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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대통령상 수상에 빛나는 문화재(7)제52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최우수상 '금릉빗내농악'

문화재방송 2020. 7. 15. 17:50

기획. 취재. 촬영. 편집:문화재사랑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 금릉빗내농악

경상북도 김천시(金泉市) 개령면(開寧面) 광천동(廣川洞)에 전승되어 온 농악,

2019년 9월에 지정되었다. 개령면은 금릉군 지역이며 삼한시대에는 감문국(甘文國)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빗내’는 광천동의 자연 부락 이름이다. 곡창지대의 전형적인 농촌인 빗내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엿새에 동제(洞祭: 빗신굿)를 열었고 이어서 풍물놀이와 줄다리기를 행하였다.

이러한 마을 축제 및 감문국의 국가 행사 때 쳐왔을 매구가 오늘날의 빗내농악으로 전해 온다고 볼 수 있다. 낮은 지대라 수해가 빈번하였던 탓에 자연 재해에서 벗어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빗신(神)굿을 격년제로 열었고, 일제시대 이후엔 10년 간격으로 행하였다.

빗내농악은 단순한 농악이 아니라 유래에 있어서 빗신과 연결되는 점, 농사굿이 아닌 진(陣)굿으로 발전되어 온 점, 상쇠의 계보가 전재진­이군선­윤상만­우윤조­이남춘­김홍엽-한기식에서부터 현재의 상쇠인 손영만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이어오는 점, 자진모리류가 주종을 이루며 가락이 다양하고 힘이 있는 점, 판놀음의 대북춤·양손을 벌려 활개치는 기러기춤·풍물패가 서로 짝을 맞추어 박수를 치는 수박치기 등이 특색으로 꼽힌다.

 

블로그 대문 / 부여 백제 왕릉 레이더 쏘아 탐사해보니..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노형석 입력 2020.07.15. 09:06 수정 2020.07.15. 11:36

 

능산리 고분군 6년간 물리탐사 결과
사비시대 왕릉 배치와 규모 확인
현재 복원 무덤보다 훨씬 큰 규모

하늘에서 본 능산리 고분군. 아래쪽으로 돌출된 숲 한가운데 누런 땅 드러난 부분이 서고분군의 8, 10호분 발굴지점이다. 숲 오른쪽의 잔디밭 봉분들이 사적 지정된 기존 능산리 고분군이다. 숲 왼쪽의 허옇고 큰 건물터는 1993년 금동대향로가 나온 능사 터다. 사진 한국전통문화대 고고학연구소 제공

능산리 중앙고분군 지하 물리탐사 결과 작성된 지하 유구 분포 도해도. 주요 무덤들을 둘러싼 점선은 물리탐사로 드러난 호석 추정 열을 따라 그린 선으로 백제 왕릉의 봉분이 현재 복원정비 되어있는 지름 20m 규모보다 훨씬 크게 조성됐으며, 동하총과 중하총, 서상총과 서하총, 중상총과 동상총이 두 기씩 서로 연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제 왕조는 5세기 고구려에 패해 첫 도읍지 한성(서울)에서 밀려난 뒤 6~7세기 웅진(충남 공주)과 사비(충남 부여)로 도읍을 옮겨 다시 일어서게 된다. 백제의 이 중흥기 시절 왕조를 대표하는 왕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많은 이들이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채 수 많은 보물을 쏟아내 세상을 놀라게 한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고고역사학계 전문가들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또 다른 왕릉급 고분군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부여(사비)의 동쪽 산기슭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국가사적)이 바로 그곳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사비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릉급 무덤 떼다. 학계에서는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등 백제 후기 왕가의 여러 제왕이 묻혔을 가능성이 큰 묘역 터로 간주해왔다.

2015년 백제역사유적 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지만,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와 30년대 일본 학자들의 발굴 조사 뒤로는 거의 조사 되지 않았던 능산리 고분군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이 고분군에 대해 약 6년간의 지하 물리탐사를 벌인 끝에 최근 백제 사비시대 당시 왕릉의 배치와 규모가 지금 복원된 모습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연구소는 2014~2019년 묘역 중앙부와 진입부를 대상으로 레이더 전파를 고분군 땅 밑으로 쏘아 지하의 매장물을 파악하는 지하 물리탐사 작업을 벌였다. 결과를 보니, 각 봉분 외곽에는 호석(護石)으로 판단되는 이상체 반응이 확인됐으며, 이를 분석한 결과 사비기 능산리 왕릉의 봉분 규모가 현재 복원·정비된 지름 20m보다 훨씬 큰 25~30m정도인 것으로 파악됐다. 연구소는 이런 내용이 담긴 종합적인 물리탐사 결과를 15일 발표했다.

