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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8월 29일 국치일] 태극기를 조기로 게양하고 일제에 나라를 강탈 당한 치욕을 상기해야

문화재방송 2019. 8. 28. 19:08



블로그 대문/사적 제123호 창경궁(昌慶宮)의 가을  




사적 제123호. 이 궁궐에서 장조·정조·순조·헌종(憲宗) 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하고 있으나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하여 있다.

본래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1484년(성종 15) 이 수강궁 자리에 새로이 별궁인 창

경궁을 건립했다.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 4편을 남긴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현 선비

 


            전남 광양시 석사리의 매천이 태어난 집. <사진작가 | 황헌만>

 

매천은 세종 조 명승 황희의 후손이지만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장수 황진의 10대 후손이다.

 

진주성 싸움에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 장수의 혼이

매천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국의 소식을 듣자 비탄에 빠진 선비 매천은

참다운 선비가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선비정심의 본질을 보여 준 것이 매천의 자결이었다.

 



 

 매천의 절명시 4수(친필). <사진작가 | 황헌만>

 

 

 

 

 

유서(遺書)는 떨리는 손으로 쓰여졌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라는 유서는 비장하기보다 오히려 담담한 선비의 일상적인 담론으로 느끼게 한다
이루려는 인(仁)을 실현하려는 뜻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충(忠)이 아니라 인(仁)을 이룸이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유시에서 같은 뜻을 밝히고 있다.
큰 집을 지탱함에 서까래 반쪽의 공도 없었으니 曾無支厦半椽功
다만 인을 이루려 함이지 충은 아니라네 只是成仁不是忠
겨우 윤곡(尹穀)을 쫓는 데에 그쳤을 뿐이니 止竟僅能進尹穀
당시의 진동(陳東)의 행동 실천 못함 부끄러워라 當時愧不陳東"

이렇게 읊어서 죽는 이유를 또 설명했다. 나라에 벼슬하여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고 녹을 받아 생활한 적도 없으니 나라에 충성하려는 생각보다는 인간된 도리, 선비된 도리를 다 하려 할 뿐이다.

다만 북송 때의 진동처럼 간신들을 처단하자는 독한 상소를 올려 죽음당한 일을 못하고, 겨우 남송 때의 윤곡처럼 나라의 망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나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의 의기는 더욱 굳세게 보인다.

1 매천집. 1911년 상해에서 발간됐다. 친구 김택영이 상해로 망명해 출판사에서 일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문집이다. 2 황현 묘.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퇴락한 무덤이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듯하다.

[

경술국치울분 순국

위당 안숙의 선비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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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문집 완간, 우국충정 기려

 

대한제국이 멸망한 시기에 비분과 저항으로 살았던 애국지사 위당(韋當) 안숙(安潚) 선비가

기념문집을 통해 이 시대의 우국정신을 일깨워 준다. 지난 111,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위당 안숙 선비 유고 완역 발간기념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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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분노한 저항 선비

 

위당 유고집은 1910829일의 경술국치’ 100주년을 계기로 고인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당의 손자인 언론인 안병찬 박사에 의해 출간됐다.

이날 기념식에는 경술국치로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해 고향 괴산의 오랑강에 투신,

순국한 애국선비를 추모하기 위해 언론계를 비롯하여 학계, 정계인사 등이 다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번역을 맡은 이충구 박사(한문학) 가 선비 안숙 일지에 나타난 삶과 저항의

정신을 설명하고 원로 언론인 남재희씨, 전 국무총리 이수성씨, 안중근의사 승모회 안응모 이사장,

괴산출신 정범구()의원 등이 고인을 추앙하는 인사말을 했다.

위당 선비의 시문낭독과 안병찬 박사의 안숙선생의 좌표에 관한 의견을 발표가 있었다.

안박사는 그의 할아버지 위당 선생이 충절의 유학자로서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깊이 생각하고

전통학문과 신학문을 주장하며 부국강병론으로 실학파의 주체사상과 개화정신으로 짧은

일생을 살았다고 말했다.

 

충정공 자결 소식 듣고 절명시

 

안숙선비는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보임된

실학파 문인으로 강고한 민족 주체사상과 애국사상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시문을

많이 남겼다.

