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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화보]국보 제205호 고구려비, 中 '동북공정' 비웃듯..中에서 또 발견

문화재방송 2013. 1. 21. 20:28

 

국보 제205호 고구려비 근경



 

왼쪽의 지도를 보면 다들 아시겠지만 중원고구려비는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에 위치해 있다.

충주시가지에서 탄금대를 지나쳐 탄금대교를 건너간다.

이 길은 중앙탑,중원고구려비,장미산성,보련산성등등으로
향하는 길이자 서울로 올로가는 길이기도 하다.

탄금대교를 건너 대략 10여분 강변 길을 따라 쭉 가고나면
주유소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중앙탑은 이 곳에서도
잘보인다.

우회전하면 중앙탑 및 충주 박물관으로 진입하게 된다.

중원고구려비는 우회전하여 가도 무방하나 삼거리에서
직진하는 편이 수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답사코스로 중앙탑을 거쳐        
중원 고구려비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
‘제위’·‘사자’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선돌부락 어귀에 서있던 돌기둥이 고구려비로 밝혀진것은 1979년 예성문화 연구회에 의해서이며
단국대학 학술조사단이 현지 조사하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국내,외에 현존하는 고구려비는
현 길림성 집안시 통구 에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 뿐인데 이비석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비 임으로 역사적 가치기 매우 크다.


오랜 세월의 풍화 작용이었을까? 회손된 부분이 너무 많아 전체 내용을 완전히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삼국시대의 역사를살필 수 있게하는 중요한 단서로 예서풍의 글씨를 4면에 모두 새긴
대략 400자의글씨가 적혀 있다.

주변은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과 육로 교통상 전략적 중요 지점으로 장미산성과 봉황리
마애불상군의 존재, 노은면에서 금동광배金銅光背가 출토되것으로 미루어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충주 지방을 점령한후 이 지역을 국원國原 이라 이름한뒤 남방진출의 거점으로 비를 세운것으로
보인다.


 

사진설명과 비문 내용설명
<前面>

五月中高麗大王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 桓]
奴主簿道德□□□安□□去□□到至 營□太子共□]
尙□上共看節賜太翟鄒□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
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 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 桓奴主簿□]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해석

5월에 고려대왕상왕공(高麗大王相王公)과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상(尙)…상공간노(上共看奴) 주부(主簿) 도덕(道德)'등이 …로 가서 궤영( 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상(尙)…상공간(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의 의복을 내리고 '겅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를 내렸다. 동이 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토내(寐錦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共)이] 고구려 국토내의 대위(大位)·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매금(東夷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를 내렸다.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와 주부 도덕(道德)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내의 주민을 모아서 …로 움직였다.


<左側面>

□□□中□□□□城不□□村舍□□□□□□□沙□]
□□□□□□□□班功□□□□□□□□節人□□□]
□□□□□□辛酉年□□□十□□□□□太王國土□]
□□□□□□□□□□□□□□□□□□□□□□□]
□□□□□□□□□上有□□酉□□□□東夷寐錦土]
□□□□□□方□桓□沙□斯色□□古鄒加共軍至于]
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해석

'… 중(中) … 성불(城不) … 촌사(村舍) … 사공(沙攻) … 절인(節人) … 신유년(辛酉年) … 십(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 상유(上有) … 유(酉) … 동이(東夷)' 매금의 영토 '… 방(方) … 환□사□사색(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右側面>

□公□□□□衆殘□□□□□□□□□不□□使□□□壬子□□伐□□□□□□□□□□□□□□□□□

<조선일보 보도>

'작은 광개토왕릉비' 中서 발견… "고고학 대사건"
   
  김기철 기자

입력 : 2013.01.17 03:01

지안 주민이 강가에서 발견해 신고… 세번째 고구려碑
학계 "자료 희귀한 5세기 고구려사 연구 획기적 단서"
'주몽이 나라를 세웠다' 등 도입부 광개토왕릉비와 같아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지방제도를
밝히는 계기가 됐다.
지안 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한국고대사학회 총무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현에서 광개토왕릉비의 축약판처럼 닮은꼴의 고구려 석비(石碑)가 발견됐다.
고구려비로는 414년(장수왕 3년)에 세운
광개토왕릉비와 역시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에
이어 세 번째다.

지안은 고구려의 초기 수도로 고분 등 고구려 유적이 밀집된 곳이다.

국내 역사학계는 "지안 고구려비 발견은 고고학 대사건"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 사회제도를 밝혀줄 귀중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선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5세기 고구려사의 베일을 벗기는 데 지안
고구려비가 획기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안 고구려비 어떻게 발견됐나

중국 국가문물국이 발행하는 소식지 '중국문물보(中國文物報)'는 지난 4일 발행한
잡지에서 작년 7월 29일 마셴현 주민이 마셴하(河) 강가에서 비석을 발견, 지안시
문물국에 신고했다고 소개했다.

