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3.1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유관순 열사와 같은 호국영웅이 반드시 한 명쯤은 있으리라 하는 설렘을 안은 채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여군이자 6.25전쟁의 숨은 영웅, 대한민국 여성의용군에 대해 처음 접하게 된 건 바로 그때였다.

여성의용군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지 약 두 달여 뒤인 1950년 9월 6일 창설됐다(현재 매해 9월 6일은 대한민국 여군창설일로 기념되고 있다). 당초 여군 500명을 모집하겠다는 소식에 무려 2,000여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당시 여성들의 자발성과 멋진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가슴에 뜨거운 게 복받쳐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임진왜란 때 여자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일본군과 싸웠듯, 여자라고 국가의 위기 앞에서 손만 놓고 있을 수 없었다." - 여성의용군 교육대 이인숙 참전용사 인터뷰 中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어요. 대단한 사람들... 입으로만 말하는 애국이 아니에요. 진심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말 그 자체 그대로입니다." - 이점례 여성의용군 인터뷰 中 "



강한 투지와 숭고한 애국 정신 하나로 뭉친 이들은 당시 갖은 차별과 역경에도 맞서 싸워야만 했다. 전투 복장이라고는 펑퍼짐한 남자 군복 또는 미군 군복을 입어야만 했고, 남자군인들이 쓰고 남은 군화를 사용했다. 심지어는 잠을 잘 숙소 역시 제대로 구비되지 못해 '피난지 민가'를 이용하기 일쑤였다. 여성의 권리 자체도 지금에 비하면 턱없이 낮았고, 여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경했던 당시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들 중 일부가 자국민들로부터 '인민군 포로' 소리를 들었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른다.

이들은 각종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들은 강한 자부심으로 이를 악물었고, 다양한 상황에 배치되며 1953년 휴전 선언 전까지 갖은 전시 상황에 투입돼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예로 1.4 후퇴 당시 신분 위장 중에 있다가 유격대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지리산과 백운산을 비롯한 주요 거점에서 대적/대민 선무 활동을 했으며, 북한군 약 1200명을 귀순시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파일:attachment/korea_war.gif

소련의 통계를 보면 북한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가 됐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다.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victerkim 



 인명피해       

민  간  인

군    인

경    찰

합    계

991,068명

988,920명

16,816명

1,996,804명


 

    ◆ 군      인

구      분

국    군

UN 군

북 한 군

중 공 군

사      망

147,039명

  35,737명

520,000명

900,000명

부      상

709,975명

115,068명

406,000명

-

실      종

131,907명

   1,554명

-

-

총      계

988,920명

152,359명

926,000명

900,000명


 

◆재산피해

학교 및 주요건물

사찰 및 교회

대.소도시

촌락 (읍, 면)

22,437개소

5,236개소

50개소

5,400개소


 

출처 - 네이버 지식in


 



11.  How a man died on the way to Maeson Dong.

September 2, 1950. Sgt. Turnbull. (Army)

전사자 모습 

20.  A small South Korean child sits alone in the street,

after elements of the 1st Marine Div. and South Korean Marines invaded the city of Inchon,

in an offensive launched against the North Korean forces in that area.

September 16, 1950. Pfc. Ronald L. Hancock. (Army)

어린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다.

29.  A Korean family mourns their murdered father, victim of the

wholesale murder at Chonju by North Koreans.

September 27, 1950. M. Sgt. E. T. Tarr. (Army)

북한군에 의해 대량 학살된 시신 옆에서 오열하고 있는 한국인 

47.  A wounded chaplain reads a memorial service over

the snow-covered bodies of dead Marines. Koto-ri, Korea.

December 3, 1950. Cpl. W. T. Wolfe. (Marine Corps)

부상당한 목사님이 전사한 해병들을 위해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

32.  Scene of war damage in residential section of Seoul, Korea.

The capitol building can be seen in the background (right).

