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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의병의 날]몽골군이 침략하자 관리,양반 ,군인도 도망, 의병장 김윤후는 노비문서 불태워

문화재방송 2019. 6. 1. 01:19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지정한 법정기념일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위기였던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가 최초 의병을 일으킨 날을 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참고. 곽재우가 음력 4월 22일에 최초 의병을 일으켰고,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 6월 1일임)

                              고려시대 몽골군이 침략하자 관리, 양반, 부자, 심지어 군사들까지 도망가고,

                        처인성과 충주성에는 천민들만 남게 되자,  승려 의병장 김윤후는

                          천민들의 사기들 북돋기 위해 노비 문서를 불태우기도 했다.


처인성전투의 승리에 이어 또다시 충주성전투의 승리를 거둔 김윤후는

그 높은 공이 인정되어 동북면병마사로 승진하였으며,

그후 추밀원부사를 거쳐서 수사공 우복야까지 승진했다고 한다.

수사공 우복야는 정2품의 고위관직으로서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최고위직 벼슬이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위치:경기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 마곡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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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정복한 몽골군은 고려가 항복하지 않자 1232황제의 동생 살리타이를 선발로 강화도 대안의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살리타이는 일부병력만으로 처인성으로 남하하여 처인성

공략에 나섰다. 



경기도 용인시의 처인성은 자그마한 토성이었다. 거기다 처인성이 위치한 지역은 바로 천민들의 거주지,

처인부곡(處仁部曲)이었고 성안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규군이 아닌 용인 일대 수령들이 이동시킨

약간의 병력과 백성들 그리고 김윤후를 비롯한 승려 100여명과 다대수가 부곡민(천민)들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선종 때 한림원에 발탁된 정문(鄭文)이 외조부가 처인부곡 출신이어서 간관과

같은 요직에 임명할 수 없다는 대간의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부곡제 출신들이 일반 군현 출신보다

관직 진출에 신분적 제한을 받고 있는 천민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살리타이가 직접 인솔한 500여 기(騎)가 처인성 동북방의 완장리, 매룡리 일대에 포진하여 처인성을

포위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고려 고종19년(1232) 12월 16일 용인으로부터 처인성 동북방 50리 지점에 도착한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는

처인성 동북방 인근 완장리, 매룡이, 화동 등지에 병력을 3개 대로 분산 배치하여 처인성에 대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고, 처인성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몸소 5,6기의 정찰기병만 거느리고 경장(輕裝)으로

처인성 동문을 향하여 접근하였다. 

 한편 승장 김윤후는 처인성 동문 밖 300m 지점의 언덕(속칭 살장터, 殺將址)에 저격병 수십 명을 미리

매복시켜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살리타이 일행이 이 지점에 이르자 매복하고 있던 고려군 저격병들은

몽고군의 주장 살리타이와 수행 기병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모두 사살하고, 그 목을 베었다. 



 몽골군 진영에서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주장 살리타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일제히 처인성 동문으로

돌진하였으나 성을 방어하던 승병들이 성 밖으로 달려나와 역공하므로서 몽골군과 고려군은 처절한

혼전이 벌어졌는데 몽골군은 주장을 구하기는커녕 한차례의 격전 끝에 태반이 사상되고, 마필과

병기를 빼앗기고 그들의 본진으로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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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려군은 승세를 틈타서 몽골군 본진으로 반격을 가하여 몽고군을 대파시켰다.

  주장 살리타이가 고려군에게 사살되자 몽골군 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그 결과

몽골군은 더 이상 고려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용인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처인성 승첩의 의의>
 
 
승장 김윤후의 기계(奇計)에 의하여 살리타이를 사살한 처인성 승첩은 여-몽항쟁이 발발한 이래

고려군측에서 거둔 일방적인 최대의 승리였다. 따라서 고려군의 처인성 승첩은 전쟁 발발 이래 시종

고려군이 열세로 몰리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 살리타이가 전사한 처인성전투는 몽골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의(戰意) 를

상실하게 하여 고려로부터 서둘러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몽골군은 고려군의 반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수가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대소 규모로 무리 지어 서북변

국경으로 분산 도주하였다. 몽골군은 이미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조직적인 퇴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사리타이를 사살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승장 김윤후를 표창하여 상장군의 직위를

내렸으나 김윤후는 다음과 같이 완곡히 사양하였다.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고려사」 권103, 김윤후열전




몽골의 후계 문제가 해결되고 귀이크칸의 뒤를 이어 몽케 칸이 즉위하자 아니나 다를까 몽골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고려 침공을 감행한다.


