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 1개 연대 vs 적 1개 사단
국군 1사단에는 3개의 연대가 있었다. 11연대와 12연대, 그리고 15연대였다. 11연대는 다부동 초입이 있는 356고지와 297고지에서 석우동까지 이어지는 7.5㎞, 12연대는 수암산과 유학산 및 674고지를 잇는 9.5㎞, 15연대는 328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3㎞ 길이의 전선을 맡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11연대, 12연대, 15연대가 늘어선 형국이었다.
개전 초기 서울을 먼저 점령함으로써 김일성으로부터 ‘서울 사단’이라는 명예를 얻었던 북한군 3사단은 우려했던 대로 왜관 북쪽에서 진격하다가 화력이 국군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미 제1 기병사단 방어지역을 우회해 15연대 지역으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대구 북방을 향해 직접 치고 내려오던 북한군 2개 사단과 미군 방어지역을 우회한 북한군 3사단이 모두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을 향해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유학산 일대를 담당한 12연대 앞에는 북한군 15사단, 그 동쪽으로 서 있던 11연대 지역에는 북한군 13사단이 공격을 벌여왔다.
우리는 따라서 다부동 전투가 막 벌어지던 무렵에는 각 연대가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특히 북한군 3사단이 밀고 들어오는 15연대 방어지역에서는 험한 지형 때문에 격전이 불가피했고, 12연대는 유학산 북사면을 먼저 점령한 북한군과 혈전을 벌여야 하는 형국이었다.
- 1950년 11월 무렵, 대구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어느 신병의 어머니가 먼길 떠나는 아들에게 물을 떠와 먹이는 모습.
유학산의 12연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북방으로 800m 이상의 능선이 4㎞ 길이로 펼쳐져 있는 유학산은 방어를 하는 쪽인 우리가 정상을 향할 때 문제가 심했다. 700m 지점에 이르러서는 높이 70~80m의 아주 가파른 바위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북사면의 완만한 경사를 올라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북한군은 우리의 공격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아군이 7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수류탄을 던지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가다 죽거나 사망하는 병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따라서 12연대는 야간 공격을 지속적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적의 반격이 거세 피해는 계속 증가했다.
담뱃갑에 적은 신병 이름
내가 있던 다부동 동명초등학교의 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고지를 공격하다 사망한 장병들의 시신이 나날이 쌓였다. 매일 전황 브리핑에서 보고받는 사망자 숫자가 자꾸 늘어나더니 2~3일이 경과하면서는 하루 700여 명의 손실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충격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사단 사령부를 나와 연대 전방 지휘소 등을 둘러보러 길을 떠날 때는 일부러 시신이 쌓여 있는 곳에 눈길을 두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참담한 그 광경을 보면서 괜히 투지(鬪志)가 꺾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그곳 일대는 무더운 8월의 날씨로 인해 주검이 부패하면서 번지는 냄새로 가득 차고 말았다.
전쟁은 여러 가지의 책략과 전기(戰技)를 필요로 한다. 싸움의 얼개를 다루면서 전체 흐름을 조정하며 적에 앞서 유리한 지형과 시간을 선점하는 전략적 안목, 병력과 화력을 제때 동원해 공격과 방어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보내는 전술적 시야 등이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 낙동강 전선 서쪽, 대구 북방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적을 맞아 끝까지 싸우려는 굵고 강하며 꺾이지 않는 투지였다. 적도 사력(死力)을 다해 전선을 허물고자 덤벼들었고, 우리 또한 그에 맞서 젖 먹던 힘까지 자아내 적을 막아야 했다. 당시의 전장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겠다는 강인한 투지였다.
병력 보충은 후방의 육군본부, 전시 행정 채비를 갖춘 정부의 노력으로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다급한 전시의 상황이라서 새로 모병한 장병들에게 충분한 훈련을 시킬 수가 없었던 점이 문제였다. 이들은 각 연대의 임시 훈련장에서 한두 시간 소총 작동법 등을 배운 뒤 전선으로 갔다.
각 고지에서 대원을 이끌고 있던 소대장들은 이렇게 올라온 신병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유학산 전선에서는 주로 밤을 틈탄 공격이 이뤄지고 있어 소대장은 신병이 올라오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춘 뒤 “내가 소대장”이라고 소개한 뒤 공격을 이끌었다. 소대장은 또 신병들의 이름을 화랑 담뱃갑 쪽지에 적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나중에 전사자를 확인할 때 이름이나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6.25 전쟁 때 국군에게 배급된 화랑담배. 당시 우리 국군의 고난이 상징처럼 어려있는 담배다.