October 18, 1950. Sfc. Cecil Riley. (Army)

 서울의 주거지의 파괴된 모습.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40.  An aged Korean woman pauses in her search for salvageable

materials among the ruins of Seoul, Korea.

November 1, 1950. Capt. C. W. Huff. (Army)

폐허가된 서울에서 할머니가 쓸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41.  Korean women and children search the rubble of Seoul for

anything that can be used or burned as fuel.

November 1, 1950. Capt. F. L. Scheiber. (Army)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땔감을 찾고 있다


44.  Homeless, this brother and sister search empty cans for morsels of food,

and try to keep warm beside a small fire in the Seoul, Korea, railroad yards.

November 17, 1950. Pfc. Fulton. (Army)

아이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작은불 옆에 있다. 


 

일자가 1950년 9월 26일로 나온걸로 보아 아마 인천 부근인듯 하다. 미해병의 탱크가 포로를 잡고있는 육군을 지원하고있다.

 

 

전쟁 초기 젊은 사람들은 모두 징집되었다. 사진은 신병 훈련소로 향하는 기차에 칸막이도 없이 노출된 채 앉아있는 징집병들. 1950년 7월

저도 이 당시였다면 전쟁에 나섰겠죠..

 

 

전쟁 초기 철수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의료수송헬기가 부상자를 후방으로 이송하고있다.

헬기 착륙지점에 부상자를 옮길 들 것을 준비하고있다.

 

 

1950년 8월 16일 북한이 낙동강 전선의 총 공격을 계획하고잇다는 정보를 입수한후

B-29 98대가 북한이 집결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지역에 총 850톤의 재래식 폭탄을 집중 투하하고있다.

 

 

해군의 AD-3 급강하 폭격기가 2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고있다. 

사진의 장소는 신의주에서 북한과 만주를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이며 왼쪽이 북한 지역이다. 폭격은 북한쪽의 철교부분을 폭파시키고있다. 

사진의 왼쪽에 달 분화구 같은 많은 폭파구가 보인다. 그 동안 많은 폭격이있었음이 확연하다. 1950년 11월의 사진이다. 

이러한 공중 공격작전이 중국을 자극하게되고 중공군의 개입빌미를 제공한다.

 

 

 

1950년 7월 12일 남쪽으로 후퇴를 계속하면서 임시로 설정된 미군의 작전 지휘소. 이를 볏단으로 위장하고 경계를 서고있는 미군이 이채롭다.

 

 

원본 설명서에서 장소는 아곡(Agok)이라고 하나, 아마 잘못된 표기가 아닌가 한다. 1950년 8월 사진으로 한창 후퇴를 거듭하던 시기인듯하다. 마을이 불타고있는것을 항공사진으로 촬영한것.

 

 

미 육군에서 공개한 사진으로 그동안 1급 비밀로 분류되었던 사진이다. 

이사진의 설명에 따르면 1950년 7월 전선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한국군이 대전지역에서 3일동안 약 1,800 여명의 정치범들을 즉결심판 처형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처형이유는 공산주의 동조자와 북한군이 남한 피난민 깊숙히 위장하고 들어온 간첩의 혐의를 받고있었다. 

이들중에는 일부 생존하여 지금도 무고한 민간인들도 있었다고 주장하고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4척의 상륙함이 전투 물자를 하역하고있다. 1950년 9월 15일

 

 

 

잘알려진 한국전쟁 지휘관 맥아더 장군. 9월 15일인데도 두꺼운 가죽 자켓을 입고있다니..

 

 

 1950년 9월 30일 대전 시가지. 의외로 길이 반듯반듯하다. 저 폐허가 불과 60년전인데,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면 상상이 안간다

 

 

미군의 수색 작업중 북한군 포로. 1950년 11월 16일. 북한 지역

 

 

수술 장면이라네요..

 

 

서울 수복작전중인 국군과 미군. 한 민간인이 이 땅굴속에 북한군이 숨어있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슈류탄을 투척하고있다. 

또 다른 군인은 북한군이 튀어 나올것에 대비하여 기관총을 준비하고있다.

