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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화보]국보 제180호 '세한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귀양살이 최고 명작

문화재방송 2013. 2. 4. 00:02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인 추사고택은 추사의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고택은 80.5평으로 솟을 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옥이다. 


ㄱ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2간통의 안방, 건넌방이 있다. 이밖에도 추사 선생의 묘소와 증조부이신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 즉,  홍문이 있다. 또한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600미터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는데 백송은 중국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 나라에 몇 그루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예산의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1980년도에 줄기의 피해 부분을 외과 수술하여 치유하였고, 그 후부터는 철저하게 보호, 관리하고 있다.


故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유적정화사업을 1976년 9월 4일 착공하여 1977년 6월 27일 준공을 보았으며 1977년 9월 22일부터 충청남도 추사고택관리사무소를 설치하여 관리하여 오다가 1980년 1월 1일부터 예산군 추사고택관리사무소로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고택옆에 마련된 추사 기념관.

그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관도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다.

 

관람순서 : 추사묘 -> 추사고택 -> 잔디관장 -> 화순옹주 홍문 -> 백송

입장료 : 어른  (개인 500, 단체 300) 어린이 (개인 200, 단체 100)

유의사항 : 근처에 숙박시설 없음 (숙박시설 5km)

주차료 : 무료

 

위    치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홈페이지 : 예산군청  www.yesan.go.kr 
           예산문화원 
http://yesan.cult21.or.kr
 
관 리 청 : 예산군 공공시설관리사업소 추사고택 관리사무실 (041-330-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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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547-5호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영정(影幀)      
조선 후기의 서화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 종가에서 보관해 오고 있는 선생의 초상화이다. 김정희 선생은 순조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고증학과 금석학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말년에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이 초상화는 머리에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있으며,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전신상이다. 두 손은 소매 속에서 마주잡고 있어 보이지 않으며 두 발은 여덟 팔(八)자로 벌리고 발받침 위에 가지런히올려놓았다. 그림의 위쪽에는 “추사 김공상(秋史 金公像)”이란 그림의 주인공 이름과 영의정을 지낸 권곽인이 쓴 글이 있고,아래쪽에는 이한철이 철종 8년(1857) 베껴그린 그림임을 알려주는 문장이 남아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자화상(自畵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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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  

이 그림은 제주도(濟州道)에 유배(流配)온 지 5년이 지난 추사(秋史) 나이 59세(1844년) 때 그린 최고(最高)의 명작(名作)이자 우리나라 문인화(文人畵)의 최고봉(最高峰)으로 손꼽히는 그림이다.

당시 집권 세력(執權 勢力)이던 안동 김씨(安東 金氏)일파(一派)의 미움 때문에 이미 10년 전에 종결(終結)된 사건(事件)인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헌종(憲宗)6년(1840)부터 9년동안 제주도(濟州道)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처음엔 자주 찾아주던 제자(弟子)들의 방문(訪問)도 점차뜸해졌지만, 그래도 역관(譯官)이었던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 1804~1865)만큼은 귀양살이 4년째인 1843년에계복(桂馥)의『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槀)』를 북경(北京)에서 구해 보냈다.

이듬해에는또다시 하우경[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총 120권, 79책의 방대한『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내주자, 제자(弟子)의마음 씀씀이에 감동(感動)하여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작품(作品)이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지고 가고, 청나라의 쟁쟁한 학자와 문인 13명으로부터 그림에 대한 찬사의 글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세한도는 질 낮은 허름한 종이 세 장을 이어붙여 그린 것"이라며 "세한도에 쓰인 질 낮은 종이에는 쓸쓸하고 곤궁한 자신의 처지를 돋보이기 위한 김정희의 철저한 계산이 담겨져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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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藕船]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와 화제(畵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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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跋文)내용

 “거년에 〈만학〉·〈대운〉 두 책을 부쳐 왔고, 금년에는 또 〈우경문편〉을 부쳐 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고, 머나먼 천만리 밖에서 구입한 것이며, 여러 해 걸려서 얻은 것이요, 일시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같이 몸과 마음을 쏟아 얻은 것을 권력자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해외의 한 초췌하고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주기를 세상이 권력가에 추세하는 것과 같이 하니,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 진다’고 하였는데, ()도 역시 이 세상 사람으로 초연히 권력에 추세하는 테두리 밖을 떠나서 권력으로 나를 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세한 연후에야 송백의 후조를 알게 된다.’고 하였으니, 송백은 사철을 통해 시들지 않는 것이라면,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인데, 성인이 특히 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다. 지금 군이 나에게 대해 앞이라고 더한 것도 없고 뒤라고 덜한 바도 없으니, 세한 이전의 군은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군은 또한 성인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도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도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 전한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과 정당시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노인 씀. 

 

                                                                                                     <제주도의 추사관>

55세(1840년) 되던 해, 추사는 안동 김씨의 역모탄핵으로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조종혐의로 연루되어 죽음의 문턱에서, 오랜 친구 조인영의 상소로 죽음만은 면해 제주도로 9년 동안의 긴 유배길 을 떠난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절대고독과 정치가로서 품었던 높은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 9월 초, 고문(拷問)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제주 유배의 길에 오르면서 전북 전주를 들러 당대 서예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을 만난다.

호남 명필 71세의 노서예가였다. 창암은 추사를 위해 시를 하나 썼다.