위당은 충정공 민영환이 경술국치에 분노하여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명시를 남기고

48세의 젊은 나이에 투신 순국했다

이보다 앞서 위당은 명성황후가 일제에 시해에 당한 소식을 듣고 슬픔이 나의 가슴을 관통하여

견딜수 없는 통분으로 미친 사내(狂夫) 가 되어 글을 쓴다고 절규했다.

광복 후 정부는 위당 선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했다.

또한 괴산군수 임각수씨는 이번 문집 발간비를 지원하고 고인이 투신한 오랑강변에 충혼비를 세워

애국선비 정신을 널리 계승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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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기다린 책

 

위당 문집에는 나라를 생각하는 충절의 정론(正論) 으로 경세론, 책론, 정기론, 병제론, 상무론,

도덕론 등으로 엮여있다.

모두가 우국충정에다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한 강골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글이다.

묘비에 새겨진 절명시가 위당 선비의 저항정선을 잘 말해준다.

사람이 태어나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진실로 죽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도리어 사는것 보다 현명한 것이니...”

이 문집 발간사를 통해 손자 안병찬은 위당 유고집이 100년을 기다린 책이라고 말하고

사는 이들이 100년의  역사로 읽고 의미를 되새기는 춘추서가 될 것을 바란다는 깊은 소회를 밝혔다.

출처:경제풍월

http://www.econotalking.kr/news/articleView.html?idxno=28978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 ~ 1905)충정공의 자결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은 허울만 남은 나라가 되자

같은 달 30일 민영환은 왕조의 몰락에 책임을 지고 자결로 속죄했다.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하는 가운데 모두 멸망하려 하는도다.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께서

이를 어찌 헤아리지 못하리오?  나 영환은 다만 한번 죽음으로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데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 더 분발하여 힘쓰기를 더 하고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여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나도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라.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으로 고하노라.....



 

민영환 선생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하였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 났다는 이른바 "혈죽(血竹)"사건은

당시 1906년 7월5일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어 커다란 화제가 됐다.

더욱이 발견된 대나무 잎의 숫자는 45개로 민영환의 나이와 같았다고

하여 더욱 놀라웠다고 한다.

광복 이후 대나무를 고이 수습하여 보관하고 있던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여사는

이를 폭 8cm, 길이 50cm 정도의 나무 상자에 보관하여 자줏빛 보자기로 쌓아 1962년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

고대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인 기쿠다가 촬영한 혈죽 사진과 1906년 안중식이 그린 혈죽도(血竹圖)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등 많은 인사들이 뒤이어 자결하였고,

전국 곳곳에서 義兵이 일어 났다.

한말 의병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일본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족이었다>



일본은 방위백서에서 독도는 자기들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며

초등학교.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독도 영토권을 주장, 100년 후를 예비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는 국사 교육을 도외시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일본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재무장하고 있는데

만일 독도 침략 전쟁, 이른바 한일 해전이 발발한다면

우리 군사력이 그들을 격퇴할 수 있을까?


미국은 최근 한국의 독도 방어 훈련을 비난, 일본 편을 들었다.


개항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항상 침략의 촉수를 감추고 자신을 한국 독립의 지지자는 물론 근대화의 후원자로 포장하였다. 예컨대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지방自主之邦”임을 내세워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개화파의 마음을 잡고, 1894년 “시정개선施政改善”을 표방하며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갑오내각의 성립을 지원하였다.




나아가 1895년 청일전쟁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인정”케 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마치 한국의 독립 전쟁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04년 일왕은 러일전쟁 선전 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한다고 함으로써 침략 전쟁을‘동양평화의 성전’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말의 민족지성들은 일찍부터 일제 침략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을사늑약’의 체결 시기에 와서야 침략성을 깨닫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항일 역량을 키우고 조직하는 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나아가 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므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1895년 청일전쟁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인정”케 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마치 한국의 독립 전쟁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04년 일왕은 러일전쟁 선전 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한다고 함으로써 침략 전쟁을‘동양평화의 성전’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말의 민족지성들은 일찍부터 일제 침략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을사늑약’의 체결 시기에 와서야 침략성을 깨닫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항일 역량을 키우고 조직하는 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나아가 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므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