 

 

이것이 전쟁이다. 약 400여구의 시체가 대전 교도소에서 발견되었다.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교도소에 수감했던 국군포로, 민간등을 모두 학살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무덤을 직접 팠다. 왼쪽의 사람은 종군 기자다. 교도소 뜰에 옥수수가 높다랗게 자란 것이 가을을 알려주나 보다. 

사진은 1950년 9월이다.

 

 

서울 수복후 폐허속의 생존자와 죽은자

 

 

1950년 10월 북한 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미군의 C-119를 이용한 공수작전. 저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미군들은 무슨 목적이있을까?

 

 

북한의 숙천과 선천 지역이라고 표기하고있다. 대규모 공수작전이 펼쳐지고있다.

 

 

서울지역 변두리에서 미군이 탱크를 앞세워 북한의 파르티잔(비정규 게릴라 군)들을 소탕하고있다. 1950년 10월

 

 

장소는 불명확하나 많은 격전이있었던 931미터 고지. 항공촬영을 통해 북한이 파놓은 정교한 참호를 볼수있다. 

그리고 많은 포화와 항공폭격으로 나무는 거의 다 죽어 버렸다.

 

 

1950년 10월 금봉산의 공산에서 발견된 60여구의 민간인 시체. 이들은 북한군에 의해 타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0월. 평양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황주에 진입한 오스트레일리아와 프랑스 군대.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원산만으로 진입하는 미군. 1950년 10월, 약 5만명의 미군들이 이곳에 상륙하였다

 

 

1950년 12월 4일. 그 추운겨울 중공군의 전쟁 개입소식과 함께 자유를 찾아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목숨걸고 남하하는 북한 주민들.

 

 

12월 9일. 미군에 포로가 된 중공군.

 

 

12월 26일. F4U-5 Corsairs 공군 공격기의 지원을 받으면서 중공군과 대치하고있다.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우리 국군들의 시신. 합동 매장을 위해 시체를 모아두었다. 장소는 북한 지역 고토리. 12월 8일

 

 

F86 Sabre 제트 전투기가 눈으로 덮힌 적 밀집 지역 공격에 나섰다. 1951년 1월 28일

 

 

눈속에 손만 보이는 우리국군의 시체

 

 

원산지역의 적 주요 보급지역을 B-26 Invader로 폭격하고있다.

 

 

한강 근방에서 화염방사기로 적의 은둔지를 불사르고있다. 1951년 3월.

 

 

미군의 도움을 받아 영국 특공대들이 북한지역 깊숙하게 침투하여 철도 폭파를 위한 폭약을 설치하고있다. 

이 작전으로 약 30미터의 중요 철도가 파괴되어 중국에서 북한으로 수송하는 군수물자가 장기간 제약을 받았다.

 

 

적이 많이 밀집한 지역에 B-26이 네이팜 탄을 투하하고있다. 위치은 북한 지역으로 '한촌'이라 표기되어있다. 1951년 5월 10일

 

 

의정부. 터키 군인이 적으로부터 빼앗은 당나귀를 타고있다.

 

 

3명의 북한군이 어선을 타고있다가 발각되어 투항하고있다.

 

 

춘천지역 1951년 5월. 중공군의 시체들. 아직도 머리에서 연기가 나고있다.

 

 

원산 공격중, 북한의 대공라이트가 대공사격을 위해 불을 비추고있다. 

이런 불빛을 보고 미공군은 적을 공격하고, 공격후 연기를 보고 다음의 공격군이 다시 공격한다.

 

 

1952년 4월 적의 박격포 공격에 참호속에서 몸을 피하고있다

 

 

회수된 북한의 대포와 박격포 포탄들. 도대체 이 어마어마한 무기들이 다 무엇을 위해 사용된건지..

 

 

지금은 판문점이된 중립지역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되고있다. 

정전이란 진자도 이긴자도 없이 전쟁을 잠시 쉬는 상태. 다시말해 언제든지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상태.

