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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돌과 나무에 새겨진 신비한 그림과 글자 속으로

문화재방송 2020. 7. 19. 04:07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벽에 새겨진 선사시대 사람들의 그림

 

 

오랜 세월 동안 돌과 나무는 인간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다. 큰 바위나 당산나무 앞에서 제사를 올리며 안녕을 빌었다. 삶이 거칠고 험했기에 그 마음은 더욱 절실했다. 돌과 나무를 찾아가는 여행길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서 시작한다.


반구대 가는 길은 한 폭의 그림이다. 오밀조밀한 산이 겹겹이 어우러져 흐르는 강물을 감싸듯 펼쳐져 있다. 그 일부인 연로(硯路)는 반고서원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벼랑길로 너비가 2.5m가 채 되지 않는다. 연로 개수기(改修記)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연로는 '벼룻길'이라는 뜻으로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이라 풀이하고 있다.

눈맛이 좋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반구대 암각화에 이른다. 태화강 상류 서쪽 기슭의 '건너각단'이라는 암벽에 있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그림이다. 대부분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한살이와 연관이 있다. 사람 얼굴을 비롯해 사냥하는 사람들, 활·작살·그물, 다양한 고래, 호랑이·멧돼지·사슴 같은 짐승들의 모습이 사실적이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와 새끼를 밴 호랑이, 교미하는 멧돼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사슴 등이 그렇다.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도 있다.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의 모습도 그렸으며, 그물이나 배도 표현했다. 대부분 다산과 풍요로운 생업, 안전한 사냥을 기원하는 종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당시 생활상을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과 점으로 동물과 사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특징을 실감나게 그려낸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 당대 생활과 풍습을 알려주는 바위그림으로 평가된다.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돌아나오다 건너편을 바라보면 반고서원유허비(울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3호)도 있다. 귀양살이하러 왔다가 이곳 반구대에 올라 시를 지었던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를 기리는 빗돌이다. 이 때문에 반구대를 '포은대'라 하기도 한다.


울산 암각화박물관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을 소개하는 한편으로 암각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실물 모형을 통해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내용을 자세하게 알수 있으니 먼저 들러보는 게 좋겠다.

 


- 울주 천전리 각석
마름모꼴, 동심원, 나선형 등 기하학적 문양

 

울주 천전리 각석은 태화강 상류 물줄기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다. 여기를 걸어가는 길도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만큼이나 멋지다. 걷는 내내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온통 바위로 이뤄진 골짜기를 풍성한 물이 흐르면서 내는 소리다. 대곡천이 대곡천인 까닭을 물소리를 들으니 알겠다. 각석에 있는 마름모꼴, 동심원, 나선형 등 기하학적 문양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천전리 서석(書石)'이라고, 신라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800자 남짓 명문도 남아 있다. 법흥왕 때 씌어진 글자들로 이를 보면 당시 신라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은 반구대 암각화와 더불어 조상들의 생활모습과 우주관을 엿볼 수 있는 암각화다.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의 모습이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돼 있다. 반구대 암각화와 견줘가며 감상하면 재미 더할 수 있다.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이 담겨 있는 그림들은 특정시대가 아니라 여러 시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더욱 뜻깊다.


여기 새겨져 있는 6세기부터 9세기까지 신라시대 여러 글자들은 특별히 천전리 서석이라 한다.
쇠붙이나 돌에 새긴 글(금석문)들은 종이에 남겨진 문헌 기록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그 시대 생생한 시간의 나이테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서석은 아래쪽에 있고 각석은 주로 위쪽에 있다. 여기 그림과 글들은 반구대 암각화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서 맨눈으로 볼 수있다.


각석으로 건너가기 전 골짜기 바위에는 공룡 발자국 화석(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6호)도 남아있다.

 

 

- 포항 냉수리 신라비
'절거리'라는 사람의 재산과 상속에 관한 내용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64호)는 나이가 대략 550년으로 짐작된다. 조선 세조때 단종복위운동이 들통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죽은(竹隱) 이지대(1369~1459)가 여기로 들어오면서 갖고 와 연못가에 심은 나무라 한다. 이지대를 기리는 유허비도 함께 서 있다.