15연대의 상황은 아주 처절했다. 참호를 깊이 팔 수 없었던 까닭에 아군은 적의 공격에 자주 몸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15연대 장병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 뒤에 숨어서 적과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신병들은 한번 올라간 뒤 내려오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열에 여덟아홉은 그렇게 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세상을 등졌다. 전사자 확인도 쉽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 또한 전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설령 소대장이 살았더라도 신병들의 이름을 적었던 화랑 담뱃갑은 땀과 피에 젖어 적어 놓은 이름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희생당한 무명용사는 그런 이유로 해서 아주 많았다.
11연대의 싸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곳 정면을 공격하던 북한군 13사단은 다부동 일대를 향해 다가서던 북한군 중에 병력이 가장 많아 전투력이 강했다. 역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나는 피가 마르는 듯한 느낌에 빠졌다.
쉴 새 없이 전선을 들여다보면서 급한 상황이 생기면 일선을 지휘하는 연대 지휘소로 달려갔다. 현황파악을 위해 그 밑의 대대급 부대도 방문했다. 일선에서 마주치는 전쟁터의 피해는 참담했지만, 나는 전황을 파악한 뒤 가혹할 정도로 단호히 고지탈환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위기에 마주치면 잘 싸우는 민족이라는 점은 그때 알았다. 휘하의 장병들은 군말 없이 내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향했다. 지휘관들은 묵묵히 싸움터로 향했고, 겁에 질려 전선에 당도한 신병들도 명령을 내리면 어김없이 고지를 향해 달렸다.
일보(日報)라는 게 있다. 매일의 작전 상황을 육군본부에 보고하는 문서였다. 다부동 전투 중에 우리 1사단은 감찰을 받은 적이 있다. 작전 상황을 보고하는 일보를 육군본부에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 감찰팀이 사단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직접 현장에 보냈다. 15연대가 공방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었다.
- 다급한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학생의 신분으로 전투에 나선 학도병들의 자랑스러운 모습.
북한군은 ‘제파(諸波)식’ 공격을 벌이고 있었다. 물결처럼 끊임없이 다가서는 방식이었다. 소련군이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선보였던 전술이었다. 돌파구를 설정해 그곳에 여러 차례의 공격 진영을 짜놓고는 계속 투입하는 방식이다. 소련의 작전계획을 따랐고, 그들의 전법까지 그대로 보고 배웠던 북한군은 최후의 돌파를 위해 인명의 손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전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5연대 전면에서는 계속 공방이 벌어졌고, 유학산은 아군이 쉽게 정상에 오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11연대 또한 북한군 13사단과 치열한 공방을 전개하면서 희생이 나날이 커졌다. 8월 16일에는 유엔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벌어졌다.
미 8군으로부터 지시가 왔다.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경에 대규모 공습이 있을 예정이니 전 병력으로 하여금 진지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미 공군이 정확히 어느 곳을 폭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지시에 따라 당일의 그 시간에 맞춰 전 병력에게 진지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주먹밥과 탄약 날랐던 다부동의 노무자들, 처절했던 그들의 희생
거대한 공습, 융단폭격
하늘에서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미 8군이 폭격에 대비해 참호 속에 들어가 나오지 말라고 했던 시간이었다. 하늘엔 굉음만 가득했다. 미군 폭격기들이 대구 북방과 왜관 쪽을 향해 새카맣게 몰려가고 있었다.
예정 시간이 되자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맹렬했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폭발음과 함께 실제로 땅이 울렁거렸다. 융단폭격이었다. 지정한 지역을 융단 깔듯이 폭탄으로 덮어버리는 작전이다. 일본 오키나와와 가네다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B-29 전략 폭격기 98대가 날아와 전선의 지축을 흔들었다.
폭격기들은 이날 오전 11시 58분에 폭격을 시작해 12시 24분까지 26분동안 400~900㎏에 달하는 폭탄 960t을 쏟아부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최대 규모의 폭격이었다. 다부동에서 벌어진 당시의 전쟁 양상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날의 폭격은 왜관 북방인 구미 일대의 가로 5.6㎞, 세로 12㎞ 지역에 집중됐다. 우리로서는 적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 폭격 효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는 점에서 폭격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으리라는 짐작만 했을 뿐이다.
- 일본 오키나와와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 폭격기들이 1950년 8월 구미 일대에 융단폭격을 하는 모습.