 

 

4명의 미해병이 휴전소식을 듣고 기뻐하고있다. 이제야 전쟁이 끝나나보다

 

 

백령도에서 경계근무중인 해병대원

 

전쟁중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에 천안함 희생자 가족의 그림자가 어렴풋하게 비친다. 

묘비에 하나의 이름만 남겨졌지만,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않을 이름이지만, 전쟁중 그들은 생명체였고, 가족이있었고, 

또 목숨과 정신은 얼마나 죽음의 공포속에서 떨었을까?


[청계천 옆 사진관]'6·25전쟁 속 민초의 삶' 사진으로 보니..

입력 2018.06.25. 15:05

6.25전쟁 제68주년을 맞은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2층 로비에서 6.25전쟁 당시 참전했던 고 토마스 휴튼 상사가 촬영한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사진을 촬영한 토마스 휴튼 상사는 1910년 미국 오클라호마 포룸지역에서 출생.

2차세계대전에 참전해 중국-버마-인도 지구에서 복무했으며 6.25전쟁 당시에 미8군 91중차량 정비중대에서 일등상사로 복무했다.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동아일보]

대구역앞 광장. 한 여성이 머리에 짐을 지고 서있다.
대전 목천교. 대전 시내 한복판에서 소달구지가 똥통을 싣고 가고 있다.
대전 비행장. 도포입고 갓 쓴 노인들이 미군전투기 (F-82트윈 무스탕) 날개위에 올라가 있다.
대전 수운교 광덕문앞.길게 줄지어 서있는 어린이들.촬영자인 미군의 요청에 다라 모델이 되어준 듯하다.
서울역앞.
대구 금호강변.
대전역앞.
대전시내 거리풍경.
수원화성팔달문.
카투사. 국군은 미군 지상군 병력의 보충을 위해 카투사제도를 실시했다.카투사란 미군부대에 증원된 국군병력이란 의미로 1950년 8월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시행됐다.
노무자. 유엔군은 1950년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긴급히 전력을 강화하기위해 ‘한국노무단’을 조직했다.노무단은 전선으로 탄약,연료,식량등 보급품운반과 부상자후소 진지공사,도로.교량보수등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금강철교앞.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금강철교앞에서 촬영자인 토마스상사가 소속된 중차량정비중대원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대전 신흥동지역에서 포즈를 취한 토마스상사의 모습.멀리 당시 대전제3발전소 건물이 보인다…현재도 우측 적갈색 건물은 남아있다.

6.25전쟁 제68주년을 맞은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2층 로비에서 6.25전쟁 당시 참전했던 고 토마스 휴튼 상사가 촬영한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사진을 촬영한 토마스 휴튼 상사는 1910년 미국 오클라호마 포룸지역에서 출생.1934년 미 육군에 입대. 2차세계대전에 참전해 중국-버마-인도 지구에서 복무했으며 6.25전쟁 당시에 미8군 91중차량 정비중대에서 일등상사로 복무했다.

사진전은 국회 미래안보포럼(대표 바른미래당 김중로의원)과 육군본부(기록정보관리단) 공동주최로 26일까지 열린다.

[청계천옆 사진관] 6,25 전쟁속 민초의 삶 =전시01
[청계천옆 사진관] 6,25 전쟁속 민초의 삶 =전시02
25일 오후 군관계자와 바른미래당 김중로의원(맨 오른쪽)등이 사진전 설명을 듣고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사진= 고 토마스 휴튼 상사(뉴튼 대령의 외할아버지)

글= 김동주기자.zoo@donga.com

원문보기

http://v.media.daum.net/v/20180625150551819


한국전쟁 떠돌던 '부대 마스코트'를 아십니까



국사편찬위, 미국 NARA 소장 한국전 사진자료 공개

미군에게 커피를 따라주는 한 소년. 이들은 '부대 마스코트'로 불렸다.
미군에게 커피를 따라주는 한 소년. 이들은 '부대 마스코트'로 불렸다.1950년 9월 23일 촬영됐다.[국사편찬위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양동이 앞에 선 한 소년이 국자로 무언가를 떠서는 군복 차림 남성이 든 컵에 따라준다. 나이답지 않게 무심한 얼굴과 꾀죄죄한 옷차림, 자기 몸보다 더 큰 양동이가 소년의 삶을 짐작게 한다.