옛날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나무를 우러름의 대상으로 삼고 신성시했다. 구량리 은행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무를 해코지하면 해를 입는다고 믿어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나무 밑둥 구멍에 대고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이 정성들여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나무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냐에 따라 입혀지는 의미와 해석이 달라진다. 구량리 들판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아왔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제264호)는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사무소 뜰에 있다. 진흥왕 때인 524년 세워졌다고 짐작되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보다 적어도 21년 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신라비로 인정받았었다.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至都盧) 갈문왕(지증왕)이 나왔고 그래서 지증왕 4년(503년)에 세워졌다고 짐작된다. 하지만 2009년 발견된 같은 포항의 중성리 신라비(보물 제1758호)가 마찬가지 재산 문제를 다루면서 신사년(辛巳年)이라 적고 있어 최고(最古) 지위를 잃게 됐다. 여기 신사년은 냉수리 신라비보다 이태 앞선 501년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쨌거나 냉수리 신라비에는 네모꼴 화강암의 앞·위·뒤 3면에 231자 글씨를 새겨 넣었는데,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의 재산과 상속에 관한 것이다. 지증왕을 비롯한 6부 출신 귀족 7명이 앞선 두 임금이 재산 소유를 인정한 결정사항을 다시 확인하는 한편, 절거리가 죽은 뒤 아우 아사노(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에게 상속하고, 다른 사람은 그 재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여러 귀족이 참여한 가운데 처리했는데, 이는 왕권이 확립되기 이전에 왕의 권한이 미미했던 신라의 실상을 알려준다. 국가에서 세운 빗돌로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준다. 바위가 이전에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문자를 만나면서 그 성격이 바뀌어 왕과 나라의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 흥해 이팝나무 군락
이팝나무 서른네 그루가 빚어내는 꽃축제

 

 

흥해 이팝나무 군락(경상북도기념물 제21호)은 흥해향교(대성전은 문화재자료 제87호) 뒤쪽으로 상수리나무와 뒤섞여 자라는 이팝나무 서른 네 그루를 이른다. 고려 말 또는 조선 초 향교를 지은 후 기념으로 심은 이팝나무에서 씨가 떨어져 번식했으리라 짐작된다. 마을 가운데 공원에 자리잡은 100∼150년 가량 된 이들 나무에 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


이팝나무는 여름의 문턱에 들어서면 마치 뻥 튀어놓은 쌀밥처럼 하얀 꽃이 핀다고 붙은 이름이다. 이팝나무에 꽃이 많이 피고 적게 핌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는데 여기에는 다 까닭이 있었다. 이팝나무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므로 비가 알맞게 내리면 꽃이 활짝피고,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피지 못한다. 비는 벼농사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도출된 결과였다. 그러고 보면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고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는 뜻이 담긴 '흥해(興海)' 라는 지명도 농사와 관련이 깊다 할 수 있다.

 

 

-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

돌기둥이 병풍처럼 보여`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천연기념물 제415호)는 신생대 제3기(대략 200만 년 전)에 분출된 용암이 식으면서 굳은 것으로, 돌기둥이 높이 20m 너비 100m로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다. 주상절리는 대부분 수직으로 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 주상절리는 위쪽은 80도 정도 기울어져 있지만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거의 수평에 가까운 기울기로 휘어져 있어 특이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용암이 땅 밑에서 지표로 솟아 오른 후 수평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흘러내린 방향이 유별나서 멀리서 보면 한옥 기와지붕 모습으로도 보이고 마치 부채를 활짝 펼친 모습으로도 보인다. 장작을 켜켜이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달전리 주상절리 앞에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시대로 돌아가 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포항 북송리 북천

수해방지와 바람막이 역할

 

포항 북송리 북천수(천연기념물 제468호)는 곡강천을 따라 2.4km로 길게 조성된 솔숲이다.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마을숲 가운데 세 번째로 길며, 규장각에 있는 <흥해현지도>와 <한국지명총람> <조선의 임수> 등에도 기록돼 있는 예부터 이름난 숲이다. 옛날부터 소나무는 뿌리가 깊어 방풍림으로 쓰였는데, 흥해읍 수해 방지와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정월대보름에 숲 속 제당에서 동제를 지내고 마을 앞산에서 산제를 지내며 한 해 전에 병에 담아 묻어둔 소금물의 상태를 보고 그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풍습이 전해는 등 오랜 기간 마을주민들의 신앙 대상이었다. 규모나 가치로 보면 사람들 발길이 잦을 것 같은데 뜻밖에 한산하고 조용하다. 여기 서쪽 끄트머리 흥해 서부초등학교에는 굵직한 소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그림처럼 아름답다. 여기 북천수에는 사람들이 지금도 나무를 꾸준하게 심고 있다. 마을숲을 과거 유산으로만 여기는 대신 지금도 손을 보태어 숲을 키우는 마음이 아름답다.