따라서 북한군 병력을 향한 폭격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전선에 있는 북한군을 지원하는 후방의 물자 보급기지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는 나중에 포로로 잡혔던 북한군의 증언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왜관 인근 약목 일대 북한군 3사단과 15사단 예비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지원 포병과 공병, 전차, 탄약, 보급품 등이 미군의 융단폭격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얘기다. 북한군 내부를 잇는 통신선 등도 모두 폭격으로 끊겼다고 한다. 북한군은 이를 ‘비밀’로 분류해 외부로 새나가는 것을 막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적은 코앞에 있었다. 다부동 일대 모든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적과 그를 막아 세우려는 아군의 끊임없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병은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모집, 끊임없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앞에서 적은 대로 그들의 희생은 아주 컸다. 당시 전선의 사병들은 새로 모집해 전선에 당도한 신병들을 ‘고문관’으로 불렀다.
노무자들의 막심한 희생
신병들은 대부분 총도 제대로 다룰 줄 몰랐고 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행동이 굼뜰 수밖에 없었고, 숙지하고 있는 사항이 많지 않으니 자연스레 겁도 많았다. 그런 신병들을 ‘고문관’이라고 부르면서 비하했지만, 사실은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호칭이기도 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품고서도 결국 전선으로 올라가 목숨을 바쳤다.
- 6.25 최후의 방어선이자 최대 격전지였던 낙동강 일대. 지난 2000년 4월, 6.25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된 전사자 유해발굴작업 도중 다부동 현장에서 발견된 군화 조각.
당시 이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다부동은 지키기 어려웠다. 지게에다 짐을 잔뜩 짊어진 노무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선의 장병들에게 짐을 날라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희생은 나날이 커져갔다. 당시 전선사령관이었던 나는 전선 상황에 매달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잘 몰랐다.
나중에 실시한 피해조사 등을 보면 노무자들은 신병을 포함한 일반 전선의 장병 못지않은 희생을 감수했다. 주먹밥과 탄약을 실어 날랐던 그들은 밤중에 고지를 향하다 적의 사격에 무수히 희생됐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항전이었다. 장병과 더불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일반인들의 처절한 희생이었다.
전략적인 의도에서 벌인 폭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세는 집요했다. 전선의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전선을 모두 이끌고 있던 미 8군 사령부는 다부동 일대의 상황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8군 사령부는 융단폭격에 이어 별도의 조치를 취했다.
다부동 일대에서 분전(奮戰)하는 국군 1사단의 뒤를 받쳐줘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듯하다. 사실, 당시 국군 1사단 전력으로서는 전선을 지탱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군 1개 연대가 적 1개 사단 병력과 싸워야 했던 수적인 열세 때문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적을 압도할 만한 화력을 갖추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마산으로 급히 이동해 북한군 6사단 등 2개 사단의 공로를 좌절시켰던 미 25사단의 1개 연대를 빼내 우리 1사단의 우전방을 막도록 했다. 27연대장은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었다. 그는 처음 다부동에 왔을 때 계급이 중령이었으나, 도착과 동시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미남 연대장 마이켈리스
그는 매우 잘 생긴 미군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으나 얼굴 생김새가 웬만한 영화배우 못지않았다. 나는 미 8군 사령부로부터 “27연대가 다부동 방어를 위해 그곳으로 이동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몰랐는데, 그는 나중에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에 이어 제 4대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는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참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막강한 전투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 101공수사단에서였다.
- 존 마이켈리스 미 25사단 27연대장. 다부동 초입의 길목을 막기 위해 미 8군이 1950년 8월 그를 국군 1사단 방어지역으로 급파했다. 미남의 장교로, 나중에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라이프'에 실린 사진.
그는 동명초등학교의 사령부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와 함께 상주로부터 다부동에 이르는 국도의 북쪽 길목인 천평동 초입으로 갔다. 27연대가 방어를 맡은 지역이었다. 그는 내가 보는 가운데 신속히 작전 배치에 들어갔다. 천평동은 작은 협곡의 지형이었다. 약 1㎞ 남짓의 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좌우 양쪽으로는 유학산 등의 산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부대 27연대는 협곡 가운데에 해당하는 천평동 계곡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북한군은 당시 국군이 지니지 못했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지를 두고 벌이는 전투와는 다른 양상의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천평동이었다.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몰려올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미 8군이 27연대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경험 많은 미군 장교답게 천평동 계곡을 둘로 나눠 좌우 양쪽에 1개 대대씩을 배치했다. 맨 앞에는 지뢰를 매설했고, 중간에는 전차를 배치했다. 각 대대장에게는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지침만을 전달했다. 부대의 방어선을 정확하게 그었으며, 각 장교에게는 임무와 위치를 거듭 확인했다.