1252년 고종이 몽골 측에 이현을 보내 6월경에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이라 약속했지만 당시 최우의 뒤를 이어

집권한 무신정권 최항의 반대로 약속이 결렬되자 1253년 몽케 칸은 예구를 사령관으로 하고 4차 침공 때

동원됐던 아모간과 홍복원 등이 이끄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예구의 몽골군은 더욱 속전속결로 전쟁을 수행해 강화도 정부와 대치하기 위해 방호별감 권세후가 방어하던

서해도 양산성을 함락시키고 서해안 내륙의 북부 서해도(고려 5도 양계 중 북계 아래에 위치함)로 진격한다.

 

또한 동시에 동해안 부근의 동계를 통해 진군하면서 이전처럼 오로지 수도 개경만을 노리고 일면 초토화

전술로 내려오던 작전이 아닌 서해도와 동계, 양면 침략 전술을 써 고려 방어선을 확실하게 밀어버리면서

남하한다.


몽골군은 계속 남하해 동주(철원), 춘주(춘천), 양근(양주), 양주(양양) 등을 공격해 유린하고 충청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를 공격한다.



               충주성


충주는 몽골군이 1차 침공 때부터 죽 거쳐가던 제일 중요한 교통로이자 몽골군이 삼남지역으로 남하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가야 하던 남부의 최고 전략적 요충지로 이전부터도 몽골군과의 격전이 빈번하던

지역이었다.

아모간은 충주를 함락시키고자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몽골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충주성 내부는 아주 난장판이었는데 우선 충주성에서 고려군과 백성들을

지휘해야 하는 충주성의 수령들과 재력 있는 별초(마을단위의 무사 계층), 양반들은 예전에 몽골군이

충주성에 침입했을 때처럼 몽골군이 충주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집안의 귀중품과 가구들을

지고 진작에 도망간 상태였기에 당시 충주성엔 처인성 전투의 영웅인 방호별감()김윤후가 충주성

수비를 맡고 있었고 성안에는 도망갈 수단과 돈을 구할 수도 없는 노비들과 하급별초, 백성들만이 남아 방어에

임하여 몽골군의 거센 공세를 막아내기도 벅찬 와중에 설상가상 식량 또한 고갈돼 상황이 악화돼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의 고려 최고 전쟁영웅다운 결단력과 리더십을 보여준다.



 

충주성에 남은 모두가 낙심해있던 와중에 김윤후는 관청에 보관돼있던 충주성 소속 관노들의 문서와

장부를 모두 가져와 노비들과 백성들을 집합시키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누구든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이기면 귀천에 상관없이 벼슬과 상을 주겠다!'라며 노비문서를 모조리 불태우고 성안의 귀중품과

몽골군에게 노획한 소와 가축들을 나누고 전리품을 뿌리며 충주성 주민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몽골군은 곧이어 충주성을 향해 대공세를 펼쳤고 기꺼이 목숨을 바칠 동기가 생긴 충주성의 주민들은

김윤후의 지휘 아래 혼신의 힘으로 몽골군과 맞서싸워 군인과 관리들도 없는 상황에서 70일 동안이나

몽골군을 막아내는 성과를 올린다.


충주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몽골군은 경상도,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하지 못하고 충주에서 군대가
정체되버리는 바람에 전세가 몽골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이것에 대한 책임으로 충주성 전투를
담당했던 몽골군 지휘부가 중앙의 명령으로 인해 집단으로 해임되버리는 일이 벌어지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남부의 몽골군들은 하나둘씩 철수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강화도 정부도 몽골군에게
화의를 요청하며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인질로 보내 철수를 주저하던 북부지역의 몽골군까지 모두
철수해 몽골군이 완전히 고려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짧고 굵었던 몽골의 5차 침공도 끝이 났다.

충주성은 몽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포상으로 국원경으로 승격했다고 한다.

김윤후가 싸웠던 두 지역이 모두 승격이 이뤄졌는데,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충주목은

국원경으로 둘 다 승격이 이뤄진 것이다.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

김윤후의 첫 승전지인 처인성. 이곳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대몽항쟁의 치열함을 증명하듯 화살촉과 칼이 발견되었는데,

고려시대 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매우 드문 발견이다.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은 현재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고려도검을 통해 처인성 전투의 흔적을 취재했다.


▶다인철소 - 고려시대의 포항제철

김윤후의 두 번째 승전지인 충주, 이곳에서 용광로와 숯가마, 그리고 철을 만드는과정에서 나오는

슬래그(강재, Slag)가 다량 발견됐다. 충주 야철 유적 지표 조사에 의하면 총 41곳의 야철지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35곳이 다인철소 지역이다. 다인철소는 충주시 이류면 일대의 대규모 수공업소로

금, 은, 동, 철이나 종이, 도자기와 같은 수공업생산물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고려시대 다인철소의 철물

주조기술은 질과 생산량에 있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국내 최대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다인철소는

오늘날의 포항제철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고려시대의 첨단 무기 제작소인

다인철소를 집중 취재했다.

블로그 대문/ 6월  6일  현충일 [顯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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