마셴현은 1000기가 넘는 고구려 묘가 집중된 곳으로 이중 왕릉으로 알려진
천추묘(千秋墓), 서대묘(西大墓)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중국문물보'에 따르면 고구려비는 천추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456m,
서대묘는 서남쪽으로 1149m 떨어진 곳에서 출토됐다.

지안 고구려비는 고구려 역대 왕릉을 관리하는 내용을 담은 '수묘(守墓)비'로
보인다.

◇지안 碑의 내용은?

414년 장수왕 때 건립된 광개토왕릉비는 1880년대 일본이 비문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비문은 주몽의 건국 신화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왕의 세계(世系)에 이어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업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했고, 마지막으로 능을 지키는 사람인 '연호(烟戶)'
명단과 관리 규정이 기술돼 있다.

지안 고구려비는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을 축약한 것처럼 흡사하다. 비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일부 사라진 이 비엔 예서체로 글자 218자가 새겨져 있는데 판독
가능한 글자는 140자다.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는 첫 행은 광개토왕릉비의
시작 부분과 글자까지 똑같다. 이어 '○○○子河伯之孫'으로 '주몽이 하백(河伯·물의 신)
의 손자'라고 출신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왕릉비가 주몽을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라고 소개한 것과 비슷하다. 글자가 없어진 비 앞부분이
'천제의 아들'(天帝之子) 등 고구려의 천손(天孫)신화를 밝히는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이어 "'연호'를 두어 사시(四時) 제사를 지내게 했고" "부유한 자들이 수묘자를
사고팔았다" "비(碑)를 세워 연호 20명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
수묘자는 함부로 사고팔 수 없다"고 쓰여 있다.

화강암으로 세운 지안 고구려비는 높이 173㎝, 너비 60.5~66.6㎝, 두께 12.5㎝로
무게는 464.5㎏이다. 비문은 모두 10행으로 마지막 10행만 20자이고,
행마다 22자를 적었다. 1775자로 알려진 광개토왕릉비에 비해 8분의 1정도 분량이다.

 

"제2의 광개토대왕비 서체는 독특한 '고구려 예서체'"

동북아역사재단 고광의 박사 분석

고구려비는 지안박물관에 보관중인 것으로 알려져

최근 발견 사실이 공개돼 국내 학계를 놀라게 한 고구려비에 사용된 서체가 독특한 고구려 예서체라는 분석이 나왔다.

최근 고구려비가 발견된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향 마셴촌 현장을 돌아보고 온 동북아역사재단의 고광의 박사는 23일 "지안에서 단둥(丹東)으로 가는 구(舊)도로와 신(新)도로가 있는데 고구려비는 구도로와 신도로 중간 지점 서쪽 강변에서 발견됐다"면서 "고구려비가 발견된 마셴 지역은 고구려 무덤이 집중 분포된 곳"이라고 전했다.

고구려 전문가인 고 박사는 이날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이번에 발견된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비에 나와 있는 수묘(守墓) 제도의 시행 시점, 수묘 제도의 성격 등을 규명하는 것은 물론 고구려의 문화 예술적인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핵심 단서"라고 평가했다.

특히 "비석에 글자가 예서체로 적혀 있는데 이른바 중국 한(漢)대의 전형적인 예서체가 아니라 독특한 고구려 예서 형태를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서체와는 확연히 다른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와 많이 닮았으면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한대의 예서체와도 유사한 면이 있어서 고구려 서체의 발전 과정, 한중간 문자 교류 양상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게 고 박사의 설명이다.

비석의 형태, 비석의 건립 시점도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고 박사는 "이번에 발견된 고구려비는 석주형(사각기둥 모양)인 광개토대왕비, 충주 고구려비와 달리 비석의 전면과 후면을 평평하게 갈아서 만든 판상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에 판상형 비석이 등장하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화시킨 결과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비석이 광개토대왕대에 세워졌는지, 그 아들 장수왕대에 세워졌는지에 따라 수묘 제도 시행 시점 등이 달라질 것이라고 고 박사는 말했다.

그는 "이번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비석 뒷면에도 글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 만큼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비석이 공개돼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정확히 판독하는 일"이라면서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각국의 고구려 연구자들이 함께 글자를 판독해 연구를 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국 지안시 문물국이 고구려비 분석을 위해 '지안 고구려비 보호와 연구를 위한 영도 소조'라는 이름의 전문가 연구팀을 구성했으며 정식 보고서를 낼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지안 고구려비 보호와 연구를 위한 영도 소조'에는 겅톄화(耿鐵華) 중국 퉁화(通化)사범학원 교수, 쑨런제(孫仁杰) 지안 박물관 연구원 등 중국의 고구려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고구려비는 지안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측이 아직 실물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국내 학계도 중국 국가문물국이 발행하는 '중국문물보' 등이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고구려비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고대사학회는 비석 분석 회의를 준비 중이며 고구려발해학회는 다음 달 긴급 학술회의를 열 예정이다. 동북아역사재단도 중국 측에 공동 연구를 제안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인 이 고구려비는 지난해 7월29일 중국 지린성 지안시 마셴향 마셴촌에서 발견됐으며 '중국문물보'가 이달 초 발견 사실을 공개하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은 광개토대왕비, 충주 고구려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고구려비는 고구려 역대 왕릉을 관리하기 위해 세웠다는 수묘비(守墓碑) 관련 내용이 비석에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는데다 사시(四時)로 제사에 대비케 했다는 구절(四時祭祀) 등이 확인돼 고구려 사회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라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yunzhen@yna.com
 