나는 그 뒤를 줄곧 따라다녔다. 그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약 두 시간이 걸렸다. 그 짧은 시간에 연대급 전투 병력을 모두 배치했다. 말이 연대였지, 사실 그가 이끌고 온 부대는 여단 규모였다. 다부동 방어에 총력으로 나선 미 8군 사령관이 그에게 증강된 여단 병력을 이끌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그가 끌고 왔던 병력이 우선 궁금했다. 마이켈리스는 내 의중을 알겠다는 듯이 “전차 1개 중대, 155㎜ 곡사포 6문, 105㎜ 18문에 공지(空地) 연락장교도 데리고 왔다”고 시원스레 대답해줬다. 그는 아울러 “포탄 사용량에도 제한이 없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면서 씩 웃어 보였다.
경북 화령장에서 개전 이래 처음 한미 합동작전이 벌어졌었다. 그보다 절박한 상황에서 다시 국군과 미군의 합동작전이 벌어질 태세였다. 마이켈리스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그러나 한국군과의 합동작전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그에게선 세계 최강 미군의 자존심과 함께 국군에 대한 일종의 불신감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밤중에 우리 사령부를 덮친 북한군, 전멸 위기에서 구해준 '밥심'
하수구에 CP차린 미 연대장
마이켈리스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스승과 제자로서가 아니라, 전선에서 경험이 많은 지휘관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그는 내게 많이 보여줬다. 그는 부대 배치를 끝낸 뒤 연대 지휘소를 의외의 곳에 마련했다. 하수구였다. 양쪽으로는 포대를 두텁게 쌓은, 물이 흘러 지나가도록 만든 하수구였다.
아울러 그는 전선에서 병력을 배치할 때도 직접 통신병 한 사람만 대동한 채 총탄이 날아다니는 곳을 정찰했다. 그와 함께 작전을 펼치고 있던 1사단 11연대 병력은 연대장이 통신병 하나만을 대동한 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선을 시찰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이틀 뒤에는 폴 프리먼 대령이 이끄는 미 2사단 23연대가 전선에 왔다. 역시 다부동을 튼튼하게 막아두려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결단이었다. 프리먼 대령은 이듬해 중공군 참전으로 벌어지는 1·4 후퇴 당시 경기도 가평 인근 지평리라는 곳에서 프랑스 대대와 함께 중공군 5개 사단 병력을 물리쳤던 전투로 이름을 크게 높인 인물이다.
23연대는 마이켈리스 대령의 27연대 후방을 받쳐주면서 서쪽으로 우회해 대구로 진입할 지 모를 북한군 병력을 대구 진입로에서 막아 세우기 위해 보낸 병력이었다. 어쨌든 북한군의 발악적인 공세에 대응코자 미 8군은 여러 후속 조치를 취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어 국군 8사단 1개 연대도 1사단 방어지역으로 보낸다는 통보가 왔다. 다부동에서 동쪽으로 나있는 가산(架山)산성 쪽에 적군 병력이 모여들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다부동을 통해 대구로 진입하는 공로가 막히자 북한군 일부 병력이 동쪽으로 나있는 가산산성을 노렸던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은 미 25사단 27연대, 미 2사단 23연대, 국군 8사단 10연대의 병력을 증원받은 형국이었다.
- 다부동 입구 천평동 다리에서 정찰 나갔던 전차를 보고 있는 미 27연대 병력. 다리 옆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다.
가산산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다부동을 뚫기 어려워 북한군이 그곳을 향하고 있다는 정보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곳은 적이 박격포 등으로 대구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증원군이 필요했다. 1사단 병력으로서는 가산산성을 방어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후 5시 무렵, 저 멀리 선발대가 보였다.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도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앞에는 대대장 한 명이 대열을 이끌고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1948년 정보국장 시절 데리고 있던 김순기 소령이었다.
‘밥부터 먹여야 잘 싸운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순기야! 밥은 먹었냐!”라고 소리쳤다. 멀리서 내 얼굴을 알아본 그는 단걸음에 달려와서는 “사단장님, 아이고…, 먼길 오느라 아직까지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천에서 하루종일 시간에 쫓기며 굶으면서 행군을 했던 모양이다. 이어 도착하는 장병들도 피곤과 갈증, 배고픔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이들은 사실 곧바로 전선을 향해 행군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가산산성의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배고픈 군인은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헤아렸다. 이들을 사단 사령부 운동장에 숙영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참모 한 사람이 “그래도 가산산성으로 먼저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우선 쉬도록 했다. 그 상태에서 전선에 올려 보낸다고 하더라도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으리라 봤기 때문이다. 나는 내친 김에 인근 마을에서 돼지 3마리를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 문형태 작전참모에게 “우선 배불리 먹고 쉬게 한 다음에 내일 아침 일찍 전선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사단사령부가 있던 동명초등학교 운동장은 갑자기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변했다. 고달픈 행군에 지쳤던 증원군 부대원들이 오랜만에 먹는 돼지고기와 식사로 들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본 뒤 사령부 안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이 늦어서야 나는 학교 운동장 뒤편에 있는 교사 숙직실로 가 잠이 들었다.