1950년 9월 23일 촬영된 이 흑백사진 속 소년은 한국전쟁 '부대 마스코트'(unit mascot) 중 하나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 중 일부는 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거들며 부대와 함께 이동했다. 이들 중 몇은 종전 후 미국으로 정식 입양됐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국사편찬위원회는 6·25를 맞아 '부대 마스코트'를 포함해 한국전 사진자료 일부를 공개했다. 국편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으로, 일상과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의미가 있는 사진들이다.

1950년 12월 18일 대구역에서 이별하는 모자
1950년 12월 18일 대구역에서 이별하는 모자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불안감을 억누른 채 1950년 12월 18일 대구역에서 신병 아들을 배웅하는 어머니, 같은 해 11월 8일 폭격에 폐허가 된 원산 시내 집터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는 남성, 1951년 3월 1일 가재도구들을 잔뜩 짊어진 채 아이를 앞세운 피난민 가족 등 다양한 사진이 공개됐다.

역사 현장을 포착한 사진도 보인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1951년 7월 8일 개성 휴전회담 예비회담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한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본 회담은 이틀 뒤 시작됐지만, 사진 속 이날부터 양측의 기나긴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해 처음 만난 유엔군(오른쪽)과 공산군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해 처음 만난 유엔군(오른쪽)과 공산군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연합뉴스]

타임지를 함께 보는 북한군, 미군 병사(1951.7.8)
타임지를 함께 보는 북한군, 미군 병사(1951.7.8)[국사편찬위원회 제공=연합뉴스]

같은날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이뤄지는 와중에 북한군 병사와 미군 병사가 함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을 같이 읽는 흥미로운 순간도 공개됐다. 사진 속 잡지는 1951년 6월 16일 자로, 표지 인물은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였다.

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파괴된 철로를 복구하는 모습도 나왔다. 1954년 4월 27일 촬영된 사진이다.

국편은 "최근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 평화를 향한 기대감이 부쩍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일상과 평화를 담은 사진자료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설명했다.

국편은 앞으로 주제별로 분류·정리한 자료를 수시로 공개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사진들은 전자사료관 홈페이지(http://archive.history.go.kr)에서도 볼 수 있다.

북한의 철도 복구(1954.4.27.)
북한의 철도 복구(1954.4.27.)[국사편찬위원회 제공=연합뉴스]

airan@yna.co.kr
원문보기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8/06/22/0906000000AKR20180622052200005.HTML



블로그 대문/ 국보 제147호 울주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선사·역사시대의 조각·바위그림 및 여러 종류의 명문 유적.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71년 2차례에 걸쳐 정식 조사되었다.

 

각석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강안 암벽지대에서 있다.

이 지역은 울산과 경주를 잇는 길목지에 해당되어 울산·언양 일대의 풍부한 물산이

경주로 운반되는 교통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각석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암질은 적색 셰일이고 크기는 너비 9.5m, 높이 2.7m이다.

상부의 문양은 주로 쪼기〔彫琢〕기법을 썼으며 하부는 긋기〔線刻〕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시대 및 제작집단이 달랐음을 뜻한다


〔명문〕명문 중 확인된 글자는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인다. 원명이 새겨진 기사년은 신라 법흥왕 12년(525), 추명에 새겨진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된다.

뒤의 추명은 왕과 왕비가 이 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 곳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탁부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뜻한다. 이 곳은 사탁부의 고유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제명에는 여러 화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 곳을 찾아 도량(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는 신라 6부체제의 발전·변화과정과 내용을 규명해나가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휴일이면 가족과 더불어 각종 문화재와 함께 하여 민족의 숨결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