 

中, '작은 광개토왕릉비' 연구에 고구려史 왜곡 동북공정 학자 투입

  • 베이징=안용현 특파원
  •  

    입력 : 2013.01.26 03:03 | 수정 : 2013.01.26 03:46

    현재 지안市 박물관에 있는 碑 역사 왜곡 근거로 삼을 가능성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작년 7월 발견된 ‘작은 광개토대왕비’의 탁본. 중국은 현재 지안시 박물관에 있는 이 고구려비에 대한 연구를 비공개로 진행하고 있다.
    중국이 최근 발견된 '작은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연구를 비공개로 진행하는 가운데 고구려사 왜곡 논란을 빚은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참여했던 학자들을 연구팀에 대거 투입한 것으로 25일 밝혀졌다.

    이에 따라 중국이 새 고구려비의 연구 결과를 고구려사(史)가 중국사에 포함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작년 7월 지린성 지안(集安)시에서 발견된 이 고구려비는 현재 지안시 박물관에 있다. 그러나 박물관은 '내부 인테리어'를 이유로 문을 닫은 상태이며 5월쯤 다시 문을 연다고 한다.

    베이징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 연구팀에 포함된 인사 중 웨이춘청(魏存成) 지린대 교수와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학원 교수는 동북공정에 참여했던 대표적 학자다. 모두 고구려사가 전공이다.

    겅 교수는 "고구려는 동북 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내용의 논문도 발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역 역사를 모두 자국화하려는 중국의 프로젝트로,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진행됐다.

    특히 국가문물국이 발행하는 중국문물보는 새 고구려비와 관련, "비석 형태가 동한(東漢) 시대 이래 널리 사용된 판상형"이라며 "이는 고구려와 중원의 문화적 연결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이 어떤 시각에서 이번 연구를 진행 중인지 시사하는 대목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이 끝나고 나서도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작년 6월 국가문물국은 만리장성의 범위를 서쪽으로 신장위구르자치구, 동쪽으로 지린·헤이룽장성까지 연장해 발표했었다.

    戊子냐 戊午냐… 한 자에 운명 걸린 지안(集安) 고구려비

  • 김한수 기자

     

     

    입력 : 2013.01.31 03:02

    '무자년'이면 고구려 最古, '무오년'이면 광개토왕비 이후

    '무자년(戊子年·388년)인가, 무오년(戊午年·418년)인가.'

    글자 한 자를 어떻게 판독하느냐에 지난해 7월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에서 발견된 '지안 고구려비'<사진>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고구려비로 인정받을지 여부가 갈리게 됐다.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이영호 경북대 교수)는 30일 오전 서울 한국외국어대에서 지안 고구려비에 대한 언론설명회를 열고 "이 비(碑)는 광개토대왕이 세운,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고구려비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학회 측이 이렇게 추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문 왼쪽에서 넷째 줄 10번째 '무(戊)' 다음의 글자를 '자(子)', 즉 '무자년'을 가리킨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전체 218자 가운데 140자를 판독했는데 문제의 글자는 마모돼 판독하지 못했다. 하지만 희미하게 남은 글자는 '자(子)' 혹은 '오(午)'자로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30년의 시간과 비를 세운 주체가 바뀔 수 있다. '무자'로 읽을 경우엔 광개토대왕(재위 391~412) 즉위 직전인 388년이 되고 '무오'로 읽을 경우엔 광개토대왕 사후인 418년이 된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고구려 비석인 광개토대왕비는 414년에 세워졌다.

    학회는 또 지안고구려비에 새겨진, 왕릉을 지키는 '수묘(守墓)'라는 제도에 대한 언급이 광개토대왕비의 관련 내용보다 훨씬 풍부하고 상세하다는 점을 들었다. 학회 총무이사인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광개토대왕비 내용과 비교 검토한 결과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았다"며 "광개토대왕이 부왕(父王) 고국양왕 때인 388년 제정한 율(律)에 입각해 즉위 후 세운 수묘비의 하나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학회의 분석이 중국 측이 인터넷에 공개한 탁본 사진을 근거로 판독한 결과라는 점. 실물과 탁본을 대조하며 작업한 중국 연구진도 판독하지 못한 글자를 사진만으로 정확히 맞힐 수 있느냐는 것. 이날 설명회에서도 이 학회 연구이사 윤용구 박사(인천도시공사)는 이 글자를 '오(午)'자로 판단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