꿈결에서 들었을까. 요란한 총소리가 마구 울렸다. 이어 무언가 깨져서 땅에 흩뿌려지는 소리도 들렸다. 잠결에 듣는 소리여서 나는 그저 꿈으로 알았다.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숙직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를 깨웠다. 부관인 김판규 대위였다. 목소리가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사단장님, 사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적이 기습했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를 알 수 없었다. 사단사령부에 적이 당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상황을 짐작했다. 저들이 소규모 부대로 기습을 벌였다는 얘기였다.
-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매복한 미군 병사들.
숙직실에서 운동장으로 나가려면 교사(校舍)가 있는 건물을 거쳐야 했다. 중간에 복도가 길게 난 교실 앞을 지나는데, 사단 참모들 여럿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유리창이 거의 모두 깨진 상태였다. 기관총 탄알이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수류탄도 함께 날아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군화를 맨 상태에서 자는 버릇이 있다. 교범의 규정대로다. 그에 따르면 전시 중의 지휘관은 취침 시간에도 군화 끈을 매고 자야 했다. 나는 깨진 유리를 밟으면서 곧장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연병장에 숙영하고 있던 증원군 부대를 향해 소리쳤다. “순기야, 어서 나가라. 빨리 부대를 출동시켜. 적들이 앞에 있다!”
대구에 날아든 적의 포탄
김순기 소령은 다행히도 아주 기민하게 부대를 통솔했다. 일부는 곧장 개인화기를 지니고 나와 적이 노리고 있는 오른편 담장을 향했고, 일부는 정문을 빠져나가 적이 있는 곳으로 우회하면서 공격을 펼쳤다. 적은 곧 쫓겨 갔다. 김 소령의 일사불란한 지휘가 빛을 발했다.
적은 사단을 직접 노리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부동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지시대로 뚫리지 않았다. 발악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다부동을 지키던 국군 1사단이 쉽게 물러서지 않자 사단지휘부의 전멸을 노리고 들어온 기습이었다.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했다. 국군 1사단장인 나와 사단지휘부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사단사령부는 평소 1개 헌병 소대 병력이 지켰다. 적의 기습을 막아내기에는 화력이 여러 모로 떨어지는 병력이었다. 북한은 그 점을 노리고 야밤에 직접 사단사령부를 공격해 들어왔다.
사람은 전쟁 중이라도 먹어야 한다. 먹지 못하면 싸우지를 못한다. 배가 불러야만 적을 제대로 보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평소 나의 소신이다. 그에 따라 하룻밤을 먹이고 재운 김순기 소령 의 병력이 결국 사단의 전멸을 막을 수 있었다. 당장 그들을 전선으로 올려 보내자는 참모의 제안을 따랐다면 국군 1사단은 적의 기습에 당했을 수도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단사령부의 자체 경계 능력을 높이기로 했다. 사단에서 2개 소대를 끌어와 사령부 경계를 맡겼다.
경계는 그만큼 중요하다. 적이 다가서는 동향을 모를 바에는 경계라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 그에 빈틈이 생기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놓이기 십상이다. 그날 밤에 있었던 적의 기습은 경계의 중요함을 새삼 일깨웠다.
간발의 차로 위기를 넘겼지만 여전히 첩첩산중에 놓인 심정이었다. 유학산에서는 아직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아군의 희생이 늘어만 갔다. 15연대 방면의 전선도 적과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치르면서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가산산성을 차지하려는 적의 움직임도 부쩍 활발해지고 있었다. 적은 이미 가산산성에 들어서 있었다.
그곳은 대구를 직접 포격할 수 있는 위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대구에서는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었는데, 대구역에 떨어진 북한군의 포탄은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다. 대구는 금세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구역에 적 포탄 세례…이승만은 맥아더에 맞서 "대구 사수!"
피난민으로 북적였던 대구
대구는 당시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구는 결코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될 곳이었다.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대구를 빼앗긴다면 적에게 대한민국의 명운을 넘겨줬다고 해도 좋을 만큼 대구는 중요했다.
적은 낙동강을 넘어 대구로 진입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개전 이래 낙동강까지 진출하면서 소모한 자신의 병력과 물자, 화력 등을 대구를 점령한 뒤 모두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구는 우리 대한민국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을 지휘하는 미 8군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적에게 대구를 내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따라서 그와 도쿄에 머물고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은 1950년 8월에 접어들면서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뜻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한다.
