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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한글날] 백성들이 한글로 폭정을 고발하자 연산군은 왕명으로 한글 사용 금지령 내려

문화재방송 2019. 10. 6. 04:08

고성오광대, 제60회 한국민속예술축제 대통령상

등록 2019-10-04 17: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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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경남)=뉴시스】신정철 기자=경남 고성군의 대표적인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가 4일, 서울시 송파구 서울놀이마당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제6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사진은 이윤석 고성오광대보존회장(가운데), 백두현 고성군수(완쪽 2번째) 등이 대상을 수상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19.10.04.(사진=고성군 제공)  photo@newsis.com

국립 한글박물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사적 362호 연산군 부부의 묘(좌측 연산군묘, 우측 거창군부인 신씨묘)

한글은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됐다. 이름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가 한글이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반포 당시부터 ‘백성의 글’이라는 뜻에서 ‘언문(諺文)’ 또는 ‘언서(諺書)’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당시 한문을 숭상하던 양반들은 한문이야말로 진정한 문자이고 한글은 천한 백성들이나 쓰는 글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한문을 진서(眞書), 한글을 언문(諺文)이라 왜곡해 썼다. 양반들에게 언문은 진짜 문자가 아닌 가짜 문자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은 주로 여성과 스님들 사이에서 유행해 ‘암클’ 또는 ‘중글’이라 불렸다. ‘암클’이란 ‘암놈들의 글’이란 뜻으로서 한글을 사용하는 여성들이 짐승으로까지 비하된 결과이며, ‘중글’ 역시 ‘중놈들의 글’이란 뜻으로 스님들에 대한 극단적인 비하가 함축돼 있었다.

이런 상항에서 언문은 ‘백성의 글’에서 ‘상글’ 즉 ‘쌍놈들의 글’로 천시돼 양반들에서는 아예 기피 대상이 돼버렸다. 이런 사실들은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 발전을 가로막은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양반들의 한문 숭상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글을 탄압한 최고의 군주를 꼽으라면 단연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심정적인 면에서의 한문 숭상을 넘어 노골적으로 한글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글금지령을 둘러싼 연산군의 행태에는 연산군이 어느 정도의 폭군인지가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연산군이 한글금지령을 내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동왕(同王) 10년(1504) 7월 10일에 있었던 투서였다. 이날 새벽 왕의 처남인 신수영의 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제용감에서 일하는 이규가 보내서 왔다며 서찰을 전하고 사라졌다. 신수영이 펴보니 그 안에는 언문 즉 한글로 된 세 장의 익명서가 있었다.


조선시대 익명서는 내용에 관계없이 폐기처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름을 숨긴 작자의 흉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수영은 너무 심각한 내용이라 판단하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익명서를 본 연산군 역시 크게 놀랐다. 왕은 즉시 명령을 내려 이규에게 “네가 무슨 글을 신수영의 집에 통하였느냐”라고 묻게 했다. 이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결국 누군가가 이규를 빙자해 투서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폐기처분하고 무시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일을 크게 벌였다.

먼저 왕은 명령을 내려 도성의 각 문을 닫고, 출입을 금하게 하고는 한글 익명서를 신하들에게 내렸다. 반드시 주모자를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신하들이 받아본 익명서 3장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쓰였는데 사람 이름만 한자였다.

익명서의 첫 표면에는 무명장(無名狀)이라 적혀 있었다. 익명서 3장의 각 내용이 실록에 수록돼 있는데 핵심은 개금·덕금·고온지·조방 등 의녀들이 연산군에 대해 대역무도한 말을 했으니 엄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금의 황음무도를 강하게 비판한 ‘한글 익명서’


“개금(介今)·덕금(德今)·고온지(古溫知) 등이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실 때, 개금이 말하기를 ‘옛 임금은 난시(亂時)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파리머리 끊듯 죽이는가? 아아! 어느 때나 이를 분별할까?’ 했고, 덕금은 말하기를 ‘주상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으랴?’ 했다. 이외에도 그들의 말이 몹시 심했으나 이루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이런 계집을 일찍이 징계해 바로잡지 않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글을 던져버리는 자가 있으면 내가 ‘개금을 감싸려 한다’고 상언(上言)하리니 반드시 화를 입으리라.”[<연산군일기> 권 54 10년(1504) 7월 19일]