호석이란 무덤 봉분 외곽에 둥글게 열을 지어 두르는 고분의 경계를 표시하는 돌을 말한다.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이 호석이 일본학자들의 발굴 조사 사진에서 일부 나타난 것 외엔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물리탐사를 통해 중앙 고분군 7기의 모두에서 완형 또는 부분적인 원호가 나타난 것이다.

부여 능산리 중앙고분군과 남쪽의 평탄대지에 대한 2014~2019년 지하 물리탐사 작업의 범위를 전체 사진에 합성한 도해도. 지하에 있는 이상체 반응을 탐색한 물리탐사 작업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공동 진행했다.

부여 능산리 중앙고분군의 물리탐사 작업 광경. 지난해 찍은 사진이다.

이를 통해 중앙 고분군을 이루는 주요 무덤인 동하총과 중하총, 서상총과 서하총, 중상총과 동상총이 각각 두 기씩 모여 있는 배치 얼개를 보여준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장한길로 학예사는 “탐측 결과 호석 추정 열이 붙은 고분이 두 기씩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 간에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과 왕비 무덤이 함께 조성됐거나 가족 단위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육안으로는 각각의 고분이 제각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무덤끼리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연구소 쪽은 무덤 사이 빈 곳 여기저기서 이상체가 감지된 만큼 그 동안 몰랐던 새로운 무덤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조사는 백제 후기 능원 종합 학술연구 사업의 핵심인 능산리 고분군 중장기 학술조사의 첫 단계인데,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정보가 나와 학계의 기대감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공중에서 본 부여 능산리 고분군 전경. 중간에 일곱개의 무덤 자리가 보이는 곳이 능산리 중앙고분군이며, 왼쪽 상단에 숲으로 둘러싸인 네모진 구역이 지난 2016년 4기의 무덤이 발굴된 서고분군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조선 영조 때인 1757년 나온 공주의 옛 읍지인 <여지도서> 등에 언급돼 있다. 부여현 관아 동쪽에 ‘능산’이 있다는 기록이 나와 조선시대 선조들은 이미 백제의 왕릉급 무덤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능의 내부 실체가 처음 드러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뤄진 세 차례의 발굴조사였다. 1915년 구로이타 가쓰미와 세키노 다다시,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가 중앙고분군과 서고분군을, 1937년 우메하라 스에지가 동고분군을 발굴했다. 정식 보고서 없이 1916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와 1920년 나온 <대정6년도고적조사보고>에 간단한 설명과 내외부를 찍은 유리건판 사진 몇 장만 남겼을 뿐이지만, 중앙 고분군의 고분 6기와 동서 고분군의 9기 등 고분 15기가 당시 확인됐다.

이후 60년대 봉분을 정비하면서 고분 2기가 다시 드러났고, 2016년 한국전통문화대 조사팀의 서고분군 발굴로 3기의 고분이 추가 확인돼 현재까지 20기가 파악된 상태다. 특히 2007년까지 무덤 내부가 개방됐던 중앙 고분군의 동하총은 고구려 강서무덤처럼 사신도 벽화가 남아있는 유일한 백제무덤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덤 얼개는 백제 후기의 전형적인 굴식 돌방무덤이지만, 세부 양식에선 웅진 시기 벽돌 무덤의 아치식 천장이 정제된 판석과 꺾임 천장을 쓰는 석실분으로 변모돼 가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 백제 능원 제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주목됐다. 고분군 서쪽 능산리 절터(능사)에서는 1992년 백제 미술품 가운데 최고 걸작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석조사리감(국보 288호)이 출토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오는 9월부터 일제강점기 발굴 이래 100여년 만에 능산리 중앙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재발굴 조사에 들어간다. 잠정적인 계획안에 따르면, 2038년까지 진행되는 대규모 중장기 조사다. 올해 하반기 첫 조사는 시굴 성격으로 이번 물리탐사에서 확인된 무덤 부근 지하 호석을 확인하고, 내부를 흙으로 메운 동하총의 관대 등을 해체·분석할 계획이다. 김대영 학예연구사는 “발굴을 통해 능산리 중앙고분군 무덤의 실제 토층 연대를 확인하고 분류하게 되면 무덤의 선후 관계와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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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v.daum.net/v/2027월 

7월 16일은 초복(初伏)   /  7월 26일은 중복(中伏)

복날과 삼계탕

닭은 여름의 음식이다. 닭찜, 연계찜, 닭죽, 닭백숙, 초계탕 같은 닭 요리는 대게 여름에 먹는다. 여름의 절정에 복날이 있고 복날먹는 목달임 음식의 중심에 삼계탕이 있다. 복날이면 사람들은 삼계탕 한 그릇을 먹기 위해 긴 줄을 선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 최고의 음식'이라 극찬한 삼계탕 한 그릇에 여름이 오고 더위가 간다.