미군들이 대구의 외곽지역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아울러 그들은 밀양과 울산을 잇는 마지막 방어선도 설정했다. 미 8군 공병참모였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만든 ‘데이비드슨(Davidson) 라인’이었다. 적이 대구를 차지하면 워커는 이 방어라인을 한동안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기도록 하고, 한반도에 전개했던 미군을 일본 등으로 철수시킬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였다.
피란민들은 계속 대구와 부산으로 몰려드는 상황이기도 했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북한군 치하(治下)의 고난을 피해 강을 넘으려는 피란민이 대거 몰리면서 이들을 통제하려는 미군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움직이려는 피란민은 강을 넘어와도 얼마든지 좋았다. 그러나 피란민의 통행이 아군의 작전을 저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오열(五列)’의 문제였다. 유럽의 전쟁에서 적과 내통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면서 자리를 잡았던 이 단어의 주인공들은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도 아군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1950년 여름, 미군 헌병이 낙동강을 넘어 오는 피란민들을 검색하는 모습.
피란민의 틈에 끼어들어 강을 건너는 위장(僞裝) 북한군, 또는 그를 추종하는 빨치산, 그들로부터 사주를 받은 민간인 등이 많았다. 변장한 채 아군지역으로 넘어와 불시에 기습을 벌이는 상황이 생겼고, 미군 등은 그에 따라 커다란 피해를 입거나 작전에 큰 차질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통제하는 일이 아주 큰 문제였다.
자칫 상황이 악화되면 대한민국이 임시 수도를 다시 부산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았고, 피란민들이 자꾸 몰려들면서 대구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전쟁 전에 인구 30만 명이었던 대구에는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가 불붙고 있던 무렵에는 70만 명의 인구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8월 18일 대구 북방의 가산산성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박격포를 쐈다. 대구를 직접 노린 포격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8일 새벽에 북한군이 가산산성에서 쏜 포탄 일곱 발이 대구역에 떨어지고 말았다. 대구는 금세 요동쳤다. 우선은 역무원 1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7명이 부상했다.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적의 포탄은 기름을 가득 머금은 볏짚에 그어댄 성냥불과 같았다. 대구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로써 임시 수도는 부산으로 옮겨가는 게 정해졌고, 피란령이 발동했다. 시민들 일부는 대구에 북한군이 진입한 것으로 착각까지 했다고 한다. 삽시간에 불어난 피란대열로 인해 군 부대 이동도 불가능할 정도로 대구는 혼돈의 도가니로 깊이 빠져들었다.
당시 내무장관은 조병옥(趙炳玉·1894~1960) 박사였다. 그는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한민당과 결별하면서 이 대통령과 협력 관계를 끊었다가 전쟁이 터진 뒤인 7월 15일 다시 정부의 요직인 내무장관을 맡고 있었다. 조병옥 박사는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등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해외 유학파 경력을 지닌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연희전문을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해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최고의 지식수준을 갖췄던 데다가 선이 굵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력한 리더 중 한 사람이었다.
1959년 10월 10일 조병옥(왼쪽)과 장면. 유석(維石) 조병옥 (趙炳玉ㆍ1894~1960) 박사는 초대 경무국장(경찰총수)을 지냈다.
대구역 앞에 적의 포탄이 떨어져 모든 거리가 피란대열로 엉망이 돼가고 있을 무렵, 그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지프에 올라탄 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우리는 절대 대구를 적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의 대구 사수 의지를 전파하고 다녔다.
급기야 피란민이 죄다 몰려 있던 대구역에 나타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정부의 대구 사수 의지를 연설하면서 분위기를 안정시켰다. 대구가 적의 포탄이 날아들어 금세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들었음에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조병옥 박사의 공이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조 박사는 7월 15일 내무장관에 취임한 뒤 많은 일을 수행했다. 그가 내무장관에 올라 먼저 살핀 점은 경찰병력이었다.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를 도와 후방에서 상황을 관리해줘야 했던 경찰병력이 북한군 남침과 국군의 급한 후퇴로 많이 줄어있었다.
약 2만5000여 명의 경찰 병력은 조 박사가 내무장관으로 취임할 때는 1만3000명 정도로 감소한 상태였다. 지닌 무기도 칼빈 소총 6000정 정도가 고작이었다. 후방의 치안을 책임져야 할 내무장관으로서 조 박사는 당장에 경찰병력 증원과 무기 확보에 나섰다고 했다.
고급 수준의 지식인이었고, 아울러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영어에도 능통한 조 박사였다. 그는 자신의 그런 장점을 충분히 살렸다. 경찰병력을 6만5000명으로 늘릴 계획을 잡은 뒤 대구와 부산에 경찰관 훈련소를 만들어 집중적으로 경찰요원들을 길러냈고, 미군과 탁월한 교섭을 벌여 무기를 크게 늘렸다.