 


-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 최대

 

 

바닷가에 나와 앉은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9호)이 바위와 나무에 새겨진 문화유산 여행길의 종착지다. 여기 암각화군은 규모에서 우리나라 최대다. 여행 삼아 다니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데는 두 군데다. 하나는 길 가다가 오른편 공장 있는 곳에서 산으로 100m 정도 올라가는 기슭(칠포리 201번지)에 있고 다른 하나는 '암각화길' 이라 이름 붙은 이 도로가 바닷가쪽으로 더 나아가 국도 20호와 만나지며 왼쪽으로 휘어지는 왼편 언덕배기 들머리에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자리는 옛날 사람들의 제사터라 해도 틀리지 않을 텐데, 여기 두 곳은 모두 제사 지내기에 적격인 자리들이다.


산기슭에 있는 암각화는 모두 세 군데로 흩어져 있다. 가장 위에 있는 바위에는 제법 암각화가 많은데 가운데는 잘록하고 아래와 위가 널찍한 실패 또는 두툼한 칼손잡이 모양 그림이 여럿 새겨져 있고 알구멍(性穴)도 많이 만들어져 있다.
바닷가 언덕배기 들머리 암각화는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데 뚜렷하게 잘 보이지는 않으나 칼손잡이 모양과 화살촉 모양을 하고 있다.


거기 새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거기에 바위가 있었고 또 절박한 사람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빌고 바라는 심정을 거기에 새겨 넣었던 것이다.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박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 그 무엇을 이루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천전리 서석의 두 남녀는 연인일까, 오누이일까

 

천전리 각석이 있는 골짜기는 이름이 서석골이다. 이를 일러주는 명문이 바로 천전리 서석(書石)이다. 이 서석은 천전리 각석 아래쪽에 있다. 우리 글로 옮기면 이렇다. <을사년(법흥왕 12년, 525년)에 사탁부 갈문왕이 찾아 놀러와 처음 골짜기를 봤다. 오래된 골짜기이면서도 이름이 없어 서석곡이라 이름짓고 좋은 돌을 얻어 글자를 새겼다.> 여기 서석곡에 사탁부 갈문왕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함께 놀러 온 우매(友妹)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여랑님이다.>
<과거 을사년 6월18일 새벽(昧)에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이 누이 어사추여랑님 함께 놀러 온 이후 올해로 14년이 지났다.> 여기 사부지는 법흥왕의 동생이다.


이어지는 글은 이렇다. <누이님을 생각하니 누이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다. 정사년(537)에는 갈문왕도 돌아가셨다. 왕비 지시혜비는 애타게 그리워했다. 기미년(539) 7월3일 왕과 누이가 함께 써놓은 서석을 보러 골짜기에 왔다.> 이번에는 사부지 갈문왕의 왕비가 여기에 온 것이다.


왕비와 동행한 사람들도 적혀있다. <셋이 함께 왔는데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사부지왕 아들 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무즉지태왕은 법흥왕이라 하니 그 왕비 부걸지비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아들 심맥부지는 한 해 뒤(540년)에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이다.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주인공 자격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 어사추여랑, 그리고 갈문왕의 조카이면서 아내이기도 한 지시혜비, 그 어머니인 법흥왕비 부걸지비(사부지 갈문왕에게는 형수 겸 장모), 마지막으로 지시혜비의 아들 심맥부지 등 다섯이다.


여기서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은 '우매(友妹)' 와 '새벽(昧)'이다. 한쪽에서는 우매를 벗으로 사귀는 누이(같은 여자)로 풀고 다른 한쪽은 벗(友)을 별 뜻 없이 꾸미는 글자일 따름이라고 본다. 벗으로 사귀는 누이로 보면 사부지 갈문왕과 어사추는 연인(그 때 근친혼이 성했기에 둘은 친족일 수도 있다)이 되지만 별 뜻이 없다고 여기면 말 그대로 손아래누이가 된다.


‛새벽(昧)’에 눈길을 두는 쪽에서는 나들이의 목적이 제사 지내기에 있다고 본다. 귀신이 활동하는 때가 밤이라는 데에 착안한 얘기다. 반면 놀기가 목적이라 여기는 이들은 (음력) 6월18일과 7월3일이 여름철임을 내세워 피서하러 왔다고 본다. 개연성이 더 높기는 오누이설 쪽인 것 같다.


먼저 세상을 떠난 어사추와 사부지를 그리워하던 왕비가 그이들이 함께 새겨놓은 서석을 보러 나왔다는 내용도 이런 생각을 좀더 뒷받침해 준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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