위에 의하면 익명서에서 발언 주체는 의녀 개금과 덕금이었다. 먼저 의녀 개금이 연산군의 무차별한 신하살육을 비판했는데 이는 갑자사화에 대한 것이었다. 이어서 의녀 덕금 역시 같은 비판을 했는데 그 비판은 개금보다 훨씬 과격했다. 즉 덕금은 “주상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으랴?”라고 했는데 머지않아 왕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둘째 장의 익명서 내용은 “옛 임금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임금은 여색에 대해 분별하는 바가 없어 이제 또한 여기(女妓), 의녀, 현수(絃首, 여자 무당)들을 모두 다 조사해 궁중에 들이려 하니 우리도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이었으며, 셋째 장은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폐비 윤씨의 생모인 신씨 때문이니 신씨의 친족을 몰살시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한글 익명서는 연산군의 갑자사화와 황음무도에 대한 비판이었다.


▎한국화가 우승우가 그린 연산군의 범 사냥 도(圖). 연산군은 사냥 때도 궁녀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고 기록돼 있다.


가정윤리는 물론 종교윤리까지 파괴된 시대

훈민정음 반포 이후, 글을 읽고 쓰게 된 백성들은 한글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궁중 여성들이 한글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을 표시하는 일이 많았다. 예컨대 궁녀가 왕의 실정이나 궁중 안의 비행을 폭로하는 한글 익명서를 투서하거나, 왕비나 대비 등이 정치현실에 개입하는 한글 명령서를 반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할 때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한글 명령서를 이용했다. 이는 한글이 유행하면서 궁중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정치의식이 고양됐음을 알려준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이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양반은 물론 백성의 여론에도 더더욱 귀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반은 물론 백성들의 여론도 폭력적으로 억압하려고만 했다. 특히 자신의 황음무도가 심해질수록 더더욱 그렇게 하려고 했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본격적으로 황음무도하게 된 계기는 정업원의 여승들을 강간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연산군 9년(1503) 6월 어느 날인가, 왕은 환관 대여섯 명에게 몽둥이를 들려 정업원으로 달려갔다. 술에 취해 있던 연산군은 늙고 못생긴 비구니는 내쫓고 젊고 예쁜 비구니 7~8명만 남겨 간음했다.

당시 연산군이 간음했다고 하는 정업원의 비구니들은 사실상 선왕의 후궁 또는 왕족여성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정업원은 태조 이성계 이래로 왕의 후궁들 또는 왕족여성들이 출가해 여생을 보내던 절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건국 이후 정업원의 초대 주지가 된 혜빈 이씨는 공민왕의 후궁이었다. 또한 1차 왕자의 난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 즉 세자 방석의 부인 심 씨,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 등도 정업원의 비구니가 됐다.


이후에도 수많은 후궁과 왕족 여성이 정업원의 비구니가 됐다. 정업원은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쯤에 위치해 궁궐과도 가까웠으며 왕실로부터의 지원도 많았기에 후궁 또는 왕족여성들이 출가하기에 유리했다. 이런 정업원의 비구니들을 강간했으니 연산군은 가정윤리는 물론 종교윤리도 파괴한 왕이라 할만 했다.


연산군 묘 옆 은행나무는 조선 전기에 식재된 나무로 이 지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수형도 아름다워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기존의 보호수 지정을 해지하고 2013년 3월 28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왕은 기생은 물론 의녀, 여자 무당 등을 색출해 궁에 들였다. 이런 와중에 의녀인 개금과 덕금 등도 뽑혀 들어갈까 두려워하며 연산군을 비판했고 그것이 연산군 10년(1504) 7월 19일의 익명서 투서로 연결됐던 것이다.


그런 절대왕권은 연산군 12년(1506) 9월 1일 한밤중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렸다. 폭력으로 억압되었던 양반과 백성들의 여론이 폭력으로 분출했던 것이다

일부 원문 보기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8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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