나중에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조 박사의 활약에 힘입어 경찰 병력은 1950년 말 4만8000여 명으로 늘었고, 미 8군 참모장 앨런(Leven C. Allen) 소장과 협의해 미군으로부터 칼빈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을 지원받아 무기를 7만 여 점으로까지 증강했다.
아울러 조 박사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요청해 한국의 경찰을 미군부대에 배속토록 했다. 이는 워싱턴 미 행정부의 승인을 얻어 곧 현실화했다. 한국 경찰이 미군을 따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계기였다. 이들 경찰은 미군 부대의 전선에 진출해 낙동강을 넘어서는 피란민 중에 섞여 들어온 ‘오열(五列)’을 색출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한국 경찰의 성가를 높일 수 있었다.
전선에서는 처참한 아군의 희생이 매일 벌어졌다. 솜털이 얼굴에 나있는 신병과 학도병도 기꺼이 고지에 올라 적과 싸우다가 세상을 등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 많은 노무자들도 전선의 병사들에게 밥과 탄약을 날라주다 목숨을 버렸다. 후방에서도 조병옥 박사처럼 분투를 보이는 대한민국 사람도 아주 많았다. 그런 피어린 노력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위기의 깊은 그늘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면서 들은 풍문으로는 믿고 싶지 않은 내용도 적지 않았다. 일부 군인들의 탈선도 있었다. 그보다는 부산에서 밀항을 준비하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자극적이었다. 대한민국의 패망을 미리 짐작해 제주도와 일본으로 먼저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부산을 빠져나가 일본으로 가는 밀항은 당시에 ‘돼지몰이’로 불렸다고 한다. 밀항 주선 비용은 1인당 50만원에서 시작했다가 100만~150만원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선박 임대료는 5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호가’했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정부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위기에서 먼저 제 목숨만 건지려고 들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프 운전병 팔뚝 관통상…"하느님 도와주소서" 간절한 나의 기도
"당신들 뭐 하는 군대냐", 전선 무너지자 미8군의 거센 질책
중국말 하는 미 연대장
앞서 소개한 존 마이켈리스 미 25사단 27연대장에 이어 그 후방을 받쳐주는 미군 부대로 2사단 23연대가 추가로 다부동 전선에 도착했다. 23연대의 연대장 폴 플리먼 대령은 이듬해 1·4 후퇴로 한강 이남으로 아군이 밀렸을 무렵 지평리라는 곳에서 중공군 5개 사단 6개 연대와 맞서 싸워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었던 이른바 ‘지평리 전투’의 영웅이었다.
마이켈리스의 27연대에 이어 23연대가 도착하던 무렵이었다. 프리먼 대령이 우리 1사단 사령부로 나를 찾아왔다. 인상이 좋아 보였던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중국어로 “당신 중국말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내 이력을 그가 알아본 뒤 건넨 중국말이었다.
나도 중국어를 사용해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프리먼은 “그렇다면 우리 중국어로 이야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상황이 조금 우스워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영어도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러자 프리먼은 활짝 웃으면서 “왜 진작 영어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화답했다.
자라온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군대가 전우로서 함께 전선에 나서는 상황이었다. 본격적인 한국과 미국의 연합작전을 알리는 장면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화력과 전투경험, 물자보급 능력 등이 모두 부러웠다. 당시의 국군 수준은 미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낮았다. 그런 양국군의 연합작전은 그저 함께 서서 싸운다는 열정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어 보였다.
프리먼은 중국에 유학한 경험이 있었다. 1931년부터 4년 동안 중국 베이징(北京)에 머물면서 익힌 중국어가 아주 돋보였다. 그는 함께 싸울 한국군 지휘관과의 소통을 먼저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이력을 살펴 만주군관 출신이라는 점을 알고서는 중국어를 써서라도 소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 한국군 지휘관 중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까닭이다.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공세에 맞서는 국군과 미군.
다른 나라, 다른 부대
우리 1사단은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15연대, 유학산 일대의 12연대, 다부동 초입에서 다시 가산산성 방향으로 11연대가 진을 펼친 채 북한의 막바지 공세에 맞서 분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북은 미군, 동서는 국군이 막아서면서 대구를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형국이었다.
27연대의 마이켈리스 대령은 아주 노련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철저하게 현장을 살피면서 냉철하게 부대를 이끌었다. 내가 전쟁 중에 만났던 전형적인 앵글로색슨 계통의 지휘관이었다. 상견례를 할 때는 부드러웠지만 현장을 돌아보면서 부대를 배치할 때는 매우 냉정했다.