 

〈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장차는 영원한 삶을 누릴지니.〉

 

추사는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영원한 삶이라는 무량수(無量壽) 단어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를 끝내고 오는 길에 다시 전주에 들러 창암(蒼巖)을 찾았을 때. 이때 창암은 이미

작고한 뒤였으므로, 추사는 그의 묘비에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李公三晩之墓)라는 비문을 남겨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藕船是賞 阮堂[우선에게 그려 줌. 완당] 화제(畵題)

개인(個人)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크기 23.7×70.2㎝의 이 그림은 선비의 지조(志操)와 의리(義理)를 상징적(象徵的)으로표현하고 있어 추사(秋史)의 회화관(繪畵觀)이 잘 드러난 작품(作品)이며, 그림 뒤에는 장문(長文)의 화제(話題 : 크기23.7×38.1㎝)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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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31.9㎝×137.8㎝ 크기에 개인(個人)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이 작품(作品)은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書齋)”라는 뜻으로 제주도(濟州道) 유배(流配) 후 강상(江上) 시절의 대표작(代表作)인데, 추사(秋史) 글씨 중 추사체(秋史體)의 멋과 개성(個性)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최고 명작(最高 名作)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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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은사(奉恩寺) 판전(板殿)

  77.0㎝×181.0㎝ 크기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소장(所藏)하고 있는이 작품(作品)은 봉은사(奉恩寺) 경판전(經板殿)을 위해 추사(秋史)가 세상(世上)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大字 懸板)이기에 추사(秋史) 최후(最後)의 작품(作品)인데, 고졸(古拙)한 가운데 무심(無心)의 경지(境地)를 보여주는 명작(名作)으로 칭송(稱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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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로향실(一爐香室)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 일지암(一枝庵) 소장(所藏)의 이 작품(作品)은 추사(秋史)가 초의(艸衣) 스님을 위해 써준 현판(懸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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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숭해심(山崇海深)  유천희해(遊天戱海)

산숭해심(山崇海深)은 폭42㎝․길이 207㎝의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 소장(所藏)으로 현존(現存)하는 추사(秋史) 작품(作品) 중 최대(最大)일 뿐만아니라 전서(篆書)․행서(行書)․예서체(隸書體)가 함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아 마치 홀리는 듯한 귀기(鬼氣)까지느껴지는 추사(秋史)의 대표작(代表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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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선(茗禪) 간송미술관 소장

115.2㎝×57.8㎝ 크기에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所藏)의 이 그림은 추사(秋史) 작품(作品) 중 가장 사랑스럽고 또 가장가지고 싶은 작품(作品)으로 추사(秋史)의 ‘입고출신(入古出新)’ 정신(精神)을 잘 보여주는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작품(作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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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선란(不二禪蘭)

 제목 수정 이유(題目 修訂 理由)추사(秋史)의 난초(蘭草) 그림이 파격(破格)을 넘어 ‘불이선(不二禪)’의 경지(境地)에 다다른 작품(作品)으로 그림의화제(畵題)가 “부작란화(不作蘭畵)……”로 시작되어「부작란(不作蘭)」이라고 불렀지만, 이 말이 어법(語法)에 맞지 않아근래(近來)에는 화제(畵題)의 내용(內容)에 따라「불이선란(不二禪蘭)」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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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24.9㎝×29.7㎝의 크기에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소장(所藏)인 이 그림은 원(元)나라 문인화풍(文人畵風) 이래의 간일(簡逸)한필치(筆致)와 문징명(文徵明 : 1470~1559)․심주(沈周 : 1427~1509)․동기창(董其昌 : 1555~1636)이즐겨 쓴 수지법(樹枝法)으로 그려졌으며, 마른 붓질[갈필(渴筆)]과 까실까실한 초묵(蕉墨)이 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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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상촌장(樊上村庄)

완당이 제주 시절에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으로 '번상촌장'(樊上村庄)은 번리(樊里)에 있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다. 또한 이 작품을 받아든 권돈인은 너무도 흡족한 지라 다음과 같은 시로 작품 상단 넓은 여백을 메웠다.
                             蘭花蘭葉在山房

                        난초꽃과 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何處秋風人斷腹

                        어디에서 부는 가을 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若道風霜易摧折
                        바람과 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山房那得長留香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백송 천년기념물 106호

백송...

천연 기년물 106호인 백송은 1809년

동지 부사로 청나라에 가던 아버지를 수행했던 추사가

연경에서 돌아올때 가지고와

증조부 묘 입구에심어 놓은것 수령은 약 200년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 5그루뿐인 귀한 백소나무다....

 

추사는 15세 때 동갑내기인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안타깝게도 5년 후 상처한다. 그리고 23세 때 예안 이씨와 재혼한다. 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추사는 양자를 들여 ‘육십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했다. 두 번에 걸친 10년의 귀양생활과 아내의 죽음으로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추사에게 단란한 가족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추사고택 안채 기둥에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大烹豆腐瓜薑菜)/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다(高會夫妻兒女孫)’라는 주련이 걸려있는 것도 추사의 가정이 쓸쓸했기 때문이다.


죽은 아내를 생각하여 슬퍼하다 -도망시(悼亡詩)- 김정희(金正喜)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귀양 중에 아내의 상을 당하여

那呼月姥訴冥司
나호월모소명사

來世夫妻易地爲
내세부처역지위

我死君生千里外
아사군생천리외

敎君知我此心悲
교군지아차심비

어떡하면 월하노인을 데려다가 저승에서 소송하여
내세(來世)에는 우리부부의 처지를 바꿔서 태어나서
천리 밖에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남아 
나의 이 슬픈 마음을 그대에게 알게 할까 
 

 추사 김정희 선생은 1837년 72세의 나이로 임종(臨終)한 친부(親父)의 묘소(墓所)가 있는 과천(果川) 주암리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묻혀 살다가 71세인 1856년 10월 10일 임종(臨終)하였다.

 

출처:인터넷 검색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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