01 삼계탕은 삼복 시식의 하나로, 여름철에 보신하기 위하여 닭에 인삼을 넣고 푹 고아서 먹는 한국 전통 보양식이다.

복날과 복달임의 탄생

‘삼복더위’란 말은 더위의 절정을 연상시키는 관용어가 되었다.‘삼복三伏’은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 말이 생겨난 것은 2000년 전 중국 진나라 시대(BC 221〜BC 206)부터다. 사마천의『사기史記(BC 104~101)』에는 진나라 덕공德公이란 사람이 사대문 밖에 개고기를 걸어두고 복사伏祠를 처음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초복은 24절기 중 지구가 태양과 가장 가까워지는 하지夏至의 세 번째 경일庚日이다. 하지는 양의 기운이 절정에 달하는 날이다. 그런데 경庚은 가을의 기운을 가진 날이다. 그러나 강력한 여름 기운에 가을의 서늘한 기운은 맥을못추고 쓰러져 엎드려있게 된다.‘복伏’이란 말은 이런 뜻이다. 그런데 가을 기운이 엎드린 탓에 여름의 기운은 더욱 거세지게 된다. 복날이 더운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여름기운이 변하기 시작하는 복날에는 가을 기운金을 가진 음식을 먹어야 몸이 온전하게 보전된다고 믿었다. 복날의 음식은 이런 기본 철학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상은 더위에 지친 몸을 보충하는 실용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다. 더워지면 수분은 땀으로 배출되고 차가운 음식을 먹은 속은 더욱 차가워져 배탈이 나거나 서중暑中같은 병이 생긴다. 더위는 더위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원리는 이런 우리 몸의 기본 구조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과학이다. 한국인은 복날에 먹는 이런 음식을 '복달임'이라 불렀다. 복달임은 한문‘복’과 순수한 우리말‘달임’의 합성어다. 복날에 달여 먹는 따스한국이나 탕을 의미하는 말이다.

삼계탕 이전의 복달임 음식들과 대구의 육개장

지금은 복달임 음식의 중심에 삼계탕이 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삼계탕은 부자들이나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 이전에는 개장狗醬즉 개고기 국이 중심에 있었다. 19세기에 집중적으로 발간된 세시기歲時記들인『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하나같이 개장국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개고기를 싫어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탓에 개장국과 거의 비슷한 모양과 맛을 내는 육개장肉狗醬이 만들어진다. 19세기 말에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육개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더운 대구에서 꽃을 피운 음식이 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육개장은‘육개장’,‘대구탕반’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음식이 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밥과 국을 따로 내면서 따로국밥이란 말이 더해졌다. 그 밖에도 복달임 음식은 더위를 몰고 오는 악귀를 물리치는 팥죽과 궁중에서 먹던 깨죽, 여름철에 제 맛이 나는 호박에 민어를 넣고 끓인 민어탕이 삼복더위를 물리치는 대표적인 복달임 음식들이었다.

삼계탕의 등장

그런데 어느날삼계탕이 복달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삼계탕이 외식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1960년대부터 계삼탕 혹은 삼계탕으로 불리던 삼계탕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여름철 외식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과연 삼계탕은 195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음식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삼계蔘鷄’란 이름은 19세기 부터 등장하고 삼계탕이란 이름은 붙어있지 않지만 삼계탕과 비슷한 음식들은 여럿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삼계탕의 조상쯤으로 생각되는 음식들은 조선 시대에 여럿 등장한다. 조선중기의 문신 박정현이 1609년에서 1635년까지 기록한 일기인『응천일록凝川日錄』에는 황계탕黃鷄湯이 등장한다. 1773년『승정원일기』에는‘연계탕軟鷄湯’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등장하는‘계탕’들은 건더기 중심이 아니라 국물 중심이었다. 이처럼 닭을 푹 고아 국물을 마신 기록은 이외에도 여럿 남아있다. 17세기 중반에 쓰여진 조리서인『음식디미방』에는‘수중계’가 나오고 1766년에 편찬된『증보산림경제』에는‘총계탕’이 있다.‘삼계蔘鷄’란 이름은 개화파 김윤식의 일기인『속음청사續陰晴史』1887년자에 인삼과 닭을 넣고 푹 고은‘삼계고蔘鷄膏’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1894년 이제마가쓴사상의학서『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도 삼계고가 설사병 치료제로 등장한다.