모든 전선은 견부(肩部·어깨부위)가 중요하다. 어깨와 어깨가 서로 잘 맞물려야 한다. 군사용어로는 전투 지경선(地境線)의 문제다. 함께 적을 맞아 싸우는 군대가 서로 경계를 형성하는 이 지경선은 뚫리기가 가장 쉬운 부분이다. 제대로 어깨를 잇지 않으면 적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아군의 후방을 노릴 수 있다.
따라서 지경선 옆에 선 아군 부대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면 그 옆의 부대는 곧장 커다란 위기를 맞는다. 적은 제방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와 사나운 기세로 돌변하는 물길처럼 변해 아군의 측면과 후방은 금세 요동을 친다. 공황에 빠진 군대는 곧 무너지면서 참혹한 결과를 빚고 만다.
미군은 그런 점에서 당시의 국군을 잘 믿지 못했다. 국군의 전투력이 우선 크게 떨어지는 상태였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켈리스 대령과 프리먼 연대장 둘 모두는 나와 부드럽게 상견례를 했으나 그런 염려를 불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이켈리스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차와 포병 등 막강한 화력을 지닌 제 부대 병력을 배치하면서 철저하게 무엇인가를 따지는 눈치였다.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미군이 어떻게 부대를 배치하는지 관찰하던 내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미군 전차의 야간 포격..
프리먼 대령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오죽하면 내 이력을 먼저 살핀 뒤 영어로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고 판단해 먼저 중국어로 말을 건넸을까. 함께 싸워야 하는 한국군의 지휘관과 그렇게라도 소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전선에 나서는 군대에게는 함께 어깨를 댄 채 싸워야 하는 옆 부대의 역량이 매우 중요했다.
적군의 공세는 아주 집요하게 벌어졌다. 처참한 인명의 희생이 날로 늘어갔다. 그럼에도 우리 국군은 고지에서 적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8월 21일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평동에서 다부동과 대구로 이어지는 축선의 간선 도로는 앞에서 소개한 대로 미 27연대와 23연대가 지켰다. 동서로는 우리 11연대가 천평동 계곡 북쪽 초입의 양쪽 산에 포진해 있었다.
“우리도 철수한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천평동 계곡 초입 지역 돌파에 안간힘을 기울였으나 마이켈리스의 27연대에 의해 번번이 꺾이고 말았다. 계곡 양쪽에 포진한 1사단 11연대도 분전을 거듭하며 고지를 확보하는 등 나름대로 선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내가 있던 1사단 사령부에 전화가 걸려왔다. 대구의 미 8군 사령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부관한테서 건네받은 전화통 안에서는 대뜸 호통이 튀어 나왔다. “사령관, 지금 당신들 뭐 하고 있는 거야! 한국군이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당시 미 8군의 작전 참모 중 한 명이었을 그 미군은 “당신들이 이러면 우리는 철수한다. 계곡에 적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렇게 한국군이 물러난다면 미군 또한 그냥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이어 “천평동 계곡 좌측방 고지가 뚫렸다. 한국군이 물러나고 말았다. 한국군에 실망했다. 27연대가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철수한다’고 통보해왔다”라고 말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붙잡힌 북한군 포로가 미군 지프에 앉아 있는 모습.
나는 지프에 올라타고 곧장 천평동 계곡 초입으로 달렸다. 11연대 1대대가 방어하는 곳이 문제가 생겼는데,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산길을 올라가야 했다. 산자락 근처에 도달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파편이 운전병의 팔을 뚫었던 모양이다. 지프를 몰던 운전병이 갑자기 “억!”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운전을 멈췄다.
운전병은 제 팔뚝을 감싸 쥐고 있었다. 선혈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를 살필 겨를도 없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1대대 방어지역을 향해 달려갔다. 몇 백 미터의 평지를 달렸고, 이어 나타난 산길을 타고 올랐다. 마음속으로는 이제 닥친 가장 큰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라는 생각만 했다.
뭔가에 좀체 기대지 않는 게 내 성정(性情)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심성도 내겐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산길을 뛰어오르다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에 먼저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내가 7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어린 삼남매를 꿋꿋하게 돌보신 어머니였다. 마음은 어느새 어머니의 그런 굳건함을 찾고 있었다.
이어 그전까지는 제대로 다니지 않던 교회도 떠올렸다. 그리고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이번 위기를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마음속 기도였다. 그때는 그런 생각만이 들었고, 그저 그런 기도만이 떠올랐다. 저 멀리에 11연대 1대대가 보였다. 고지에서 밑으로 무질서하게 밀려 내려오는 부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계속 그쪽으로 달려 올라갔다. 점점 다가서면서 부하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이어 후퇴의 선두에 선 1대대장 김재명 소령이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를 불렀다.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사령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