삼계탕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1910년에 일본인들이 작성한『중추원조사자료』다. 이 자료에는‘여름 3개월간 매일 삼계탕, 즉 인삼을 암탉의 배에 인삼을 넣어 우려낸 액을 정력精力약으로 마시는데, 중류 이상에서 마시는 사람이 많다.’라고 적고 있다. 보약이 아닌 요리로서 삼계탕과 가장 유사한 기록은 1917년판『조선요리제법』이란 조리서에 닭국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발과 날개 끝과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뱃속에 찹쌀 세 숟가락과 인삼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쏟아지지 않게 잡아맨 후에 물을 열 보시기쯤 붓고 끓이나리라’라고 적고 있다.

삼계탕의 주원료는 어린 닭인 연계

그런데 18세기『승정원일기』의 연계탕 기록에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닭 요리에 들어가는 닭은 새끼를 낳지 않은‘연계軟鷄’다. 연계를 이용한 ‘연계백숙軟鷄白熟’은 삼계탕이 대중화되기 전에 복날에 먹는 복달임 음식 중 하나였다. 연계를 영계라고도 부르는데 연계백숙 혹은 영계백숙이란 말의 ‘백숙’은 간을 하지 않고 닭을 끓인 것을 말한다. 백숙을 끓일 때는 맹물에 보통 마늘을 집어넣는 것이 일반적인 조리법이었다. 백숙에 마늘 대신에 인삼이 들어간 것이 삼계탕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연계백숙 조리법에는 ‘혹 인삼먹는 이는 삼을 넣어’란 구절이 나온다.

인삼가루가 아닌 인삼을 직접 넣어 요리를 해먹은 가장 이른 기록이다. 20세기 초반의 신문 기사들에 종종 등장하는 북한의 복날 음식으로 ‘연계찜’이 있다. 연계찜은 연계의 배속에 찹쌀과 여러 가지 고명, 향료를 넣고 쪄낸 것으로 삼복에 함경도 사람들은 연계찜을 반드시 먹었다. 1929년 8월 1일에 발간된『별건곤』제22호에는 황해도 안주를 돌아본 뒤 쓴 기행문이 나온다. ‘영남지방에서는 삼복 중에 개죽음이 굉장하다. 하지만 안주의 명물로 삼복중의 닭천렵이 대단하다’고 적고 있다. 경상도나 전라도 같은 남도가 복날에 개를 복달임 음식으로 먹은 것에 비해 함경도에서 황해도에 이르는 북한 지역에서는 닭을 복달임 음식으로 먹어왔음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다. 삼계탕은 아니지만 복날에 닭을 먹는 문화는 북한 전역에 넓게 퍼져있던 문화였다.

삼계탕의 대중화

양반이나 부자들의 약선藥膳음식이었던 삼계탕이 대중화된 것은 닭고기가 대중들이 먹을 수 있게 된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닭고기보다 더 비싼 인삼도 삼계탕 대중화에서 빼놓을수없는 요소다. 1910년대부터 인삼가루가 부자들에게 인기를 모으자 약으로 먹던 삼계고 삼계음을 벗어나 요리에서 인삼가루가 등장한다. 1950년대 인삼가루를 넣은 닭국물이 등장하면서 식당주인들은 ‘계삼탕’이란 이름을 붙이고 영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대중화는 좀 더 시간이 걸린다. 1960년대 이후 인삼가루가 아닌 생 인삼인 수삼水蔘이 정부규제 완화와 냉장시설의 발달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자 상인들은 계삼탕보다 인삼에 방점을 둔 삼계탕이란 이름을 내걸고 영업을 한다. 196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육류 소비가 급증하게 되는 1975년 이후에 닭 한마리와 인삼을 같이 먹을수있는 삼계탕은 여름 최고의 보양식으로 등극하게 된다. 약에서 시작해 부자들의 식탁을 거쳐 대중들의 여름철 최고의 보양음식의 탄생은 긴 과정이 필요했지만 음식이 완성되자 한국인은 물론 동북아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음식이 되었다.

글·사진.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이미지투데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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